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초록 - 어쩌면 나의 40대에 대한 이야기
노석미 지음 / 난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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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에는 [매우 초록- 노석미 산문집(난다, 2019)]를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이 책을 지난겨울 속에서 읽으며 봄을 기다렸다. 부제가 [어쩌면 나의 40대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쩌면 사십대를 나는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으면서 읽었다면 거짓말이다. 오십대도 끝나가는 마당에 사십대를 생각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얼마나 쓸데없는 짓에 많은 시간을 보냈던가를 돌아보면 씁쓸하다. 여전히 그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순간순간 최선이라고 살았던 순간이 어느 순간 쓸데없는 열정 소모였다는 것을. 나름 그 시간이 그때는 열정이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그런 순간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이 되겠지. 누군가는 성공하는 삶으로, 누군가는 실패하는 삶으로 살았다고는 타인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생은 자신의 몫이고 그 결론도 자신의 몫이 아닐까.

   표지의 그림부터, 제목으로도 초록을 참 좋아하는 화가구나 싶다. 그 초록의 색감만으로 읽기도 전에 책의 내용보다도, 그림보다도, 이미 한가득 기대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알라딘은 표지는 찢기고 묶음의 맨 위 책이었지 싶게 찌그러지고 긁히고 끈에 뭉개진 흔적 가득한 책을 보내서 맘 상하게 했다. 요즘에는 그렇게 책에 상처가 나게 묶지는 않을 텐데 이 책은 고생을 엄청 심하게 한 상태로 내게 온 것이다. 안쓰럽고 서운한 마음 가득해지며 최근에 [난다]의 책들을 많이 사들이고 읽는다는 생각을 했다. 황현산 선생님 책들, 허수경 시인의 책들, 걸어본다 시리즈 등 최근은 확실하게 [난다] 홀릭이다. 책의 상태와는 별개로 작가가 땅을 구입하고 집을 짓는 과정과 그 집에서의 생활, 풍경이 책에 담겨있어서 그렇게 살고 싶은 로망이 있는 나를 읽는 내내 설레게 했다. 책을 읽다 말고 같이 담겨온 그림들을 몇 번이고 다시 펼쳐봤다. 책을 읽으면서 옆집에 이사 온 '화가 노석미'를 만났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생활이 궁금하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한데 들여다보면 허당인 이웃이다. 담백하고 유쾌한 이웃이 옆집으로 이사 와서 삶이 풍성해졌다. 그렇게 생활인 '노석미'를, 화가 '노석미'를, 초보 시골살이 '노석미' 를 알 게 해준 책이다.

   건축 현장을 찾아간 어느 날, 그날은 벽체가 올라가고 있었다. 창을 낼 구멍을 제외하고 벽체가 만들어졌다. 아직은 지붕이 없는 집 내부로 들어섰다. (이제 내부라는 게 생긴 것이다.) 남향으로 커다란 창을 내기로 했고, 아직 창호를 달지 않았지만 그 창 자리로 켜켜이 놓인 앞산이 보였다. (이제 앞산이 생긴 것이다.) 그때 나는 아, 드디어 집이로구나, 하며 스스로 감동에 젖었다. 집이 없을 때 보았던 풍경과 네모난 프레임을 통해서 보는 풍경의 느낌은 달랐다. 이제 내가 실내에서 소유하게 될 풍경이었다. 그때 느꼈던 만족감은 잊을 수가 없다. 땅을 소유하고 집을 소유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감동이 밀려왔다. 37쪽

  

  이 감동이 그대로 전이된다. 처음으로 내 방 한 칸을 세 얻었을 때, 그쪽 창 앞에서 느낀 감동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조금 더 큰 방을 얻었을 때 방 크기에 비례해 창들도 조금씩 커질 때마다 세상을 딛고 있는 두 발이 더 단단해지는 감동이 밀려왔었다.

   집은 남쪽을 바라보게 지었고 남향으로 창을 크게 내었다. 땅을 구하려고 돌아다니던 오래전부터 여러 사람에게서 남향집에 사는 것은 축복이라는 얘기를 들어왔다. 남향집은 난방비도 많이 들지 않는다. 추운 겨울날이더라도 햇살이 좋은 날에 실내의 온도는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다. 또 건축할 때 다른 비용은 다 아껴도 창호에 드는 비용은 아끼지 말라는 충고도 잘 새겨들었다. 남향의 커다랗고 견고한 유리창으로 차가운 바람은 빼고 따스한 햇살만 들어온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거나 음울하게 어두운 날이 아니고는 남향집은 톡톡히 제 역할을 한다. 추운 날들엔 햇살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알게 해준다.

   남향으로 난 커다란 창으로 밭, 논, 집 등을 지나 멀리 있는 산이 보인다. 내가 사는 곳을 기준으로(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기도 하므로) 사방이 산이지만 남쪽 방향으로는 산이 멀리 보인다. 강원도의 설악산처럼 수려하지 않은 산, 크지 않고 둥글둥글 소박한 산이다. 가끔 그 소박한 산이 내겐 갓 구운 빵처럼 보인다. 나는 이곳에 와서 '멀리 있는 산' 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꽤 그렸다.

