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stotle, 『Nicomachean Ethics』(trans. Roger Crisp), 2000, Cambridge University Press의 서문(Introduction)을 요약한 것입니다. 전문 번역은 아닙니다. 서문을 쓴 사람은 번역자인 Roger Crisp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그가 말한 것과 같이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철학자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이것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의학적인 유비가 많이 나오는 이유인 것 같다. 367년에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했고, 347년에는 아테네를 떠났는데, 잠깐동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선생이기도 했다. 334년 아테네로 다시 돌아와서 리케이온을 세우고 죽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의 후기 저서로, 가장 원숙한 사상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는 초기작인 『에우데모스 윤리학』과 『대도덕학』이 있는데, 후자는 대개 위작으로 간주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출판된 책이 아니고, 그가 만든 강의록을 그의 제자들이 편집해서 만든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진 그의 윤리학적 견해는 이후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로, 평범한 집안 출신이면서 정치적인 활동을 통해 공적을 쌓으려고 했다. 그래서 실용적인 측면이 많이 강조되어 있는 것 같다. 때로는 당시 아테네 사람들의 상식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모습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테네의 문화가 어떤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심각하게 잘못되었다고 인식했다. 그리고 이런 점을 수강생들이 납득하게끔 설명했다.

  소크라테스는 ‘덕은 지식이다.’, ‘악행은 무지에서 비롯한다.’, ‘행복은 덕, 지식과 밀접하다.’ 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이를 이어받아서, 이성이 감정과 욕구를 통제해 영혼을 가지런히하고 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길에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슷한 강령을 수용하고, 이들과 비슷한 개념을 사용해서 문제에 접근한다. 그러나 앞의 둘과 다른 아리스토텔레스만의 특징은, (1) 단순한 덕의 소유와 대비되는, 덕스러운 행위를 강조한 것과 (2) 행복을 구성한다고 간주되는 다른 요소들과 대비해서, 덕스러운 행위를 강조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는 차이가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방법은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받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거짓된 신념을 드러낸다. 그 질문의 과정에 자신의 생각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말은 대부분 플라톤의 대화편 속에서 나타나므로, 진짜 소크라테스와 대화편 속의 소크라테스, 그리고 플라톤 이 셋의 생각을 구분해내는 것이 문헌학적 문제로 남아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생각한 내용을 직접 말하는데, 그 단계가 네 가지 층으로 나뉜다. (1) 연구분야를 선정하기, (2) 다수의 의견과 지혜로운 사람의 의견을 설정하기, (3) 두 의견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부분을 파악하기, (4) 그 문제를 해결할만한 대안을 제시하기. 다수의 상식적인 의견을 중요하게 취급한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의 방법의 실천적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것이 그를 보수적인 철학자로 보이게 하기도 하지만, 그는 모든 분야에서 기존의 견해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토대 위에서 견해를 펼치는 것이다.



  행복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핵심적인 주제는 ‘좋음(좋은 것)’에 관한 고려다. 그는 인간적인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고유한 선을 성취하는 것으로 정의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그의 윤리학이 이기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고려할 때, 그는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별적인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를 걸쳐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도 근대적(현대적)인 윤리학적 시각과 차이가 있다. 그는 한 인간의 삶을 만족의 삶, 정치의 삶, 학문의 삶으로 나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것은 인간적인 가치가 없다. 두 번째 것은 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과 덕스러운 행위를 하는 것 사이에 불일치가 생기기 때문에, 중요한 삶의 모습이긴 하지만 권장되진 않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실제 활동과 무관해보이는 형상을 추구하는 삶이 좋다고 말하는 플라톤의 주장에도 반박한다.

  그에게 있어서 행복은 ‘완성’이다. 그는 행복 자체는 ‘완성’이며 결핍이 없는 것(또는 상태)이라고 정의하며,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덕을 계속 쌓는(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비춰, 수단보다는 목적에 더 우위를 두는 위계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행복은 다른 것의 수단이 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은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은 ‘완성’이다. 다른 측면에서 이 의미를 다시 살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행복한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결핍이 없고 충만한, 즉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는 상태를 뜻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 상태에 도달했을 때에만 행복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며, 이것은 단지 개념적인 제한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 하다. 예를 들어, 즐거움은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할 때 이런 개념적 제한이 사용된다. 즐거움은 지혜와 같이 있을 때 더욱 행복한데, 그렇다면 즐거움에는 결핍이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는 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포괄론적인 것인데, 행복이 덕을 쌓는 활동 모두를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배론적인 것이다. 이것은 철학적 관조가 다른 모든 활동보다도 우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배론적인 해석은 행복이 삶 전체를 관통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는 그의 고려하지 않을 때 생기는 잘못된 해석이다.

