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끼호떼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6
미겔 데 세르반떼스 지음, 김현창 옮김 / 범우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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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알고 보니까 돈 끼호떼는 미친 놈이었다. 이 소설이 씌어질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기사도 이야기'라고 하여 전설적인 기사들의 기상천외한 모험담들을 온갖 이빨을 보태어 묘사한 소설책들이 유행을 했었던 모양인데, 돈 끼호떼는 이러한 소설들을 지나치게 탐독한 나머지 소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내가 봤을 때 이러한 '기사도 이야기'들은 현대로 들어와 무협지 내지는 판타지 소설로 변형 및 발전(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것 같다. 세르반떼스는 극중 여러 인물의 입을 빌어 이러한 기사도 이야기에 대하여 가차없이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그의 기사도 이야기 및 당시 에스파냐 문단 일반의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은 본문의 47장 및 48장에서 신부와 교회 참사원의 대사로써 적나라하게 전개되고 있다.

 돈 끼호떼와 산초 빤사의 대화라든지 초기에 돈 끼호떼가 겪는 모험들은 상당히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정말 웃긴 장면들도 많았다. 하지만 소설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돈 끼호떼는 뒤로 물러나고 온갖 잡다한 사람들이 나타나 - 특히 여인숙에서 - 헛된 사랑 이야기를 계속하여 늘어놓을 때는 다소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작품의 분위기가 연애소설 쪽으로 흘러가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러한 연애 이야기가 한 커플의 이야기도 아니고 비슷비슷한 내용이 서너 커플이나 이어지니까 자연 지루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소설의 질을 떨어뜨리고 나에게서도 점수를 잃는 요인이 되었다.

 연애 이야기 중에 특기할만한 것으로 - 세르반떼스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캐릭터가 하나 등장하였는데, 바로 래판토 해전에 참전하였다가 포로로 붙들려 여기저기 끌려 다니다가 탈출한 노예가 바로 그것이었다. 세르반떼스 역시 래판토 해전에 참전하였다가 붙잡혀서 5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노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데, 이는 내가 군대에 있을 때와 전역을 막 하였을 때 가장 절실히 느꼈던 사실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다.

 

「"그것 참 고마운 일이군요." 하고 포로가 말했다. "그런 은총을 하느님에게서 받다니, 뭐니뭐니해도 이 지상에서는, 나는 생각합니다만 잃었던 자유를 되찾는 기쁨에 비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연애 이야기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거기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천하의 절색에다 행실도 올바랐으며, 남자들은 엄청난 부자이거나 귀족이었다. 그러니까, 현실성도 없고 공감도 쉽게 가지 않는, 그들만의 이야기였다는 말이다.

