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중국현대철학연습 숙제>
1. 문화열 현상의 역사적 배경과 문제의식
문화열은 1980년대에 '문화' 개념을 중심으로 벌어진 다양한 학자들의 논쟁을 뜻하는 단어다. 문화 개념의 복잡함 만큼이나 이 논쟁 역시 80년대 전체에 걸쳐서 벌어졌는데, 중국의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참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규모였다. 이 현상은 처음에는 단순한 학술적 논쟁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당의 노선과 관련해서 그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이 논쟁에 직접 뛰어들고, 이 개념을 정의하는 방향이 이후 중국의 지향점을 설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당시 지식인들의 인식이 보태지면서 논의의 층위가 매우 다양해졌고, 다양한 입장들이 출현했다.
문화열 현상의 배경은 역사적 배경과 당대의 현실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짚어낼 수 있다. 먼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중국의 지식인들이 '문화'에 관해서, 특히 '중국의 문화'에 관해서 논의한 전통은 상당한 기간을 거슬러 올라가서도 살펴볼 수 있다. 5.4신'문화'운동, '문화'대혁명이 그렇고, 문화열도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신해혁명과 5.4운동 시기에 중국의 전통을 어떻게 해석해야하고 또 앞으로 중국의 역사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해야하는가에 관한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눈여겨볼만한, 몇 가지 관점이 등장했다. 양수명, 장군매 등 문화적 보수주의자로서 중국의 전통문화를 현대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호적 등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전통문화에 반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진독수와 이대조 등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관점에서 전통문화를 봉건적이고 계급질서에 편향된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런 갈래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이런 비슷한 유형의 갈래가 문화열 현상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당대의 현실은 이런 지식인들의 열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모택동이 죽은 뒤, 화국봉과 등소평을 비롯한 공산당 내의 일파는 모택동의 노선을 계승하려던 4인방을 몰아내고 새로운 당 지도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1977년 당대회에서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선언하고, 1978년 이른바 농업, 공업, 군사, 과학기술 분야를 육성한다는 이른바 4개 현대화 강령을 당의 과제로 설정했다. 이는 '인민의 정신적 혁명으로부터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간다'는 모택동의 노선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생산력 발전에 당이 전력하겠다는 것, 즉 선부론(先富論)의 채택을 의미했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인민공사에서 지방자치조직 또는 조합으로 넘어가는 부분적 공유-사유화 정책이 추진되었고, 서양의 국가들과 합작회사를 성립할 경제특구가 조성되었다. 등소평의 이런 개혁개방 노선은 모택동사상으로 단일화되었던 중국 사상계를 해빙시키는 역할도 동시에 해냈다. 그러나 이는 양면적이었다. 개혁과 개방의 제스처를 취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법치를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했으나, 여전히 모택동사상은 당의 지도 이념 가운데 하나였고 이에 관해 비판적인 지식인은 처벌을 면할 수 없었다.
2. 문화열의 전개
그러나 개혁개방 정책의 시행이 중국과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아주 중대한 국면이며, 미래를 설계하는 정책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라는 점은 매우 분명했다. 또한 모택동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언권이 자유로워진 것도 분명했다. 가장 결정적으로,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은 독자적인 혁명노선을 걸으면서 상대적으로 폐쇄되어있던 중국 사회를 다시 한번 국제경제, 그리고 그와 항상 동반되는 서양의 문화에 노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 1979년 미국과 중국은 국교를 수립했으며 80년대를 걸쳐서는 소련과의 관계도 차츰 완화되었다. 1984년에는 영국과 홍콩 반환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런 경제적 개혁개방 정책은 거의 동시에 정치적, 문화적 개혁개방 요구를 불러일으켰다. 개혁개방과 함께 밀려들어온 것은 단지 상품 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이후 전개된 각국의 다양한 사상사조들 또한 같이 유입되었고, 중국의 전통문화를 포함해서 다양한 학문분과들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런 학술적 작업들은 또한 지금까지 모택동 사상을 중심으로 펼쳐진 중국과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여정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평가하며, 동시에 역사적 전환점 속에서 앞으로 중국의 발전 노선을 설정하려는 실천적 목표를 지향했다.
