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과 그의 아내 - 33쌍과의 인터뷰, 우리 시대의 남성.여성.가족
김현주 지음 / 새물결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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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도 그렇거니와 가족제도에 관한 책이라고 해서 한국사회에서는 왜 ‘장남과 그의 아내’가 주목받아야 할까 이런 사실에 접근해 가지 않을까란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장남과 결혼한 여자는 결혼생활에서 시부모와 갈등이 이렇게 나타나더라, 시부모와의 갈등을 없애려면 사회적 논의는 ‘고드부와 샤르보노’가 지적한 이상적인 인간관계와 그 지향성 중 세 번째 내용 “A(개인)는 B(개인)로부터 자신이 준 것보다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B 또한 자신이 A로부터 자신이 준 것보다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상호 긍정적인 빚의 상태’”을 지향하라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한가지 의문은 장남과 그의 아내가 아닌 차남이하와 그들의 아내는 시부모와 대등한 거래(상호 긍정적인 빚의 상태)를 하고 있다는 얘긴가?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가 아닌 ‘장남과 그의 아내’라는 특정 신분만을 부각시키면서 ‘개인’과 ‘개인’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건 뭔가 초점이 맞지 않는 얘기같다. 차남, 장녀, 막내... 이 모든 부부형태가 다같이 총체적으로 고찰되는 관계에서 ‘개인’과 ‘개인’의 관계설정이 의미를 가지는 것 아닐까? 그리고, 시부모, 장남, 맏며느리... 이런 ‘신분’적 명칭을 벗어버리고 그 사람만의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거나 서로 대등한 호칭으로 불릴 때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가 아닌 ‘개인’ 대 ‘개인’의 사이가 되어 서로를 대등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장남과 결혼을 했든, 차남과 결혼을 했든, 막내와 결혼을 했든 남편과 혹은 시댁과 소통 창구가 열려있다면 뭐가 문제이겠는가. 서로 소통창구가 막혀 있으니까 주고받는 거래관계로 읽히고, 장남이라는 위치가 의미를 가지는 거겠지. 막힌 소통창구를 뚫으려는 노력은 없고 대신 ‘경제력’으로 무마해가는 여성들의 무능을 보았다. 한편, 남편이 월급 받아다 아내한테 통째로 받치는 것도 못마땅해하는 난데, 월급 봉투를 시어머니에게 건네주고 용돈을 받아쓰는 며느리들이 있다는 사실에 할말을 잃었다.

이책은 시부모와 함께 사니까 갈등이 생기더라, 그러니까 장남이 축이 되는 가족제도는 문제가 있다는 접근을 하고 있지만, 가족제도가 문제 있으니까 여자가 결혼하면 시댁에 호적을 올리고 시부모를 모시는 의무가 지워지는 게 아닌가. 그리고, 장남과 그의 아내와 부모와의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 가족관계가 문제 없는 걸까? 오히려, 차남/삼남.../막내와 그의 아내, 장녀/차녀...막내와 그의 남편이 아닌 하필 왜 ‘장남과 그의 아내’에게만 무게를 두는 지 이걸 그려냈어야 하지 않을까... 결혼이 남녀가 양쪽 부모로부터 독립해 나와 그들의 가정을 꾸리는 게 아닌 여자의 결혼이 남편 집안에 흡수되는 형태라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만 주목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장남의 누나가 있는 경우, 장남의 아내가 장인, 장모에게 있어 장녀인 경우 모두를 배제하고 왜 ‘장남과 그의 아내’만 다루고 있는 지에 대한 고찰 없음, 결혼하기 전에 결혼의 실체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 결혼생활을 어떻게 꾸려갈 건 지 서로 주고받은 대화내용 내지는 계획설계내용과 장남과 결혼한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건 지를 고민한 흔적 없음, 앞뒤전후사정을 살펴 맏며느리들이 왜 결혼생활에서 그런 시행착오를 겪어야하는 지를 반성하고 원인규명을 하기보다 시댁과의 갈등만을 부각시킨 점, 시부모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시부모에게 점수를 얻으려는 여자들의 이중성 등 이책에서 포착된 아쉬운 점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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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1-05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뭐.... 일종의 처세술 책이네요.ㅋㅋ

"장남은 부모를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고, 그 아내는 남편의 책임을 인수 받는다"를 전제로 하고 쓰여진 책인 것 같네요. 씁쓸....

사고뭉치 2005-01-06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남부부 33쌍을 인터뷰해서 쓴 책인데, 제목은 ‘장남과 그의 아내’인데도 주로 ‘아내’와 인터뷰를 해서 썼더군요. 맏며느리가 힘들어하니까 지금의 가족제도는 문제있다 이런 메시지가 읽히고요. 제목이 장남과 그의 아내니까 장남의 아내로서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다루기보다 장남과 그의 아내 사이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좀 드네요.

 
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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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구미가 당기는 책은 아니었으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봐야하는 책이 아닐까라는 강박관념이 작용해 미루고 미루다가 손에 잡게 된 책이다. 의무감으로 읽는 책이니 재미가 있을까... 책을 펴자 미국의 언론과 각계의 사람들이 남긴 짧은 코멘트가 등장해서 굉장한 책인가보다고 조금은 기대를 했는데 그 기대마저 깨져 하루에 한 장(쪽수가 아닌 제목 하나를 말함)씩 읽기로 하고 다른 책을 잡고 씨름하다 세 번째 장을 읽을 때부터는 ‘어... 재밌네?’를 넘어 ‘다음 얘기는 뭐지?’ 이 단계까지 갔다.

