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윤리학연습 발표>
1장 : 정의에 관한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규정. 정의는 법에 따르는 것이다; 정의는 공정한 것이다; 정의는 완전한 덕이다; 정의는 다른 사람과 관련된 것이다
이 장에서 밝히는 5권 전체의 탐구 주제는 정의와 부정의(불의)다. 정의 또한 다른 덕들과 같이 중용의 관점에서 탐구될 것이다. 이에 관련된 문제는 정의가 어떤 행위와 관계를 맺는가, 정의를 중용이 되도록 만드는 두 극단의 악덕은 무엇인가가 될 것이다. 또한 정의는 덕이므로, 지금까지의 탐구에 따라 특정한 종류의 상태로 정의된다. 5권에서 등장하는 정의라는 말은 어떤 정의로운 상태(또한 부정의는 부정의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어떤 사람이 (1) 정의로운 행위를 하고 (2) 정의롭게 행위하며 (3) 정의로운 것을 바라게끔 만드는 상태다. 이는 특히 어떤 사람(행위의 주체)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간주된다. 또한 정의로운 상태는 그와 반대되는(부정의한) 결과(즉 행위)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부정의한 상태도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결과(즉 행위)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정의(를 포함한 상태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가 학문이나 기능과 다른 점이라고 언급한다.
정의와 부정의는 여러 방식으로 논의된다. 이렇게 여러 방식으로 논의된 결과 도출된 각각의 정의의 의미는, 유사하긴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동음이의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것은 법을 따르는 것, 그리고 공정한 것이다. 이 가운데 공정하지 않다는 것은, 좋거나 나쁜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관련해서, 좋은 것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하며 나쁜 것은 더 적게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탓에 이들은 탐욕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또한 법을 따른다는 것은, 법이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규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덕있는 사람들이 할법한 행위들을 사람들에게 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법을 따르는 것은 정의로운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의 정의는 가장 완전한 덕이다. 정의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좋은 것이다.
2장 : 정의에 관한 부분적이고 특수한 규정. 정의는 세 가지로 나뉜다. 이익(부), 명예 등을 함께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필요한 분배에 관련된다; 정의는 두 사람 이상의 자발적인 교환과 관련된다; 정의는 두 사람 이상의 비자발적인 교환과 관련된다
그러나 위에서 다룬 일반적이고 전체적인 의미에서의 정의와는 다른, 부분적이고 특수한 의미에서의 정의가 있다. 즉, 어떤 행위가 다른 악덕으로 환원되지 않고 정의 그 자체의 문제인 그런 정의를 규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장에서 도망친 병사는 법을 어기긴 했지만, 부정의한 것이 아니라 비겁한 것이다. 이처럼 전체적인 의미에서 부정의한 행위는 많은 경우 다른 악덕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행위를 통해서 적절한 것보다 많은 이익을 얻었다면, 이것은 다른 악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을 따른다는 전체적인 의미에서의 정의와는 다른,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익과 손해에 관련된 부분적인 의미의 정의를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정의/부정의는 공정/불공정이 된다. 부분적인 정의는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명예나 돈, 기타의 것을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나눌 때의 분배와 관련된 것이다. 둘째는 교환(transaction)에서 교정적인(rectificatory) 역할을 하는 정의인데, 이것은 다시 자발적인 경우와 비자발적인 경우로 나뉜다. 자발적인 것은 이런 교환의 첫 번째 원리가 자발적이기 때문에 자발적이라고 불린다 – 사기, 팔기, 빌려주기, 맹세하기, 보증하기 등이다. 비자발적인 것은 교환의 첫 번째 원리를 밝힐 수 없거나(비밀스럽거나) - 도둑질, 간통, 독살, 성매매알선, 노예 빼돌리기, 기만을 통한 살해, 위증 등 – 강제를 포함한 것 – 폭행, 감금, 살인, 강도, 신체 절단, 명예훼손, 모욕 – 이다.
3장 : 이익(부), 명예 등은 기하학적 비례에 따라 나눠야 한다. 기하학적 비례란, 그 사람이 얼마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에 비례해서 이익(부), 명예 등을 나눠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사람이 얼마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그 사회가 지닌 정치적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부정의는 공정하지 않거나 공평하지 않은 것이며, 정의는 공정하고 공평한 것이다. 공정하고 공평한 것은 공정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부정의에 대해서 중용이다.
