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에 달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92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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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리고 돌아오다

               김소연

 

 

   지루한 글이었다 진전 없는 반복, 한 사람의 생 읽어내느라 소모된 시간들, 나는 비로소 문장 속으로 스며서, 이 골목 저 골목을 흡흡, 냄새 맡고 때론 휘젓고 다니며, 만져보고 안아보았다, 지루했지만 살을 핥는 문장들, 군데군데 마지막이라 믿었던 시작들, 전부가 중간 없는 시작과 마지막의 고리 같았다, 길을 잃을 때까지 돌아다니도록 배려된 시간이, 너무 많았다, 자라나는 욕망을 죄는 압박붕대가 너무, 헐거웠다, 그러나 이상하다, 너를 버리고 돌아와 나는 쓰고 있다, 손이 쉽고 머리가 맑다, 첫 페이지를 열 때 예감했던 두꺼운 책에 대한 무거움들, 딱딱한 뒷표지를 덮고 나니 증발되고 있다, 숙면에서 깬 듯 육체가 개운하다, 이상하다, 내가 가벼울 수 있을까, 무겁고 질긴 문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집[극에 달하다]중에서

 

   며칠 전, 상자를 정리하느라 하루를 온통 소비했다. 내게는 스스로 보물 상자라 칭하는 상자가 네 개 있는데(명품 가게 앞에 내놓은 것을 새벽 귀갓길에 주워온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명품 쇼핑백이나 명품의 빈 상자조차도 꽤 고가에 거래되기도 한단다. 내 성향에 굳이 돈을 지불하고 살 것 같지는 않지만 **리 문장이 찍힌 단단하고 예쁜 색감의 상자였다. **리를 비롯해 명품으로 불리는 물건들을 짝퉁조차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상자는 아주 흡족했다.) 이십여 년의 시간이 지나서 색도 바래고 몇 번의 이사로 옆은 찢어져서 다른 맞춤한 상자가 생기면 바꿔야지 마음먹고 있었던 참이다. 동생이 가져다준 와인이 담긴 상자가 색감도 좋고 단단하고 크기도 알맞아서 그 상자 하나와 가지고 있던 빈 상자 하나, 두 개에 정리하기로 했다.

   옮겨 담기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분량이 많아서 넘쳤다. 버릴 것은 버려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밥 먹는 일도 잊게 하고 커피도 잊은 채 종일 매달리다가 나이트 출근 시간이 촉박해져 대충 마무리하고 상자를 닫았다. 편지들이다. 버리려니 읽어 보고 추려야 했던 것이다. 상자에는 꾸깃꾸깃 구겨지고 접히고 봉투째 담긴 내 이십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루한 글이었다 진전 없는 반복, 한 사람의 생 읽어내느라 소모된 시간들, 나는 비로소 문장 속으로 스며서" 지금은 이름조차 희미한 이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이만큼의 답장이 있기까지 내가 써보냈을 무수한 안부와 문장들은 "길을 잃을 때까지 돌아다니도록 배려된 시간이"얼마나 많았을까 싶어서 아득해졌다. 얼마나 많은 밤의 시간을 할애해서 메아리도 없는 헛짓을 했는지가 한 통의 답장 안에 증명되기도 했다. 안쓰럽고 짠한 내가 여전히 안부를 묻고, 대답 없는 안녕을 빌고 있었다. 딱했다.

   "첫 페이지를 열 때 예감했던 두꺼운 책에 대한 무거움들, 딱딱한 뒷표지를 덮고 나니 증발되고" 시작은 그러했으나 정리되는 세월의 흔적은 나를 가볍게 했다. 그 20대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버리고 돌아오"는 과정의 연속성이 생애를 결정한다. 나는 너무 줄레줄레 달고 있었다. 가뜩이나 무거운 몸이 그래서 더 무거웠던 것이다. 언제 또 시간을 내서 버려야 한다. 비워야 한다. "내가 가벼울 수 있을까, 무겁고 질긴 문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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