스콧의 남극탐험을 다룬 세 번째 글 마지막에 “사람들은 주로 민족주의, 종교, 인종 등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만, 16킬로그램의 돌이 든 가방과 그것이 상징하는 사라진 세계도 목숨을 걸기에 과히 나쁜 명분은 아닌 것 같다.”는 글귀에서 “카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을 추켜세우며 위대한 죽음만이 가치있는 듯 교육을 받아온 몸이기에 이말에 혹 했다. 책읽기를 멈추고 나라면 과연 뭘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대학 때 강의교재로 쓰였던 리더스다이제스트 내용 중에 등산을 가서 조난을 당한 남자가 눈덮인 산속에 갇혀 꼼짝 못하게 되었을 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죽는 거니까 미련은 없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또, 예전에 김동길 씨가 쓴 책에서 자신은 그냥 편안하게 맞이하는 자연사보다는 국가를 위해 대중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하다가 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한 글을 읽은 후로 그 인상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서 노후로 인한 죽음, 혹은 일상에서 개인의 삶을 추구하다가 맞이하는 죽음에 무게를 덜 두게 되었다. 이 글을 읽고 저 두 오랜 기억을 끄집어 내어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동안 나도 머리가 컸는지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죽음은 만인이 애도하는 죽음일 지는 모르나 그 개인의 위치에서 본다면 불행한 죽음이 아닐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신의 세계를 추구하다가 자신의 소신에 취해 죽음을 맞이하는 게 개인의 죽음으로 볼 때는 더 행복한 죽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강렬하게 다가왔던 김동길 씨가 말하는 죽음이 개인으로 살아오지 못한 한국 사람답게 집단에 함몰된 죽음에 의미를 두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에게 죽음에 대해 강하게 인상을 남긴 두 글에 하나가 보태어져 이 책에 나온 남극 탐험가 스콧의 죽음은 그 세 번째가 되었다.

나 역시 책을 너무 신성시 다루는 거 아니냐는 비판? 주의?를 받고 있던 터라 ‘너덜너덜한 겉모습’을 뚫어져라 읽었다. 덴마크를 방문한 가족 여행에서 호텔 청소부가 책을 펼쳐 엎어놓은 저자의 오빠에게 남긴 메모 ‘손님, 책을 절대 그렇게 다루지 마세요.’를 두고 저자는 책이 담고 있는 말은 거룩하지만 책을 담고 있는 그릇인 종이, 천, 판지, 풀, 실, 잉크를 함부로 다루는 건 신성모독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나로 볼작시면, 저자보다는 그 호텔 청소부의 궁정식 사랑의 신봉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책이 너덜너절해지는 걸 참을 수 없고, 책은 크기와 장르에 맞춰 꽂혀 있어야 하며, 그래서 책을 사서 그 책을 어디에 꽂아야 할 지 책장을 보며 한참 궁리를 할 때 식구들의 닭짓 그만하고 아무 데나 꽂으라는 말에 상처를 입는, 책 장에 꽂힌 책 위에 다른 책이 얹혀지는 걸 참을 수 없는, 밑줄 긋는 거 말고는 볼펜 자국을 용납하지 않는, 읽던 곳을 표시하기 위해 책모퉁이를 접어놓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그 청소부처럼 내용과 형식이 불리 될 수 없다고 믿고 책의 물리적 자아를 신성시까지는 아니어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8천권이나 되는 책을 가진 저자의 친구가 햇빛에 책이 바랄까봐 부인이 서재의 창문 블라인드 올리는 것도 말리고, 아끼는 책은 두 권을 사서 한 권은 그대로 모셔둔다는 거에 비하면 내 강박관념은 새발의 피인 것 같다. 그래도 책의 물리적 자아와 책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자세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할 것 같다.

난 저자처럼 부모를 건너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느껴보지 못했다. 할머니는 고사하고 엄마한테서 네가 여성으로서 읽어야할 책이라고 추천이라도 받아보면 소원이 없겠다.

또, 나 역시 오자에 대한 강박관념이 심해 대화방에서 대화할 때 오자를 지적하다가 한소리 들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언젠가는 의식적으로 지적을 하지 않으려고 참고 있는데 오히려 상대방이 자신의 맞춤법을 지적해주지 않는다고
“미안해요.”
“왜죠?”
“맞춤법이 틀렸는데 지적을 안 해주시네요.”
이런 대화가 오가서 놀란 적도 있다.
여기다 한 수 더 떠서 문장부호에 대한 강박관념까지 작용하다 보니 문장부호를 찍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문장부호를 비교적 잘 지키는 사람을 보면 혹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닐까하고 물어보기까지 한다. 나아가 각국에서 수집한 엽서랑 전화카드를 수집첩에 꽂을 때도 주제별로 나라별로 분류해 꽂아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관념도 따지고 보면 이런 성격과 연관된 게 아닐까 한다.


온가족이 책에 빠져 사는 데다가 저자는 직업도 글을 쓰는 직업이고 결혼도 책에 중독된 사람과 했다. 거기다 낭독을 즐기는 행복까지... 부럽기만 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4학때인가... 반친구들은 다 아는 백설공주 얘기를 나만 모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이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돈을 모아 백설공주 책을 사서 아버지 몰래 숨어서 읽다가 혼난 적이 있다. 교과서나 열심히 보라던 아버지 말씀 때문에 그 뒤로도 쭈욱 나의 독서행각은 언제나 아버지 몰래였다. 내 부모만 그런 줄 알고 창피해서 누구한테 얘기도 못하고 있었는데 나이 먹으며 비슷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접했을 때의 황당함이란... 나이 먹은 지금은
“얘, 그거 읽으면 남자가 하늘에서 떨어지니?”
이런 엄마 잔소리를 감당해야한다. 참고로 내 엄마는 혹시나 남자한테 전화가 와서 밖에 나갔다 들아오면
“너 왜 벌써 들어왔어? 그 남자가 너 싫대?”
이러는 분이다. 운명의 장난으로 책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가족을 만났지만 내 소원은 책 좋아하는 남자 만나서, 앤 패디먼 부부처럼 낭독의 즐거움을 즐기든, 같이 책을 붙잡고 앉아 읽든 책에 두드러기 반응 안 보이는 사람과 살아보는 거다.

