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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평점 :
김지은입니다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봄알람 (2020)]
오후 4시인데 한밤중처럼 어둡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다. 이렇게 30분만 쏟아진다면 어디선가 산사태가 날 것이고 하수가 역류할 것이란 생각을 잠시 한다. 이렇게 아는 게 많다는 것은 걱정이 많다는 것이고 쓸데없는 걱정이 많다는 것은 모든 일에 신랄해지고 조금만 아는 척을 해도 곧 잘난 체가되어버리기 때문에 나는 줄곧 어떤 이슈가 될 문제들에 내 생각을 드러내지 않으려 조심한다. 스물 중반이 넘어가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잘난체한다는 거였다. 그 말속에 담긴 비난과 시샘, 힐난과 깔아뭉개는 그 태도들에 너무나도 익숙해서 피하고 싶다. 말을 안 하면 안 해서, 말을 하면 저것 봐 저럴 줄 알았지로 피하려 할수록 내가 입은 잘난체한다는 손가락질의 외투는 물을 먹은 이불처럼 무거워질 뿐이다. 그래서 대부분 모른 척, 못 본 척 침묵을 택한다. 어느 정도 친하지 않으면 말을 섞지 않으려 조심한다. 그래서 또 잘난 체한다는 비난을 듣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오늘은 작정하고 해야겠다.
왜냐하면 오늘은 5.18 민주화운동 40주기이고······, 종일 '김지은입니다'를 읽었기 때문이다. 먹먹하기도, 불편하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평소 책을 얌전히 읽는 편이다. 그러나 오늘은 책 내용 때문인지 죄책감 때문인지 온갖 포즈로 바꿔봐도 자세도, 머릿속도, 뱃 속도, 기타 등등 모든 신체 조직이 불편했다. 뉴스룸에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경악했던 그 순간이 되살아났다. 모든 사실들이 놀라웠지만 특히 저 말, "미안하다. 미안하다. 괘념치 마라. 잊어라. 부디 잊어라."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싶어서 놀라웠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 '괘념치 마라' 저런 언어와 말투는 일반인이 쓰는 게 아니다. 보편적인 사람들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권위를 가진 부류의 언어다. 조선 왕조의 언어다. 그런데 그 일로 뒤숭숭한 세상에서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저 말투를 문제 삼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의 균형이 기우뚱 흔들릴 만큼. 안희정이라는 권력은 부하직원한테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런 언어의 수혜를 내릴 만큼의 도덕성을 가진, 선택받은 너는 성은을 입은 것인데 너의 맘을 다독거리고 사과까지 한 나란 인간, 좀 멋지지 않니라고 자랑하듯 괘념치 마라~부디 잊어라를 반복하는, 너만 그냥 입다물고 있었으면 승승장구 대통령이 되실 몸이셨던 것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내 작은 몸을 가려주는 큰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걸었다. 우산 위로 거침없이 비가 막 내려오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우산이 날 지켜주는구나. 나를 이렇게 지켜주시는 분들도 곳곳에 계시겠구나' 머리 위에서 듬직하니 커다랗게 서 있는 우산이 마치 키다리 아저씨 같았다. 든든했다』 [p245]
저 빗속에 우산을 쓴 김지은이 지나간다. 키다리 아저씨 로망을 가진 많은 우리들은 '설마! 안희정이, 그 안희정이 그럴 리가.' 반신반의하면서 그 사건을 알았고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그 2년 동안 김지은은 빨가벗겨진 채로 길거리에서 짓이겨지고 끌려다니면서 생이 나달나달 해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떤 폭우에도 맞설 수 있는 우산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뉴스룸'에 나올 만큼 강단이 있고, 도와주는 이들이 있고, 많이 배운 사람이니까 잘 건너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익명 속에 섞인 우리들 중의 하나인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결국 그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모르는 것이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겨우 핑계나 변명에 불과한 것이라고 누누이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모른 척했다는 사실이 쳇증처럼 얹힌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 했던가. 그런 식으로 몇몇이 모여 거짓을 말하니 순식간에 나는 세간에서 '그런 여자'가 되었다. 사심으로 일을 한, 지사의 사생팬인, 신뢰할 수 없는 이상한 여자. 그리고 나를 향한 그런 프레임화는 이후 이어진 지난한 재판 과정 내내 그들의 집요한, 거의 유일한 전략이었다.』 [p 21]
어쩌면 저 三人成虎의 시선 속에는 익명을 가장한 내 속내도 얹혀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성에 관한 한 피해자가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라는 편견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여자가 꼬리를 쳤을 거라는 둥, 어떻게 처신했으면 그 점잖은 사람이 그랬겠냐는 둥.' 나도 자유롭지 않은데 가해자 쪽에서 그런 전략으로 갔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 여자', 프레임은 성공한 듯 보인다.
