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는 정혜신이다. 그녀와 나는 일년 363일(이들 땐 거 맞다.)24시간 함께 있다. 무엇보다 연인이고 같은 일을 하는 도반이었으며서로에게 스승이었고 특별하게는 전우였다. 심리적 참전의 현장에서그녀는 치유자로 나는 심리 기획자로 서로를 보호하는 전우로 함께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심리적 침전의 현장은 참혹했다. 국가 폭력이든 가정사든 불행한 사고든 트라우마 피해자들의 고통은 상상을초월한다. 집단적 고통처럼 보이는 일도 한 개인에 이르면 각자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개별적 고통이 된다. - P5
실제로 얼굴빛이 달라진다. 밤새 끔찍한 생각을 하거나 심하게 싸우고 아침에 거울을 보니 얼굴이 악마처럼 변해 있었다는 고백을많이 들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그러니 얼굴빛이 바뀐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누구라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비유적으로, 어떤 이는 들것에실려 상담실에 들어갔고 어떤 이는 성난 코뿔소처럼 펄펄 뛰며 들어갔다. 그런 이가 비포애프터처럼 으스러진 뼈를 추슬러 걸어 나왔고 사슴 같은 눈으로 순하게 나왔다. - P6
이 책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치유자 정혜신의 현장 경힘과 내공을 집대성해 놓은, 쉽고 전문 지인 책이다. 읽는 제이 아니라 행하는재이다. 심폐소생술(CPR)은 내용보다 내용을 정확하게 몸에 익히는게 중요하다. 그래야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을 구한다. 이 책은 심리적CPR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책이라기보다 행동 지침서다. 이해하고 알아야 행동할 수 있으니 읽는다고 표현하지만 궁극은 ‘공감‘ 행동 지침서다. 세상에 무수한 사랑이 있어도 누구의 사랑이냐에 따라 전혀 다르듯 그 흔하디 흔한 공감이 무슨 새로운 원리냐고 따져 묻는다면 정혜신의 공감‘이라고 도를 달아야겠다. 이해가 쉽도록 ‘적정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성혜신의공감‘을 얹었다. 이론 정립과 검중에 3년쯤 걸렸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정신과 의사라는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자격증이있어야 치유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게 치유자라는 생각이 확고하다. 정신의학 쪽이나 관련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들은 불편할 수도있다. 예를 들어 우울증 진단 등과 관련한 부분 등은 도발적이다 못해 전투적이다. - P7
정혜신의 공감이 심리치유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심리치유의 베이스캠프는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오랜 경험을 가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검증도 했다. 상담가, 목사, 학교 선생님, 신부, 수녀, 직장인 멘토 등 심리적으로누군가를 도와주려는 이들이 보면 좋겠다. 상처 입은 가까운 사람을연민하고 보호해 주려는 사람이 보면 좋겠다. 일반인들에게, 엄마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다는 책 「삐뽀삐뽀 119소아과처럼 상비 치유지침서쯤을 예상했다. 몇 번 읽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지 말고필요할 때마다 펼쳐 읽고 되새김질하면 결정적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나 같은 심리 전문가도 그러고 있고 그때마다 도움을 받는다. - P8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 혼내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 줘야지. 그 애가 먼저 나에게 시비를 걸었고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지." 아아, 아이의 그 말 엄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내 편이어야지. 내게 물어봐야지어린이 집에서 왕따 경험을 한 여섯 살 아이가 오랜 시간에 걸쳐엄마의 세심하고 과감한 지지를 받은 후 홀가분한 표정으로 했다. 는 말. "엄마, 고마워. 나는 이제 자유야." 그게 이 책의 전부다. 정혜신의 공감‘의 핵심이다. - P10
어떤 단어가 사냥매처럼 마음속에 내리꽂히거나 저녁 강물처럼흘러 들어올 때가 있다. 적정기술‘이란 단어가 그랬다. 이런 사람 살리는 개념이라니. 심플하고 아름다웠다. 매혹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 식수가 부족해 아이들은 아침 일찍 물동이를지고 물을 길러 나선다. 몇 시간을 걸어가서 물을 길어 이고 지고 되돌아오는데, 아이들의 불완전한 걸음과 부실한 물동이 때문에 절반은 돌아오는 동안 흘러서 사라진다. 그 딱한 사정을 접한 디자이너가 사람들과 힘을 합쳐 큰 공(드럼통) 모양의 물통을 만들었다. 그후 아이들의 삶은 달라졌다. 아이들은 물을 꽉 채운 물동이를놀이하듯 굴리며 돌아온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양의 물을 운반 - P11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저장도 가능하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삶도달라졌다. 아이들은 물 긷느라 갈 수 없었던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주 간단한 물통 디자인 하나가 바꿔놓은 일상의 기적이다. 