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현대철학연습 발제. 프랑크 하르트만, 『미디어철학』(강웅경, 이상엽 옮김) 13장 요약>

 

1. 역사의 종말

 

   20세기 이후 인간을 둘러싼 매체환경은 완전히 변했다. 매체는 사실을 전달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기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매체 기술의 발달이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많은 매체이론가들은 인간이 이 기술에 지배되었다는 도식으로 상황을 파악한다. 그러나 플루서는 이런 도식만으로는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매체환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고,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매체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소통에 관한 학문, 즉 코뮤니콜로기Kommunikologie라고 이름붙였다.


   코뮤니콜로기의 입장에서 세계사는 두 단계로 해석된다
. 하나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변하는 단계로, 산업혁명 시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 다음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방식이 변하는 단계로,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현상이다. 이 단계에서는 알파벳에서 비-알파벳으로 나아가는 코드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변화가 어떤 정치적 효과를 일으킬지 현재 우리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코드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방식(즉 존재방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코뮤니콜로기는 바로 존재방식의 변화를 연구 과제로 삼으며, 전통적인 철학적 연구를 대체하는 기획이 된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알파벳 코드로 기록되었다
. 이런 의미에서 비-알파벳 코드를 향한 변화는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고, 동시에 역사가 새로 쓰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과연 플루서의 코뮤니콜로기가 사용하는 이런 수사는 단순한 표현이나 선동에 해당하는가? 또는 매체환경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방법인가?

 


2.
텔레매틱스 사회

 

   플루서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놀라운 것이 하나 있다. 그는 인터넷 세계나 컴퓨터 환경 등 우리가 지금 늘 쓰고 있는 매체환경이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점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매우 정밀하게 예견했다. 그는 현상학적 방법으로 매체를 분석해 그 일을 해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전화기는 일대일 소통수단이기 때문에 발신자와 수신자의 주체성을 지켜주는 매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플루서는 통화를 위해 가설된 여러 종류의 선들이 실제로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매체를 가능하게 해주고 작동시키는 체계이며, 이들을 이용하는 (문화적) 코드가 바로 전화번호라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전화 체계는 인간이 사용할 비
-알파벳 코드를 암시한다. 역사의 종말 이후에 도래할 사회의 의사소통은 전화번호와 같은 비-알파벳 코드로 이뤄질 것이다. 이는 방송 형식을 통해 파시즘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지만, 동시에 다대다 매체로서 대화의 형식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 둘을 구분하는 방법이 아마도 매체이론의 과제가 될 것이다. 대화의 형식이 성취된다면, 모든 이에게 모든 필요한 사실이 알려지는 완전한 공공성(공지성) 또는 정치적인 이상향이 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전화는 대상에 의식이 현존하는 방식을 근거리
-직접 현존에서 원거리현존Telepräsenz으로 바꿨다. 사람들은 서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매체를 매개로 삼아 서로 아주 가까이에 있게 된다. 귄터 안더스는 이런 의미에서 텔레비전Tele-vision이 세계를 우리의 집으로 배달한다고 말했다. 이런 매체환경을 근거리-직접성을 기준으로 삼아 평가한다면 매우 위험스럽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매체를 통해 펼쳐지는 현상은 실재로서의 지위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루서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전환하여, 근거리-직접성이라는 기준이 환상에 불과하며 버려야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원거리현존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내던져졌다. 이 환경을 구성하는 매체들을 텔레매틱스라고 부른다. ‘텔레비전Tele-vision/Fern-sehen텔레Tele-phone/Fern-hören, 그리고 텔레센서Tele-sensor/Fern-spüren가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플루서가 보기에 텔레비전만으로는 진정한 텔레매틱스 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
. 텔레비전은 일대다 매체이고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다대다-쌍방적 매체가 확산되고 정착되는 그 때가 되어야 진정한 텔레매틱스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사회가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는 지금 예측할 수가 없다.

 


3.
언어현상학적인 자극 유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매체에 현상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고전적인 철학적 탐구가 거의 소용없어진 시대에 관해 상상한다. 이들이 소용없어진 이유는, 그런 철학적 문제를 만든 매체환경이 사라지고 새로운 매체환경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플루서는 인간되기Menschwerdung’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에세이에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플루서는 언어를 통해서 우리의 매체환경, (매체)현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전의 매체환경에서 언어적 개념들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한계, 즉 매체적 한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인간은 텔레매틱스를 통해 이 한계를 넘어선다. 만약 이 시대에 철학을 한다면, 우리는 지금 상황을 표현할 언어적 개념을 가지지 못한 채 말 없는 철학(형상으로 철학하기)을 해야만 한다.