1980년 이후 전국 각지에서 '중국문화사 연구자 좌담회', '중국 근대문화사 토론회', '전국 동서양 문화비교 토론회', '제1차 국제 중국문화학 토론회' 등 좌담회가 토론회가 연이어 개최되었고, '중국 사상문화 연구중심', '동서양 비교문화 연구중심', '근대문화사 연구실', '중국 사상문화사 연구실' 등의 연구단체가 조직되어 체계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이들은 『중국문화연구집간』, 『국학집간』, 『중서문화 비교연구』, 『동서양 문화연구』, 『중국 근대문화문제』 등의 잡지를 발간했다. 1985년에서 1986년 사이에 발표된 문화연구는 200여 편에 달하며, 연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중국 내의 원로와 소장학자, 서양의 중국문화연구자들, 홍콩과 대만 등 중국 외 지역의 중국인 학자 등으로 매우 다양했다.
이들의 주요 연구 주제는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문화 및 문화의 정의, 대상, 구조, 범위 등 문화에 관한 일반이론의 정립. 둘째, 중서문화 비교연구를 통한 중서문화 각각의 특징과 우열의 토론. 셋째, 중국문화를 거시적으로 고찰, 중국 전통문화의 특징과 핵심 그리고 발전변화 법칙의 연구. 넷째, 각종 문화현상의 전문역사, 전문주제, 어떤 구체적인 문화현상의 연구와 토론. 문화교류, 갑골해석학, 도예, 선종, 경학 등이 여기에 해당. 다섯째, 중국문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둘러싼 주제. 중국 현대문화아 전통문화 그리고 서양문화의 관계에 관한 토론.
위 주제들은 연구의 분야나 성격에 의해 나눠질 수 있지만, 이들의 목표는 결국 실천적 문제에 관한 이론적 답변을 제공하려는 것, 즉 중국의 미래상 정립으로 모인다. 먼 시간을 건너야 하고, 사회주의적 실험이 이미 한 차례 완료된 상황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의 신문화운동과 문화열 현상을 유사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측면에서 노선의 구도 또한 신문화운동 시기와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은 한 편으로는 현대신유학으로 전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자본주의로 변형되어 문화열 논의에 뛰어들었다. 반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할 수 없는 중국공산당은, 표면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을 내세우되 문화대혁명 이후 부분적인 이념적 공백을 메우고자 민족주의적 감정을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중도적 입장을 택했다. 반면 개혁개방 정책을 더욱 급진적으로 추진할 것을 원했던 일부 지식인들은 입각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경제를 달성해야 한다는, 이른바 '철저재건론'을 주장했다. 이는 일면 등소평의 선부론과 큰 차이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의 핵심은 공산당의 이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 이념은 학생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나, 천안문 시위에 대한 잔혹한 진압으로 인해 수그러들었다.
3. 문화열 시기의 노선
(1) 문화보수주의
문화열 시기 문화적 보수주의 노선의 핵심은 중국의 전통사상,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유가사상에 관한 전면적인 (긍정적) 재평가와 계승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중국은 유가사상을 연구하는 측면에서 암흑기였다. 모택동이 집권한 이후, 당을 영도하는 사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이 채택되었으며, 그에 따라 유학사상은 봉건적이고 계급질서를 옹호하는 구사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공자를 파는 상점을 부수자!'는 이 시기를 상징하는 구호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개혁개방 정책의 시행은 유가사상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 시기 문화적 보수주의 노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 내부에서 유가사상을 새롭게 조명하고 되살리려고 한 노력에서 비롯된 현대신유가 사조다. 문화대혁명이 거의 끝나가는 1978년, 잡지 『중국철학』 제1집에 양수명과 풍우란, 웅십력의 글이 실리면서 중국 내부에서의 현대신유가 연구가 시작되었다. 1984년 유가사상 연구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공자기금회'와 민간연구단체인 '중국문화서원'이 설립되면서 이 분야의 학술적 사업은 더욱 활발해졌다. 여기에는 중국 내부의 학자들 뿐만 아니라 중국 외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인 학자들까지 대거 참석하였다. 또한 1985년 광주의 화남 사범대학에서 중국근현대철학사 학술토론회가 열렸는데, 이것은 건국 이래 중국 근현대철학사에 대해 처음으로 열린 전국적 학회였다. 