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은 단편이었다. [친절한 복희씨]에 수록된 작품으로 먼저 읽었다. 이번에도 그런 반복으로 읽었다. 그래서인지 장편으로도 쉽게 쭉쭉 읽었다. 야간 근무중 짬짬히 신경의 반만 책에 걸쳐놓고 한쪽 귀는 다른 쪽으로 열어 놓고, 읽기로는 소설이 딱이다. 소설은 읽는동안 소설속으로의 몰입과, 일을하고 있다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평행을 이루면서 모든 신경들을 날카롭게 일으켜준다. 느슨해질수도 있는 정신을.
  4월, 박완서 다시 읽기를 시작하고 나서 나는 좀 바보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분명 읽었던 책들이고, 간혹 메모지도 꽂아 둔 책들인데도 처음처럼 생소하고 새로웠다. 정말 읽었던 것일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어떤 특정한 한 편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반적으로 고르게 그러했으니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하고 바보 같은지. 이런 식의 독서를 줄기차게 해왔다는 자괴감까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무얼 읽고 기억했다는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새롭게 읽힐 수가 있지 싶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읽었다해도 읽어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을. 그때의 나도 나였고 지금의 나도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이해하고 기억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고전은 계속 읽히는 것이란 사실을.

  2010년쯤이었을 것이다. 제주 올레길에서 만난 한 친구와 나눈 대화들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우리는 살아온 과정, 어느 곳에서도 겹치는 부분이 1도 없었으나 시와 소설의 얘기에서 많은 부분 겹쳤다. 둘 다 그 대화의 신명에 빠져 길을 걷기보다 더 자주 멈추고 쉬면서 미니올레를 했다. 일년의 절반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지내는 그 친구를 다시 만나 걷지 못한 것처럼 그런 미니 올레도 다시는 해보지 못했다. 그때의 화두는 미래의 노년을 작가[박완서]를 통해 미리 알아가는 즐거움과 여전히 현역인 작가에게 보내는 헌사에 가까웠다. 아직 억새가 성성하던 통오름에서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붉은색 표지의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를 한 꼭지씩 나눠보던 그 겨울이 풍경화처럼, 기억의 폴더에 저장되어 있다. 아름다운 기억이다. 선생도 그렇다.

  내가 ‘아직 못 가본‘ 노년을 선생의 글로 미리 배웠다. 소설과 산문을 통해 한편으로는 수다스럽고, 자식 자랑에 주책맞기도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 변덕스럽기까지한 그녀들의 세계를 미리 엿보고 내 노년까지 짐작하기도 했다. 선생은 원하지 않으실지 몰라도 내게는 스승이시다.



  한번 뒤집혔던 세상이 원상으로 복귀해서 미처 숨 돌릴 새 없이 다시 뒤집혔다가 또 한 번 뒤집히는 엎치락뒤치락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집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고, 그 남자네 집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국가라는 큰 몸뚱이가 그런 자반뒤집기를 하는데 성하게 남아날 수 있는 백성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여 우리는 서로 조금도 동정 같은 거 하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고통은 김치하고 밥처럼 평균치의 밥상이었으니까. 만약 아무도 죽지도 않고 찢어지지도 않고 온전한 가족이 있다면 우리는 그 얌체꼴을 참을 수 없어 그 집 외동 아들이라도 유괴할 것을 모의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창백하게 일렁이던 카바이트 불빛, 불손한 것도 같고 우울한 것도 같은 섬세한 표정, 두툼한 파카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껴지던 단단한 몸매, 나는 내 몸에 위험한 바람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불쌍한 어머니를 맨날맨날 구박한다고 해도 그게 하나도 못돼 보이지 않았다. 피차 동정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닮은 불운을 관통하는 운명의 울림 같은 걸 감지한 건 아니었을까. 나는 마치 길 가다 강풍을 만나 치마가 활짝 부풀러 오른 계집애처럼 붕 떠오르고 싶은 갈망과 얼른 치마를 다둑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장작을 아끼기 위해 우리 식구들은 다들 안방에 모여 자고 있었다. 깊이 잠든 살아남은 식구들, 두 과부와 두 어린 것들의 평화로운 숨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더는 나빠질 수 없는 밑바닥에 도착한 안도감과 평화는 같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보다는 평화가 얼마나 더 거룩한가. 나는 내 안에서 회오리치는 위험에의 갈망과 이렇게 맞섰다. P36. 37



  ˝더는 나빠질 수 없는 밑바닥에 도착한 안도감과 평화는 같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보다는 평화가 얼마나 더 거룩한가.˝ 나는 이런 문장들에 무릎이 꺾인다. 밑바닥에 가 본 사람만이 저런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글로만, 역사로만 접해 본 전쟁을 생각한다. 지금의 아프카니스탄을.