정의와 부정의에서 공정함과 공평함을 만드는 데 관계된 항은 최소 네 가지다. 두 사람과, 그 사람 각각과 관련된 몫(shares)이다. 사람들에게 돌아갈 몫은, 각 사람들이 맺고 있는 관계와 동일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는 사람들 각각의 생각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차지해야 하는 몫이 그 관계에 비례해야 한다는 데는 사람들이 모두 의견을 같이 한다.
이를 선분에 비유해보자. 선분 A,B,C,D가 있다고 하자. 정의로운 관계는, 선분 A와 B의 비율(예를 들어 2:3)이 선분 C와 D의 비율(예를 들어 4:6)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는 또 A와 C의 비율(2:4)이 B와 D의 비율(3:6)이 일치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또한 A+C와 B+D의 비율(6:9)이 A와 B의 비율과 일치한다는 것도 함축한다. 여기에서 A와 B는 사람, C와 D는 몫이다.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각자 가진 몫 사이에서 이런 기하학적 비례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 분배는 부정의한 것이다.
4장 : 두 사람 이상의 교환에서의 정의는 산술적인 비례의 원칙을 따른다. 산술적인 비례란, 그 사람이 얼마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모두가 동등하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계산이다.
분배가 아닌 교환에서의 정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모두가 동등하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았다고 해서, 기하학적 비례에 따라 처벌을 덜 받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생겨서는 안된다. 적절한 교환에서 일어날법한 그런 교환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 재판관은 적절한 교환에서 일어날법한 동등한 상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교환의 당사자들에게 이익이나 손해를 가한다. 여기에서 이익은 좋은 것을 적절한 정도보다 더 많이 차지하는 것과 나쁜 것을 적절한 정도보다 더 적게 차지하는 경우를 모두 뜻하며, 손해도 마찬가지로 좋은 것을 적절한 정도보다 더 적게 차지하는 것과 나쁜 것을 적절한 정도보다 더 많이 차지하는 경우 모두를 뜻한다. 이렇게 동등하게 만드는 것에서 재판관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를 다시 선분에 비유해보자. 부정의하게 교환되었다는 것은 마치 전체(예를 들어 10) 가운데서 어떤 사람 A는 B에게 준 것(7)보다 더 적은 것(3)을 받은 상황이다. 여기에서 재판관은 B에게 2의 손해를 주고 A에게 2의 이익을 주어서 적절한 교환에서 일어날 법한 그런 교환(5:5)을 달성한다. 이런 관계를 산술적인 비례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위와 같은 관계에서 산술적인 비례를 참고해서, 재판관이 적절한 교환을 달성하기 위해 개입해야 하는 양이 둘 사이의 차이인 4도 아니고, 3도 1도 아닌 2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적절한 교환이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만큼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속했다가 내어준 그 만큼만 받는 것이다. 이런 교환에서는 이익이나 손해를 입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교환은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절한 교환에서의 동등함은 자발적이지 않은 이익과 손해의 중간이다.
5장 : 서로가 가진 서로 다른 기술이나 상품에 대한 필요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 그런데 서로 다른 기술과 상품들 사이의 교환을 위해서는 적절한 비율이 필요하다. 어떤 기술이나 상품이 다른 것들에 비해 낫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내가 준 만큼 적절하게 돌려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교환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필요와 교환의 사회적 지표가 돈이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은 상호성(되갚음, 보상; reciprocity)을 조건 없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상호성이란 그가 했던 것을 그대로 당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배에서도, 교정에서도 정의가 아니다. 또한 모든 경우에 다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절한 비율에 일치하는 상호성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놓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당한 만큼의 나쁜 것을 되갚아주려고 하며, 그만큼의 좋은 것도 마찬가지로 되갚으려고 한다. 또한 사람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되갚아야 함과 동시에, 자신이 먼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행위가 비례적인 상호교환(reciprocation)을 만든다. 동일하지 않고 비례적인 이유는, 어떤 사람이 만들어낸 물건이 다른 사람이 만든 불건에 비해서 더 나아서는 안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물건들은 비율에 따라서 동등해져야 한다. 또한 이런 비례관계는 물건이 교환되기 전에 먼저 있어야만 하는데, 그래야만 사람들 사이에서 동등한 교환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물건이 교환된 후 비례관계가 있다면, 반드시 어느 한 쪽이 이익을 보고, 다른 한쪽은 손해를 볼 것이다.