이 자리에서 중국 내부에서 현대신유학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대만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조금 더 이른 시간에 나타날 수 있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장개석 독재 정부가 유가사상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58년 대만의 잡지 『민주평론』에는 모종삼, 서복관, 당군의, 장군매의 공저로 「중국문화와 세계 : 우리의 중국 학술 연구 및 중국문화와 세계문화 앞날의 공동인식」 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들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정치에 있어서는 정통을, 철학에 있어서는 그 도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후 중국 내부에서 모택동사상의 영향 때문에 유가사상 연구가 차질을 빚었던 것과는 달리, 대만에서는 현대신유학 사조를 정립하고 독자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현대신유학 사조 안에도 다양한 흐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신유학 사조에 속하는 이들은 모두 기존의 관점들, 특히 서양학자들의 중국학 연구에 대해 비판적이다. 또한 중국의 역사와 전통에 속하는 내부적 관점으로부터 유가사상을 평가하고 그 현대적 의미를 발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중영(成中英)은 이런 관점에서 중국 전통사상의 현대적 의의를 내재적 인간주의, 구체적 합리주의, 생동적인 자연주의, 수양의 실용주의로 요약하고 있다. 또한 유술선(劉述先)은 유가사상의 도덕철학이 인간의 도덕적 발달에 관한 서양의 대표적인 이론인 콜버그의 도덕심리학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그보다 더 나은 면이 있다고 평가한다. 콜버그의 발달단계는 외재적인 도덕법칙을 따르는 것에서 최고단계를 이루지만, 유학의 도덕철학은 도덕법칙의 내용을 마음 안에서 찾기 때문이다.
현대신유학과 다른 한 갈래는 유교자본주의 주장이다. 이것은 동아시아 지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관해 연구하던 서양의 학자들이 그 문화적 배경으로 유가적 전통을 지목하면서 시작된 주장이다. 전통사회에서 발견되는 "재부, 명예, 건강에 대한 강렬한 동기, 그리고 가족과 조상과 능력이 있는 사람에 대한 경외 - 이러한 의심할 수 없는 결정적인 문화적 요소는 맹렬한 경제적 행동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주장은 일정 정도 개인의 행위동기를 중심으로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막스 베버의 문화연구 방법론을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베버는 개신교의 윤리는 자본주의를 뒷받침했지만 유교와 도교의 윤리는 자본주의적 사회를 잉태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는데, 유교자본주의는 이런 견해에 반대하여 유가적 전통도 충분히 자본주의를 뒷받침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유교자본주의 주장은 한 때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한때의 유행으로 끝났으며, 지금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주장에 대한 반박은 간단하다. 만약 유가적 전통에 실제로 그런 요소가 있다면, 왜 당대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또한 똑같이 유가적 전통을 계승한 사회라고 하더라도, 대만이나 싱가폴, 일본 등의 경제는 발전했으나 중국, 한국, 북한, 베트남 등은 당시까지도 저개발 상태이거나 또는 개발도상국들 가운데서도 후진적인 편에 속했다. 결국 유교자본주의는 흔히 80~90년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불린 특정 국가들에 한정된 연구이며, 학술적인 의미는 거의 없다.
(2) 중국공산당의 노선
중국공산당의 공식적 노선은 비판적 계승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선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화할 때 취했던 태도, 즉 공산주의적 기조는 유지하되 중국의 현실에 맞도록 변형한다는 정신의 연장선상으로 파악된다. 당의 노선을 전면적으로 바꾸지는 않지만, 전통 문화와 "'비판'의 관계를 강조할 때 일체의 착취계급 사상의식과 결별하면서 민족문화 허무주의를 반대하고, '계승'의 관계를 말할 때 복고주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정립하였다." 이들은 ""봉건주의의 찌꺼기는 버리고 민주주의의 알맹이는 흡수한다."는 『신민주주의론』의 명제에서 이론근거를 찾고 있다."
계승할 것과 버릴 것을 찾아내려면 우선 전통 문화에 관한 정확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노선에 속하는 이종계(李宗桂)는 전통문화에 관한 논의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몇 가지 요소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중국의 전통문화는 윤리적 사고에 근거한다, 학문과 실용이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현실정치에 관심이 많다, 주체의식을 고양한다, 변증법적 사유가 풍부하다, 정체(整體) 관념이 강조돼 조화를 추구하고 공동체 중심으로 사고한다, 직관(직각)적 사유에 크게 의지한다, 경전중심적이다, 인간관계를 중시한다, 무신론적이다 등등.