  그는 행복 개념을 기능(에르곤)에 의한 논증을 통해 정의하기도 한다. 피리부는 사람은 피리부는 것을 잘 해야 하듯이, 좋은 사람이 되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즉 이성이라는 능력을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성은 덕스러운 활동들을 쌓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런 견해는 여러 가지 비판과 마주한다. 인간의 특성이 과연 이성 뿐인가?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예를 들면, 신)도 이성적인 특성을 가지지 않는가? 모든 이에게 공통된 본질을 실현시키는 것이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하면서, 왜 나를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덕스럽다고 하지 않는가? 등등. 그러나 이런 비판들의 상당수는 야박한 해석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비판들에 대응할만한, 행복 개념에 관한 추가적인 설명도 이 책 안에 담겨있다.

  그의 행복 개념은 운에 물들지 않은 행복 개념을 확립하려는 고대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행복에 대한 운의 현실적인 영향력도 인정했다. 인간의 행복에는 태어났을 때의 주변 환경, 살면서 벌어지는 사건, 죽은 뒤에 벌어지는 사건 등이 영향을 미친다. 특히 죽은 뒤에 벌어지는 사건이 인간의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은 주의해서 이해해야 한다. 우선 그의 행복 개념은 인간 존재를 위한 좋음을 구성하는 것 전부를 뜻하는 것이지, 개인의 정신적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죽은 뒤의 사건은 평가를 깎아내리거나 행복을 감소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영향이 제한적이다. 그리고 이 말은 자신이 좋은 삶을 살았는지 생각할 때 우리는 대개 우리가 죽고 난 뒤 세간의 평가가 어떨지를 생각해본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덕과 중용(균형)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 그 문화는 ‘탁월함’의 문화였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이들과 특정한 영역에서 경쟁하는 것이 권장되었고, 그 가운데서 ‘잘 하는 것’이 바로 탁월함 즉 덕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영혼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영혼은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째는 영양과 육체적 건강에 관련된 부분이다. 둘째는 이성에 복종하거나 거부하는 능력이 있는 부분(감성?)이다. 이 부분에서 탁월하면, 그것은 성격적인(기질적인) 덕이다. 셋째는 이성적인 부분으로, 이 부분에서 탁월하면 지적인 덕이다. 성격적인 덕은 훈육과 습관들이기를 통해서 갖춰지고, 지적인 덕은 교육을 통해서 갖춰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덕스럽다면, 그는 자기가 하는 행위에 관해서 잘 알고, 그의 입장에서 잘 판단해서, 잘 만들어진 성향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를 할 것이다. 이 중에 두 번째 조건인 ‘내면적 판단’은 칸트의 윤리학과 연결시켜서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행위의 덕스러움(도덕적으로 옳음)을 판단하는 데 어떤 내면적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덕이란, 습관이나 실천을 통해 우리에게 불러일으켜진 성향이라고 이해된다.

  과잉과 결핍이라는 대립적 개념은 습관화를 설명하면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너무 많이 먹는 것과 너무 적게 먹는 것은 똑같이 건강을 해친다. 그러므로 적절히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단순히 수량화해서 중간을 계산하는 것은 아니며, 이미 규범적이고 인정된 바를 행하는 것이다. 즉, 용기를 내야할 땐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서도 당당히 맞서야 하는 것이다. 덕스러운 행위에 관한 이런 기준은 아무래도 행위자에 관해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무작위적으로 상대적인 것은 아니며, ‘덕스러운 사람이 할법한 행위’라는 기준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중용(균형)의 교의는 무엇인가? 이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의 부적절함을 교정하는 것이다. 즉 적절한 때에 적절한 느낌을 느낀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때에 적절한 때와 비슷한 정도의 느낌을 갖는 것 그리고 적절한 때에 적절하지 않은 정도의 느낌을 갖는 것 사이의 어느 지점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런 두 방향의 악덕 사이에 덕이 있고, 때때로 그 두 악덕은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이런 점을 살펴볼 때, 단지 절제하고 자제하라는 것만이 그의 윤리학이 말하는 전부는 아니며, 그 적절함은 상황에 의존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견해는 용기와 의분(정당한 분노, indignition)를 설명할 때 다소간 어려움에 부딪히는 것으로 보인다. 의분의 경우, 질투와 앙심 사이의 어떤 것이라고 설명된다. 그러나 질투는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감정으로, 앙심은 다른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좋아하는 감정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얼핏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꼭 어떤 감정들 사이의 지점이 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 맞는 적절한 감정을 드러내고 행위를 하는 것이 덕스러운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변호할 수 있다. 그의 중용의 교의가 내용이 없고 공허하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이 교의를 통해서 말하려는 것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끌리기 쉬운’ 여러 악덕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가 윤리학의 제1교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의 문제, 즉 어떤 상황에 직면해서 어떤 행위를 직접 해보면서 자신을 시험해보라는 것이다.

