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된 학교 - 한 사회학자의 한국교육의 패러다임에 대한 지적 성찰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바뀌고 교육에 관한 정책이 새로 나올 때나, 언론이 교육개혁 좀 하자고 교육의 방향을 제시할 때나 거기에 귀가 솔직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건드리지도 못하고 입시제도만 이리 뜯어고쳤다 저리 뜯어고쳤다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제목에 홀려 목록을 살펴보았으나 내 기대에 부응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 교육 제도는 어떻게 돌아가는 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책속에서’란에 소개된 ‘개인주의’에 관한 언급에서 약간의 희망을 갖고, 주문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 교육이 살 수 있는 길은 '개인주의' 실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개인주의를 어떻게 실현시켜야 되는가에 대한 얘기는 없다. 이 책은 하나하나의 사실을 놓고 볼 때는 알찬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개인주의 교육이라는 대안제시에 비해 그 실현과정에 대한 고찰이 깊지 못해 아쉽다. 개인주의는 우리 스스로 얻어낸 개념이기보다 서구 나라들을 들여다보면서 힌트를 얻은 정답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개인주의를 어떻게 정착시켰는 지 그 과정까지 고찰해봐야 하는데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결과’만 얘기하고 개인주의를 정착시켜간 그 ‘정신’, ‘과정’까지는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더 시행착오를 겪는 건 아닐까? 지금쯤은 ‘개인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개인주의를 어떻게 실현시켜야할까’ 이런 얘기가 나와야할 때다. 어차피 이 책에서도 다른나라들 교육방식이 개인주의라는 얘기만 있고 그 나라들은 어떻게 개인주의 교육제도를 이루어냈냐는 얘기까지는 없으니, 우리는 왜 개인주의가 구현되지 못하고 가족주의에 집착하는 지 그걸 진단해 가는 과정이 해결책에 다가가는 일이 될 수 있겠다.

한국의 학교에서 개인주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건 입시제도나 교육과정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등록금’ 문제다. 거기다 가정이 아빠는 밥벌이, 엄마는 살림 이런 구조이다 보니 일상에서 개인주의가 자랄 환경이 못 되었다. 이런 걸 간과한 채 교육에 관해서만 개인주의를 얘기하는 게 설득력이 있을까? 등록금 부담 문제와 이런 삶의 형태를 살펴보는 게 한국의 교육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아니, 이 사회에 개인주의가 정착되게 할 수 있는 열쇠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언제나 입시제도만 뜯어고친다. 얘기가 길어지니까 여기선 등록금 문제만 언급하고 싶다. 후자(아빠는 밥벌이, 엄마는 살림하는 가정 구조)에 대해서는 ‘현대 가족 이야기’라는 책 서평 참고요망. 다시 화제로 돌아가서,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은 국가가 학생에게 등록금을 대출해 주고 졸업후 갚아나가는 방식이거나 거의 전액을 국가가 부담해주는 형태다. 대학은 그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갈 인재를 키워내는 곳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공적비용이 개입돼 있지 않고 부모 손에만 등록금을 의존한다. 이게 지금의 지독한 입시교육의 병폐를 낳는다. 이게 한국사회에서 개인주의 실현을 발목잡고 있는 주인공이다. 이게 부모의 인생도 없고 자식의 인생도 없는 부모와 자식간의 공생 관계를 낳는 거고, 부모가 꾸준히 자식의 교육을 간섭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 거다. 이게 사교육에 집착하게 만드는 원인이고, 평생 자식의 인생을 자신의 손안에 움켜쥐려는 부모를 낳는 거다. 이게 공부를 잘하나 못하나 돈으로 대학에 밀어넣으려는 부모를 낳는 거고,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교육이 차이가 나게 하는 거다. 등록금이 부모 손에서 나와야되니까 노후복지문제도 개떡같은 나라 현실에서 자신들의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을 자식교육비에 투자해야한다. 그러니 결국은 자신의 노후보험을 자식한테 드는 셈이 된다. 이게 자신들은 책 한 줄 안 읽으면서도 자식한테는 공부, 공부, 공부를 주문할 수 있는 부모들의 뻔뻔함을 낳는다.

