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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평점 :
다원주의 사회니 문화 상대주의니 하는 말들은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일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사실 득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백 년은 커녕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이분법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 적어도 메인스트림인 서구의 경우는 확실히 그랬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동양적인 일원론적 사고 방식을 기반으로 하는 다원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는 "합리주의가 획득했다고 믿은 객관성이라는 것도 결국 주관적인 오류의 하나일 뿐"이라고까지 말했다. 이 말은 곧 서양 철학자들이 줄기차게 탐구해온 객관적 진리라는 것이 백 날 찾아봤자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믿고 주장하는 순간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믿는 - 혹은 믿고 싶은 - 철학자 개인의 주관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니스벳 역시 이러한 다원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있음이 확실해 보이며,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믿음을 - 완벽하지는 않지만 - 최대한 배제하는 자세로 저술에 임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일단 책을 받아들고 본문을 대충 훑어보다가 어느 대목을 보고 순간 놀랐다. 그 대목은 바로 저자가 본문 중에서 역자인 최인철 교수의 이름을 언급하는 부분이었는데, 그 언급의 농도가 단순한 인물 소개의 수준이 아닌, 같이 연구를 수행한 동료로서 상당한 연대감을 보여주는 류의 것이었기 때문에 적이 놀랐던 것이다. 처음에 그냥 책을 받았을 때에는 표지만 보고 그저 '흥미롭겠구나'하는 생각 정도만 가지고 있었는데, 본문 중의 역자 이름을 보고 나니 책 자체에 대하여 대단한 신뢰감이 생겼다. 이는 꼭 원서가 아주 좋은 책일 것 같다는 신뢰감이기 보다는 번역의 충실함에 대한 기대감 및 신뢰감이었던 것이다. 역자가 저자와 단순한 친분만 있어도 번역이 훨씬 충실해 질텐데 하물며 역자가 저자의 제자임에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스스로 적지 않은 책들을 읽어 보았다고 자부하는 터에 번역과 교정이 엉망이라서 책 전체를 망친 경우를 상당히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더해졌다.
저자가 지나친 범주화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므로 나 역시 이 책에 대한 도식화나 범주화는 지양하고 되도록 자연스럽게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스스로의 출신성분(?)을 극단적인 서양 사람, 즉 미국에 사는 앵글로 색슨 청교도의 범주에 두고 동양과 서양 간 사고 방식의 차이와 그 원인에 대하여 다양한 연구 실험 결과들을 가지고 증명을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각 문명권 간의 사고 방식의 차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며, 그 원인 또한 다양하다. 그리고 그는 그 원인과 사고 방식이 순환하여 서로 영향을 줌으로써 항상성을 지님을 서론에서 주장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이 여러 분야에서 나타내는 차이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 즉, 특정한 사회적 행위들은 특정한 세계관을 가져오고, 그 세계관은 특정한 사고 과정을 유발하며, 그 사고 과정은 역으로 원래의 사회적 행위들과 세계관을 다시 강화시킨다.」
(20쪽)
이후 전개되는 본문에서는 수없이 많은 실증적 연구 결과들이 인용되었으며, 대부분이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특히 실험 방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실제 실험에 사용된 갖가지 문제들이 제시되었는데, 내가 그 문제를 풀어보면 십중팔구는 동양인들의 결과와 일치하여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실험 절차에 대한 설명을 읽는 도중에 내가 생각한 것은 '같은 재료로 된 물체'였다.
「'코르크'로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그것이 닥스(Dax)라고 알려주었다. '닥스'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실험자가 임의로 만들어낸 이름이다. 그런 후에 두 물체를 보여주었는데, 그 중 하나는 모양은 앞에서 본 피라미드와 같았지만 재료는 코르크가 아니라 하얀 플라스틱이었다. 다른 하나는 재료는 같았지만 모양은 피라미드가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닥스'인지 고르게 했다. 그 결과 매우 놀랍게도 미국인들은 주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물체를 선택했고, 일본인들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물체를 선택했다.」
(83쪽)
그밖에도 자존감의 차이에 대한 논의 같은 것이 대단히 흥미로웠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실로 공감이 되었다.
「동양인들은 진보보다는 '회귀'를 추구하고, 극단적인 것들 사이의 '중용'을 추구한다. 그리고 동양의 유토피아는 '과거'에 존재하며, 인간의 소망은 '현재 상태에서 과거의 완전한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다.」
(104쪽)
중국인들은 항상 황제나 요순우탕을 그리워 하며 '격양가'를 다시 부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 대부분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 요임금 시절의 태평성대는 그렇게도 절실히 원하는 "과거의 완전한 상태"임은 재론의 여지조차 없다.
한편 위 인용문에서 "중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는데, 이는 저자가 동양 문화의 특징 중 하나로 계속하여 언급하는 용어이고, '대부분의 우리'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용'은 동양인이 아닌 저자도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 증거는 오로지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책의 서론 본론 에필로그 등 모든 곳을 둘러보면 저자가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강력하게 어필하기 보다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점에서 - 어떻게 보면 다소 소극적으로 - 주장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결론 역시 서양이 먹는다, 동양이 먹는다 하는 식의 이분법을 무시 - 할 때조차 온건한 입장으로 '그것들도 나름 타당하지만'하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 하고 두 문화는 결국 수렴되리라는 주장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이 주장은 지극히 당연하고, 타당하다. 그리고 현실이 또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연구 결과들은 실로 다양하였으며, 그것들을 검토하느라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동서양 사고 과정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여 집대성한 최초의 저서라는 의의 말고도 앞으로의 방향 제시의 역할을 꽤 훌륭하게 수행해냈다는 점에 이 책의 또다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