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주 보고 있어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불안은 점점 커지면서 연제나 그 자리에 있다."
반항적이고 내향적 외톨이이자 아웃사이더인 페소아의 글에는 체념, 자의식, 고독이 어려 있다. 자신이 창작해낸, 수십가지 이명들은 외롭기 때문에, 나를 아무도 이해해줄 것 같지않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싫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만들어준분신이자 친구가 아니겠는가. 그는 열일곱 살에 남이공에서리스본으로 돌아온 후, 단 한 번도 외국에 나가지 않고 고집스럽게 오로지 리스본에만 머물렀다. 그가 여행이나 여행기를상상력의 부재라며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이 나에게는 진심이라기보다 좌절된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한 반발로 읽혔다. 혹은 성장기 시절 그 어디에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인간의
"결코 변하지 않을 내 것‘을 향한 집착이 아니었을까. 이것은나의 주관적인 동질 의식일 뿐일까.
- P45

하기야 그들 입장에선 우리 모녀는 꽤나 뜬금없고 신기한손님일 것이다. 멀리 동양의 한 나라에서 날아와, 바닷가에서수영도 하지 못할 이런 비수기에, 투숙하는 손님도 아니고 카지노를 하러 온 것도 아닌데, 굳이 에스토릴까지 와서 말없이늦은 짐심을 먹는 두 사람. 관광차 온 듯한 들뜸과 설렘도 느껴지지 않고,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어 이 시기에 이 멀리까지있을지 궁금할 법도 하다. 안경 쓴 수줍음 많은 저 여자아이에겐 아빠가 있을까. 이혼 후 둘이 사는 걸까. 아니면 아이 아빠는 일찍이 세상을 떠난 건 아닐까? 저 봐, 엄마와 딸의 분위기가 어쩐지 묘하게 차분하잖아. 물론 그들은 유서 깊은 호텔에서 일하는 자부심을 지닌 직업인이기에 그러한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도록 훈련받았다. 하지만 눈빛에서 우러나는 호기심만큼은 숨기기가 힘들다.  - P112

체크인을 하고 몸 컨디션이 상대적으로 나은 이른 오후에엄마를 모시고 자주색 카펫이 깔린 긴 복도를 지나 온천장으로 향했다. 내가 화장실을 들르는 동안, 엄마가 먼저 목욕하러들어가 있겠다고 했다. 뒤늦게 탈의하고 수증기로 김이 가득서린 대욕장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넓은 대욕장 중간쯤에 엄마 혼자 자리를 잡고 몸을 씻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엄마의 뒷모습에 내 가슴이 쿵쿵 뛰었다. 너무 말라서 척추뼈가그대로 도드라졌고, 상체가 머리 크기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모자로 가리고 지내던 민머리는 머리카락이 삐뚤빼뚤 나기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와서 아무 말 없이 엄마 옆자리에 앉았다.
"경선아, 엄마 너무 징그럽지?"
엄마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 P114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이득과 손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살 것만 같다. 누구는 그런 성질을 두고 어눌하다 하겠지만나는 지금 그런 다정한 너그러움을 그 무엇보다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긴초 해변은 언덕 멀리에서 볼 때부터 사람의 영혼에 강하게 호소하고, 마음을 뒤흔든다.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자연 그대로의 해변이다.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뛴다.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해안선을 따라 여러 명의 서퍼들이 거친 파도를타고 있다. 아무렴 이곳은 세계 서핑 챔피언십 대회를 주최한적도 있다. 바다는 역시 파도지! 누가 뭐래도 파도가 거친 바다가 진짜 바다인 것이다.  - P120

바다까지 가는 내리막길에는 바위들 사이로 처음 보는 야생 꽃과 다육식물 들이 반기고 모래는 얼마나 깊고 입자가 고운지, 마치 몸의 곡선대로 푸욱 들어가는 템퍼 매트리스 위를뒤뚱뒤뚱 걷는 기분이다. 하늘은 여전히 화창하고 물결은 햇빛에 눈이 부시도록 반짝반짝 빛난다. 가족과 연인, 친구 들은모래사장 곳곳에 피크닉 매트를 깔고 쉬고 있고, 개와 강아지는 주인을 따라 해변가를 기분 좋게 산책한다.  - P121

가게에 선보일 상품의 기준은 자연스레 정해졌다. 최저30~40년의 역사가 있는 브랜드나 제품일 것. 사람들의 향수와 추억을 소환할 것, 제작 과정에서 수작업으로 만드는 부분이 반드시 남아 있을 것. 포장은 그대로 하거나 예전 스타일을기본으로 할 것. 가장 중요한 것은 포르투갈에서 생산되고 품질이 좋을 것. 제품이 지닌 본래의 매력은 최대한 그대로 두면서 그녀만의 감각으로 정갈함과 세련됨을 보완했다. 참신한아이디어 하나가 폐쇄 일보 직전의 일터들을 재생시키고, 전국 각지의 생산자들에게 살아갈 자부심을 안겨준 것이다.  - P137

"돈 달라는 말이 그렇게 입 밖으로 안 나오더라고."
외할머니는 내가 아는 가장 선하고 인자하신 분이고 엄마네 집은 당시 가난하지도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엄마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아 어쩐지 속으로 조금기기도 해서, 모하게 감미로운 감정에 빠졌다. 그러니까 어면에서 나는 엄마를 닮았다. 라는 동질감의 확인, 어른에게의지하는 방법을 모르는 어린이, 어른보다 더 어른의 감정을하리 알아채는 어린이 어른을 귀찮게 하거나 상처 주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는 어린이,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해결해보리고 하는 어린이, 그게 잘 안 되면 혼자 숨어서 무너지는 어린이. 그러고는 꾸역꾸역 소화시켜 어떻게든 추스리는 어린이.
말을 하지 않는 어린이.

미술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는 리스본을 두고 "망자들의 특별한 정거장" 이자 "이곳에서 망자들은 다른 도시에서보다 더 과감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하는데, 자꾸 이렇게 엄마에 대한 일들이 떠오르는 걸 보면,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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