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베개 - 장준하전집 1
장준하 지음 / 세계사 / 1992년 4월
평점 :
절판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한국의 위정자들은 태반이 (궁극적으로)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고, 도대체가 뒤끝이 깨끗한 인간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 적어도 내가 보기에 - 깨끗한 인물, 오로지 공익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인물을 지금까지 두 사람 발견하였는데, 그 중 한 명이 여운형이고 나머지 한 명이 장준하이다.

 

 이 책은 장준하가 스물일곱 살 때 왜적의 학도병으로 끌려 갔다가 탈영하여 광복군을 찾아가고, 이후 해방공간에서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를 수행하기까지 약 2 년간의 체험을 기록한 수기이다.

 그가 학도병에 끌려간 것은 결혼한 지 불과 열흘만의 일이다. 중국으로 파병되어 서주에서 훈련을 받다 탈영을 한 그는, 이 탈영이 학도병으로 끌려 나갈 때부터 계획된 것이었으며, 굳이 중국으로 파병된 것도 자신의 의지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중국으로 가서 탈영을 한 후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나 광복군을 찾아가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게 사실이라면 참 대단한 사람이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가 학도병 시절 목격한 다음 이야기를 보면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된다.

 

「더욱 내가 괴로워했던 일은 한국사람들의 그 기막힌 행동들이었다...

 ...고참병들인 일본놈들이 외출갔다 돌아오면 매식으로 배부르니 별로 병영음식이 먹고 싶지 않아 계란을 깨어서 비벼 몇 젓가락 먹다 말고 선심 쓰듯 던져주는 밥 한 그릇을 더 받아먹고자 혈안이 된 우리 동료들, ...매식을 하고 들어온 그들이 자기 몫을 개, 돼지에게 던져주듯이 던져주는 그 밥 한 그릇을 우르르 몰려들어 받아먹는 그 치사하고 밸없는 꼴들.」

 

 내가 듣기로 당시에 저런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지금도 우리나라엔 잠재적인 저런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나부터 좀 반성을 해야겠다.

 아무튼 장준하는 동지 몇 명과 함께 왜군부대에서 탈영을 하게 되었고,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6천 리 길을 걸어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온갖 에피소드들이 펼쳐지는데, 나는 여기서 당시에 왜군을 상대로 매춘부 일을 하면서 정보활동을 했던 여성 공작원들도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금 우리는 참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시 중국군의 실태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이는 그들이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선은 쪽발이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내전이 횡행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때 중국군에는 <호른부땅빙(好人不當兵)>이란 말이 유행되고 있었다. 이 말은 <좋은 사람은 병정에 가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병신이나 바보만이 병정이 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돈 있고 빽이 있으면 군대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장준하는 임시정부에 도착하기 전까지 여기저기서 독립운동 단체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 단체들의 실상을 알고 난 후에는 매번 실망을 하게 된다. 어느 단체든지 제대로 독립운동을 하는 꼴을 볼 수가 없고 그저 허송세월만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싫어 궁극적으로 찾아간 임시정부에서도 그러한 습성은 똑같았다고 한다. 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젊은이들이 한 무더기나 오니까 서로 자기 당파에 끌어들이려고 작업을 하더라는 것이다. 장준하는 이런 꼴이 싫어서 동료들과 함께 무력시위까지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임시정부에서도 실망을 한 장준하는 장안의 광복군 부대로 가서 미군과 합동 침투훈련을 받기로 한다. 그 훈련이 거의 끝나갈 즈음 김구가 위로차 시찰을 왔는데, 이때 김구의 담력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발생했다.

 

「폭발은 이들의 바로 뒤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폭발물은 단순한 폭약의 매몰로서, 어떤 수훈생이 얼마나 놀라나 하는 것을 측정하기 위해 미리 장치해 놓았던 것을 계획대로 폭발시킨 것뿐이었다.

 이 폭발에도 김구 주석께선 태연히

 "허허...이게 무슨 소린고?" 하실 뿐이었다. 그러나 독립군 총사령관인 장군이 에크! 하며 들고 있던 식기를 놓칠 정도로...」

 

 3 개월간의 훈련 후 서울로 낙하 침투하려던 계획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장준하는 김구의 수행원으로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후 20일 정도의 이야기가 진행되다 이 책은 끝이 난다. 익히 알다시피 당시의 임시정부에도 분열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심화되었다.

 

「환국한 임정의 각료들 안에서까지 일치구국의 염이 허사이면, 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이 형세, 이 난국에서 집중된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단 한마디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아픈 일이었다.

 각료회의는 뻔한 결과를 가지고 산회되었다. 김구 주석의 말씀처럼, 과연 여러 파, 여러 층을 한보따리에 싸서 내던지고 온 것인가? 그보다는 오히려 끼고 들어온 파벌의 보따리를 더 크게 벌이고자 하는 결과일 뿐이다.」

 

 장준하가 본 우리의 독립운동사와 정치사는 온통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었다. 단결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장준하가 이 수기를 완성한 때는 1971년도인데, 당시의 정치 상황에 개탄을 하며 경고의 차원에서 이 책을 펴낸다고 밝히고 있다.

 

 '돌베개'는 장준하에게 하나의 이상이며 목표이자 짐이었다. 본문을 보면 각 사연마다 자신의 감정을 구구절절 적어놓고 있는데, 가끔은 그것이 지나치게 절절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또한 장준하는 평북 의주 출신으로서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으로 떠난 이후 가족을 일절 보지 못하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해방 후에 가족과 상봉을 하였는지의 여부가 나와 있지 않아 궁금증이 해소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나름 깨끗하고 고결한 삶을 산, 고생도 많이 한 사람이 졸지에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는 현실은 그리 옳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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