이 책이 번역판이 아닌 한국 사람이 쓴 책이었더라면 더 실감이 나지 않았을까란 생각과 함께 자기창조 없이 서구 이론 욹궈내 책 팔아먹는 한국 작가들과, 아울러, 나이 먹어서까지 여성학 문제에 빠져 여성의 현실이나 읊어내야 하는 한국 여자들 현실이 또 한 번 불쌍해진다. 내가 여성학 책만 골라읽어서 그런 건 지 한국 여자들이 쓴 책 중에 여성의 현실을 성토하는 책 말고 이렇게 자기세계를 끄집어낸 책을 읽어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조안 리? 한비야? 이주향? 현경? 이 책을 읽고 책장을 쳐다보니 여성문제 빼고는 여자가 쓴 책이 별로 안 보인다. 내친 김에 도서관에서 빌려본 대출목록까지 조회해 보니 여자가 쓴 책이 별로 없다. 내 독서취향에 문제가 있는건가 생각해 보니 내가 일부러 남자가 쓴 책들만 고르는 것도 아닌데 취향 문제라고 보기도 애매하다. 아, 불쌍한 한국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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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4-12-16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공감되네요. 여성문제 빼고는 여자가 쓴 책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죠? 조경란, 배수아, 전경린,김형경 등 소설들이 쏟아 지지만, 소설과 시를 제외하고는 여자들이 쓴 책은 여성문제들로 한정되죠? 아니면 '성공은 이런거다...'이런 자서전이나.... 하지만.... 여성문제란.... 이게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여자들의 정체성 문제가 아닐까.... 단지 여성문제라고 국한시키기에 '존개감' 자체의 문제가 아닌가...이런 생각이 들어요. 좋은 리뷰 잘 읽었어요.

사고뭉치 2004-12-19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전 누군가가 저보고 책을 너무 편식해서 읽어서 그런 작가를 찾지 못한 거라고 질타해 주길 바랐는데...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읽었을 때, 한국에서 시오노 나나미에 버금가는 여자가 누가 있을까를 떠올려보니 도무지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내가 책을 너무 편식하나 보다고 생각하고 좀 더 다양하게 읽어야겠구나 이러고 말았죠. 그런데, 이책을 읽고 나니까 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번엔 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전 자신의 세계가 남편과 애들 그리고 문명의 혜택으로 편리해진 살림으로 집에서 시간 죽이는 게 전부인 여자들이 많다는 사실, 직장 생활을 한다해도 정신의 행복을 치워두고 돈을 벌어 출세, 성공, 상승만을 꿈꾸는 여자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기에 존재감의 문제로 보이진 않고,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존재감이라는 말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을 지도 의문이고요.



관심의 범위를 넓히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존재감의 문제는 정말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자들 말고는 해당사항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정신의 행복을 치워두고 자신의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적응해 가는 여자들이 너무 많다는 거 이걸 주목해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자신의 욕망과 현실과의 괴리를 돈을 벌어 출세, 성공하는 걸로 보상받으려 하는 것 이런 데에 반성이 필요하다고 봐요.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강수돌 지음 / 그린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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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머리에서 교육문제를 교육문제로만 풀 수 없는 데다가 교육이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란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니까 제대로 풀어가려면 교육과 더불어 경제, 나아가 삶의 방식과 더불어 사회적 연관성 속에서 따져보고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되어서, 교육제도 개선한다면서 매번 입시제도만 뜯어고치는 데 지쳐있는 나로선 처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이 부분에서, 상당히 호감을 가지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옳거니!’ 감탄을 하며 읽어나가다 어느 순간 드는 의문이, 저자는 한국의 교육이 자본주의에 종속된 학교에서 학생을 자본주의 인력으로 키워내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한국에만 도입된 제도가 아닌 이상 한국의 교육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입시위주의 교육, 돈봉투, 학원수업, 과외, 치맛바람... - 우리는 이걸 교육열과 연관시킨다. 파고보면 부모들의 내새끼 유일주의에서 나온 극성일 뿐인데. 부모의 무모한 열정이 오히려 자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를 억압, 착취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애써 외면하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며 교육열이라고 자위를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부모도 아닌 내가 다 미쳐버릴 거 같다. - 이런 문제들을 자본주의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입학시험을 치를 때면 부모가 자식이 시험을 치르는 학교까지 따라가느라고 그렇지 않아도 출근시간이라 붐비는 교통혼잡을 더하기도 하고(자식이 시험을 잘 치를 수 있도록 응원해주며 집에서 기다리면 왜 안 되는가.)-, 시험이 끝날 때까지 교문 밖에서 기도하고 염불하면서 하루 종일 기다리며 덜덜 떨기도 하고, 직장인들 출근 시간이 1시간 연장되고, 듣기 시험에 방해된다고 비행기 이륙이 금지되고, 만약을 대비해 경찰이 대기하고 있다가 시험에 늦는 학생을 실어나르기도 하고... 이 정도면 미친짓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언론에서 이런 뉴스는 제발 그만 접하고 싶다. 올해 역시 이런 뉴스를 접하며 '미쳤군, 미쳤어!' 이런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런 현상들을 비롯해 한국만의 교육현실을 설명하려면 한국만이 가진 환경, 한국만이 처한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우선, 한국사회는 ‘가족주의’가 유난히 강조되는 사회이다.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이 부재하다 보니 모든 걸 ‘가족주의’에 의존하는 나라답게 학생의 등록금 역시 당연히 가족안에서 해결해야할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교육문제의 본질을 파고 들어가면 결국 등록금 문제로 집결된다. 이 등록금 부담의 주체가 누구냐가 바로 한국의 교육을 움켜쥐고 있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은 국가가 학생에게 등록금을 대출해 주고 학생이 졸업후 갚아나가는 방식이거나 거의 전액을 국가가 부담한다. 대학은 그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갈 인재를 키워내는 곳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국가비용이 개입돼 있지 않고 부모한테만 등록금을 짜낸다. 그러니까,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을 바라보는 시각이 저런 나라들 부모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열심히 벌어 자식교육에 투자를 해야하다 보니 부모는 자식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고, 부모에게서 등록금을 지원받는 자식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하다 보니 부모의 인생도 없고 자식의 인생도 없는 서로 공생하는 관계가 된다. 노후복지제도도 개떡같은 나라에서 자신들의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을 자식교육비에 투자해야하다보니 결국은 자신의 노후보험을 자식한테 드는 셈이 된다. 이게 자신들은 책 한 줄 안 읽으면서도 자식한테는 공부, 공부, 공부를 주문할 수 있는 부모들의 뻔뻔함을 낳는다. 한국 사회가 부모 자신들은 책 한 줄 읽지 않으면서도 자식한테는 입만 열면 공부를 강조하는 부모들에게 관대한 것도 결국은 부모가 교육비를 부담한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 아닐까? 자식의 등록금 문제에서 자유로운 나라들은 학생을 온전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대입시험제도가 문제의 핵심인양 매번 대학에서 학생을 뽑는 시험방식만 뜯어고친다.