  최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논의를 이어서 덕윤리학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흐름은 앤스콤의 논문에서 시작되었다. 그 논문은 근대 도덕철학의 언어인 ‘의무’를 버리고, 그 존재가 확실치 않은 ‘법칙부여자’라는 것을 폐기하며, 대신 덕윤리학의 토대로 도덕심리학을 채택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덕윤리학의 흐름을 지지하는 최근의 저자들과 그의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 그에게 최고의 덕은 영혼의 위대함이라는 전근대적인 것이다. 영혼의 위대함이란, 자신이 위대한 일에 쓰일만하다고 생각하며 그런 능력을 갖춘 영혼의 특성을 뜻한다. 둘째, 인간의 본성에 기반한 ‘객관적인 행복’ 이라는 개념은, 그는 인정하지만, 현재에는 대개 거부당하고 있다. 셋째,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강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테네 시민을 대상으로 강의했고, 도시국가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형태라고 믿고 있었으며, 자신의 행복 개념을 민족-국가에 적용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현재의 논의를 진행하는 데 그를 단순한 지지자로 삼기보다는, 인간의 윤리적 조건에 관해 분석한 견해로서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함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발적임과 책임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자발적일 때에만 책임을 물을 수 있다(칭찬하거나 비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수강생의 성격을 고려해봤을 때, 이 논의는 자유의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법적 판단과 관련한 것으로 보인다.

  무지와 강제에 의한 행위는 자발적이지 않고, 따라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강제는 외적이고 물리적인 강제를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범위가 너무 좁고, 내적인 충동 또한 강제의 한 종류일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런 점을 고려해 그는 ‘복합적인 행위’라는 것을 제시한다. 이것은 행위의 원천이 내적인 것이긴 하지만, 비자발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사례를 뜻한다. 즉, 특정한 조건이 아니면 어떤 사람도 그 사람이 한 것처럼 선택하지 않을법한 행위다. 그 행위는 그 자체를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한 것이 된다.

  또한 무지와 관련해서는 반자발적(non-voluntary)이라는 범주를 제시한다. 이것은 내가 고려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어떤 요인에 의해 발생한 경우를 뜻한다. 이것은 비자발적인 것(involuntary)과 다르다(?). 또한 무지 속에서 한 행위와 무지를 통해서 한 행위의 처벌의 경중이 다르다. 무지 속에서 한 행위는, 무지한 상태로 들어간 것과 그 상태에서 벌인 것 양쪽 모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또, 여기에서 말하는 무지는 도덕적인 원칙에 관한 무지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 관한 무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이후에 실천적 삼단논법을 통해 설명).