돈은 이런 교환의 비율을 나타내고 모든 것들을 측정하는 수단(지표)이다. 돈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물건들은 동등해진다. 특히 이런 수단은 수요를 나타낸다. 만약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없거나 다른 정도로 물건들을 필요로 했다면, 교환은 없었거나 우리가 지금 돈을 매개로 삼아 하는 교환과는 다른 방식으로 발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은 사회적인 약속에 의해 수요를 대표하는 것이 된다. 돈이라는 말은 법에서 나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방식으로 돈은 물건들 사이의 비례관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된다.
또한 돈은 미래에 할 교환을 위해서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어떤 물건을 우리가 지금 당장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돈을 내면 그 물건을 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든 살 수 있다. 돈의 가치도 변하기는 하지만, 다른 물건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그 변화가 적다. 그래서 모든 물건에는 항상 돈이 매겨져 있어야 한다.
위의 논의들에 비춰볼 때, 정의는 부정의를 당하는 것과 부정의를 행하는 것 중간에 위치하는 중용이다. 그러나 다른 덕들과 같은 방식으로 중용인 것은 아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합리적으로 선택해서 정의로운 것을 한다. 정의로운 사람은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자신에게는 더 많이 분배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는 덜 분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해로운 것에 관해서는 반대로 행위한다. 이것은 비례적으로 공평하다(이것이 중용으로서의 다른 덕들과 차이가 나는 점이다). 반대로 부정의한 사람은 이로운 것이나 해로운 것에 관해서 비례에 어긋나는 과도나 결핍을 드러낸다.
6장 :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정의의 부분으로서 정치적인 정의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정치적인 정의는 법(이성, 합리적인 원리)이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지, 사람이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정의에 관한 논의에서는 불공평한 것에 관한 정의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정의에 관해서도 탐구해야 한다. 정치적 정의는 자유로운 사람들 그리고 비례적으로나 산술적으로 공평한 사람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의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이 정의는 아니다). 정의는 그들의 관계가 법에 의해 조정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고, 법적 정의는 정의로운 것과 부정의한 것 사이에서 판결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은 부정의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 부정의는 좋은 것을 자기 몫으로 너무 많이 가져가고, 나쁜 것을 자기 몫으로 너무 적게 가져간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우리가 통치를 허락하는 대상이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법인 이유다. 어떤 한 사람은 위와 같은 부정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행정관(magistrate)은 정의로운 것과 공평한 것을 지키는 사람이며, 적절하게 자신의 몫이 아닌 한 좋은 것의 더 많은 몫을 가져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식으로 다른 이를 위해서 일한다. 이것이 정의가 ‘남 좋은 것’이라고 취급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신 그는 명예와 영광(특권, privilege)을 받아야 한다.
주인에게 정의로운 것과 아버지에게 정의로운 것은 위에서 언급한 이런 정의와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주인과 소유물, 아버지와 나이가 차서 독립할 때까지의 자식 사이의 관계에서는 그 관계를 무효화시키는 부정의(unqualified injustice)가 없는데, 소유물과 자식은 주인과 아버지의 부분이고 자기 자신에게 부정의한 상태에 있을 수는 없다. 또한 그 관계에서는 정치적인 부정의도 없다.
7장 : 정치적 정의에는 자연적(natural) 정의와 법적(legal) 정의가 있다.
정치적으로 정의로운 것은 자연적인 것과 법적인 것으로 나뉜다. 자연적인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관계없이 모든 곳에서 영향을 끼치는 것이고, 반대로 법적인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차용한 이후에 생긴 것들이다. 특별한 법령에 의해 만들어진 결정들도 법적인 것에 포함된다. 어떤 사람들은 정의가 모두 법적인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분명히 어떤 것은 자연적인 것이고, 어떤 것은 법적인 것이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 해도 그 차이가 있다. 이것은 마치 오른손이 우선하는 것이 자연적이지만, 모든 사람이 양손잡이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하다.