 책은 돈 끼호떼가 두 번째 모험에서 친구인 신부와 이발사의 계책에 의하여 소달구지에 죄인처럼 실려서 귀가하는 장면까지를 보여주고 있고, 그의 세 번째 모험의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하며 속-돈 끼호떼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키며 끝나고 있다. 속-돈 끼호떼는 실제로 있는 작품이고, 읽어볼까 싶기도 하지만 만약 읽는다 해도 그것은 꽤 나중의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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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삶과 죽음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
이브 코아 지음 / 시공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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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크고 강한 생물을 동경한다. 고래는 크고 강한 생물의 극단에 있는 녀석이다. 따라서 나는 고래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학교 서점 앞에서 40프로 세일인가 하길래 바로 사뒀던 책이다. 이 책은 고래의 프로필에 대해서 그리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포경의 역사를 더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그러다 보니 돌고래 류는 거의 언급되지도 않는다).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고래는 흰긴수염고래와 향유고래인데, 그들이 바로 - 안타깝긴 하지만 - 지구상에서 가장 포경을 많이 당한 고래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포경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할 당시 - 수백만 마리의 개체가 존재하였을 때 - 에는 향유고래의 덩치가 상당히 컸다고 한다. 1841년에는 태평양에서 27.5 미터 짜리 향유고래가 잡힌 기록도 있단다. 그러나 고래사냥이 본격화되고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자 고래 스스로가 생식 가능 연령을 앞당기게 되었고, 따라서 덩치도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도 참 왜 그렇게 고래를 많이 죽여서 애들 체질까지 바꾸게 하는지... 환경파괴는 안 좋은 것이다.
 아무튼 책 중간에는 내가 고등학교 때 2년인가 3년간에 걸쳐서 독파하였던 <백경>의 주인공 '모비 딕'의 실제 모델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모샤 딕이라는 이름은 1810년경, 칠레 근해의 모샤라는 섬에서 이 고래와 인간이 처절한 싸움을 전개했던 데서 유래했다.
 1840년 7월, 영국 포경선의 승무원은 혼자서 헤엄치고 있는 거대한 향고래를 발견했다. 수면에 나타난 그 고래의 길이는 22m나 되었다.
 모샤 딕이었던 것이다. 두 척의 포경정이 바다에 띄워지고, 곧이어 향고래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래가 정면으로 공격하여 포경정 한 척을 물어서 박살냈다. 고래가 잠수를 하자마자 다른 포경정의 선원이 서둘러 생존자를 건져 내려고 했다. 그 순간, 바닷속에서 모샤 딕이 솟구쳐 올라와 포경정을 덮쳤다. 포경정에서 선원들이 튕겨 나갔다. 이때 살아 남은 선원은 그 괴물고래의 이마에 백색 칼 자국이 나 있었다고 증언했다.
 한 달 후, 두 척의 포경정이 외따로 있던 고래 한 마리를 잡았다. 잡은 고래를 본선 쪽으로 끌고 가는데 갑자기 모샤 딕이 나타났다. 모샤 딕이 포경정 한 척을 부수는 동안, 다른 포경정은 간신히 그들이 잡은 고래 뒤에 숨었다. 본선이 다가와서 선원을 구조하고 떠날 때까지, 모샤 딕은 마치 죽은 고래를 보호하려는 듯이 그 곁에 머물러 있었다.
 모샤 딕에 관한 이처럼 놀라운 사실들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일어났다. 이 고래는 1859년 스웨덴 포경정에 의해 마침내 피살되었다. 모샤 딕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 19개나 되는 작살이 꽂혀 있었다. 이 고래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버렸다. 살아 있는 동안의 모샤 딕은 바다를 누비던 모든 포경선원을 공포에 떨게 했다...」 

 가끔 한 무리의 고래떼가 바닷가로 밀려와 죽었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책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고래의 귀에 생긴 기생충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고래 무리의 대장이 귀에 기생충이 생겨 버리면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되고 이를 무작정 따라가던 다른 고래들까지도 바닷가로 돌진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고래의 물뿜기는 진짜로 물을 뿜는 게 아니라 숨을 내쉬는 것일 뿐인데 거기 포함된 수증기가 물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 모든 동식물들은 - 가축, 농작물 빼고 - 인류에 의해 멸종 위기까지 다 가 본 것 같다. 고래도 예외는 아니다. 요즘 고래를 보호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하는데 모든 포경업자들은 이러한 대세에 따르는 것이 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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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 장준하전집 1
장준하 지음 / 세계사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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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한국의 위정자들은 태반이 (궁극적으로)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고, 도대체가 뒤끝이 깨끗한 인간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 적어도 내가 보기에 - 깨끗한 인물, 오로지 공익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인물을 지금까지 두 사람 발견하였는데, 그 중 한 명이 여운형이고 나머지 한 명이 장준하이다.

 

 이 책은 장준하가 스물일곱 살 때 왜적의 학도병으로 끌려 갔다가 탈영하여 광복군을 찾아가고, 이후 해방공간에서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를 수행하기까지 약 2 년간의 체험을 기록한 수기이다.

 그가 학도병에 끌려간 것은 결혼한 지 불과 열흘만의 일이다. 중국으로 파병되어 서주에서 훈련을 받다 탈영을 한 그는, 이 탈영이 학도병으로 끌려 나갈 때부터 계획된 것이었으며, 굳이 중국으로 파병된 것도 자신의 의지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중국으로 가서 탈영을 한 후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나 광복군을 찾아가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게 사실이라면 참 대단한 사람이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가 학도병 시절 목격한 다음 이야기를 보면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된다.

 

「더욱 내가 괴로워했던 일은 한국사람들의 그 기막힌 행동들이었다...

 ...고참병들인 일본놈들이 외출갔다 돌아오면 매식으로 배부르니 별로 병영음식이 먹고 싶지 않아 계란을 깨어서 비벼 몇 젓가락 먹다 말고 선심 쓰듯 던져주는 밥 한 그릇을 더 받아먹고자 혈안이 된 우리 동료들, ...매식을 하고 들어온 그들이 자기 몫을 개, 돼지에게 던져주듯이 던져주는 그 밥 한 그릇을 우르르 몰려들어 받아먹는 그 치사하고 밸없는 꼴들.」

 

 내가 듣기로 당시에 저런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지금도 우리나라엔 잠재적인 저런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나부터 좀 반성을 해야겠다.