한국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집착과 교육현실은 부모가 등록금 부담의 주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한국 현실에서 국가가 대학등록금을 전액부담하는 방식은 불가능할 것 같고, 미국처럼 국가가 등록금을 대출해주어서 졸업 후 자신이 갚아나가도록 등록금을 부모가 아닌 학생 자신이 부담을 떠안고 다니게 만든다면 지금의 병폐를 낳고 있는 모든 입시교육의 문제는 해결된다. 국가 예산이 딸려 이것도 어렵다면, 학생이 등록금을 벌어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던가. 등록금이 부모한테서 나오는 걸 어떻게든 학생 자신한테로 부담을 떠안겨야 한다. 그것만이 교육이 살 길이다. 가진 부모나 못가진 부모나 등록금은 부모의 부담이 아니라 학생 자신의 몫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정작 교육의 주인공들인 학생들의 생각을 배제한 채 사교육에 열올릴까? 등록금이 학생 자신 부담이면 가진 부모를 둔 자식과 못가진 부모를 둔 자식이 교육에서 차별받을까? 등록금을 자신이 감당하는데 공부하기 싫은 학생이 대학에 가려고 할까? 굳이 대학에 가야겠다는 학생들이 줄어들면 교육이 입시위주로 갈까? 그러면, 입학 시험에 목맬 필요도 없어지고, 입학은 누구에게나 개방되는 현실이 되고 졸업이 어려워지는 형태로 갈 수 있고, 어중이떠중이 모두 돈쳐발라 대학에 가서 남까지 공부 못하게 강의 시간 망치는 일도 없을테고, 강의 끝나고 한가하게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시간 낭비하는 학생 줄어들어 젊은 인력낭비하는 일 없을테고, 각자가 자신의 본래의 삶에 열심일 것 아니겠는가. 정말 대학에 가지 말아야 할 사람들까지 가진 부모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대학에 가는 현실을 막아야 할 것 아닌가. 더구나 졸업이 쉬운 나라니까 학교라는 공장에서 적당히 만들어진 그런 불량품은 출고를 막아야 할 것 아닌가.


여기서 나아가, 교육문제에 열성을 보이는 건 대개가 엄마들이라는 점을 주목해 보자. 한창 일해야할 젊은이로서 일할 의욕이 있고 열정이 있는데, 집에서 살림하고 애낳아 키워야한다는 명목으로 가정에 갇힌 여자들이 그 열정을 주체못해 자식교육에 열 올리는 건 아닐까? 하다못해 학교에서 학생 문제로 부모들 소집을 할 때도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들한테 유리한 시간대에 한다. 직장 다니는 여자들은 소집에 참여하려면 직장을 하루 쉬던가 조퇴를 하던가 해서 참여해야 한다. 이게 시사하는 바가 뭘까?


이 사회가 여성들의 일자리를 창출해서 직장생활참여를 지원해 주지 않는 이상 여자들은 자식한테 집착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문제 역시 등록금 문제처럼 결국 이 사회에서 개인이 개인으로서 바로 설 수 있는 문제와도 얽혀 있다. 우리는 아내는 남편한테, 남편은 아내한테, 자식은 부모한테, 부모는 자식한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될 정도로 일상이 서로의 영역에 침투해 있다. 부모든 자식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개인이 개인으로서 온전히 바로 설 수 있어야, 개인에게는 개인의 독립영역이 있음을 자각해야 부모도 자식을 자신들의 소유물, 부속물이 아닌 온전한 인격체로서 바라볼 수 있을 것 아닌가. 자식도 부모에게서 경제적 독립을 해서 스스로 설 수 있다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하는 인생을 살까? 여성 자신이 남편한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현실이니 자식을 독립시킨다는 걸 어찌 생각할 수 있을까! 자식이 곧 나인 걸!


