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는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9
곽효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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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에 없는 집

                       곽효환

  지도에 없는 길 하나를 만났다

  엉엉 울며 혹은 치미는 눈물을 삼키고 도시로 떠난

  지나간 사람들의 그림자 가득해

  이제는 하루 종일 오는 이도 가는 이도 드문

  한때는 차부였을지도 모를 빈 버스 정류소

  그곳에서 멀지 않은 비포장길

  지금 어디에 있다고 너 어디로 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지시하던 내비게이션 소리도 멈춘 지 오래

  텅 빈 인적 없는 한적함이 두려움으로 찾아드는

  길섶에 두려운 마음을 접고 차를 세웠다

  오래전 서낭신이 살았을 법한 늙은 나무를 지나

  교목들이 이룬 숲에 노루 울음 가득한 여름 산길

  하늘엔 잿빛 날개를 편 수리 한 쌍 낮게 날고

  투명하고 차가운 개울 몇을 건너

  굽이굽이 난 길이 더는 없을 법한

  모퉁이를 돌아서도 한참을 더 걸은 뒤

  고즈넉한 밭고랑

  황토 짓이겨 벽 붙이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곡식 창고

  함석지붕을 머리에 인 처마가 깊은 집이 있다

  산나물이 들풀처럼 자라는

  담도 길도 경계도 인적도 없는 이곳은

  세상에 대한 기억마저도 비워낸 것 같다 그래서

  지도에 없는 길이 끝나는 그곳에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집 한 채 온전히 짓고 돌아왔다

                                            시집[지도에 없는 집]중에서

 

      

 

 

  이 시를 읽는데 오래전에 비스름한 시를 끄적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따라 올라왔다. 지도에는 없고, 내 혈관 속으로 난 길을 따라 어쩌고저쩌고했던 거 같다. 한참 끄적거림에 왕성하던 시기의 치기 어린 짓이었는데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은 꽤 오래 담아두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다. "세상에 대한 기억마저도 비워낸 것 같다 그래서// 지도에 없는 길이 끝나는 그곳에/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집 한 채 온전히 짓"는 결말을 얻지 못해 시는 내게서 멀다. 지도에는 있지만 누구도 애써 찾지 않는 지도에 없는 길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무수한 지도에 없는 집들에 대한 생각, 나만 알고 나만 누리는 곳이 바로 그런 곳이리라. 지도에 없는 길.

 

   이제는 떠나온 직장에서 출, 퇴근하는 길에(아침 이든 저녁 이든) 애정 하는 공간이 몇 군데 있었다. 그런 공간을 찾고, 그런 공간을 누린다는 것이 소확행이었음을 깨닫기도 했다. 우선은 집들과 건물들 사이의 공터에 꽤 많은 사람들이 가꾸는 텃밭이 있었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각각 다르고 주인의 성품을 닮은 농작물들의 달라지는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은 몇 분에 불과하지만 마음을 촉촉하게 해줬다.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상추는 입맛을 다시게 하고, 완두콩 줄기들은 매번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그 비싸던 대파들은 오동통한 잎들을 자랑하고, 이슬 맺힌 감자꽃은 어찌나 예쁜지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했고, 손가락만 한 오이들은 어찌 자랄지 궁금했다. 그중에는 화초를 심어두는 고랑도 두어 군데 있는데 꽃을 가꾸고 꽃 차를 만들어파는 카페를 운영한다는 친구를 생각나게 했다. 공교롭게도 꽃을 시작한 그즈음부터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소식도 나누지 못하는 마음 안에 그 친구의 방에 잠깐씩 불이 들어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도라지, 몇 군데 도라지들이 있어 고개를 돌려 도라지 꽃들에 눈 맞춤을 하고는 했다. 저 사진은 출근 마지막 날에 그곳에 머문 130일의 애틋함을 담아서 찍었다.