흔하디 흔한 적정기술의 한 사례다. 적정기술은 화성 이주를 꿈꿀 정도로 환상적인 과학기술이 넘치나는 시대에 간단하고 일상적인 기술의 결핍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주목에서 비롯한 개념이다. 전 지구적으로는 식량이 넘쳐나는데 굶어 죽는 사람이 그토록 많은 이유를 따져묻는 것과 비슷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윤택한 삶이 최종 목표인 과학, 그것도 과학만능주의 시대에 여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넘쳐나지 않는 건 이상하다. 어떤 이들은 그 이유를 우리에게 최첨단 과학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상에 필요한 적정기술과 그것의 적정한 분배가 이뤄지지 않아서라고, 요약했다. 소박하지만 위대한 성찰이다. 그래서 적정기술의 개념과적용 사례를 처음 접했을 때 흥분했다. - P12
최근 15년을 1970~80년대의 고문 생존자와 자살이 이어지던 해고 노동자 집단, 세월호 유가족 등 여러 형태의 국가 폭력 피해자들과함께 있었다. 현장에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생생하게 들었고 회복이불가능할 것 같은 그들의 내상을 목격했다. 트라우마 현장에선 심리치유 관련 전문가 자격중이 무용지물이라는 걸 숱하게 목격했다. 사회적 재난 현장에는 심리치유 전문가들뿐 아니라 시민운동가. 일반 자원활동가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그런데 초기 몇 개월이지나면 (치유 관련)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들은 현장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오랜 세월 각기 다른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접한 일이다. - P13
세월호 참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 많은 (심리치유) 전문가들.. 이 현장에 왔지만 이내 거의 사라졌다. 대신 집에 앉아만 있을 수없어서 무작정 왔다‘는 자원활동가들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울면서 무슨 일이는 했다. 피해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했으며 한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슬픔과 분노, 무력감을호소하면서도 유가족들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그들의 이런 마음과 태도는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들의 행동과 눈빛은 트라우마를 받은 이후 세상과 사람을 통째로 불신하게 된 피해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결정적인 위로다. 아무 자격증 없는 자원활동가들은 현장에서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찾고 역할은 해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와 정치권력은 상처힙은 피해자들을 길바닥에 패대기치고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하지만 자원활동가들의 한결같은 일상적 활동과 그들의 공통 정서인 슬품과 무기력이 만들어낸 ‘슬픔과 무기력의 거대한 연대‘는 피해자들을 구하는 동아줄이 되었다. - P14
다른 많은 트라우마 현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일반 자워활동가들은 처음엔 혼돈 속에서 갈광질팡하더라도 마침내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처음엔 전문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뚜렷하게뭔가 치유를 하겠다며 나서지만 곧 존재감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생업이 바빠서 자신의 일터로 돌아간 경우보다 피해자들이 더이상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거나 심지어 거부를 당해서 현장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럴까. 왜 심리치유 전문가일수록 현장에서 실패하는가. 사람목숨이 경각에 달린 현장에서 전문가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많은 경우 그렇다면 그때의 자격증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있는가. 내가 관련 자격증을 가졌으니 오해를 무릅쓰고 정신의학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정신의학은 신경증, 정신 질환 등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한 임상적, 학문적 틀 위에 세워진 의학의 한 분야다. - P15
트라우마 현장에서 피해자가 전문가에게 도움이 되는 도움을라고 절규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의 실체는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도움은 왜 도움이 되고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은 무엇 때문에 도움이 안 되는가. 정신과 의사들은 트라우마 현장에서도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충분히 듣기 전에 약물 처방전을 꺼내는 경우가 많다. 이는 피해자의고통을 증상을 중심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며 중상은 질병의 근거가된다. 우울증의 원인을 생물학적 기전으로 설명하며 약물로 증상을줄여주는 일은 의사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하고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 P18