여기다, 가정을 ‘남편은 밥벌이 아내는 살림’ 이런 역할 논리로 돌리다 보니 남편/아빠가 직장에서 그 늦은 시각까지 야근하는 것도 가능한 거고, 이게 결국 자녀와 얼굴을 대하고 대화하고 소통할 시간을 빼앗아 버린다. 자식과 얼굴조차 마주 대하지 못하는 아빠 뒤엔 자식을 들들 볶는 엄마가 존재한다. 이런데도 주5일제만 하면 모든 사회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호들갑 떠는 걸 보면 그저 암담하다는 생각 뿐이다. 오히려 주5일제는 집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가장을 둔 가정이라면 여자들의 노동력만 더 높여 줄 뿐인 것을. 주5일제가 급한 게 아니라 ‘9시 출근, 6시 퇴근’ 이런 정시출퇴근제가 정착되어서 6시 이후의 시간을 가정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가정이 민주적으로 돌아갈 수 있고, 평소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와 함께 할 시간이 많아져서 부모와 자식간에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래야 부모도 자식한테 희생하는 삶을 살지 않고 부모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찾아갈 여유가 생겨 자식을 들들 볶지 않을 것 아닌가. (이 부분은 ‘현대 가족 이야기’라는 리뷰 4번 내용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부모들은 공부를 정말 더럽게 안 한다. 책 한 줄 안 읽는데 어디서 자식한테 줄 인간정신 자양분을 얻을 것인가. 자기 자신의 인생이 없는 데다 자식한테 인간정신까지 발휘하지 못하다 보니 자식이 알아서 해야할 부분까지 부모가 일일이 참견하고 간섭하는 걸 자식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자신들은 책 한 줄 안 읽으면서 자식한테는 입만 열면 공부, 공부, 공부를 외쳐대는 부모들의 현실을 먼저 자각하지 않는 이상 어떤 변화가 있을까? 늦은 시간까지 직장생활하는 남자들은 그렇다치고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들은 도대체 왜 책 한 줄 안 읽는 지... 이러고도 자식 교육에 용감히 뛰어드는 여자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부모가 깨어서 교육정책을 정면 비판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타협을 해나가도 모자랄 판에 이 나라 부모들은 오히려 정부의 교육정책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교육이 잘못되어 있다고 불평한다. 부모 자신들부터 깨어나지 못하면서 정부는 깨어나란다. 부모가 연대해 사교육을 거부하지는 못할망정 없는 집 부모마저도 자식 과외시키지 못하는 걸 부모의 부끄러움으로 알 정도다.


이 모든 일들이 부모 자신들이 내부 성찰을 하지 않고 교육제도탓, 학교탓, 선생님들탓... 탓탓탓으로 돌리니까 생겨나는 문제라는 걸 우리 사회는 왜 인식하지 못할까. 부모들의 자각없는 비판은 오히려 공허한 것 아닌가. 이 점에서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남편이든 아내든, 부모든 자식이든 모두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내 삶을 포기하고 살아야하는 삶의 형태에서 탈출해서 내 자신을 들여다보며 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 때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져 자식도 부모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자면, 부모와 자식 각자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데 있어 걸림돌인 저 위에서 말한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적 시각보다는 한국적 가족주의 청산이 오히려 문제 해결에 가까운 접근이라고 본다. 가족주의를 똑바로 직시하자면 가족사랑을 빙자한 국가의 방관, 국가의 폭력을 감지하지 못하고는 불가능하다. 노후복지, 등록금, 육아정책... 이런 모든 것들이 국가가 손을 놓고 ‘가족사랑’이라는 이름을 빙자해 가정에 책임을 떠넘기기 때문이라는 걸 우리 사회가 빨리 인식하고 이 부분에서 접근을 해야한다. 우리 사회가 교육문제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아직도 갈팡질팡 헤매는 이유가 바로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가족사랑을 뒤집어 보면 서로의 ‘필요’에 의해 공생하는 관계라는 점에 눈 뜰 때가 되었다. 교육이라는 건 어차피 일상의 수준을 담아내는 거니까 가정부터 변하지 않으면 학교도 변할 수 없다. 경제위기가 와서 가장이 수두룩하게 실직을 당하는 현실도 가족이 끌어안고 가야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국가의 공적 자금이 개입해야할 문제들 역시 가족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각 가정이 끌어안고 가야하는 문제로 체화하고 살아가는 이상 이 나라에 교육개혁은 없다!!!


국가 기득권이 존립하기 위해 강요하는 이 가족주의는 교육문제를 풀어가는 열쇠이기도 하지만 직업에 대한 개념을 ‘생계유지 수단’으로만 부각시키는 데도 한몫하고 있다. 남편과 아내, 아빠와 엄마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돌보지 않고 ‘남편은 밥벌이, 아내는 살림’ 이런 역할 논리로만 가정을 돌아가게 하는 현실에서 직업을 자아실현, 사회참여,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자금줄 창구 이런 도구로 보지 않고, 생계유지 수단으로만 보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표면으로 드러난 건 교육문제이지만 결국 우리 사회 총체적인 문제들이 걸린 과제다. 가정에서부터 결혼 생활, 가족의 의미가 제대로 자리잡혀 있지 못한데 학교와 직장은 제대로 돌아갈까? 난 이것부터가 항상 의문이었다.



교육문제도 그렇고 뭐든 우리 현실을 담아내는 문제를 자본주의적 시각으로만 보려고 하는 데서 오히려 우리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문제해결에서 더 멀어지게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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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국 속의 여자들 - 문화과학 분석신서
이득재 지음 / 문화과학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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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이책의 저자가 쓴 ‘가족주의는 야만이다’라는 책을 읽다가 어려운 이론이 계속 등장하는 데에 질려서 읽다가 손을 놓아버린 적이 있다. 이 책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가족 현실을 얘기하면서 남의 나라 이론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론 적용을 하지 않고 우리 사회 현실을 풀어낼 때는 쏙쏙 이해가 되었지만, 들어보지도 못한 서구 학자들 이름과 어려운 이론이 수시로 등장해서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 왜 우리 현실을 우리언어, 우리이론으로 풀어내지 못하고 그 들어보지도 못했던 서양 학자들이 생산해 놓은 이론으로 풀어내야 할까. 사람의 머릿속까지 어떻게든 하나하나 분석해 증명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서양철학으로 문제를 풀어가다 보니 책이 더 어렵게 읽힌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저자들의 이름은 주로 문학 작품을 인용할 때 등장했고, 그 작품들을 설명하는 이론은 불행하게도 우리가 창조해낸 이론이 아니었다. 이런 불만을 누군가에게 얘기했더니 인간사를 접근하는 문제는 다 똑같은 거라나... 내가 보기엔 ‘자기창조’가 없는 학문 풍토이기에 남이 만들어 놓은 이론을 끌어다 쓰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더 먼저 든다. 서구는 이론을 창출해내고, 한국은 그걸 가져다 쓰고... 한국은 언제쯤 한국 사람들 시각으로 현실을 들여다보며 한국 현실에 맞게 한국 걸 창출해서 써먹을 수 있을까... 이 점만 빼고 보면, 이 책은 정말 굉장한 책이다.

