어머니는 이 학교가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시실 갈 몰랐다. 단지 가톨리 신자들에게 평판이 좋다는 이유로 생트마리를 골랐다. 하지만 이 학교에서 시몬은 프랑스에서 그 누구보다 많은 학뒤를 소지한 교사 마들렌 다니엘루(Marcleleine Danielou)를 만났다. 마들렌은교육이 해방의 열쇠라고 믿었다. 남편이자 국회의원이었던 샤를 다니엘루도 생각이 같았다. 딸들이 다 컸고 남편도 집을 자주 비우다 보니 시간이 많았던 프랑수아즈는 독서와 공부에 매달리면서 시몬의 공부를 따라갔다. 머리가 좋았던 프랑수아즈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다니에루 선생의 커리큘럼에 감탄하게 되었다. 시몬은 어머니의 관심이 기쁘면서도 씁쓸했다. 어머니가 친구 같은 모녀 관계를 원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외할머니와 결코 누려보지 못했던 친밀함을 딸에게 바랐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기보다는 무리하게 접근을 시도했기에 딸은더 움츠러들고 원망이 생겼다. 엘렌은 언니가 열여덟 살 때도 어머니가 언니 앞으로 오는 편지를 다 뜯어서 읽어보고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는 편지는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잖아도 깨알 같던 시몬의 손글씨는 마치 어머니의 염탐하는 눈을 피하려는 듯 점점 더 작아졌다. - P77
확실히 나는 개인주의적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적이면 타인을 사심 없이 사람하고 헌신할 수 없는 걸까? 나의 어떤 부분은 내어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또 다른 부분은 내가 지키고 고양해야 하는 것 같다. 후자의부분은 그 자체로 타당하고 타인의 가치를 보증한다.)시몬은 열여덟 살에 "공허하기만 한 철학 토론에 염증을 느끼고머리로 아는 것과 실생활에서 느끼는 것의 격차를 이미 고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학이 이 격차를 메워준다고 생각했다. 나는 삶을 재발견하는 작가가 좋다. - P81
"처음부터 남자들은 나의 적이 아니라 동료였다. 나는 그들을 시기하기는커녕 내 위치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이미 일종의 특권이라고 느꼈다. "12) 보부아르는 나중에가서 자신이 토큰 여성 이었다고 인정했지만 이 토크니즘이 문제라고 인식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중 일이다. 학생 시절에는 남학생들이보부아르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편한 친구로 지내기도 쉬웠다. 그 이유는 프랑스 교육 시스템이 남녀를 똑같이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학생들은 정원 외 인원‘으로 선발되었고 똑같은 일자리를 두고 남자들과 경쟁할 일이 없었다. (여성은 교사가 되더라도 여학교에만 갈 수 있었다. 프랑스 공교육은 여자아이들에게 열려 있었지만 남자 교사에게 여자아이들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 - P98
토크 여성(Toker Woman) 남성 지배적인 조직에서 성차별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소수로 고용한 여성, 혹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공한 몇 안 되는 여성을 가리키는다.
토크(Tokenitem) 미국 사회학자 로자베스 켄터(Rosabeth Kanter)가 제시한 개념, 성, 인종, 종교, 민족 등 사회적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소수 집단 내 상징적 인물을 조직에 포함시키거나 평등하게 처우하는 관행을 가리권다. - P98
자자는 1929년 11월 25일에 죽었다. 그 후 보부아르는 이 일의 진실을 알게 되기까지 거의 30년을 기다려야 했다. 보부아르는 절망을느끼며 슬픔으로 추락했다. 자자와 나눴던 대화, 메를로퐁티의 편지가 말도 안 되게 느껴졌고 분노하다 못해 경악했다. 그 둘은 자기네들의 고통을 ‘영적으로 승화하고 진짜 원흉을 응징하기보다는 자기네들의 덕을 갈고 닦으려고 했다. 적절하게 산다는 것은 끔찍하게부당했다. 그들은 잘못이 없었다. 세상이 잘못했다. 그리고 하느님은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P110
보부아르는 삶이 다시 즐거워졌다. 친구가 많이 생기기도 했지만특히 마회, 메를로퐁티, 자자와 지자의 사망은 다섯 달 후에나 일어날 일이었다. - 함께할 수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기를원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비록 자자는 그 모습을 "도덕 관념 없는 숙녀라고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재미가 있었다. 엘렌이 사르트르를 만나러 나간 날, 보부아르는 행복에 취해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안에 비축된 풍요로운 것들이 반드시 흔적을 남길 거라는 확신, 내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듣게 될 거라는 확신, 나의 삶이 다른 많은 이들이 목을 축이는 우물이 될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든다. 소명에 대한 확신이다. - P115
사르트르는 프랑스에서 성공한 남성 작가들의 이름을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테몸에는 프랑스의 철학적 · 문학적 후손을 기념하며 나라의대문호를 찬미하는 묘비들이 가득했다. 보부아르에게 문학으로 기억되는 여성들의 이름은 별로 없었고 철학자로 기억되는 여성은 더 적었다. 앞서간 여성들은 전통 가치를 거부한 대가를 비싸게 치렀고 때때로 자유를 얻기 위해 행복을 희생했다. 보부아르는 더 나은 것을원했다. 왜 사랑을 희생해야만 자유를 얻는가? 혹은 왜 자유를 희생해서 사랑을 얻는가? - P122