  덕스러운 사람은 깊게 생각(숙고, deliberation)한 뒤에, 어떤 행위를 할지를 합리적으로 올바르게 선택한다. 따라서 덕스러운 사람의 덕스러운 생각은 이 세계에서 그가 하는 행위 속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책임과 연계된, ‘나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는 소크라테스 식의 논증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만약 성격이 나쁜 사람이라서 나쁜 짓을 해도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이 사례는 소크라테스 식의 생각의 반례인 것 같다), 그는 그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된 것에 관해 책임이 있는 것이다. 나쁜 사람이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된 이유는, 나쁜 행위를 반복하여 나쁜 성격을 키우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의사의 조언을 무시해서 더 아프게 되는 환자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어떤 행위 속에서 어떤 목적을 목표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본성에 따르는) 과정이므로,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책임을 느낄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행위를 통해 추구하는 바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에, 자연적 과정 속에서도 우리는 책임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일상적인 책임 개념 이해에 부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주장에 비춰봤을 때, 그는 도덕적인 운이 영향을 미칠 여지를 주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여러 조건이 좋아서 덕스러운 사람이 되기 쉽기 때문에 그가 덕스러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는 덕스러운 사람이며 칭찬받을만하다. 반면 그렇게 되기 어려운 조건 속에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악한 사람이라면 비난받을만하다. 그는 행위자가 무엇을 충실하게 추구하려고 했는지를 도덕적인 책임 소재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부분으로 간주하지 않고(근대, 현대적 이해방식), 자발적으로 한 일에 관한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정의


  흔히 정의라고 번역되는 ‘디카이오스네’는 간혹 도덕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일반적 정의와 특수한 정의로 나눈다. 우선 일반적 정의는 전체로서의 덕을 의미한다. 이런 덕들은 나와 관련된 덕과 다른 사람과 관련된 덕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정의로운 사람은 이 두 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으로 규정되는데, 이에 따라서 정의는 공동체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더 자세하게는, 덕스러운 사람들이 덕스러운 행위를 할 대상이 있는 ‘공동체’라는 조건 아래서만 정의는 성립한다. 그는 법도 덕과 관련시킨다. 법은, 그 법이 지배하는 시민들 속의 모든 덕들을 구체화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정의로운 것은 대개 법에 알맞은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법 개념을 지나치게 넓게 정의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특수한 정의는 일반적 정의와는 또 다른 개별적인 덕이고, 일반적 정의를 구성한다. 정의와 관계를 맺는 악덕은 탐욕(greed)이다. 자신에게 공정하게 주어져야 할 몫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거나 가져가는 사람이 바로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정의 개념은 여러 방면에서 의문에 부쳐질 수 있다. 탐욕은 과잉인가? 자신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정의로운가 불의한가? 이 경우 결핍은 무엇인가? 등등. 정의를 덕과 나란히 놓고 볼 때의 문제점은 그에 걸맞는 감정이나 행위를 규정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정의는 대개 결과나 정황 등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는 분배의 정의에 관해서도 다룬다. 이를 위해 그는 중용의 교의를 공평(공정, equal)으로 확장시켜서 생각한다. 정의는 너무 많이 가져서 생기는 불의와 너무 적게 가져서 생기는 고통 사이의 어떤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도 산술적인 중간이 아니라 적절함이 문제가 된다. 정의를 성취하는 데는 불의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들은 이후에 몇 가지 점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분배의 토대를 기주능로 분배정의에 관한 여러 이론들을 분류한 것, 교환에서는 동등한 상호성이 정의라고 생각한 것 등이 그 예다. 또한 자연적 정의와 법적 정의를 나눈 것도 눈에 띄는데, 이 둘은 자연적으로 가장 좋은 방식으로 정의를 성취하는 것과 어떤 공동체가 관습과 전통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을 통해 정의를 성취하는 것을 나눈 것이다. 이런 구분은, “합리적 반성에 의해 도출되는 일반적인 선악 개념에 기반해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자연법 전통의 시초가 된다.



  실천적 지혜


  그러나 정의가 다루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공평함’을 통해서 메워진다. 이런 공평함을 알고 실천하는 능력을 ‘실천적 지혜’라고 한다. 이것은 지각과 유사하며, 비법칙적이고 상황과 실정법 등등을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능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안에서 이 능력은, 덕스러운 행위를 하는 것과 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덕스러운 사람은 실천적 지혜를 사용해 특별한 지도원리나 규칙 없이도 덕스러운(중용에 맞는, 균형있는) 행위를 한다고 규정되기 때문이다. 중용에 맞는 행위는 어떤 목표가 “실천적 지혜를 지닌 사람이 할법한 행위를 참고하는 이성적 능력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실천적 지혜에 관한 명확한 규칙이 제시되지 않는 것은, 윤리학은 규칙 몇 개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위에서 영혼의 세 부분에 관해 언급했는데, 그 마지막인 이성적 부분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변하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 과학적 이성이며, 다른 하나는 변하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 실천적 이성이다. 또한 진리를 탐구하는 영혼의 다섯 상태(단계)를 인식(에피스테메), 기예(테크네), 지적인 직관(누스), 지혜(소피아), 그리고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실천적으로 지혜로운 어떤 사람은 이성을 잘(올바르게) 사용하여 삶을 개선한다. 즉, 덕스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것을 해야하는지를 깊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천적 지혜는 실천적 진리를 발견해내는 능력이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지도받거나 배우거나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얻는 종류의 능력은 아니다. 또한 실천적으로 지혜롭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많은 것들을 고려하며 실제로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를 가려내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경험 즉 연륜이 반드시 필요하다.

