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일 K-포엣 시리즈 11
안현미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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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일

                     안현미

 

  그날 이후 누군가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다

  그것은 깊은 일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는 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책임해야겠다

  오래 방치해두다 어느 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마음처럼

  오래 끌려다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쓸모없어진 어떤 마음처럼

  아무래도 이번 생은 나부터 죽고 봐야겠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삶을 살아야겠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혼자 밥 먹는, 혼자 우는, 혼자 죽은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침묵해서는 안 되는

  그것은 깊은 일

                    시집 [깊은 일] 중에서

 

 

 

   경험은 겪은 것이 아니다. 선택적인 기억이다. 경험은 철저히 정치적인 것이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의미화하는가, 내가 겪은 일은 어떤 것인가. 경험은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이 생길 때 비로소 '떠오르고' 인지되고 해석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자기 경험을 바로 볼 수 있는 렌즈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성의 언어가 여성의 삶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기 경험을 믿지 못한다. 자기가 겪은 일을 남 이야기하듯 말한다. 나도 그랬다. 가부장제는 모든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한다. 가해 남성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자기가 저지른 일을 남의 얘기처럼 말하며 피해 여성을 비웃거나 자신과 같은 가해 남성 '동료'를 비난하기도 한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이 겪은 폭력이 훨씬 심각한데도 '덜 맞은' 여성들을 보며 놀라고 걱정한다. 경험, 몸, 인식의 분리 속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 p102, 103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늑대, 여우, 토끼가 한 집에 사는 것이 가능할까? 늑대가 여우를 때리지 않을까? 늑대가 토끼를 잡아먹지 않을까? 먹이 사슬에서 포식자와 피식자가 같이 살 수 있는가? 이처럼 근대 핵가족은 성별과 연령이 교차하는 위계적 제도다. 가정 폭력은 근대 이전에도 빈번한 문화였지만 늑대, 여우, 토끼처럼 서로 덩치 차이가 크고 힘이 다른 이들이 함께 사는 곳에서 폭력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구조다.

  쉼터(shelter house)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쉬는 곳이라기보다는 긴급 피난처다. 미셀 푸코는 군대, 감옥, 병원이 훈육의 공간이라고 했지만 여성의 경험은 다르다. 집에서 전쟁을 치르는 여성에게 감옥은 방공호일 수 있다. 동네마다 쉼터(방공호)와 여성 자경단이 있어야 한다. 왜 쉼터를 찾아 서울까지 와야 하는가. 쉼터는 '자기만의 방'이자 고통을 함께 해석하고 위로하는 공동체다. 그곳은 언어가 다른 세계다. 다른 국민이 사는 네이션(국가)이다.

  내가 여성의전화에서 일하던 시절 어떤 가해 남편이 단체 상근자들을 인신 매매범으로 고발한 적이 있다. 우리가 피해 여성을 가두고 노동을 착취할 뿐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괴담처럼 "새우잡이 통통배에 여성들을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 상근자들은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구타 남편은 그렇다 치고, 남자의 말을 믿고 사무실에 출동한 경찰은 뭐 하는 사람인가. 그런 영화 같은 시절이 지나가고 쉼터가 만들어진 지 30년이 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이 공간을 위해 노력한 수많은 여성들을 존경한다. 우리는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살아남은 이들의 궤적이고, 우리가 살아갈 방향이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그 일은 사소하지 않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중에서 P106, 107

 

 

 

  햇살이 뜨거웠다. 며칠 만에 만나는 반가운 햇살은 악수를 나누기보다는 손사래를 칠 정도로 오전임에도 이미 달구어질 대로 달궈져서 화들짝 손을 거두고 싶었다. 냉방을 안 틀고 있는 버스는 뜨거웠고 하필이면 저 페이지를 마저 읽던 내 심장은 녹아내렸다. 심장초음파 검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딱 저 페이지에서 책을 덮었다. 더 읽다가는 초음파 검사도 전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어차피 결과는 다음 주에 보는 것이지만.