약속이나 편의에 따라 정의로워진 것은 마치 표준적인 도량형과 같다. 또한 본성에 의해 정의롭지는 않은 것이 특정한 사람들이나 집단 속에서 정의로울 수는 있지만, 그런 정의로운 것은 모든 곳에서 다 정의롭지는 않다. 하나의 정치체제가 본성적으로 가장 좋다고 하더라도, 정치체제들은 모든 곳에서 각각 다른 것처럼.
정의롭고 법적인 것의 각각의 유형은 구체적인 것들에 관해 보편적인 것으로서 자리매김한다. 정의롭고 법적인 것의 각각의 유형에 관한 덕 속에서 행해진 행위들은 다수이지만, 정의롭고 법적인 것은 하나의 보편자이기 때문에 그 행위들 각각은 하나의 단일한 형체다. 또 부정의한 행위와 부정의한 것, 정의로운 행위와 정의로운 것은 다르다. 정의로운 것은 정의롭지만, 행해져야만 정의로운 행위가 된다. 부정의한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정의로운 행위를 정의의 행위(act of justice)라고 부르고, 부정의한 행위를 교정하는 것을 정의로운 행위라고 부른다.
8장 : 자발적인 것들만이 정의롭다거나 부정의하다고 불릴 수 있다. 자발적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어떤 종류의 행위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 그와 같은 행위를 다른 악덕으로 말미암아 행하지 않고 숙고 끝에 합리적으로 선택한 뒤에 했다면 그 행위를 한 사람은 부정의하다.
정의롭거나 부정의한 행위는 위에서 쓴 것과 같다.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정의롭거나 부정의한 행위한 모든 경우에 그는 정의롭게 행위하거나 또는 부정의하게 행위한 것이다. 비자발적으로 행위했을 경우에는 정의롭거나 부정의하게 행위한 것이 아니다. 우연적으로 정의롭거나 부정의하게 행위하는 것은 가능하므로, 우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예외다. 자발적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칭찬받거나 비난을 받는다. 자발적이라는 말은, 어떤 행위가 그 행위자의 능력 안에 있고, 또한 영향을 받을 사람, 사용될 수단, 또는 그 행위의 목적에 관해서 모르지 않고 알고 있으면서 한다는 뜻이다. 반면 무지 속에서, 행위자 자신의 제어를 넘어서, 그리고 강압 아래서 행한 것은 비자발적인 행위다. 또한 정의롭거나 부정의한 행위가 우연히 정의로워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자발적인 행위를 합리적 선택(숙고의 결과)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손실을 끼치는 방식은 세 가지로 나뉜다. 합리적인 기대와 상반되는 손실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불운(misadventure)이다. 합리적인 기대와 상반되지는 않지만 악의(malice)는 없었다면, 그것은 실수(error)다. 무지 속에서 행해진 것도 실수라고 부른다. 무지 속에서 행해진 것은 그 행위의 본성에 관해서, 또는 사용되는 수단이나 목적에 관해서 행위자가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행해진 것이다. 알고서 했지만 사전에 숙고하지 않은 것은 부정의한 것(injustice)이다. 기개(spirit)나 감정, 다른 인간의 본성에 따라 행해진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이 부정의한 것을 저지르는 것이고, 그들의 행위가 부정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부정의하거나 사악한(wicked) (상태인) 것은 아니다.
그러면 부정의한 사람이 되지 않고서도 부정의한 것을 저지를 수 있다면, 어떤 종류의 부정의한 행위들이 부정의한 것을 저지른 사람을 부정의한 것 각각의 유형 속에서 부정의하게 만드는가? (즉, 부정의한 상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만약 여기에서 행위와 그 사람이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면,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하더라도 그 사람은 도둑이 아닐 것이고, 간통을 했더라도 그 사람은 불륜남(불륜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행위를 합리적인 선택에서 했다면, 그 행위자는 부정의하거나 사악하다. 이렇게 된다면, 불운과 실수나 부정의한 것과는 다르게, 행위의 첫 번째 원리가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 논의는 어떤 행위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관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합리적인 선택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해쳤다면, 그는 부정의하게 행위한 것이고, 비례와 공평함을 공격하면서 한 사람을 부정의하게 만드는 부정의의 행위(act of injustice)를 저지르는 것이다. 반면 어떤 비자발적인 행위들은 이해할만 하지만, 다른 비자발적인 행위들은 그렇지 않다. 무지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지를 통해 만들어진 실수는 이해할만하다. 반면 무지를 통해서 만들어지지 않고 인간에게서 자연스러운 정도의 감정을 통해 무지 속에서 만들어진 실수는 이해할만하지 않다.