구성애 씨의 성교육을 비판한 내용이 와닿았고(굳이 서구 학자들 이론을 개입시키지 않아도 구성애 씨의 성교육내용은 허점투성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프로이트에 관한 해석 역시 기존의 시각과 달라서 좋았고(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남성학문으로 만들어놓은 사람이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언어에 대한 접근시도 또한 흥미로웠다. 나 역시 한국말 호칭체계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고민하다 보니 언어 문제가 시급하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그런데, 한국말은 여성 언어의 부재 문제 이전에 타언어가 가지고 있지 않은 핸디캡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바로, 자기가 사용해야할 언어가 ‘나이’를 기준으로 규정된다는 사실. 한나라의 말은 그 나라 국민 모두가 쓰는 말인데 그런 말이 특정부류(연장자)에게 유리하도록 특권이 부여되어 있다. 한국 사람들은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내눈엔, 한글은 훌륭한 문자일지 모르지만, 나이 개입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의 언어를 제한하는 한국말은 인간적인 말이 아니다. ‘나이’가 개입되는 말이다보니 한국말은 자연히 상하를 구별하는 호칭체계가 발달했고 그 와중에 여성언어의 부재까지 얽혀 문제가 더 심각하다. 한국말을 정의하는 데는 ‘나이’를 빼놓을 수 없지만, 만약 한국말에서 이 나이를 거두어낸다면 개인을 개인으로 규정하는 말로 바뀔 수밖에 없을테고, 그 과정에서 여성 언어 부재 문제 또한 손을 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말 호칭체계를 들여다보면 ‘관계’는 있는데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정체불투명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제나 ‘나이’가 개입되어 개인을 개인으로 만나지 못하고, ‘(상하)관계’로만 파악하다 보니 끊임없이 쪼개고, 찢고해서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을 때까지 쪼개서 관계를 드러내는 호칭만이 발달했다. 이렇게 ‘개인’이 없는 데다 성차별 언어까지 감수해야하는 여자들은 이중의 차별을 겪고 있다. 그런데, 개인도 정의되어 있지 않은데, 성차별 언어가 개선되길 바라는 건 순서가 잘못된 거 아닐까? 이런 뒤죽박죽 현실을 잘 드러내주는 현상이 하나 있다. 연상연하 커플이라고 할 때 연상연하는 왜 남자보다 여자가 나이가 더 많은 경우에만 사용될까라는 의문은 차라리 초딩버젼이다. 이보다 더 코미디는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는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 먹힌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남자가 더 어린 연인 사이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너’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에서는 나이가 무시되면 왜 불쾌해할까? 우리는 우리의 시각이 아닌 서구의 이론으로 우리 현실을 보기에 모두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성차별’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게 아닐까?

‘삼촌’이라는 호칭을 보자. 아빠나 엄마의 남동생이나 형/오빠는 "삼촌"이라고 부른다. 그것도 엄마의 남동생이나 형/오빠는 삼촌 앞에 ‘외’자가 들어간다. 아빠쪽은 그냥 삼촌이지 ‘내삼촌’이 아니다. 아빠의 여동생이나 누나는 "고모"라고 부른다. 엄마의 여동생이나 언니는 "이모"라고 부른다. 고모랑 이모는 나랑 몇 촌 사이일까? ‘삼촌’은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지 호칭이 아니다. 부를 때 쓰는 말과 관계를 가르킬 때 쓰는 말이 일관되게 자리잡혀 있지 않고 섞여서 쓰이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누이'라는 말은 남자가 여자를 부르거나 가르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여자가 여자를 부르거나 가르킬 때 쓰이는 말이 아니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의 여동생이나 누나를 타인에게 지칭할 때조차도 남자가 정해준 호칭(시누이)을 쓴다. 그런데, 당사자를 부를 때는 ‘아가씨’나 ‘형님’이라고 한다. 왜 ‘시누이들’이라는 말은 성립하는데 남편의 남자형제들을 뭉뚱그려 부르는 말은 없는걸까? ‘누이’가 나이를 개입시켜 언니나 여동생 가리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일 거다. ‘시누이’에 해당하는 남편이 아내의 언니와 여동생을 부르는 말은 뭘까? 처형, 처제는 시누이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아가씨’, ‘형님’에 해당하는 말이다. 사정이 이런데 왜 여자들은 ‘아가씨’, ‘형님’, ‘시누이’라는 말을 정리하지 못할까? 난 이런 호칭만 생각하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쏙 들어간다.(새언니가 나를 '아가씨'라고 부를 때 지금이 양반상놈하는 시대도 아닌데 내가 졸지에 아가씨가 되는 게 못마땅하다. 거기다 작은 올케가 '형님'이라고 불러제끼면 난 그저 “엽기”라는 생각만 든다. 나 역시 결혼으로 이 대열에 끼일 걸 생각하면 소름만 끼친다. 아직은 내가 수행하는 상황이 아니고 당하는, 그래서 반만 몸담고 있는 현실이지만, 가끔 남자들 앞에서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 무슨 또라이 취급하며 굉장히 피곤한 여자라는 반응이 되돌아온다. 그래서 말인데... 한국어학자들이야 거의가 남자들이라서 그렇다지만, 여성단체들은 왜 이런 문제는 안 건드리는 거냐고요오. )