   지금까지의 철학이 우상숭배금지
, 즉 형상금지를 원칙으로 삼았던 이유는 형상을 실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상은 실재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노력을 가로막기까지 한다. 그래서 철학은 알파벳 언어의 나열을 매체로 삼았다. 그러나 매체의 변화, 특히 사진기의 등장은 형상과 실재 사이의 차이에 의문을 제기했다. 급기야 이 둘의 위계는 역전되었고, 그렇다면 철학의 매체 또한 바뀌어야만 했다. 철학은 실재를 대상으로 삼는 탐구인데, 이제는 형상이 실재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이 사진기를 거쳐 인간의 의식에 떠오르는 과정은, 이제 매개작용이 아니라 인간이 대상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미국에서 실제로 이뤄진 기술발전은 플루서의 이런 아이디어와 호응한다
. 바네바 부시는 미국 내 과학연구자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해 지능증폭 논리기계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는 도서관 모델을 대체할 지식의 창고로서 기획된 것이다. 이후에는 이미지를 전자적으로 처리하는 비트매핑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 두 아이디어의 핵심은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는 것처럼 미디어가 작동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4.
/글쓰기

 

   플루서는 문자와 형상의 대립구도를 포기함으로써 실재와 가상이라는 대립도 포기하고, 철학(인식론)에서 매체철학으로 옮겨간다. 실재, 그리고 실재하는 것에 관한 개념은 사라져가고 그 자리를 모든 의식된 대상에 공통된 매체규칙이 대신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손에 은유해 표현한다. 인간은 손이 두 개인데, 하나는 철학적인 손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적인 손이다. 기술적인 손은 세계를 움켜쥐는(개념화하는begriff) 손이고, 이것을 도와주는 여러 수단을 이용하는 손이다. 그러나 개념화 이후의 시대를 진단하는 손은 철학적인 손이다. 이 둘이 맞잡는다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철학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또한 어디에도(어떤 일에도) 잘 들어맞지 않아 노는 손들은 서로 다른 손들을 맞잡아 텔레매틱스 사회를 구현한다. 근대 사회에서 손을 맞잡는 것은 근거리-직접성이 성립되는 곳에서만 가능했지만, 텔레매틱스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은유 그 이상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 반드시 사회과학적 분석이 뒤따라야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논의가 될 것이다. 플루서는 실제로 자신을 시험삼아 이런 분석을 시도했다. , 전통적인 철학의 작업인 글쓰기에 관해 정리하고, 새로운 형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는 글쓰기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의미의 생산, 글쓰기의 포기, 글쓰기가 구시대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는 글쓰기라는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하였다. 자신의 글을 인쇄하지 않고 디스켓에 담아 출판해서 이런 유형분석이 맞는지 시험해보았다.


   특히 그는 이 디스켓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해 끝없는 추가글을 달아주길 바랐다
. 텔레매틱스 사회에서 글 쓰는 도구와 글쓰기의 관계, 그리고 나아가서 저자와 독자, 원래글과 추가글의 관계가 바뀐다. 그의 디스켓 출판의 의도는 이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런 생각은 미셸 푸코가 글쓰는 주체의 종말이라는 주제로 엮어낸 의견과 유사하다. 근대의 글쓰기와 텔레매틱스 사회의 글쓰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책문화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지식을 유포하는 여러 체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특히 지식 자체가 중요시되는 사회로 진행되면 될수록, 어떤 저작들은 저작의 성과 그 자체로 수용된다. 그리고 그 성과는 지식의 체계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성과로 자리매김한다. 반대로 저자(즉 주체)의 이름은 그 성과의 이름으로만 붙여질 뿐이다.