 아무튼 장준하는 동지 몇 명과 함께 왜군부대에서 탈영을 하게 되었고,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6천 리 길을 걸어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온갖 에피소드들이 펼쳐지는데, 나는 여기서 당시에 왜군을 상대로 매춘부 일을 하면서 정보활동을 했던 여성 공작원들도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금 우리는 참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시 중국군의 실태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이는 그들이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선은 쪽발이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내전이 횡행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때 중국군에는 <호른부땅빙(好人不當兵)>이란 말이 유행되고 있었다. 이 말은 <좋은 사람은 병정에 가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병신이나 바보만이 병정이 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돈 있고 빽이 있으면 군대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장준하는 임시정부에 도착하기 전까지 여기저기서 독립운동 단체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 단체들의 실상을 알고 난 후에는 매번 실망을 하게 된다. 어느 단체든지 제대로 독립운동을 하는 꼴을 볼 수가 없고 그저 허송세월만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싫어 궁극적으로 찾아간 임시정부에서도 그러한 습성은 똑같았다고 한다. 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젊은이들이 한 무더기나 오니까 서로 자기 당파에 끌어들이려고 작업을 하더라는 것이다. 장준하는 이런 꼴이 싫어서 동료들과 함께 무력시위까지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임시정부에서도 실망을 한 장준하는 장안의 광복군 부대로 가서 미군과 합동 침투훈련을 받기로 한다. 그 훈련이 거의 끝나갈 즈음 김구가 위로차 시찰을 왔는데, 이때 김구의 담력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발생했다.

 

「폭발은 이들의 바로 뒤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폭발물은 단순한 폭약의 매몰로서, 어떤 수훈생이 얼마나 놀라나 하는 것을 측정하기 위해 미리 장치해 놓았던 것을 계획대로 폭발시킨 것뿐이었다.

 이 폭발에도 김구 주석께선 태연히

 "허허...이게 무슨 소린고?" 하실 뿐이었다. 그러나 독립군 총사령관인 장군이 에크! 하며 들고 있던 식기를 놓칠 정도로...」

 

 3 개월간의 훈련 후 서울로 낙하 침투하려던 계획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장준하는 김구의 수행원으로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후 20일 정도의 이야기가 진행되다 이 책은 끝이 난다. 익히 알다시피 당시의 임시정부에도 분열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심화되었다.

 

「환국한 임정의 각료들 안에서까지 일치구국의 염이 허사이면, 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이 형세, 이 난국에서 집중된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단 한마디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아픈 일이었다.

 각료회의는 뻔한 결과를 가지고 산회되었다. 김구 주석의 말씀처럼, 과연 여러 파, 여러 층을 한보따리에 싸서 내던지고 온 것인가? 그보다는 오히려 끼고 들어온 파벌의 보따리를 더 크게 벌이고자 하는 결과일 뿐이다.」

 

 장준하가 본 우리의 독립운동사와 정치사는 온통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었다. 단결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장준하가 이 수기를 완성한 때는 1971년도인데, 당시의 정치 상황에 개탄을 하며 경고의 차원에서 이 책을 펴낸다고 밝히고 있다.

 