반면에 천재인 여성은 너무 화려하게 빛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100년에도 프랑스 교육 체계는 교수자격시험에서 남성보다 뛰어난 여성이라는 민감한 문제에 신중을 기했다. 교수자격시험 결과는운동 경기 순위처럼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부터 차례대로 이름이 나오는 식이었다. 그래서 이처럼 공식적이고 영향력 높은 시험에서 여학생보다 하위 점수를 기록한 남학생들은 비록교수 자리를 못 차지할 위험은 없었지만 창피해했다. (교육부는 이 굴욕을 덜어주려고 1891년부터 남학생 순위와 여학생 순위를 따로 발표했다. 그러다가 1924년부터는 다시 남녀 합산 순위제를 도입했다.)보부아르의 경험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그로부터 20년 전 사르트르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사르트르 어머니가 아들을 시댁에 뺏길까 봐황급히 파리를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아들에 대한 친모의 권리가 사망한 친부의 가족들 권리만도 못했다. 시몬이 공부하던 때만 해도 프랑스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고 자기 명의의 은행 계좌조차 만들 수 없었다. 시몬이 교수자격시험을 치르던 그해, 프랑스에서 대학에 다니는 여성은 전체 대학생의 24퍼센트였다. (그래도이전 세대인 1890년에는 1.7퍼센트로 전국에 288명 수준이었으니 폭발적으로 증가한 편이다.) 하지만 여성은 투표도 못하고 은행 거래도 못하는시대에 게다가 자기가 낳은 자식에 대한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에 무슨 권리를 일 순위로 누렸겠는가? - P127
보부아르는 생애 후기에 사르트르의 초연함이 때때로 존경스러웠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위대한 작가는 감정에 사로잡히기보다 감정을 포착해야 하므로 냉정함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또 어떨 때는 말이 "현실을 포착하기도 전에 죽여버린다." 고 느꼈다. 보부아르는 현실이 죽기를 원치 않았다. 현실 속에서 즐기고 싶었다. 방부 처리해서 후세에 남기기보다는 자기에게 다가오는그윽한 풍미를 맛보고 싶었다. 두 사람은 문학의 중요성에 동의했지만 문학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두고는 생각이 달랐다. 사르트르는 말에는 힘이 있지만 결국 문학은 속임수와 위장이라고보았다. 보부아르는 문학이 그 이상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버지니아울프를 읽으면서 경외감을 느꼈다. 문학과 삶의 간격을 좁히려 했던여성이 바로 거기 있었다. 보부아르는 세상을 알고 싶었고 진정으로세상을 드러내고 싶었다. 보부아르는 두 번째 회고록 《생의 한창때 에서 사르트르가 철학적인 면에서 경솔하고 부정확해 보일 때도 많았다고 썼다. 하지만 자신의 정확하고 치밀한 사유보다 그의 객기가 더 생산적인 사상을 만든다고 보았다.39) 이 경우에서든 다른 여러 경우에서든, 보부아르는 사르트르가 자기에게 없는 장점들을 바탕으로 삼아 자신감을 키웠다. - P151
이 여행에서는 새로운 장소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전에는 본적없는 불평등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시몬 베유의 가시 돋친 말과 달리, 보부아르도 배고픔이 뭔지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기는 그래도 특권층이라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남부 지방에내려가 만난 사촌은 그들에게 공장을 구경시켜주었다. 작업장은 더럽고 금속 분진이 자욱했다. 보부아르도 마르크스를 읽었고 노동과 가치의 관계에 눈뜨고 있었지만 파리에서 책으로 본 것과 공장 바닥에서 느낀 것은 천지 차이였다. 노동자들이 하루 몇 시간이나 근무하는지 물어보았고 죽도록 단조로운 일을 8시간 3교대제로 한다는 말에눈시울을 붉혔다. - P158
‘자기 기만‘은 20세기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가 되었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예로 든 웨이터‘는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이 무엇이지 잘 보여준다. 그런데 왜 보부아르는 이 개념을 ‘우리‘가 발견했다고 말하는가? 1930년대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서로에게 무엇을 이바지했는지 명명백백하게 가리기란 매우 어렵다. 엘렌의 남편 리오넬 드 룰레(Lionel de Roulet)는 두 사람의 관계를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들은 끊임없는 대화, 모든 것을 공유하는 방식을 통하여 서로를 너무 밀접하게 비춘 나머지 둘을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게 됐다. "20)이 단계에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정치적 인식에 눈떴다. 비록원숙기의 보부아르는 이때의 그들을 돌아보며 "정신적 자부심이 넘쳤고" "정치적으로는 장님이었다."고 했지만 말이다.1) 오드리와 다른 친구들을 통해 트로츠키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들을 만났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자신들의 혁명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들의투쟁은 철학적이었다. 그들은 이성적이고 육체적인 자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들은 자유를 이해하기 원했고 사르트르는 신체를 - 신체의 욕구와 습관을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생각했다. 비록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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