   '멀리 있는 산, 빛나는 얼굴'

  이라는 명제를 한동안 품고 지냈다. 49, 50쪽

   남향집······ 충고, 잘 새겨두었다.

   나의 장작난로는 비록 중고(실로 난로는 구멍이 뚫리지 않은 이상 중고여도 아무 상관이 없다)였으나 10년이 넘도록 여전히 처음 살 때와 똑같은 모양새로 잘 쓰고 있다. 이 난로에서 고구마, 감자, 고기, 생선, 떡 등 뭐든지 구워 먹는다. 특히 평소에 생선구이는 실내에서 절대 요리해 먹을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난로를 피우는 겨울철에는 생선을 구워 먹게 되었다. 고구마용, 생선용, 고기용 등 따로 쓸 요량으로 다양한 모양과 재질의 석쇠를 구비했다. 심지어 참나무 장작이 적당히 달아올라 희고도 붉은 숯이 되었을 때 그 불에 커피 로스팅 하는 요령까지 생겼다. 커피 로스팅용 석쇠도 따로 장만했다. 석쇠 부자가 되었다.

 

 ······ (중략)

 

   이렇게 주문할 수가 있는데 나무를 장작에 가까운 모양으로 만드는 수고가 더해질수록 가격이 비싸진다. 그래서 나는 중간 단계인 절단목을 주문해서 도끼로 직접 쪼갬목을 만들어 쓰고 있다. 도끼질은 장작을 배달해주는 사람에게서 배웠다. 처음에는 장작을 패는 일이 무척 곤혹스러웠다. 도낏자루에 휘둘린다는 표현이 딱이다. 장작 배달 해주는 이는 당시 내가 쓰던 도끼보다 더 무겁고 큰 도끼로 바꿀 것을 충고했다. 이것도 무거운데 더 무거운 것으로요? 황당해하는 내게 장작은 도끼가 패는 것이지 네가 패는 게 아니라는 당시로서는 당최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이제는 장작을 팬지 수년이 흘러 경력자가 되어간다. 흠. 그의 충고가 어떤 이야긴지 알게 되었다. 도끼를 들 기운만 있으면 되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남자(장작을 패본 적이 별로 없는데 남자라는 이유로 잘난 척을 하며 팔을 걷어붙이는 그런 유의 남자)보다 장작을 잘 팬다고 자부한다. 한번은 나의 집을 방문한 한 지인(남자)이 내가 장작 패는 모습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도끼를 든 나의 초상을 집 대문에 커다랗게 붙여놓을 것을 권했다. 가끔 해장국집이나 토종닭집 입구에 퉁퉁한 아주머니 또는 털보 아저씨의 커다랗고, 심하게 미화되지 않은, 리얼한, 무표정의 초상을 내건 음식점들을 연상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혼자 사는 여성이라고 얕잡아보기는커녕 근처에 아무도 얼씬도 하지 않을 거라나. 54~56쪽

   장작난로, 장작, 도끼의 충고도······ 잘 새겨두었다.

   불 때는 것을 좋아한다. 얼마 전 시골 오빠네 갔을 때도 종일 아궁이 담당을 했다. 불 때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자 올케언니는 만류하면서 잠깐 하는 것과 종일 하는 것은 다르다 했다. 왜 아니겠는가, 사는 것은 취미가 아니다. 생활이다. 고통스러워서 멈추고 싶은 순간에도 멈춰 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생활이지 싶다. 새벽부터 일어나 고사리를 꺾고 몇 번씩 삶아 내고, 나물들을 삶아 말리는 반복 과정이 불앞에서 진행됐다. 잘 정리된 장작을 쓰는 지금은 어릴 때 불때기에 비해 쉽다. 불앞에서 잠깐의 한눈팔기도 허용되지 않은 불감들이 대부분이었다. 보릿대, 고춧대, 짚, 쌀겨를 비롯한 농작물의 마른 대들과 소나무 마른 잎, 겨울에는 생솔가지로 고래를 뚫었고 어쩌다 아카시아 장작은 가시에 찔리면서도 오래 태울 수 있어 좋았다. 특히 보릿대를 때는 것을 좋아했다. 거친 보리의 질감과 다르게 보릿대는 보드랍고 불길도 다정했다. 그 짚불에 구워주신 엄마표 갈치 맛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다가 불 줄이기를 놓쳐 밥을 태워먹은 날은 엄마의 잔소리를 한 지게 듣던 그 시절의 그리움에 나는 여전히 불 때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제 몸을 활활 태우는 모든 불땀들 앞에 겸손해진다. 불 때는 방을 갖고 싶다. 새벽까지 따뜻하게 두꺼운 구들장을 깔고 가마솥을 걸을 것이다. 커피 로스팅도 도전해봐야지.