『2018년 3월 5일,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하기까지 나는 오랜 시간 두려움에 떨었다. 안희정은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였고 미래 권력이었다. 미래 권력은 현재 진행형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청와대부터 정재계에 이르기까지 안희정과 관계를 맺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차기 대통령이라 여겼다. 차기 1위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뒷받침해 주고 있었고 실제로 사람들은 안희정을 그렇게 대했다. 학생운동과 386이라는 끈끈한 연대도 있었다. 안희정은 그에 상응하는 의전과 예우를 받았다. 안희정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 유명세를 함께 누렸고, 외부의 많은 사람이 그와 알고 지내고 싶어 했다. 사회 곳곳과 관계 맺어 생물처럼 다각도로 뻗어나가는 거대 조직, 그 자체가 안희정이었다.
그런 대상을 향해 미투를 한다는 것, "지금 당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안희정 개인만을 향한 한정된 외침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정치적 지위와 그가 관계 맺은 수많은 이에게 맞서는 일이었다. 나에게 미투는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힘과 싸움을 시작하는 일이었다. 말하고 나서 바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지 모를, 설령 산다 해도 남은 날이 죽은 것과도 같은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죽게 되더라도 다시 그 소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 성폭행 이후 안희정의 사과를 들었을 때 그 한 번으로 끝나리라 믿었던 피해는 반복되었다. 2018년 2월에 또다시 범죄를 겪고 나서야 여기서 영원히 도망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반복되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듯 성폭력을 당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주변의 사람들은 리더의 폭력을 묵인하는 그런 조직 안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p22, 23]
"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듯 성폭력을 당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주변의 사람들은 리더의 폭력을 묵인하는 그런 조직 안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이 부분을 읽을 때부터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무리 중에는 리더의 폭력을 묵인하는 분위기에서 질투하고 선망하면서 닮아가려는 이도 있을 것이고, 뒷짐 지고 큼큼 헛기침하면서 점잔 빼는 이도 있을 것이고, 매번 뒷정리랍시고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고 관리하는 실무자도 있을 것이다. 의리라는 이름으로, 대의를 위해서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양아치들. 이따위밖에 안 되는 것들을 이 땅을 이끌어 갈 미래 주자라고 믿었던 순간이 있었다는데 화가 난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어 안희정의 볼에 뽀뽀를 할 때 가슴 벅차오르던 환희가 이제는 구토 나올 거 같다. 또 노무현 대통령, 그분의 얼굴이 떠올라서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 그분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잖아, 싶어서 울화가 치밀었다. 김지은은 안희정만 미투 한 것이 아니다. 삐뚤어진 권력의 실체를 고발한 것이다.
-- 여기까지 쓰고 비가 주춤하길래 산책을 다녀왔다. 비는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고 마침 걸려온 후배와 통화를 하면서 이 불편함과 울분을 얘기하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하다. 그 어떤 해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생각해 본다. 세 시간의 우중 산책에 신체적 불편함들이 많이 나아졌다.
······
그래놓고 며칠.
말이 되어 튀어나간 감정들은 다시 돌아오기가 힘들다. 한 번이라도 저렇게 격한 문장들을 토해낸 적이 있던가, 의기소침해지다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솔직하게 써보겠나 싶어 그대로 두기로 했다가 갈팡질팡이다.
pc 옆에 덩그러니 놓인 책을 아침저녁으로 쳐다보면서 마쳐야지, 마쳐야지, 하고 다시 며칠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채무변제 방법은 이 리뷰를 마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마음 다잡고 또 며칠.
5.18을 관련해 올해 새롭게 알게 되거나 깨우친 건, 현장에 있던 그 많은 여성들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가였다. 가두방송을 하던 그 가슴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공들, 시위대에 주먹밥을 건네주던 많은 아주머니들, 도망치는 시위대를 숨겨주고 선두에 섰던 황금동 아가씨들, 마지막 도청 사수 때 묶인 채로 엎어져있던 사진 속의 여학생들,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올려 세상에 드러난 들불야학 박기순의 죽음들을 통해 민주화에서조차 배제된 여성들의 삶과 희생이었다. 그런 사실들과 책의 내용이 맞물려서 혼란스러웠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사는 일은 인내와 희생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열여덟 살 때 나는 '깽깽이'라는 별명을 공장의 최고참 선배한테 하사받았다. 그녀에게 내 이름은 '야~ 깽깽이'이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 나는 웃으면서 '자네는 나만 보면 왜 그렇게 부르는가'라고 물었다가 '자네'라는 호칭의 위력을, 내가 왜 깽깽이에 불과한지를 따귀 몇 대로 배웠다. 그때까지 언니들을 그렇게 불렀는데 손아랫사람에게 하는 하대였다는 '자네'때문에 세상의 자네들을 알게 되었다. 선배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말이 거칠고 행동이 거친 센 언니였을 뿐, 몇 달 후 결혼으로 퇴직하면서 호탕한 웃음과 함께 잘해보라며 등짝 스매싱을 남겨 두고 떠났다. 40년 전이다. 그 선배는 기억에도 없을 어느 봄날의 일이다. 볼에 남겨진 손자국은 심장에 새겨졌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누가 뭐라 부르든, 잘한다고 등짝 스매싱을 하든 별말 없이 사는, 아프고 약하면 무시당하니까 철저하게 참고 참는 사람이 되었다. 흔적은 그렇게 흉터가 된다. 그런 작은 흔적도 흉터가 되는데, 죽는 것이 차라리 축복이었을 고통에 나달나달해진 사람으로 사는 것은 그 삶이 과연 사는 것일까?
