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정치철학연습 숙제>
1. 서론
존 롤즈의 『정의론』은 20세기 후반 사회·정치철학적으로 가장 많이 검토된 책 가운데 하나다. 그는 도덕법칙에 관해 생각할 때는 모든 우연적인 것을 배제해야 한다는 칸트의 발상을 정의에 관한 생각에 적용시켰다.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목적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여기에 가치를 부여한다. 사람들이 이런 목적의 체계를 설정하는 과정에는 출생지역, 부모의 신분과 가치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환경 등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많이 개입한다. 롤즈는 이들 요소를 우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목적의 체계들 가운데 특정한 몇몇을 중심으로 사회가 조직되어 있다는 것은, 그 특정한 체계가 목적으로 삼는 것을 성취하기에 적합한 행위가 상대적으로 더 권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다른 체계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은 행위를 제약당할 것이다. 이 경우 행위를 제약당하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적인 요소 때문에 그런 불행을 겪게 된다. 그래서 롤즈는 특정한 목적의 체계에 입각한 태도는 정의를 설정하는 데 바람직하지 않으며, 정의에 관해 생각할 때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롤즈는 이른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개념을 정립시켰다. 원초적 입장이란 정의에 관해 생각할 때 올바른 결정을 내려줄 가상적 상태를 뜻한다. 그 입장에 서있는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내용 가운데 구체적인 것은 알지 못하고 단지 일반적인 사실만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어떤 수단들은 어떤 목적의 체계를 채택하더라도 쓸모있을 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수단들은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선호한다. 이들을 기본 가치 또는 사회적 기본 가치(social primary goods)라고 부른다. 롤즈는 권리와 자유, 기회와 권한, 소득과 부가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정의의 원칙은 사회적 기본 가치의 분배를 규제하는 방식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는 롤즈의 정의론에서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실제로 어떤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목적의 체계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 사람들의 행동을 조정할 여러 제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장 간단한 형식을 제시하려는 것이 롤즈의 목표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고려가 없었다면, 굳이 특정한 목적의 체계가 정의에 관한 생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기본 가치 개념은 구체적인 개인들의 선호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목적론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기본 가치 개념을 정의에 관한 생각에 끌어들이는 것은 구체적인 목적의 체계를 배제하려고 했던 롤즈의 구상과 충돌을 일으킨다. 나아가 롤즈가 정립한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칙은 바로 그 목적론에만 부합하는 분배의 원칙이 될 가능성이 있다. 즉 롤즈는 특정한 유형의 자원을 분배하는 원칙을 정의 일반에 관한 원칙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삶을 규제할만한 원칙이 될 수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점은 특히 사회적 기본 가치 가운데 소득과 부에 관해서 생각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문제를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개인의 삶의 계획을 설정하는 과정이다. 개인은 특정한 목적의 체계를 추구하기 보다는 부 자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조직할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하나는 사회 전체의 조직이다. 사회적 기본 가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사회 전체가 사회적 기본 가치에 가까운 것을 추구하는 목적의 체계를 성립시킨다. 즉, 어떤 행위가 사회적 기본 가치에 가까운 어떤 것을 가져다주거나, 또는 서로 다른 두 가치가 사회적 기본 가치에 똑같이 근접한 것일 경우 둘 중 하나 또는 둘을 합한 양을 더 많이 얻게 해주는 행위를 권장하는 목적의 체계가 세워지는 것이다. 이는 특정한 목적의 체계가 한 사회를 지배하는 거부하고 각 개인들이 다양한 목적의 체계들을 추구하는 것을 보장하려고 했던 롤즈의 의도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2. 사회적 기본 가치 개념과 목적론적 해석 가능성
사회적 기본 가치 개념에 관해 알기 위해서는 우선 원초적 입장 개념에 관해 살펴보아야 한다. 원초적 입장은 이른바 무지의 베일에 싸여있는 상태를 뜻한다. 구체적인 개인이 정의에 관해 고려하면서 원초적 입장의 태도를 취할 때,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구체적인 상황에 관한 정보는 모두 배제된다. 인간은 어떤 목적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런 목적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자연스럽게 선호한다. 그런데 그 목적의 내용이 정해지려면, 우리는 주변 상황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정보들은 이른바 가언적(조건적) 명령을 도출하기 위한 조건들이다. 이에 비춰봤을 때 구체적인 상황에 관한 정보를 배제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가치가 부여된 특정한 목적과 그 목적들의 체계에 관한 생각, 그리고 이들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특정한 수단에 관한 선호 또한 같이 고려할 수 없어진다.