   나는 이제야, 강가에 서서 아까 흐른 물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관찰하고, 이것을 자각하고 있는 이 찰나 역시 계속 다른 찰나로 교체된다는 것을 배운다. 곧 과거가 될 지금 또한 나의 과거의 소망이었던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비와 눈과 바람을 막아줄 지붕과 벽이 있고, 소박한 작은 네모난 창이 있는 집안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간다. 창밖엔 언제나 생경한, 내 것일 수 없는, 그래서 항상 신비로운 자연이 있다. 초록이 있고, 그것들은 숨을 쉬고 있다. 62쪽

    6월의 장미

 

  화려한 기교는 눈에 금방 띄지만 금방 질린다. 담백함은 계속 생각나게 한다지만 처음에 자신을 소개하기에 쉽지가 않다. 그런데 따져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완성된 것들은 다 화려하기도 담백하기도 하다. 미완의 것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해질 뿐. 그렇다. 6월이고, 장미가 완벽하게 피어있다.

   장미가 좋아 정원에 여러 종류를 사다가 심었다. 장미는 꽃 중의 꽃, 어쩌면 너무 흔한 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원에서 꽃다발로 사는 장미가 아닌 정원에서 장미를 기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려면 꽤나 잘 돌봐주어야 한다. 장미는 벌레도 많이 타고, 퇴비도 많이 필요로 한다. 덩굴장미인 경우 적당히 가지를 정리해주지 않으면 제멋대로 가지가 뻗어나가 정원을 어지럽힌다. 게다가 대개의 장미는 가시를 갖고 있다. 장미 가시에 찔리면 정말이지 오래가는 아픔이 있다. 장미를 손질하다가 가시에 찔리게 되면 장미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는데, 나만의 피해망상증이겠지만 장미가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누군가는 장미 가시에 찔려 죽기까지 했다고 하니 무서운 무기를 장착하고 있는 꽃임에 틀림없다.

   화분에 있는 아직은 나무라고 하기엔 크기가 작은 어린 장미를 사다가 땅으로 옮겨심은 초기에는 벌레가 많이 꼬여든다. 벌레들은 여린 잎, 여린 꽃송이들을 아구아구 먹어치운다. 심지어 벌레들의 습격, 혹은 어떤 병으로 어느 날 보면 어? 하고 장미 나무가 아예 사라져있다. 하지만 자리를 잡고 여러 해 묵어 튼튼해진 장미는 더이상 벌레에게 큰 해를 입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작은 장미 나무가 정원 한곳에 정착을 해서 커다란 나무가 될 때까지는 꽤나 정성이 들어간다. 조금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탐스런 꽃을 피우지 않는다. 장미는 꽃을 보기 위해 심는 것이므로 나는 또 그만 이 아름다운 것들의 노예가 되어 전전긍긍 장미 나무를 보살핀다. 꽃이 다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어는 기나긴 겨울이 오면 장미 나무는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포근한 봄바람이 불고 세상이 연두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죽어있던 메마른 가지가 물을 머금고 슬슬 이파리부터 시작해서 꽃을 작은 크기부터 피워대기 시작한다. 장미가 피기 시작하는 5월, 장미꽃은 마치 색을 가진 빛처럼 반짝반짝 광채가 난다.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이 오면 향기와 크기, 그리고 빛깔이 합쳐져서 그 성숙함이 완벽을 이룬다. 그러고 보니 완벽한 상태로 매우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도달하는 거였다. 문을 열면 장미 향기가 폴폴 나는 6월이다.

   '6월의 장미' 전체를 옮겨 적은 것처럼 챕터 하나하나 길지 않다. 그리고 어려운 문장도 멋부리는 문장도 없다. 오랜 관찰자만이, 체험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장미를 가꿔보지 않은 사람은, 지구에 어둠이 내리는 광경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어둠의 농도를 알 수 없듯이 이 산문집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진솔한 몸의 체험이고 간결한 감동들이다. 그런데 장미를 키우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꽃은 좋아하지만 저 과정을 감당할 만큼은 아니다. 장미꽃은 누군가 선물하면 받는 걸로 대신하겠다. 이왕이면 노란 장미로. 그럴 수 없다면 다른 집이나 화원에서 넘겨다보는 걸로 만족하겠다.

   수확의 계절이라면 가을을 떠올리기가 쉽겠지만 내가 체감하기는 뜨거운 한여름이 피크이다. 아무리 더워도 긴팔, 긴바지에 모자를 눌러쓰고 밭으로 간다. 한여름에 먹거리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수확의 기쁨을 맛보려면 부지런을 떨며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모기에게 헌혈도 해야 한다. 105쪽

  봄이 오면 실내에 앉아 있어도 놀라운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자판을 치고 있다 (뭔가 구상중). 간만에 겨우내 꽁꽁 닫아두었던 앉아 있는 의자 바로 옆의 커다란 창문을 열어놨고, 그 창으로 봄 햇살과 살랑대는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기분이 좋아진다. 머리털부터 똥꼬까지 기분이 좋다. 드디어 몸속으로도 봄이 진입한 것이다.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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