  덕과 실천적 지혜 사이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규정될 수 있다. 덕은 어떤 목표를 올바르게(알맞게) 만들어주는 것인 반면, 실천적 지혜는 어떤 목표를 올바르게 성취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다소 여유가 있으면서 돈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을 보았을 경우, 그에게 약간의 돈을 주는 것이 관대함이라는 덕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실천적 지혜를 사용해 그 약간의 돈을 어떻게 마련해서 그에게 건네줄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래서 이런 실천적 지혜가 생기기까지는, 어떤 행위가 덕스러운 행위인지를 삶 전체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실험해보아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실천적 지혜는 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이 과정에서 암묵적인 도덕적 규칙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좋다. 물론 이것은 명시적이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뀌는 것은 맞다. 실천적 지혜는 언제나 갈등에 직면하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행위를 해야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천적 지혜는 지각에 기반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대상이 과학적 지식과 같이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자제못함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구성요소에 알맞은 활동들을 모색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제못함’(또는 나약함)이라고 말한다. 이런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소크라테스 식의 사고방식 때문인데, 덕을 지식이라고 생각하기에 ‘알면서도 하지 않음’ 이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경우가 일상적으로 발견되며, 이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일상적인 견해로 간주하고 이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윤리학은 실천적 측면이 전혀 없는 하나마나한 학문이 될 위험이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윤리학인데, 그것에 관해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연구의 의의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는 앎의 방식에 두 가지 상태가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실제적인 앎이고, 다른 하나는 가능적인(dispositional) 앎이다. 가능적인 앎에서 지식은 가능하기만 하고, 실천과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취하거나, 잠들어있거나, 미쳐있거나 하는 상태가 여기에 속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제못함을 이런 상태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가 알맞은 행위를 하게 만들려면, 그에게 그 알맞은 행위 자체를 알려주는 것보다는 그를 그런 잘못된 상태에서 벗어나게끔 해주는 것이 더 좋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우리가 모르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는 이에 관해, 실천적 삼단논법의 형식에서 그 소전제에 관해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전제는 보편적인 것에 관한 언명인데, 만약 이것에 관해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다면 금방 모순에 빠져서 그것을 부정하거나 잘못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나쁜 행위’는 구체적인 상황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것이 잘못 파악된 이유는, 그 행위자가 그것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자제못함이라는 상태를 통해 소크라테스 식의 비상식적인 이해를 해결하려고 한다.



  친밀함


  어떤 이들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친밀함에 다룬 장을 편집자의 실수 때문에 끼워졌다고 주장하지만, 전체의 기획과 일관된 흐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배척할만한 합당한 이유는 없다.

  그의 친밀함 개념에는 부모-자식 관계, 인간-인간의 관계, 사업적 동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적인 관계가 포함된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잘되길 바라는 선의를, 상호적으로, 서로가 느끼게끔 가지고 있는 것’이 친밀함으로 정의된다. 이런 친밀함은 그 자체가 덕인 동시에 수단적인 선이기도 하다. 선의를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느끼는 것을 친밀함이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덕의 정의에 부합한다. 또한 친밀함을 쌓는 것은 행복의 구성요소가 되기 때문에 이 또한 덕의 정의에 부합한다. 반면에 친밀함은 내가 도움을 받거나 덕스럽게 고양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기 때문에 수단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으며, 따라서 덕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로 친밀함을 강조하는 것은 정의 개념의 중요성을 위협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친밀함으로 맺어진 사회라면, 그 사회에는 정의가 필요없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정의는 분쟁에 대해 외적인 조정을 해준다는 함축이 강한데, 모든 사람들 사이가 친밀하다면 그 규정상 분쟁이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면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도 어떤 사회이든 간에 그 속에 정의의 영역은 분명 존재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친밀함은 정의 자체가 아니라 상대방 개인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라는 규정을 유념해야 한다. 공동체를 결성하면 친밀함으로 맺어지지 않은 관계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겐 거의 반드시 정의 자체가 필요하다. 정의와 친밀함에 관한 이런 논의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을 통해 현대적으로 재현되었다.