 '돌베개'는 장준하에게 하나의 이상이며 목표이자 짐이었다. 본문을 보면 각 사연마다 자신의 감정을 구구절절 적어놓고 있는데, 가끔은 그것이 지나치게 절절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또한 장준하는 평북 의주 출신으로서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으로 떠난 이후 가족을 일절 보지 못하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해방 후에 가족과 상봉을 하였는지의 여부가 나와 있지 않아 궁금증이 해소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나름 깨끗하고 고결한 삶을 산, 고생도 많이 한 사람이 졸지에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는 현실은 그리 옳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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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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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원주의 사회니 문화 상대주의니 하는 말들은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일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사실 득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백 년은 커녕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이분법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 적어도 메인스트림인 서구의 경우는 확실히 그랬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동양적인 일원론적 사고 방식을 기반으로 하는 다원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는 "합리주의가 획득했다고 믿은 객관성이라는 것도 결국 주관적인 오류의 하나일 뿐"이라고까지 말했다. 이 말은 곧 서양 철학자들이 줄기차게 탐구해온 객관적 진리라는 것이 백 날 찾아봤자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믿고 주장하는 순간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믿는 - 혹은 믿고 싶은 - 철학자 개인의 주관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니스벳 역시 이러한 다원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있음이 확실해 보이며,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믿음을 - 완벽하지는 않지만 - 최대한 배제하는 자세로 저술에 임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일단 책을 받아들고 본문을 대충 훑어보다가 어느 대목을 보고 순간 놀랐다. 그 대목은 바로 저자가 본문 중에서 역자인 최인철 교수의 이름을 언급하는 부분이었는데, 그 언급의 농도가 단순한 인물 소개의 수준이 아닌, 같이 연구를 수행한 동료로서 상당한 연대감을 보여주는 류의 것이었기 때문에 적이 놀랐던 것이다. 처음에 그냥 책을 받았을 때에는 표지만 보고 그저 '흥미롭겠구나'하는 생각 정도만 가지고 있었는데, 본문 중의 역자 이름을 보고 나니 책 자체에 대하여 대단한 신뢰감이 생겼다. 이는 꼭 원서가 아주 좋은 책일 것 같다는 신뢰감이기 보다는 번역의 충실함에 대한 기대감 및 신뢰감이었던 것이다. 역자가 저자와 단순한 친분만 있어도 번역이 훨씬 충실해 질텐데 하물며 역자가 저자의 제자임에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스스로 적지 않은 책들을 읽어 보았다고 자부하는 터에 번역과 교정이 엉망이라서 책 전체를 망친 경우를 상당히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더해졌다.

 

 저자가 지나친 범주화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므로 나 역시 이 책에 대한 도식화나 범주화는 지양하고 되도록 자연스럽게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스스로의 출신성분(?)을 극단적인 서양 사람, 즉 미국에 사는 앵글로 색슨 청교도의 범주에 두고 동양과 서양 간 사고 방식의 차이와 그 원인에 대하여 다양한 연구 실험 결과들을 가지고 증명을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각 문명권 간의 사고 방식의 차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며, 그 원인 또한 다양하다. 그리고 그는 그 원인과 사고 방식이 순환하여 서로 영향을 줌으로써 항상성을 지님을 서론에서 주장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이 여러 분야에서 나타내는 차이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 즉, 특정한 사회적 행위들은 특정한 세계관을 가져오고, 그 세계관은 특정한 사고 과정을 유발하며, 그 사고 과정은 역으로 원래의 사회적 행위들과 세계관을 다시 강화시킨다.」

(20쪽)

 

 이후 전개되는 본문에서는 수없이 많은 실증적 연구 결과들이 인용되었으며, 대부분이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특히 실험 방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실제 실험에 사용된 갖가지 문제들이 제시되었는데, 내가 그 문제를 풀어보면 십중팔구는 동양인들의 결과와 일치하여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실험 절차에 대한 설명을 읽는 도중에 내가 생각한 것은 '같은 재료로 된 물체'였다.

 

「'코르크'로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그것이 닥스(Dax)라고 알려주었다. '닥스'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실험자가 임의로 만들어낸 이름이다. 그런 후에 두 물체를 보여주었는데, 그 중 하나는 모양은 앞에서 본 피라미드와 같았지만 재료는 코르크가 아니라 하얀 플라스틱이었다. 다른 하나는 재료는 같았지만 모양은 피라미드가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닥스'인지 고르게 했다. 그 결과 매우 놀랍게도 미국인들은 주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물체를 선택했고, 일본인들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물체를 선택했다.」

(83쪽)

 

 그밖에도 자존감의 차이에 대한 논의 같은 것이 대단히 흥미로웠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실로 공감이 되었다.

 

「동양인들은 진보보다는 '회귀'를 추구하고, 극단적인 것들 사이의 '중용'을 추구한다. 그리고 동양의 유토피아는 '과거'에 존재하며, 인간의 소망은 '현재 상태에서 과거의 완전한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다.」

(104쪽)

 

 중국인들은 항상 황제나 요순우탕을 그리워 하며 '격양가'를 다시 부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 대부분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 요임금 시절의 태평성대는 그렇게도 절실히 원하는 "과거의 완전한 상태"임은 재론의 여지조차 없다.