동생의 아내는 시누이에게 ‘형님’이라고 부르고, 오빠의 아내는 시누이에게 ‘아가씨’라고 부른다. 왜 동생의 아내는 시누이에게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고 ‘형님’이라고 불러야할까? 동생의 아내는 시누이에게도 ‘형님’이라고 부르지만, 오빠의 아내(동생의 아내 입장에서 볼 때 시아주버니의 아내)에게도 ‘형님’이라고 부른다. 시누이와 오빠의 아내는 동생의 아내한테 왜 같은 호칭으로 불릴까? 동생의 아내, 나, 오빠의 아내 이 세 여자의 정체성은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는다. 오빠의 아내는 ‘새언니’라고 부른다. 오빠와 새언니가 부부 사이가 아닌 남매 사이가 된 건가? 오빠의 아내는 새언니이면서 왜 동생의 아내는 ‘새동생’이라고 안 할까? 무엇보다, 왜 여자끼리인데도 남자들 호칭인 ‘형님’이라는 말을 써야할까?

자매(姉妹)는 여자 입장에서 여자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다. 자는 한자로 ‘윗누이자’를 쓰고 매는 ‘아랫누이매’를 쓴다. 여자가 여자를 가르킬 때 ‘누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이걸 보면 한국어에서는 ‘여성’은 아직 정의되지 않은, 생명력이 없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정체불명의 존재다.

남편쪽 식구들, 그 중에서도 아들과 관계된 식구들은 큰아빠, 큰엄마, 작은아빠, 작은엄마라는 족보를 낳지만, 아내쪽 식구들은 외삼촌, 외숙모, 이모, 이모부라는 족보를 낳는다. 엄마의 남자형제들과 그 아내들은 나에겐 큰아빠, 작은아빠, 큰엄마, 작은엄마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아버지쪽 형제들과 그 아내들만 큰아빠, 작은아빠, 큰엄마, 작은엄마가 된다. 왜 아빠쪽에만 이런 호칭이 성립할까? 남자의 가족은 아직 확대가족이라는 반증 아닐까? 호주제가 폐지되면 이런 호칭들이 어떻게 정리될 것이며 서로를 어떻게 부를지 무척 궁금하다. 그런데, 아직 여성단체에서 이에 관한 소식은 감감무소식이다.

여자들은 이런 가족 안에서의 호칭문제도 풀지 못하면서 왜 직업과 관련된 성차별 언어만을 건드릴까?

형은, 언니는, 오빠는, 누나는 동생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동생은 형, 언니, 오빠, 누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코드로 접근하자면, 이것만큼 비인간적인 잣대가 없다. 개인을 개인으로 보지 못하다 보니 가족밖을 넘어서도 모두가 형이 되고, 언니가 되고, 오빠가 되고, 누나가 된다. 상하구분으로 집안에서부터 개인의 존재가 부정당하다보니 집안을 넘어 밖에서도 개인이 부정되는 상황까지 낳은 것이다. 집안에서부터 형, 언니, 오빠, 누나 이런 ‘관계’를 접고 개인 대 개인으로 파악해 같은 눈높이의 호칭으로 부를 수 있을 때 밖에서도 개인과 개인이 만날 수 있고, 나아가 의사/여의사, 기자/여기자... 이런 직업적 성차별 언어문제까지 건드릴 수 있을 거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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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된 학교 - 한 사회학자의 한국교육의 패러다임에 대한 지적 성찰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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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바뀌고 교육에 관한 정책이 새로 나올 때나, 언론이 교육개혁 좀 하자고 교육의 방향을 제시할 때나 거기에 귀가 솔직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건드리지도 못하고 입시제도만 이리 뜯어고쳤다 저리 뜯어고쳤다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제목에 홀려 목록을 살펴보았으나 내 기대에 부응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 교육 제도는 어떻게 돌아가는 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책속에서’란에 소개된 ‘개인주의’에 관한 언급에서 약간의 희망을 갖고, 주문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 교육이 살 수 있는 길은 '개인주의' 실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개인주의를 어떻게 실현시켜야 되는가에 대한 얘기는 없다. 이 책은 하나하나의 사실을 놓고 볼 때는 알찬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개인주의 교육이라는 대안제시에 비해 그 실현과정에 대한 고찰이 깊지 못해 아쉽다. 개인주의는 우리 스스로 얻어낸 개념이기보다 서구 나라들을 들여다보면서 힌트를 얻은 정답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개인주의를 어떻게 정착시켰는 지 그 과정까지 고찰해봐야 하는데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결과’만 얘기하고 개인주의를 정착시켜간 그 ‘정신’, ‘과정’까지는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더 시행착오를 겪는 건 아닐까? 지금쯤은 ‘개인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개인주의를 어떻게 실현시켜야할까’ 이런 얘기가 나와야할 때다. 어차피 이 책에서도 다른나라들 교육방식이 개인주의라는 얘기만 있고 그 나라들은 어떻게 개인주의 교육제도를 이루어냈냐는 얘기까지는 없으니, 우리는 왜 개인주의가 구현되지 못하고 가족주의에 집착하는 지 그걸 진단해 가는 과정이 해결책에 다가가는 일이 될 수 있겠다.