내 등록금이 부모한테서 나오는데 내가 부모에게 대등한 존재로 보여질까? 더구나 장유유서가 강조되는 나라에서, 부모에 대한 효도가 강조되는 나라에서. 부모한테서조차 독립된 존재로 존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인데 학교에서는 가능할까?

한국 현실에서 국가가 대학등록금을 전액부담하는 현실은 불가능할 것 같고, 미국처럼 국가가 등록금을 대출해주어서 등록금을 부모가 아닌 학생 자신이 부담을 떠안고 다니게 만든다면 지금의 병폐를 낳고 있는 모든 입시제도의 문제는 해결된다. 국가 예산이 딸려 이것도 어렵다면, 학생이 등록금을 벌어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던가. 어떻게든 등록금이 부모손에서 나오는 걸 학생 자신한테로 부담을 옮겨야 한다. 등록금을 자신이 감당하는데 공부하기 싫은 학생이 대학에 가려고 할까? 가진 부모나 못가진 부모나 등록금은 부모의 부담이 아니라 학생의 몫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정작 교육의 주인공들인 청소년의 생각을 배제한 채 사교육에 열올릴까? 등록금이 학생 자신 부담이면 부모가 얼마나 잘 사는 사람이냐에 따라 교육받는 수준이 차이가 날까?

한 인간의 인생을 좌우하는 데 있어 경제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경제개념은 결정적이다. 경제개념이라는 건 입시 공부하듯이 책에 있는 걸 외운다고 생기는 개념이 아니다. 선진국 학생들이 방과후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기 용돈을 벌어쓰는 것처럼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용돈을 벌어가며 자기가 사고 싶은 것들, 자기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자기 스스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가며 해결해 보는 과정에서 몸으로 터득해야 생기는 개념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생들은 그런 시간을 ‘입시’라는 이름으로 박탈당한다. 지금의 입시교육은 이런 관점에서만 얘기해도 엄청나게 청소년들에게 억울한 형태다. 그렇다고, 부모들이 자식들한테 특별히 경제개념을 심어주는 것도 아니다. 한국 부모들의 용돈은 자식을 통제하는 수단이다. 스스로 용돈을 벌어쓰며 훗날 독립된 인생을 살아갈 준비를 미리부터 하는 선진국 청소년들에 비하면 한국의 청소년들은 스스로 용돈을 벌어 손에 든 예산에 맞게 계획을 세워 자신의 꿈을 실현해보는 중요한 인생과정을 압수당한 채 부모의 말에 복종해야하는 기계로 전락해 간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건너뛴 시행착오를 다 큰 어른이 되어 보상받는다. 해외 나가서 싹쓸이 쇼핑하고, 카드빚에 인생 망치고, 유명상품 추종하는 형태로. 공부만 강요시킨 후유증이 이렇게 나타나는 거라는 걸 한국 사회는 무시한다. 이런 걸 인식한 사회가 입시라는 이름으로 학생을 밤늦게까지 학교에 가두어 놓을 수 있을까?

이밖에, 개인주의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많다. 개인이 존중되는 민주주의와 장유유서가 존중되는 유교는 공존이 힘든 관계다. 개인주의를 정착시키려거든 유교를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노래해야하는데, 한국사회는 장유유서를 노래하면서 개인주의를 노래하기 때문에 진도가 더 느린 것 아닐까? 또, 이미 한국말이 개인규정을 흐리멍텅하게 만들고 있는데 한국말을 건드리지 않고 개인주의를 얘기할 수 있을까?

일주일에 책을 몇권씩 읽어야하는 치열한 수업도 아니고, 부모가 등록금과 용돈을 지원해주어서 공부할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는데 정작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한국 대학생들은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할까? 이건 국가적으로 엄청난 낭비인데 한국사회는 여기에 별 개념이 없다. 국가가 교육에 대한 비젼이 있다면 이런 일을 방치할까? 국가의 교육비젼없음을 입시제도에만 집착하고, 부모의 자식에 대한 교육철학없음을 학교에만 투덜대는 현실에서 개인주의라는 말이 먹히긴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