   "정희진의 글쓰기 3"편인 이번 책은 읽으면서 벌써 몇 번째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한 꼭지를 겨우 읽고 밀어두고 다시 한 꼭지를 읽다가 미뤄두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서평인데, 언제나처럼 그 책들을 내가 읽게 될 것 같지 않고 설사 읽는다 한들 서평을 쓸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어떤 책에 대한 서평이라기보다는 책 한 권을 통해 자신의 견해와 철학, 경험과 정신이 뭉퉁그려졌음에도 스스로 검증하고 검증한 혹독한 글쓰기의 산물이어서 읽는 동안 덩달아 경건해지는 그녀의 글을 좋아한다. 밥벌이로서 서평에 매달리는 작가의 자세가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밥벌이는 냉혹하고도 경건한 삶의 과정이다. 누구도 그 상황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는 가진 게 몸뚱어리밖에 없어서 몸을 굴려 밥을 번다. 작가 정희진은 글을 써서 밥을 번다. 많이 다르지만 결국 같다. 치사하고 더럽지만 참아야 하는 순간도 있고 견뎌야 하는 수모도 있다. 누가 더 괜찮은 삶이냐고 묻는다면 질문자를 뜨아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밥벌이는 신성하다. 어떤 밥벌이가 괜찮은지는 없다. 다만 그 밥벌이의 가치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스스로 검증하고 세상의 잣대로 검증당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폭력 앞에 항상 노출되고, 막무가내로 참고 견뎌야 한다면...... 저런 글 앞에서 나는 무릎이 꺾인다. 분노하지만 눈을 감아 버릴 수밖에 없는 가부장제의 폭력 앞에서 나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겨우, 부끄럽게도.

  언젠가 후배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아마도 결혼을 해서 두들겨맞고 살고 있다고 해도 그 결혼을 지키고 살 사람이라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말지언정 그 약속을 파기할 자신은 없는 사람이어서, 아예 결혼을 포기했다고. 빈말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견디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나 자신이 무서워서 비혼을 선택했다. 물론 반대일 수도 있다. 어차피 확률은 반반, 내 선택이 옳다고는 믿지 않지만 시간을 거슬러 다시 결정을 한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나는 맞고 살기는 싫다. 나는 장난으로라도 툭 친다든가, 애칭으로라도 비하적인 호칭이 너무 싫다. 참고 살기 싫다. 어느 누구도 누군가에게 입으로든 손으로든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없다. 해서는 안 된다. 참으면 더욱 안 된다. 그래서 안현미 시인의 『깊은 일』이다. 이것은 저 심장 깊숙한 심연(深淵)이고 더욱 아득한 먼바다의 深淵이다. 안현미 시인의 신간을 오래 기다렸다. 시인은 쑥과 마늘만 가진 채 동굴에 있었던 모양이다. 다짐과 각오가 안쓰럽고, 이런 세상에 놓인 시인의 무거운 책무가 안타깝다.

 

 

 

   "너도 할 수 있어!"

 

  그 한마디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깐 그건 어떤 슬픔 앞에서도 어떤 절망 앞에서도 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 주었습니다. 누구나 해줄 수 있는 평범하지만 잊히지 않는, 잊을 수 없는 그 한마디 말 때문에 나는 윌트 휘트먼처럼 나 자신을 축하하고 나 자신을 노래하는 시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

  그날 이후, 누군가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겨우, 살아 있습니다. 어쩌면 저주가 가장 쉬운 용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그 바다를 슬퍼하고 그 바다를 노래하는 시인으로 살다가 죽어야겠습니다.

 

  당신은 말합니다. 사랑할 수는 있었지만 사랑을 초과할 수는 없었다고, 깊고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내 새끼가 너무 보고 싶다고 울부짖는 당신, 할 수만 있었다면 대신 죽고 싶었을 당신, 당신은 말합니다. 십자가는 천사의 날개 고난 버전 같다고. 무섭고 쓸쓸하고 한없이 고독한 봄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인간을, 잃어야 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중단해야 맞는다고 생각하는 밤입니다.

 

   "기록하겠습니다."

 

  어떤 슬픔은 새벽에 출항하고 어떤 아픔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들은 그 바다에 못 박혔습니다. 당신은 말합니다. 그 바다에 못 박힌 천사 같은 내 새끼가 너무 보고 싶다고, 잊지 않겠습니다. 잊힌대도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고 기록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그 바다를 슬퍼하고 그 바다를 노래하는 시인으로 죽다가 죽어야겠습니다.

                                    2020년 흰쥐의 해

                                                   안현미

 

 

 

  [깊은 일] 시집에서 시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신은 남은 생을 그 바다의 기록으로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이 문장들을 읽는데 속이 아렸다. 청양고추를 한꺼번에 백 개를 씹어먹으면 이럴까?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면서 아주 예전에 광화문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히죽대던 우리를 보았을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어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 무례를, 그 무식을 용서하시라. "사랑을, 인간을, 잃어야 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중단해야 맞는다고 생각하는 밤입니다." 어차피 심장은 괜찮을 것이다. 조금 두껍고 약간 커서 일 년이면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아온 지 벌써 여섯 해째다. 深淵, 가라앉는 밤이다, 라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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