롤즈가 정의에 관해 고려할 때 가장 중점에 두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특정한 목적의 체계가 사회 전체에 강요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다르고 심지어 모순을 일으키기까지 하는 다양한 목적의 체계들이 유통된다. 사람들은 우연적 조건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의 판단과 취사선택에 따라 이들 목적의 체계들 가운데 하나 또는 몇 가지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 정의에 관한 생각에 특정한 목적의 체계가 개입한다면, 그런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삶을 꾸리는 사람들은 그 특정한 목적의 체계를 추구하게 되거나, 그와 다른 목적의 체계를 추구하려 할 때 다양한 형태의 제약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회적 기본 가치는 이렇게 목적의 체계들이 배제된 가운데 남은 일종의 잉여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기본 가치에 포함되는 것들은 특정한 목적의 체계에 구애받지 않는 수단이다. 그래서 특정한 목적의 체계를 선택할 자유, 그것을 성취할 기회, 이를 더 잘 성취할 수 있도록 자신의 환경을 편성할 권한, 어떤 목적의 체계 속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소득과 부 등이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다.
원초적 입장의 개인이 무지의 베일이 걷힌 뒤 자신의 목적의 체계를 더 잘 성취할 수 있으려면, 그 입장 속에서는 사회적 기본 가치를 가능한 한 많이 가져가는 것이 가장 좋은 전략이다. 그 입장 속에서 내가 선호할 수 있는 대상은 사회적 기본 가치 뿐인데, 어쨌든 나는 무지의 베일이 걷힌 뒤에 어떤 특정한 목적의 체계를 추구하는 구체적인 인간이고 그것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되는 정의의 원칙은 바로 이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구상된다. 그러므로 정의의 원칙이 관장하는 분배의 대상은 사회적 기본 가치가 된다.
롤즈가 정립한 정의의 두 원칙 속에서는 사회적 기본 가치 가운데 특정한 목적의 체계를 선택할 자유가 우선성을 부여받는다. 이 자유의 우선성은 침해할 수 없는 것이고, 모든 개인은 다른 개인의 자유와 양립하는 가장 넓은 범위의 자유를 다른 개인들과 동등하게 부여받는다(제 1원칙). 소득과 부, 권한 등은 최소수혜자에게 더 나은 삶의 전망을 제공해줄 수 있는 한 차이가 허용된다(제 2원칙, 차등의 원칙). 자유는 모두가 동등하게 부여받는 반면 소득과 부, 권한은 다르게 부여받는다.
사회적 기본 가치들이 어떤 목적을 추구하더라도 필요하다는 것은, 그 가치들이 모든 구체적인 형태의 목적의 체계 또는 그것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과 교환가능하다는 점을 함축한다. 자유는 특정한 목적의 체계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의미한다. 권한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용이하도록 자기 주변의 환경을 조직하는 권한일 것이다. 소득과 부는 목적 그 자체가 되거나 또는 수단이 되는 대상들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상징하는 물건을 뜻한다. 그러므로 원초적 상황에 있는 개인들은 모든 구체적인 수단과 교환가능한 가치들을 선호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원초적 입장의 개인들이 보여주는 선호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그 입장의 정의에 비춰보았을 때, 사회적 기본 가치에 대한 선호는 구체적인 인간들과 결부된 모든 우연적인 선호들이 배제되어도 남는, 즉 모든 인간들에게 남아있는 가장 기본적인 경향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구체적인 인간들이 우연적인 요소를 충분히 고려할만한 능력이 없을 때 이런 기본적 경향이 나타날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동시에 개인의 삶에는 우연적인 요소가 개입하며, 개인이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의 체계가 이런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달성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한 사회 내에서 사는 개인이 수립한 장기적인 전망과 그에 기초한 계획이 언제나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일반적인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우리의 삶의 불투명함은 구체적인 개인들에게도 사회적 기본 가치에 대한 선호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사회적 기본 가치에 대한 선호는 원초적 입장의 개인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들의 선호 또한 규정하는 일종의 목적론적 체계로 간주할 수 있다.