한국의 학교에서 개인주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건 입시제도나 교육과정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등록금’ 문제다. 거기다 가정이 아빠는 밥벌이, 엄마는 살림 이런 구조이다 보니 일상에서 개인주의가 자랄 환경이 못 되었다. 이런 걸 간과한 채 교육에 관해서만 개인주의를 얘기하는 게 설득력이 있을까? 등록금 부담 문제와 이런 삶의 형태를 살펴보는 게 한국의 교육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아니, 이 사회에 개인주의가 정착되게 할 수 있는 열쇠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언제나 입시제도만 뜯어고친다. 얘기가 길어지니까 여기선 등록금 문제만 언급하고 싶다. 후자(아빠는 밥벌이, 엄마는 살림하는 가정 구조)에 대해서는 ‘현대 가족 이야기’라는 책 서평 참고요망. 다시 화제로 돌아가서,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은 국가가 학생에게 등록금을 대출해 주고 졸업후 갚아나가는 방식이거나 거의 전액을 국가가 부담해주는 형태다. 대학은 그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갈 인재를 키워내는 곳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공적비용이 개입돼 있지 않고 부모 손에만 등록금을 의존한다. 이게 지금의 지독한 입시교육의 병폐를 낳는다. 이게 한국사회에서 개인주의 실현을 발목잡고 있는 주인공이다. 이게 부모의 인생도 없고 자식의 인생도 없는 부모와 자식간의 공생 관계를 낳는 거고, 부모가 꾸준히 자식의 교육을 간섭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 거다. 이게 사교육에 집착하게 만드는 원인이고, 평생 자식의 인생을 자신의 손안에 움켜쥐려는 부모를 낳는 거다. 이게 공부를 잘하나 못하나 돈으로 대학에 밀어넣으려는 부모를 낳는 거고,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교육이 차이가 나게 하는 거다. 등록금이 부모 손에서 나와야되니까 노후복지문제도 개떡같은 나라 현실에서 자신들의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을 자식교육비에 투자해야한다. 그러니 결국은 자신의 노후보험을 자식한테 드는 셈이 된다. 이게 자신들은 책 한 줄 안 읽으면서도 자식한테는 공부, 공부, 공부를 주문할 수 있는 부모들의 뻔뻔함을 낳는다.

내 등록금이 부모한테서 나오는데 내가 부모에게 대등한 존재로 보여질까? 더구나 장유유서가 강조되는 나라에서, 부모에 대한 효도가 강조되는 나라에서. 부모한테서조차 독립된 존재로 존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인데 학교에서는 가능할까?

한국 현실에서 국가가 대학등록금을 전액부담하는 현실은 불가능할 것 같고, 미국처럼 국가가 등록금을 대출해주어서 등록금을 부모가 아닌 학생 자신이 부담을 떠안고 다니게 만든다면 지금의 병폐를 낳고 있는 모든 입시제도의 문제는 해결된다. 국가 예산이 딸려 이것도 어렵다면, 학생이 등록금을 벌어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던가. 어떻게든 등록금이 부모손에서 나오는 걸 학생 자신한테로 부담을 옮겨야 한다. 등록금을 자신이 감당하는데 공부하기 싫은 학생이 대학에 가려고 할까? 가진 부모나 못가진 부모나 등록금은 부모의 부담이 아니라 학생의 몫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정작 교육의 주인공들인 청소년의 생각을 배제한 채 사교육에 열올릴까? 등록금이 학생 자신 부담이면 부모가 얼마나 잘 사는 사람이냐에 따라 교육받는 수준이 차이가 날까?

한 인간의 인생을 좌우하는 데 있어 경제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경제개념은 결정적이다. 경제개념이라는 건 입시 공부하듯이 책에 있는 걸 외운다고 생기는 개념이 아니다. 선진국 학생들이 방과후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기 용돈을 벌어쓰는 것처럼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용돈을 벌어가며 자기가 사고 싶은 것들, 자기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자기 스스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가며 해결해 보는 과정에서 몸으로 터득해야 생기는 개념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생들은 그런 시간을 ‘입시’라는 이름으로 박탈당한다. 지금의 입시교육은 이런 관점에서만 얘기해도 엄청나게 청소년들에게 억울한 형태다. 그렇다고, 부모들이 자식들한테 특별히 경제개념을 심어주는 것도 아니다. 한국 부모들의 용돈은 자식을 통제하는 수단이다. 스스로 용돈을 벌어쓰며 훗날 독립된 인생을 살아갈 준비를 미리부터 하는 선진국 청소년들에 비하면 한국의 청소년들은 스스로 용돈을 벌어 손에 든 예산에 맞게 계획을 세워 자신의 꿈을 실현해보는 중요한 인생과정을 압수당한 채 부모의 말에 복종해야하는 기계로 전락해 간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건너뛴 시행착오를 다 큰 어른이 되어 보상받는다. 해외 나가서 싹쓸이 쇼핑하고, 카드빚에 인생 망치고, 유명상품 추종하는 형태로. 공부만 강요시킨 후유증이 이렇게 나타나는 거라는 걸 한국 사회는 무시한다. 이런 걸 인식한 사회가 입시라는 이름으로 학생을 밤늦게까지 학교에 가두어 놓을 수 있을까?

이밖에, 개인주의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많다. 개인이 존중되는 민주주의와 장유유서가 존중되는 유교는 공존이 힘든 관계다. 개인주의를 정착시키려거든 유교를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노래해야하는데, 한국사회는 장유유서를 노래하면서 개인주의를 노래하기 때문에 진도가 더 느린 것 아닐까? 또, 이미 한국말이 개인규정을 흐리멍텅하게 만들고 있는데 한국말을 건드리지 않고 개인주의를 얘기할 수 있을까?

일주일에 책을 몇권씩 읽어야하는 치열한 수업도 아니고, 부모가 등록금과 용돈을 지원해주어서 공부할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는데 정작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한국 대학생들은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할까? 이건 국가적으로 엄청난 낭비인데 한국사회는 여기에 별 개념이 없다. 국가가 교육에 대한 비젼이 있다면 이런 일을 방치할까? 국가의 교육비젼없음을 입시제도에만 집착하고, 부모의 자식에 대한 교육철학없음을 학교에만 투덜대는 현실에서 개인주의라는 말이 먹히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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