  친밀함은 ‘그와 가까워지고 싶은(좋아하는)’ 상태를 포함한다. 이렇게 좋아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즐거운 것, 쓸모있는 것, 좋은 것이라는 세 부류로 나뉜다. 이에 따라 친밀함의 유형도 나뉜다. 우선 즐거운 것 또는 쓸모있는 것으로 맺어진 친밀함이 있는데, 이 친밀함에서는 진정한 선의가 발생하지 않고 결국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친밀함이 아니다. 반대로 덕스러운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관계를 맺고 있는 바로 그 상대가 덕스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맺어지는 관계이며, 가장 바람직한 관계다. 다른 관계들은 덕스러운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유사하다. 그런데 즐거워서 좋아하는 것과 덕스러워서 좋아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는 분명히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여기는데, 그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능에 의한 논증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덕스러워서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더욱 가깝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더욱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즐겁거나 쓸모있어서 좋아하는 것은 덕스러워서 좋아하는 것에 비해 덜 우월하다.

  이런 친밀함 개념은, 나쁜 사람들 사이에서도 형식적으로는 성립된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의 형식적 규정에 들어맞는 반례를 떠올리려 노력하기보다는, 그의 여러 가지 시각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즐거움(쾌)


  덕을 함양하는 데는 즐거움(쾌, 쾌락)과 아픔(불쾌, 고통)이 모두 동반된다. 그런데 이 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 관해 크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도덕교육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선 즐거움은 과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정의되고, 시간적인 개념이 부가되는 다른 구성요소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즐거움이 과정이 아니라는 논의 대신에 방해받지 않는 상태라는 규정이 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우선 즐거움은 과정이 아니라는 것에 일관되게 동의하고 있다. 또한 즐거움이라는 말 자체가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이 둘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그의 입장을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어떤 행위를 통해서 발생하는 즐거움(‘그것은 즐거운 행위다’)과, 특정한 정신적 상태를 지칭하는 즐거움(‘나는 즐겁다’)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그는 어떤 종류의 즐거움은 조건과 관계없이 좋다는 것을 강조한다(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즐거움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좋다). 또한 진정 좋다는 것은 이렇게 즐거움을 포함해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상식적 견해를 비중있게 고려하는 그의 철학적 방법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가 연구한 다른 학문분야에서 내린 결론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즐거움이 좋은가? 좋은 원천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인간이 접하는 즐거움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가장 떠올리기 쉬운 것은 육체적인 즐거움이다. 그러나 이는 절제에 의해 제한되는 그 정도까지만 좋으며, 그 이상은 좋지 않다. 육체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에는 덕을 쌓는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즐거움이 좋다고 하는 것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쾌락주의자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있는가? 그는 특정한 즐거움이 행복을 구성한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즐거움으로 간주되는 많은 것들이 사실 언제나 즐거움을 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그러므로 진정한 즐거움은 덕스러운 사람이 그것을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렇게 즐거움을 규정한다면, 세상에 진정 즐거운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즐거움은 대상의 속성이 아닌 경험의 속성으로 간주될 것이다. 즐거움에 관한 이런 주장은 그의 형이상학적 입장과 이어서 생각해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불멸하는 것에 관한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이 불멸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것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단계의 요소와 조화를 이루면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 우리는 불멸을 추구한다. 그런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에서 오는 즐거움은 불멸하는 자(신)의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윤리학이 중요한 이유는, 우선 그가 윤리학 내부의 다양한 주제를 설정하고 그에 관해 명확하고 논쟁적인 견해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 뿐만은 아니다. 그는 인간의 목적에 관한 합리적 반성이 가능한 모든 사회에서 의문에 부쳐질만한 ‘잘 사는 방법’을 탐구의 주제로 설정하고 그에 관해 생각했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에 기반한 인간의 ‘좋음’ 개념 위에서, 그리고 느끼고 행위하는 데 올바르고 그른 방식이 있는 영역들에 모든 시민적인 삶이 걸쳐져 있다는 인식 위에서 제시된 그의 답변이 다양한 관점과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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