그 기저에는 무엇보다 자신의 아픈 몸을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가게 여기지 않길 바라는 속마음이 있다. 자신의 고통을 진지하게대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몸이 건강할 때도 인간의 그런 바람이나 욕구는 거의 본능적이다. 하물며 몸이 아플 때야 더 말해 무엇까. 그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상대의 말을 질병 중심으로 생각했다. 의학적으로 질병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상태는 상이며, 정상인 경우라면 의사인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믿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냉정한 의학 기능공인 셈이었다. - P21
진료실이 아닌 곳에서 사람들의 속마음을 접하며 나는 알게 됐다. 이곳에선 심리적 진검 승부가 필요하구나, 그들은 자신을 환자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나도 당연히 그들을 환자로 생각하지 않왔다. 그동안 진료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환자로 규정하고 의사라는우월적 위치에 대한 자각 없이 살았던 것이다. 진료실 밖에서 휘 가운이라는 보호막 없이 그들의 속마음을 들으며 그 사실을 확실히알았다. ‘환자‘라는 틀로만 바라봐도 괜찮은 사람이란 세상에 없다. 그런 시각은 옳지도 않지만 맞지도 않는 말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처가 있다. 남보다 특별하게 예민한 구석도있다. 거기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 P22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서 경험한, 내가 생각하는 치유의 핵심 원리와 구조를 내 시선으로 말할 것이다. 숨쉬고 살아가는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 삶의 속살을 바탕으로 ‘도움이 되는 도움을 제공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내 삶은 물론 내 옆 사람을 도울 수있고 때론 나도 모르게 내가 내 이웃을 살릴 수도 있는 실제적인 치유 념을 그간의 내 경험을 중심으로 얘기할 것이다. 적정한 기술이 사람의 삶을 바꾸듯 적정한 심리학 이야기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론이 아닌 실생활에서 실질적인 위력을 갖는실용적인 심리학 정도로 바꾸어 설명할 수도 있겠다. 나와 내 옆 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소박한 심리학을 나는 ‘적정심리학‘이라 이름 붙였다. 만약 조리사 자격중을 가진 사람만 음식을 할 수 있다는 법이 있다면 우리 일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허기를 면하려면 조리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의 식당 앞에서 하루 두세 번씩 긴 줄을 서야 할 것이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그렇게 해소하며 살아야 한다면 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감을 유지하고 살기 어렵다. - P25
물리적 허기만큼 수시로 찾아오는 문제가 인간관계의 관중과 고로 인한 불편함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매번 자격중을 가진 의사나 상담사를 찾을 수는 없다. 끼니 때마다 찾아오는 허기만품이나잦은 문제라서 그때마다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면 일상이 불가능해진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집밥 같은 심리학이 필요한 이유다. 일상에서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으면 짜증이 많아지거나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무기력해진다. 마찬가지로 삶의 바탕인 인간관계의 갈등들이 해결되지 않고 쌓이면 마음도 엇나가고 삶도 뒤틀린다. 안정적인 일상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집밥 같은 치유다. 집밥 같은 치유의 다른 이름이 적정심리학이다. - P26
거의 모든 심리적 어려움의 원인을 뇌에서 찾고 있는 이 시대에 나는 공 모양의 물통처럼 소박하지만 강력한 위력을 지닌 심리적 힘을말하고자 한다. 그 힘은 즉시 작동한다. 약물치료 보다 더 빠르게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삶의 고통에 실질적으로 대처하는 실용적인 힘이다. 그 힘의 중심이 공감‘이다. 내가 말하는 공감은 경계를 인식하는 공감이다. 본문에서 자세히밝힐 예정이다. ‘경계를 품은 공감, 그 입체적인 공감은 집밥 같은 치유, 적정심리학의 핵이다. 잘 모르고 보면 "어, 저걸 가지고 필 할 수 있단 말이야"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공감의 위력은 어떤 힘보다 강하다. 이것은 부유하는 가난하든, 강자는 약자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노인이든 아이는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공감이 뭔지 제대로 알게되면 종이로 접은 새가 비둘기가 되어 날아가는 마술을 마음에서경험하게 될 것이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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