3. 사회적 기본 가치와 개인의 도덕적 삶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실제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들도 목적의 체계에 의존하는 수단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의존적인 수단을 선호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의존적인 수단은 어떤 사람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을 경우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지만, 비의존적인 수단은 그 목적이 실패하더라도 그 수단을 다른 목적의 체계를 추구하는 데 재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의존적인 성격을 가진 수단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구체적인 개인들은 마치 원초적 입장에 있는 개인들처럼 합리적인 선택에 따라 그런 수단을 목적으로서 선호할 것이다. 물론 이런 수단이 어떤 것으로 형상화될지는 결정되어있지 않지만, 적어도 구체적인 인간들 역시 어떤 수단이 목적에 비의존적일수록 선호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은 일반적인 사실로서 알려진다.
롤즈 본인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런 비의존적인 성격을 지닌 수단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형태는 많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장에 유통되는 모든 상품과 교환가능한 권리를 나타내는, 일반상품으로서의 화폐다. 더 많은 화폐의 소유는, 더 많은 재화와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관료제적인 조직에서의 권한 분배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조직의 상층부에 진입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행위를 조정하고 제어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수단을 목적으로서 추구하는 것 자체가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의 선호 대상이 사회적 기본 가치로 단일화된다고 하더라도 롤즈가 제시한 정의의 두 원칙은 적용된다. 정의의 두 원칙은 이 사회적 기본 가치들의 분배를 규제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우선성을 부여받은 사회적 기본 가치, 즉 자유는 소득, 부, 권한 등 다른 기본 가치들과 교환할 수 없다. 다른 기본 가치들도 그것을 무조건 추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차등의 원칙에 따라 규제된다. 최소수혜자의 삶의 전망을 개선하기 위한 약간의 이익이 이외의 사람들의 가져갈 막대한 이득을 정당화해주며 따라서 롤즈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반박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불평등을 허용하는 제도에 의해 더 많은 사회적 기본 가치들을 분배받는 개인은, 일반적으로 더 적게 분배받는 개인에 비해 소수다. 그러므로 실제 양을 계산해본다면, 그 이익의 차이가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막대하지 않은 이상 최소수혜자 전체의 이익은 최대수혜자 전체의 이익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소득과 부의 측면에서, 일정한 시간 내에 한 사회가 만들 수 있는 재화의 양은 기술적으로 제한된다. 따라서 최소수혜자에게 이익인 제도일수록 그 이외의 수혜자들에게는 손해가 될 수 밖에 없다.
진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정의의 원칙 자체가 아니다. 정의의 원칙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고려된, 목적에 대한 정의의 원칙의 중립성이다. 정의의 원칙이 목적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면, 사회적 기본 가치에 관한 논의를 할 이유가 없다. 그 목적을 달성하는 행위를 정의로운 것으로 간주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다른 사회적 가치보다 더 드높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의 원칙은 목적에 대해 중립이어야하기 때문에, 어떤 목적에도 쓰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목적에 대해 중립적인 수단인 사회적 기본가치에 관한 논의를 펼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사회적 기본 가치는 애초에 수단으로서의 가치만 지니지만, 특정한 목적의 체계에 속하지 않는 환경에 놓인 개인들에게는 사회적 기본 가치 자체가 목적으로 변화한다. 원초적 입장에 있는 개인들에게 사회적 기본 가치에 대한 선호가 있다는 것은 롤즈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고, 또 여기에 기반해 정의의 원칙을 이끌어내고 있다. 원초적 입장의 개인들이 그 본성에서 특정한 선호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롤즈의 논의의 설정에 비춰봤을 때, 그들은 사회적 기본 가치에 대한 선호를 합리적으로 선택한다.