  박수근 그림에 나오는 여자들은 다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는데 남자는 우두커니 앉았거나 놀고 있는 게 특징이라고 했다. 남자들에게는 일거리가 없어서 여자들이 나가서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가 있었던 당시의 사회상을 본 대로 느낀 대로 그린 사실적인 그림이지만, 캔버스에다 옮기는 게 아니라 돌을 쪼듯이 그렸기 때문에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 같은 시각효과를 나타낸다고도 했다. 전문가의 해설이 비전문가의 안목과 일치하는 게 신기했다. 전시장을 돌아 나오는데 회랑처럼 생긴 통로에 박수근의 판화가 걸려 있었다. 판화속의 여자들도 다들 임을 이고 어디론지 걸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 탑이 가운데 있고 그 주위를 임을 인 여인들이 맴도는 것 같은 구도의 판화를 보고 엄마의 손을 잡고 구경온 어린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엄마, 저 아줌마 대빵 큰 모자 썼다. 그치?
  여인들이 머리에 인 빈 광주리가 대빵 큰 모자로 보였던 것이다. 그 아이는 아마 광주리는커녕 작은 보퉁이 하나도 머리에 인 것을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광주리는 정말이지 대빵 컸다. 지름은 일 미터 가까이나 되지만 운두는 손을 올려 잡을 수 있어야 하는 걸 감안해, 낮게 왕골로 엮은 광주리는 뚝섬에서 두세 평씩 밭떼기한 열무니 굵은 육쪽마늘 열 접도 한꺼번에 담을 수가 있었다.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잘쟁여 담느냐가 문제지 목이 어떻게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느냐는 문제 삼지 않았다. 임만 이면 여자들의 목은 움츠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빳빳이 일어섰다. 그 남자의 어마니처럼 굽은 허리까지 일으켜세우는 이상한 임질도 있었다. 등짐장사로 생업을 삼은 애비가 식구들에게 뼈가 부러지고 등가죽이 벗겨지도록 일했느라고 공치사하는 반면, 여자들은 광주리장사를 회고할 때 목이 빠지게 임질을 했다고 표현하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어려운 시절이 지나고 여자들이 광주리 장수를 면하게 된 후에도 웬만한 집에선 대개 커다란 광주리 한두 개씩은 뒤란이나 광에 걸려 있었다. 김장때 무나 절인 배추를 씻어 건져 담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필수품이었으니까. 식구가 다섯 식구만 되어도 김장을 백 포기씩 할 때였다. 극도로 궁핍한 전시를 넘기자 김장을 몇 포기나 했냐로 그 집이 얼마나 살 만해졌나 부의 척도로 사는 시대가 왔다.
  박수근이 표현한 그와 동시대의 여인들은 판화 속에서나 유화 속에서나 빈 광주리를 이고 있다. 그래서 귀로歸路처럼 보인다. 귀로의 허기와 충만감, 귀로의 쓸쓸함과 조급증, 귀로의 피곤과 안도감, 그런 것들을 겪어보지 않고 어찌 읽어낼 수 있을까. 더군다나 미묘한 선이 생략되어 유화보다는 화강암에 새긴 부조처럼 보이는 작은 판화에서. p48~50


  5월이 되자 사랑마당에서 온갖 꽃들이 피어났다. 그렇게 여러 가지 꽃나무가 있는 줄은 몰랐다. 향기 짙은 흰 라일락을 비롯해서 보랏빛 아이리스, 불꽃 같은 영산홍, 간드러지게 요염한 유도화, 홍등가의 등불 같은 석류꽃, 숨가쁜 치자꽃, 그런 것들이 차례로 불온한 열정 - 화냥끼처럼 걷잡을 수 없이 분출했다. 이사하고 나서 조성한 정원이어서 그 남자도 이렇게 꽃이 잘 핀 건 처음 본다고 했다. 그런 꽃들을 분출시킨 참을 수 없는 힘은 남아돌아 주춧돌과 문짝까지 흔들어대는 듯 오래된 조선 기와집이 표류하는 배처럼 출렁였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싶을 만큼 아슬아슬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돈이 안드는 사치는 이렇게 위험했다.
  5월은 마치 미친 것처럼, 울부짖는 것처럼 격렬하게 제 명을 다하고 극성스러운 여름이 되었다. 나는 6월의 모란꽃처럼 피곤했다. 찌는 듯한 더위가 극에 달한 어느 날 휴전이 되었다. P53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싫증이 난 건 아니었다. 연애의 권태기가 온 것 하고도 달랐다. 만일 그 남자를 못 만났더라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까.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의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올렸다. 황홀한 현깃증이었다. 이 도시 골목골목에 놓인 어둠, 포장마차의 연탄가스, 도처에 지천으로 널린 지지궁상들이 그 갈피에 그렇게 아름다운 비밀을 숨기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 남자의 입김만 닿으면 꼭꼭 숨어있던 비밀이 꽃처럼 피어났다. 그 남자하고 다닌 곳 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있었던가.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처졌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감사하며 탐닉하고 있는 건 추억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지 않았다.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그와 소원해진 사이에 느낀 휴식감도 절정감 못지않게 소중했다. 긴장 뒤엔 반드시 이완이 필요한 것처럼. 그러나 한번 통과한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전적인 몰두가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무릉도원의 도화桃花도 일주일만 만개해야지 만약 일 년 내내, 아니, 한 달만 만개 상태가 계속되어도 사람들은 지쳐서 몸살을 앓든지 환장을 하든지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미 무릉도원의 주민이 아니게 될 것이 아닌가. p70,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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