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캐나다 사는 기자가 쓴 책인데, 베트남전의 개전, 진행, 종료까지 - 가급적 시간순으로 하여 배경과 요소 등을 일일이 짚어내어 보여주고 있다. 꽤 성실한 책이었다.
 베트남전의 전체적인 양상 따위는 이미 알고 있던 바가 있으므로 그렇게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저자는 책의 많은 지면을 미국의 정치인들이 어떻게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 그들이 이후 어떻게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였는지에 대하여 서술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다. 그러한 정치적 배경들에 대하여 꽤나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도 하나의 소득이다(물론 거의 다 금방 까먹었다).
 사실 미국에게 있어 베트남전은 처음부터 꼬인 전쟁이었다. 케네디는 암살 당하기 전 베트남에 정부 관료 두 명을 파견하여 그들에게 상황을 알아보고 미국이 취해야 할 적절한 입장을 제시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 에피소드는 마치 선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고 오게 한 두 조선 관리들의 이야기와 흡사했다. 

「크루랙 장군은 모든 일은 잘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중략)
 "디엠은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군인들의 사기도 높았다...(중략)"
 멘던홀은 상반된 내용을 보고했다.
 "디엠은 전혀 인기가 없었다. 정부가 아주 위험스러운 상태였다...(중략)"
 ...듣고 난 케네디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당신 두 사람은 같은 나라를 다녀온 거죠?"」 

 저자는 멘던홀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답시고 베트남전에 멋모르고 개입했다가 완전히 발렸다. 베트콩(Viet Cong; Vietnamese Communist의 경멸 섞인 약어)들은 엄청나게 강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단결력이 대단했다. 거기다가 - 나는 미처 몰랐던 사실인데 - 소련과 중국의 지원물자를 무한히 제공받고 있었다. 베트남전을 시작한 존슨 대통령은 이른바 '북폭'이라고 해서 북베트남 군사, 산업시설들을 수도 없이 폭격하여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으나, 베트콩들은 자기들이 생산 안해도 얼마든지 소련과 중국이 물자를 주었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베트콩이 호치민을 중심으로 단결이 매우 잘 되어 있었던 반면 남베트남은 완전 나가리 국가였다. 

「...해병대 위생병 잭 매클로스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번은 다낭에 간 일이 있었다. 18~19세 정도의 남베트남 청소년들이 일제 혼다 오토바이를 멋지게 타고 다니는 것을 봤다. 산화해 버린 내 동료들이 생각이 났다.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이 녀석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라고 우리를 이곳에 불러 놓고, 자기들은 혼다 오토바이나 타고 다닌단 말인가..."
 해답은 간단했다. 부패의 원인은 사회 전체적으로 '전쟁에서 이겨야만 된다'는 공감대와 동기 부여가 안 되어 있었던 탓이다.」 

 현실이 이러다보니 남베트남과 미국 사이도 여기저기서 금이 가곤 하였다. 이렇듯 워낙 부패하고 타락한 정부를 돕다보니 자연 미군도 기강이 해이해지는 모습을 많이 보이곤 하였다. 다음의 적군 전사자 부풀리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종종 '전사자 숫자놀음'은 코미디나 다름없는 경우가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달동네에서 성장한 맷 마틴 상병은 해병대에 지원 입대하여...(중략)...이렇게 말했다.
 "육군이건 해병대건 오래 근무한 사람일수록 전사자 부풀리기에 능숙했다. 한번은 대령에게서 걸려온 무전을 옆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무척 흥분한 상태였다. 우리는 일부러 포탄 소리가 무전기에 잘 들리도록 했기 때문에 그는 크게 소리쳤다. '전사자가 몇 명인가? 적군 전사자가 몇 명인가?' 우리는 대령과 같은 마을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다. 대령은 많은 전사자를 원했다. 우리와 함께 있던 소위가 무전병에게 성큼성큼 다가서더니 '300명 이상이라고 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무전병이 '딱 떨어지는 숫자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중위가 '그러면 311명이라고 말해 줘!'라고 소리질렀다. 무전병은 그대로 불러줬다. 대령은 '좋아!'를 큰 소리로 외쳤다. 전사자가 311명으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격전의 현장을 체험한 맷 마틴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우리는 무차별 사격만 계속했었고,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지프가 전복하여 소위 1명이 죽은 것이 전부였다. 적은 1명도 사살하지 못하고 아군 초급장교 1명이 사고사했을 뿐이었다..."」

 이 외에도 미군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일단 지휘하는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부터가 문제였고, 병사들도 복무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아서 경험자가 부족했다. 거기다가 병사들 평균 연령이 19세였다고 하는데, 내가 군대 갔을 때가 딱 만 19세 되자마자 였으니까 그렇게 어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 2차 대전 때 미군 평균 연령이 26세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어린 것이 맞는 것 같다. 사실 저 나이면 정신적으로는 청소년이다. 사실 26세 정도는 돼야 전투력이 좀 살아날 듯도 하다. 또한 전술했던 전사자 부풀리기에 이어 더욱 심한 현상들도 일어났는데, 바로 극단적인 하극상이 그것이다.

「인기 없는 장교에게 종종 현상금을 거는 경우가 있었으며, 액수는 대개 50달러에서 1000달러 수준을 오르내렸다. 미군 병사들은 여러 명이 용돈을 모아 현상금을 마련했다...
 ...상원 자료에 따르면, 1969년부터 1970년 사이에 살해나 협박용까지 포함하여 미군 부대에서 수류탄 사고가 790회 발생하여 83명의 장교가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에는 사병들이 칼이나 총으로 살해한 장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특무상사와 갈등을 겪고 있던 친구 몇 명이 있었다. 그 상사는 나이가 많은 만큼 경력도 다양했고 전투에서도 군인 정신이 투철했다. 그는 전쟁을 좋아했다. 심지어 전투 현장에서조차도 "해병대 복장은 이러해야 된다'는 등 꼼꼼하게 챙기는 성격이어서 청결 정돈을 항상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살아남은 부대원들이 그 상사를 발견했을 때, 등 뒤에서 근접 사격을 한 듯 총구멍이 많이 나 있었다.적의 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 부대원들이 뒤에서 쏘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중대원들도 항상 전쟁이 난다면 일단 간부들부터 쏴죽이겠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실제 전쟁이 나면 진짜로 그러는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은 몇 년을 끌었으나 답이 안 나왔고, 매스컴은 계속하여 전쟁의 참상을 보도했다. 반전데모는 미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일도 발생했다. 결국 미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미군의 철수는 평화협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남북베트남이 휴전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삼 년 후에 북베트남은 협정을 파기하고 전격 침공에 나섰다. 앞서 말했듯 남베트남은 나가리 국가였다. 베트콩이 남베트남을 유린했지만 미국은 더이상 간섭하지 않았(못했)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드라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가장 대표적인 표본이 베트남전이다. 하지만 그들이 염원하는 통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사이에 끼어 죽고 다친 수백만 명의 희생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베트남인이라면 차라리 조국 통일에 목숨을 바쳤느니 하면서 위안을 삼으면 되겠지만, 미국인이나 한국인 같은 경우는 완전히 개죽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베트남전의 교훈도 자명하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whairis 2010-06-08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잘썼네요. 사 봐야 겠다는 마음이 일었으니깐.
[전쟁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