이런 선호가 우리의 도덕적 삶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묻는다면, 그 대답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은 구체적인 목적의 체계들 안에서 추구되는 대상들이다. 롤즈의 논의를 따르면, 사회적 기본 가치는 그런 대상들을 추구하기 위해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것’일 뿐,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것을 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기본 가치 자체만 추구하는 삶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 또한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도 없다. 그는 그 수단을 통해서 실제로 아무 것도 성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사회적 기본 가치와 정의의 영역들
이런 측면에서 왈쩌는 롤즈는 비판하면서 지배적 재화와 재화의 독점, 정의의 영역에 관해 논의한다. 지배적 재화란 “어떤 재화를 소유한 개인이 그 재화를 가졌기 때문에 여타의 재화를 광범위하게 소유할 수 있는” 재화를 뜻한다. 사회적 기본 가치는 바로 이런 재화에 속한다. 그러나 왈쩌가 보기에 이런 재화가 등장하는 것은 긍정적이지 않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들의 임의성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논리로 이탈해서 사회적 의미를 형성하고, 하나의 지배적인 가치로 사회 전체를 통제하려는 경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왈쩌는 롤즈가 구상하는 것처럼 “모든 도덕적·물질적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기본적 가치들의 집합을 단 하나로 구상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재화는 구체적인 사회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어떻게 쓰여야 할 지가 결정된다. 그렇다면 어떤 재화를 정의롭게 분배하는 일은, 그렇게 획득된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재화는 불균등한 분배가 그 의미에 의해 허용되지만, 또 다른 어떤 재화는 평등한 분배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롤즈가 제시한 정의의 두 원칙은, 왈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지배적 재화’에 관한 분배의 정의의 원칙을 제시한 것일 뿐, 그것이 그 사회 전체의 정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다. 지배적이지 않은 재화의 분배에도 그에 따르는 정의의 원칙이 있다. 각각 다른 재화의 분배 정의를 확립하는 우선성의 원칙 또한 그런 구체적인 사회가 확립시킨 다양한 관습에 따른다. 정의로운 분배가 이뤄진다는 것은 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특정한 재화에 관해 받아들이고 있는 의미와 실제 분배상태 사이의 간극이 좁다는 것, 또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어서 사회가 부정의하다는 생각을 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회가 얼마나 정의로운지는 각각의 구체적인 재화들이 얼마나 정의롭게 분배되는가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 이렇듯 재화들 사이에는 상호교환이나 침범이 불가능한 일종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 왈쩌의 주장이다. 이런 입장에서, 롤즈는 특수한 유형의 재화에 관한 정의로운 분배의 원칙을 세우는 데 성공했을 뿐 사회 전체의 정의를 평가하는 원칙을 세우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왈쩌는 자신의 접근방식에 따르는 정의를 복합적 평등이라고 명명한다. 이 명명에서는, 롤즈의 정의의 두 원칙에 단순한 평등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분배의 원칙이 원칙적으로 그리고 실제 우리의 도덕적 삶도 더 잘 설명해준다는 의미를 담으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정의에 관한 이론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우리의 도덕적 삶에 적용하기 힘들다면, 그 정의론은 실패했다고 간주해야 한다. 그것은 분명히 실천적인 의도에서 세워진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롤스가 제시한 사회적 기본 개념에 대한 원초적 입장의 개인들의 선호는 우리의 삶을 묘사하는데도 실패하고, 한정적인 정의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만 성공했다.
5. 결론
인간과 사회에 관한 일반적인 사실에 비춰봤을 때, 구체적인 개인들에게도 특정한 목적의 체계의 추구와 그 수단에 대한 선호가 아닌, 사회적 기본 가치 자체에 대한 선호가 나타난다. 그들이 처한 조건은 원초적 입장의 설정과 결정적인 부분에서 유사하고, 원초적 입장의 개인이란 사실 구체적 개인들에게서 가장 핵심적이고 공통적인 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개인들은 사회적 기본 가치의 구체적인 형태, 즉 화폐나 더 큰 권한을 가진 직책 등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런 선호가 자신이 채택한 목적의 체계를 달성하고 번성시키기 위한 수단인지, 아니면 사회적 기본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선호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특정한 목적의 체계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했던 롤즈의 의도는 달성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 사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선호하는 것 또는 다른 더 많은 재화와 교환 가능한 사회적 기본 가치를 선호하는 것을 중심으로 조직된 목적론적 체계와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양립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왈쩌의 논의를 따르면, 각각 다른 재화에는 각각 그 사회적 의미에 의존하는 정의의 원칙이 있다. 이들 원칙은 그 사회의 관습과 합의에 따라 결정되어 있으며, 그렇게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롤즈의 논의는 이런 측면에서 한정된 재화의 영역에서의 원칙만 제시했을 뿐, 한 사회의 정의 일반에 관한 척도를 제시하지는 못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죤 롤즈, 『사회정의론』(황경식 옮김), 서광사, 1985
마이클 왈쩌, 『정의와 다원적 평등』(정원섭 외 옮김), 철학과현실사, 1999
스테판 뮬홀·애덤 스위프트,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김해성, 조영달 옮김), 한울아카데미,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