여기까지가 지난봄에 쓴 것이다.
알라딘 메인 화면에 김지은입니다 가 올해의 주목받은 책으로 떠서는 계속 나를 따라다닌다. 떼먹고 달아난 돈 갚으라는 듯이.
다시 모른 척한 불편함이 장을 꼬이게 한다. 마무리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이천이십년을 넘기기 전에(결국은 해를 넘기고 말았다).
지난봄 이후 세상에는 김지은을 소환하는 여러 일들이 있었다. 특히 '안희정 모친상'을 뉴스에서 접할 때는 생각이 많아졌다. 어머니를 잃은 슬픈 아들에게 조문을 건네는 정치권 인사들을 보는 것은 내내 불편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위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게 대놓고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것은 그의 영향력이 아직도 펄펄 살아있다는 반증이다. 두려웠다. 그녀에게도 부모님이 계시고 아프시기도 한데 그녀가 딛고 선 세상은 이미 한쪽으로만 기운 천칭 저울이다. 이렇게 먼 곳에 있는 내가 무서운데 그녀의 두려움은 눈 감아 버리고 싶을 것이다. 간절하게 눈 감고, 귀 막고,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간절한 것들은 언제나 너무 멀다.
『나는 건강해야만 한다
목이 아프면 엄마가 해주시던 밥이 생각난다. 하지만 가족이 있는 집에 갈 수가 없다. 수술 이후 계속 통원 치료를 받고 계시는 아빠가 내게서 감기라도 옮으면 안 된다. 내가 건강할 때만 뵈러 갈 수 있다. 집에는 가고 싶은데 감기가 도무지 낫지 않아 집 근처 가게에서 콩나물을 천 원어치 사 와 짬뽕라면에 청양고추를 함께 넣고 끓여 먹었다. 약보다 칼칼하게 매운 이 음식이 감기를 더 빨리 낫게 해줄 것만 같았다. 흔한 동네 병원도 내게는 방문하기 어려운 곳 중 하나다. 이름을 수없이 부르는 친절한 병원 시스템이 지금 내게는 힘들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싸움의 전제 조건은 내가 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건강해야만 한다. 나는 무사해야만 한다. 나는 반드시 살아야만 한다. 나는 견뎌내야만 한다. 이기든 지든 싸움의 끝에 나는 있어야 한다. 나는 진실을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없어진다면 모든 것이 흐지부지될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 그 범죄를 암묵적으로 방치했던 사람들, 그 범죄를 수면 아래로 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 틈에서 꼭 증명해내고 싶다. 죽어서 인정받는 것이 아닌, 살아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례를 만들고 싶다.』 [p254]
이 페이지는 가슴이 먹먹하다. 저 다짐들이 너무나 소소한 것이어서 눈물이 난다. 명치끝에서 올라오는 서러움과 외로움을 꾹꾹 누르고 다짐하고 다짐하는 나는 건강해야만 한다. 나는 무사해야만 한다. 나는 반드시 살아야만 한다. 나는 견뎌내야만 한다. 이기든 지든 싸움의 끝에 나는 있어야 한다. 살아야만 한다, 살아야만 한다고 자신에게 주문을 외웠을 긴 시간들의 흉통이 저 다짐 속에 있다. 읽는 것으로도 가슴 시린 이 문장들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었을,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을 김지은 생각에 다시 읽어도 눈물이 난다.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반.드.시.살.아.야.만.한.다.
영화 [밤셀;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을 봤다. 실화를 바탕한 이 영화를 통해서 언론이 어떻게 거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알았다. 그 거대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폭스 뉴스 회장을 고소하는 세 명의 앵커, 미투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한다. 복선과 암투가 정교하게 얽힌 권력의 측근에서 용기를 내거나 도망가는 사람들의 관계나 심리가 복잡해서 집중해야만 줄거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픽션이 아니기에 더 복잡했으리라. 영화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세 명의 여성 앵커들이 내린 힘겨운 결단이, 그 어려운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보는 내내 [김지은입니다]가 읽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얼마나 고단하고 긴 싸움의 서막인지도. 이어서 일어난 '박원순 서울시장' 사건의 파장은 현재 진행형이다.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는 기상천외한 호칭으로 정리한 정치권의 민낯을 보는 데에도 어느덧 익숙해지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더 [김지은입니다]를 사고, 읽고, 주변에 알리는 일을 해야 한다. 김지은과, 세상의 많은 김지은들과, 김지은을 연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는 일, 이렇게 리뷰라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늘 잘난 체만 하는 비겁한 나도 오늘은 용기를 내어 김지은과, 세상의 많은 김지은들에게 토닥이고 싶다.
괜찮아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이 잘못한 거 아니에요.
'박원순 사건'에서 가장 공감한 시사인의 기사를 캡처해 둔다. 이런 용기 있는 한 걸음들이 조금씩 세상을 바꾸어가리라 믿는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