또한 이런 분석에 따라 실제로 계승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것도 과제이다. 장대년(張岱年)은 반드시 배척해야 할 것과 계승해야 할 것에 각각 4가지를 꼽는다. 먼저 배척해야 할 것은 반민주적인 계급사상으로서의 삼강(三綱), 반개인적인 가족중심의 전통, 직관에 의지하는 사상적 방법, 비논리적이고 비약이 심한 사유방식이다. 이들은 반드시 민주주의, 개인주의,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반면 계승해야 할 것은 무신론, 변증법적 사유, 인본주의, 애국주의적 측면이다. 이런 것은 현대 사회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중국 전통문화에서도 그 풍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공산당의 이런 노선에서 정치적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우선 비판적 계승론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그 내용이 약간 다르게 느껴진다. 즉, 비판적 계승론이라고 이름이 붙어있지만 사실은 공산당의 공식적 노선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노선이다. 민족문화에 관한 연구는 공산당의 정치적 이념에 부차적이며, "당의 문화전략 아래 물질문명 발전에 대한 조정과 지도 역할을 담당할 수단으로서 비판계승론이 자리매김된다." 공산당에게 민족주의란 개혁개방 정책에 잇따라 발생하는 반공산당적인 연구들, 즉 완전히 전통문화를 옹호하는 문화적 보수주의자들과 완전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요구하는 세력들에 대항하는 이념이 된다.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중국 전체를 운명공동체로 묶어놓은 뒤 당의 지도에 따른 단합과 발전을 강조함으로써, 당과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을 수구 또는 반동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비판적 계승론자들은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을 "계급적 편견이 유학 안에 알게 모르게 표현되어" 있다면서 비판한다. 유가의 "'정통사상'은 중국 고대에 장기간 어용적 의식형태로 존중되고 받들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제도와 정치의 상부구조, 즉 군주전제·중앙집권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철저재건론자들에게는 중국의 구체적인 현실을 모르고 무조건 서양의 제도만 추종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전면적 도입'은 당연히 민족의 주체적 정신을 발휘한다는 전제 하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 우리들의 사회주의 제도를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독립과 통일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3) 반당적 개혁 노선 - 철저재건론
반면 전통문화의 여러 요소들이 현대 문명의 여러 측면들과는 조화롭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생각에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나아가서 마르크스-레닌의 원래 이론에 따르면 사회의 발전단계는 언제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단계를 거쳐야하는데 중국은 그 단계를 겪지 않았으므로, 이 단계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데 까지 나아갔다. 이들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미에서 이들을 '철저재건론자'들이라고 칭한다.
철저재건론을 주창하고 지지한 사람들은 대개 젊은 소장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당시에 유럽과 영국, 미국에서 유행하던 여러 이론들을 이용해 중국사회의 특징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김관도(金觀濤)의 '중국사회 초안정구조론'이다. 그의 이 주장은 문화를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서 파악하는 사회학이론을 중국의 전통문화연구에 적용한 것이었다. 그는 "중국 봉건사회가 중앙 집권적 구조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분산적인 소농 경제를 묶어주는 내재적 조직력=유생 계층으로 조직된 중앙 집권적 관료 조직이 존재했고 통일적인 문자와 발달된 교통 통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 이데올로기와 관료 기구의 '일체화' (...) 로 말미암아 중앙집권적 전제 정치가 추진되어 소농 경제 사회에서 등장하는 귀족화 경향과 농민의 지주에 대한 종속화 등이 억제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이런 초안정구조 속에서 중국의 봉건적 제도는 서양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장기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
더불어, 그가 문화는 하나의 전체적인 체계로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적 계승론자들의 주장이나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전통문화의 특정한 요소들을 떼어서 현대화한다거나 계승한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화하려고 하거나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요소가 제외된 다른 문화적 요소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로 바뀌는 것, 한 체계가 다른 체계로 교체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세계가 이전의 세계와 경제적, 정치적으로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에 알맞는 문화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김관도는 자신의 연구가 알려진 것처럼 중국의 전통문화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연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현재 중국공산당의 노선인 중국 특색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중국의 전통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간주한다.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하여 마르크스주의가 지배적인 사상이 되자 전통은 표면적으로 잊혀졌지만 심층구조의 측면에서는 도리어 전통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이념의 발전, 특히 모택동 사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이념은 이른바 "유가화한 마르크스주의"다.