9장 : 부정의는 나쁜 것을 (적절한 정도보다) 더 많이 갖는 것과 좋은 것을 (적절한 정도보다) 더 적게 갖는 것으로 나뉜다. 자발적으로 나쁜 것을 더 많이 갖는 것은 자발적으로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좋은 것을 더 적게 갖는 것은 자발적인 경우가 있다. 또 이런 부정의한 관계에서는 적절하지 않게 행한 사람은 언제나 부정의하지만, 적절하지 않은 만큼 받은 사람이 언제나 부정의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정의로운 사람이 되거나 부정의한 사람이 되는 것은 정의로운 행위를 하거나 부정의한 행위를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8장의 논의는 정의와 부정의를 행하는 문제였다면, 9장은 정의롭다고 간주되거나 부정의(한 일)를 당하는 문제에 관한 논의다. 8장에서는 자발적이지 않은 한 정의롭다, 부정의하다고 부를 수 없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정의롭다고 간주되거나 부정의를 당하는 것도 자발적이어야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또는 모두 비자발적인가? 또는 어떤 경우에는 자발적이고 그와 다른 경우에는 비자발적인가? 또, 부정의한 것과 함께 다뤄지는 것(had been dealt with an injustice, suffer something unjust)은 부정의하게 간주되는 것(being treated unjustly)은 다른가, 같은가? 우선 부정의한 것과 함께 다뤄지는 것과 부정의하다고 간주되는 것은 다르다. 이는 마치 부정의한 행위를 하는 것과 부정의한 상태에 있는 것이 다른 것과 같다. 이는 정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정의로운 상태에 있는 것과 정의롭게 간주되는 것도 다르며, 이는 부정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자해를 하거나, 망나니같은 사람에게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사람에 관해 생각해보자. 이들은 그 행위에 관해서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자발적으로 부정의한 것과 함께 다뤄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논의에 따르면, 아무도 자발적으로 부정의한 것과 함께 다뤄지려고 하거나 또는 부정의하게 간주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권에서 언급했듯) 인간의 모든 활동은 어떤 목적 즉 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논의는 실제로 벌어지는 구체적인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부정의한 것과 함께 다뤄지는 것과 부정의하게 간주되는 것을 나눈다면, 자해나 무방비 노출의 경우를 이 논의에서 소화할 수 있다. 사람들 부정의한 상태에 스스로 빠지려고(즉 스스로가 부정의하게 간주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선의 추구)에 의해서 불가능하지만, 다른 악덕에 의해서 부정의한 것과 함께 다뤄지려고 하는 경우는 가능하다. 자제력이 없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는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으므로, 그의 행위는 무지 속에서 한 행위가 되기 때문에 비자발적이다. 또한 누군가가 부정의한 행위를 하지 않는 한, 부정의한 것과 함께 다뤄질 수도 없다. 따라서 부정의한 것과 함께 다뤄지는 것은 비자발적이다.
또 다른 자발적인 부정의의 문제를 살펴보자. 만약 다른 이에게 그가 받을만한 적절한 보상보다 더 많이 분배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부정의한 것인가? 이것은 얼핏 보기에는 자발적으로 부정의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이 더 적게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 사람들이 할법한 행위이다. 또한 그는 그가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으로 인해 고통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부정의하지 않고, 또한 다른 방식의 이익(명예, 고귀함)을 얻기도 한다. 그렇게 많이 분배된 것을 받은 사람이 부정의하지도 아니다. 부정의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란, 부정의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부정의한 것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많은 양이라는 부정의한 것의 첫 번째 원리는 받는 사람이 아닌 주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런 분배 판정을 무지 속에서 내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분배하는 사람이 부정의하게 행위한 것도 아니고, 그의 판정이 부정의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서도 부정의하게 판정했다면, 그는 탐욕스러운(부정의한) (상태인)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정의로운 행위나 부정의한 행위를 하기는 쉬워도, 정의롭게 행위하거나 부정의하게 행위하는 것은 둘 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는 개별적인 행위는 하기 쉽지만, 특정한 상태에서 행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어떤 행위가 정의로운 행위라는 것을 아는 것은 법에 부합하는가에 관한 단순한 앎에 속하지만, 정의롭게 행위하는 것은 어떤 행위가 행해져야 하는가 또는 어떤 분배가 옳은가에 관한, 쉽게 알기 힘든 어떤 것이다.