 한편 위 인용문에서 "중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는데, 이는 저자가 동양 문화의 특징 중 하나로 계속하여 언급하는 용어이고, '대부분의 우리'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용'은 동양인이 아닌 저자도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 증거는 오로지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책의 서론 본론 에필로그 등 모든 곳을 둘러보면 저자가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강력하게 어필하기 보다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점에서 - 어떻게 보면 다소 소극적으로 - 주장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결론 역시 서양이 먹는다, 동양이 먹는다 하는 식의 이분법을 무시 - 할 때조차 온건한 입장으로 '그것들도 나름 타당하지만'하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 하고 두 문화는 결국 수렴되리라는 주장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이 주장은 지극히 당연하고, 타당하다. 그리고 현실이 또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연구 결과들은 실로 다양하였으며, 그것들을 검토하느라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동서양 사고 과정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여 집대성한 최초의 저서라는 의의 말고도 앞으로의 방향 제시의 역할을 꽤 훌륭하게 수행해냈다는 점에 이 책의 또다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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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교 : 왜곡된 아프리카의 정신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41
라에네크 위르봉 지음 / 시공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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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목은 '부두교; 왜곡된 아프리카의 정신'이다. 제목만 봐서는 부두교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 - 부정적인 종교라는 것인지 사실 별 문제가 없는데도 왜곡된 모습으로 알려져 있는 종교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답은 후자이다. 나는 사실 처음에 책 제목을 보고 전자쪽으로 생각을 했었다. 나 역시도 이분법적이고 닫힌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나보다.

 저자는 프랑스 사람인데, 그래서인지 한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이티의 부두교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원래 나는 아프리카의 원조 부두교를 알고 싶어서 책을 읽은 건데 그 점에는 다소 실망을 했다.

 아무튼 아이티의 부두교를 설명하려다 보니 그 섬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 선행되었는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아이티 원주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16세기 초, 아이티에는 130만 명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나 강제노동, 학대, 질병 등으로 인하여 15년만에 인구가 6만 명 미만으로 격감하였다고 한다. 비유를 해보자면, 135만 명이 사는 대전광역시에서 중구 대흥동 주민들만 빼고 죄다 몰살 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 흑인 노예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여기는 내가 얼마 전에 읽은 흑인 노예에 관한 책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이 흑인들을 잡아다 팔았다는 내용이 나올 때 유독 나의 눈길을 끈 문장은 다음과 같다. "데피 란 기넨, 네그 라이 네그(기니에서 이미 검둥이들은 검둥이들을 중오했다)." - 크레올語로 된 격언

 부두교는 기괴한 흑마술(이를테면 좀비 만들기)을 사용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등의 왜곡된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나 부두교도에게 부두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마술이나 주술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둘을 혼동하는 사람은 주로 외부 관찰자이다. 그들은 언뜻 듣기에는 '현실적인' 부두교도의 말에 현혹되고 종교체계의 위계질서 개념에 몰두해 자신들의 종교가 억압하는 것을 부두교에 투영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톨릭 교도들이 자기들 내면에 억눌려 있던 욕구를 부두교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사실 부두교는 우리의 무속 신앙과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죽은 조상들을 숭배하고 그들에게 기원을 올리는데, 이 점은 우리랑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 샤먼(무당)이 있는 것처럼 부두교에도 '운강'이 있다. 둘의 개념은 완전히 똑같다. 그러니까, 그 자신이 매개체가 되어 신과 소통하고 일반인들에게 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부두교도들은 정령(르와)들을 신봉하는데, 우리나라도 터줏대감이니 제석님이니 서낭신이니 하는 수많은 신들이 있다. 그들과 정령들은 전혀 다른 점이 없다. 책에는 부두교의 의례 절차가 대강 나와 있었는데, 이도 내가 구전문학 수업 때 배운 무당의 굿놀이 절차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한마디로 부두교와 우리 무속 신앙은 거의 완전히 일치했다. 다만 한가지 다른 점은 부두교의 경우 일반 신도들도 신이 들릴 때가 많으며 좀 더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뭐 일반인이야 신 들릴 일은 극히 드무니까 말이다. 또한 무속을 그렇게 심하게 믿는 사람도 별로 없다.

 부두교는 그동안 무수히 탄압을 받아왔는데, 그때마다 가톨릭의 등 뒤에 숨어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탄압의 주체가 가톨릭인데 그 뒤에 숨었다는 것이 일견 아이러니컬하기도 하다. 부두교도들은 가톨릭을 믿는 척 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르와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리아 그림을 앞에 두고 기도하면서 여자 르와를 떠올리는 식이다.

 

 서두에 이야기했지만 아프리카 본토의 부두교를 별로 다루지 않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프리칸들의 부두교가 동아시아의 무속신앙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은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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