결국 이들의 정치적 요구는 중국의 정치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이른바 '철저한 재건'으로 기울어진다. 철저재건론과 흐름이 완전히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이택후의 서체중용론이 이런 정치적 요구를 가장 잘 압축해서 보여준다. 더 이상 중국의 전통사상과 문화는 현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런 전통은 심층적인 의식구조에 자리잡고 있어서, 현재 중국 공산당의 이념조차도 전통문화적 색채가 강하다. 경제발전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교설에 맞서서, 모택동은 정치적 운동을 통해 공산주의 혁명을 이끌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50년대와 60년대, 70년대를 거치면서 중국은 모택동주의가 실천할 수 없는 이상이라는 점을 배웠다. 그렇다면 중국에게 남겨진 과제는 현대에 걸맞는 사상적 활동을 위해 구체적인 경제구조를 바꾸는 것, 특히 경제단계에 맞는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것은 저발전상태인 중국에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자는 정치적 요구로 쉽사리 바뀔 수 있었다. 또한 이런 발전을 지도할 사상 또한 서양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이택후의 주장에 따라서, 정치적 자유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게 되었다.
4. 결론 - 천안문 사건
철저재건론자들의 주장은 젊은 학생들과 소장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 이들의 주장과 요구는 80년대를 지나면서 점점 커졌다. 중국 공산당은 당의 지도이념과 정면으로 맞서는 이들 운동을 탄압했지만, 도리어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참신한 목소리를 지닌 합비(合肥) 과학기술대학의 천체물리학자 방려지(方勵之)가 학생들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 그것은 당 원로들을 전율케 했다. 맨 처음 합비 과학기술대학에서 시작되어 1987년 1월에는 북경으로, 그리고 전국으로 확산된 학생 시위의 배후에는 그의 사주가 있다고 원로들은 생각했다. 학생들은 '자유의 꿈'을 선전하는 깃발을 들고 다녔으며, 민주주의가 새로운 종교인 것처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 총서기였던 호요방(胡耀邦)은 이들 학생운동에 우호적인 편이었으며, 이를 우려한 등소평은 1987년 1월 그를 총서기직에서 해임하고 조자양(趙紫陽)을 임명했다.
호요방이 사망하자 전국의 학생들은 1989년 6월 4일 그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였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그 추모열기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요구하는 시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두 어달 전부터 감지되던 불안한 기운에 공산당 지도부는 인민군의 전격 투입을 결정하고, 탱크와 총으로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했다. 학생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특파원과 텔레비전 기자들이 마지막 장면을 보도하기 위해 광장에 남아있었다. (...) 그들(인민군)은 폭력과 유혈사태가 목격당하거나 취재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미국 CBS 기자는 카메라를 뺏기고, 얻어맞은 후 밤새도록 자금성에 구금되어 있었다. 홍콩과 타이완 기자들도 감금당한 채 일요일 아침에야 석방되었다. 그러나 어둠과 혼란과 위험 속에서도 카메라는 계속 돌아갔고 녹화했다."
천안문 사건은 문화열 현상을 일단락지었다. 개혁개방 정책에 맞물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다던 지식인들의 포부는, 공산당 지도부가 여전히 자신들의 노선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피를 흘려 확인함으로써 수그러들었다. 이는 문화열 현상의 성과와 한계, 그리고 과제를 동시에 보여준다. 문화열 현상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설계를 그려보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열망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조직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았고, 당은 결국 애초에 기획한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충돌의 결과가 천안문이라는 비극으로 드러난 것이다. 문화열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중국은 공산당 일당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수반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는 여전히 수용되지 않고 있다. 문화열 현상이 성취하고자 했던, 그러나 천안문으로 인해 유예된 그 요구는 여전히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과제로 남아있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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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엮음, 『현대중국의 모색』, 동녘, 1992
코지마 신지(小島晋治)·마루야마 마츠유키(丸山松幸), 『중국근현대사』(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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