 

 

    

      

 

 

  그리고 문정공 조광조 선생을 모시는 심곡서원, 저 주변에 있던 직장에서 삼 년을 넘게 지냈는데 그저 지나치기만 했었다. 이번에도 내부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저 느티나무 그늘 아래 의자를 애용했다. 작은 못이 있고 수련이 가득한 보호수 아래에 십분쯤 앉아있으면 숨차게 걸어온 도롯가 길들의 소란과 땀이 잦아들었다. 정암 선생을 생각했다. 내 고향에서 멀지 않을 능주를 생각해 보면 가보지 못한 능주 대신 남평역의 정경이 떠올랐다. 권력을 잡은 정권은 개혁을 불편해한다는 어디선가 읽은 구절도 소환해본다. 기득권의 반발은 '주초 위왕'처럼 엉성하고도 집요하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가진 것을 지키려는 노력은 바꾸려는 의지보다 뛰어나는 법이다. 선생이야 당신의 소신대로 생을 살고 마감했으나 가솔들은 어찌 되었을까? 신원 회복이 되기까지 그 긴 시간을. 오백 년을 살아온 고요한 나무의 영이 어깨에 서늘하게 내려앉는 찰나를 떨치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오래전 서낭신이 살았을 법한 늙은 나무" 두 그루가 지키고 있는 심곡서원은 지도에 있는 집이고 지도에 있는 길이지만, 나에게만 오롯한 이정표를 세워주는 곳이다. 주변을 공원화 사업하느라 공사들이 어수선한데 정리되면 또 다른 공사를 시작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토목공화국이고 공사 진행형의 나라다. 삶의 방향을 물으면 묵묵부답이지만 "지금 어디에 있다고 너 어디로 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지시하던 내비게이션"의 지적질과 지시가 난무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걸어 다니기로 결정한 며칠은 걷고 시간을 체크하고, 어떤 길이 더 걷기에 좋은지, 빠른지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볼 여력이 없었다. 사실 이 길들을 통과한 시간은 꽤 되는데 지금까지는 걸어보려 한 적이 없었다. 걸을 시간도 없었고 밤 열시쯤에나 마치는 식당의 특성상 걸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초기에 두 번인가 동료랑 걸어보았으나 소음과 분진이 심해서 다시는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누구인가, 광교산 밑에서 종종걸음으로 12시간 일을 하고도 퇴근은 걸어서 해야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길 위에서'다. '길'은 찾는 것이고, '길'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길 위에서' 비로소 충만해진다. '길 위에서' 하루치의 생활이 정리되고 마감된다. 지도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곳을 걷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내게 모든 길은 "지도에 없는 길 하나를 만났다/ 엉엉 울며 혹은 치미는 눈물을 삼키고"이다. 하루치의 노고를 저 의자에 내려놓고 앉아있다 보면 스르르 내 안으로 침몰해가는 지점쯤에서 툭툭 일어나서 다시금 길을 걷기 시작한다. 사진 속에 지명이 나와있으니 지명은 생략하고 바로 곁에 '심온의 묘'가 있다. 세종의 장인인 그의 묘역은 높은 곳에 위풍당당해서 근처의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와 늘 비교가 된다. 물론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았으나 정치적, 학자적 입지를 생각해 볼 때 흔적의 차이는 극명하다. 나의 저울추는 항상 정암에게로 기울어있다. 이 박물관 모퉁이를 돌면 해령군 이지의 묘가 있다. 해령군은 세종의 이복동생이고 우리가 아는 이방원, 즉 태종의 여덟 번째 아들이다. 어느 권력관계에서도 그렇겠지만 우리가 동화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왕자들의 삶은 단 하루도 평탄하지 않다. 왕이 되지 못한 왕자는 매일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머무는 슬픈 족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생의 이면엔 그토록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묘는 죽은 이들을 위한 집에서 후손들의 권위의 상징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생각도 이곳에서 해봤다. "지도에 없는 집'은 어쩌면 죽은 자는 떠나고 없는 누군가의 '묘'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머무는 시간은 평화롭고 흡족했다. 강아지와 어린 아기들이 비슷한 비율로 산책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의 하나였다. 산책길에서는 댕댕이의 비율이 훨씬 높다. 거기다 그 아이들의 실례를 모른 척 지나가는 몰상식한 견주들의 비율도 상당히 높다. 코로나19의 팬데믹의 시절에 '지도에 없는 집'과 '지도에 없는 길'들이 있어 살만하다. 팽팽 돌아치는 도심 한가운데에서 들숨과 날숨을 편히 쉴 곳은 지도에는 없고, 내 안에는 있다. 이곳에서 지나 온 130일의 시간이 내게 새로운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다시 '지도에 없는 길'을 찾아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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