10장 : 공평무사함(공평함, 근원적 공정성; equity, equitable)은 법이 규정한 보편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에 잘 고려하는 정의로움을 뜻한다. 모든 사건이 보편적인 것에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공평무사함은 정의인 것처럼 보이지만, 무조건 동일한 것도 아니면서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정의로움의 어떤 한 종류보다는 우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것이다. 특히 법적 정의에 대해서 더 우선하는 것으로 보인다. 법은 보편적이지만, 보편적인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인 용어로서의 법을 고려해서, 보편적인 용어로서 설명할 때 실수가 발생할 수 있거나 또는 공백이 생겨있는 부분을 메우는 일은 옳다. 이는 마치 법을 만든 사람이 지금 현재에 와서 그 법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며, 이것이 공평무사함이다.
그러므로 공평무사함은 정의로우며, 어떤 종류의 정의보다 더 낫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정의(unqualified justice)보다 나은 것은 아니며, 구체적인 면의 부족함에서 귀결될 실수보다 더 낫다는 제한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렇게 보편성이 결핍된 곳, 법의 교정이 공평무사함의 본성이다. 몇몇 사건들에 관해서는 법제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이럴 때는 마치 레스보스 섬의 건축에서 쓰이는 납자처럼 유연한 기술이 필요하다.
11장 : 자발적으로 부정의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의를 당하는 것보다는 부정의하게 행위하는 것이 훨씬 더 비난받을만하다. 우연에 의해 더 나쁜 경우가 가끔 있다.
전체적이고 넓은 의미에서의 정의는 법을 따르는 것이다. 법은 각각의 덕에 따른 행위들을 하라고 한다. 반대로 법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금지된 것이다. 보복하려는 것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해를 입힌다면, 그는 부정의하게 행위한 자발적 행위자다. 화를 참지 못하고 자해를 한 사람도 그것을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데, 이 또한 법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자발적으로 부정의하게 행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발적으로 부정의하게 행위한 사람들은, 도시에 해를 입힌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발적으로 부정의한 것과 함께 다뤄졌는데, 아무도 자발적으로 부정의하게 간주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시는 이들에게 불이익을 준다.
또 자기 스스로를 부정의하게 간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여기에서의 부정의는 좁은 의미에서의 부정의로, 부정의한 상태를 뜻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부정의하게 간주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그들은 겁이 많은 상태에 있는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사악한 것이지 사악함 자체를 소유하고 있고 그에 따라 부정의하게 행위하기 때문에 사악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부정의한 사람은 좋은 것을 적절한 몫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다. 이 둘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를 부정의하게 간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정의는 반드시 둘 이상의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다.
합리적 선택의 결과로서 자발적으로, 복수하기 위해 부정의한 것을 가하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부정의하게 간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 이런 경우는 부정의하게 행위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 편으로는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부정의하게 간주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부정의한 행위 없이는 부정의하게 될 수가 없는데, 자기 자신의 부분에게 부정의한 행위를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부정의하게 행위하는 것과 부정의한 것과 함께 다뤄지는 것은 둘 다 나쁘다. 둘 중에는 부정의하게 행위하는 것이 더 나쁘다. 부정의하게 행위하는 것은 비난받을만하고, 완전하거나 그 비슷한 악덕을 포함하고 있지만, 부정의한 것과 함께 다뤄지는 것은 비난받을만하지도 않고 악덕을 포함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의미의 이전과 유사성에 의해서, 한 사람과 그 스스로의 사이에서는 아니지만 그의 특정한 부분들 사이에서는 어떤 종류의 정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의미의 정의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은, 이런 부분들 사이에서 그들의 욕망과 상반되는 것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한 사람 자체에 대한 불의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치 통치하는 사람과 통치받는 사람 사이의 과계 속에서 어떤 정의로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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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까지 나온 니코마코스 윤리학 번역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