   이런 생각을 참고해보면
, 플루서가 놓친 점이 드러난다. 그는 생산된 정보가 각자에게서 개인적으로 수용 및 처리될 것이라 생각하고, 사회적 맥락에서 배치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또한 단순히 디스켓으로 출판하는 것만으로는 그의 구상을 완성시킬 수 없었다. 그것은 여전히 출판이었으며, 여전히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5.
상상하기-이야기하기-정보만들기

 

   위와 같은 플루서의 단편적 입장들을 종합해보면 코뮤니콜로기 기획의 성격과 목표가 대강 그려진다. 우리는 정보가 모여있는 공간이 전자매체를 통하면 모두에게 열리는 매체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이 매체환경에서는 인간의 존재 양식이 새롭게 정의된다. 그는 이 과정을 추상화과정으로 요약한다. 그 단계는 각각 생활세계, 상상, 서술(기술), 분석(비평), 비선형적 재형상화 단계를 거친다.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은 형상으로 철학을 하고, 모든 것이 집적된 종합적 형상을 투사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매체는 그림
(즉 형상)과 구술언어다. 그러나 구술언어는 지속시간이 짧고 적은 정보만을 전달하기 때문에,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그림이 매체로서 쓰였다. 그러나 그림은 개인의 의식의 투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림을 해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의사소통을 위한 그림의 해석 체계 즉 그림 코드가 만들어지고 이어져 내려왔는데, 이것이 종교의 매체이론적 기능이다. 또 그림 코드는 평면 위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차원적이다. 다음 추상화단계로 알파벳이 나타난다. 이 문자들은 상징이긴 하지만 지시대상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 않으며, 분리되어있다. 그리고 일정한 방향으로 독해된다. 사람들은 여기에서부터 인간이 하는 모든 일들의 선형성을 발견한다. 문자는 단일한 방향으로, 즉 선 위에 배열되기 때문에 일차원적이다.


   그 다음 추상화단계는 비
-알파벳 코드다. 플루서는 이 단계는 영차원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매체기술과 매체장치를 통해 기술적 형상을 접한다. 그러나 매체장치들 사이에서 그 형상들 자체가 옮겨다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일정한 형식의 부호로 변환된 뒤에 매체장치들 사이를 오고 간다. 인간은 결코 그 부호들을 직접 독해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부호를 지배하는 것은 기계들이며, 그들이 대상을 산출한다. 아날로그 사진과 디지털 컴퓨터가 이런 견해에 부합하는 장치들이다. 인간은 점점 실재를 해석할 권리를 기계들에게 넘겨준다. 그들은 부호를 해석하는 독자적인 코드를 지니고, 실재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부호와 그 해석을 전달한다. 끝내 인간이 접하는 세계는 이 매체장치가 조직해놓은 것이 되고, 인간은 이 조직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변한다.


사회적 코드

사유형식

미디어형식

문화기술

기본행동

사회형식

미학

알파벳 이전

순환적(신화)

상징화하는 장면

해석하기

상상하기

마법적 문화

이차원적

알파벳

선형적(이성)

선형적 과정

읽기/쓰기

이야기하기

산업사회

일차원적

알파벳 이후

점형적

(모자이크)

상황

컴퓨팅하기

정보만들기

지식사회

영차원적

 


6.
선형성의 위기

 

   그러므로 이 시대는 분명히 위기라고 진단할 수 있다. 우리는 매체장치들이 어떻게 세계를 조직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전에 코드가 변화하던 시기를 참고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변화를 맞이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알파벳 코드의 등장은 그림과 그 해석 전통이 지니고 있던 마술적인 힘을 약하게 하는데 성공했고,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매체를 이용하려는 계몽주의적 기획으로 발전했다. 플루서는 마치 알파벳으로 넘어올 때 그랬듯이, 우리 시대는 알파벳 코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기술적 상상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파벳 코드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여러 담론들, 즉 철학, 정치, 과학 등의 담론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알파벳의 등장에 관한 그의 분석을 자세히 살펴보자
. 인간에게 매체가 주어지기 전, 세계는 세계와 인간이라는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매체는 세계를 인간의 의식 안으로 끌어들이고 '주체화'하면서 주체가 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했다. 이것이 탈존Ek-sistenz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탈존을 가능하게 한 첫 매체는 그림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그림은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의 전통을 따로 전해야만 했는데, 이는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문제가 된다.


   그래서 알파벳은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
, 지시를 통한 직접적인 독해를 지향한다. 그러나 알파벳 코드는 직접적 독해를 얻는 대신 그림에서 한 번 더 추상의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세계와 더욱 동떨어졌다(소외). 알파벳이 하지 못하는 묘사는 또 다른 추상적 언어인 숫자로 보충되었다. 알파벳과 숫자를 사용하면 할수록 그 나열과 지시의 일차원적 특성은 인간의 사고 양식을 지배했다. 급기야 계몽주의의 최종적 모습에서 언어를 계산하는 행위에 관한 발상이 등장했고, 여러 수학적 기법들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수학적 기법들은 세계를 프로그램화 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 이제 더 이상 알파벳 코드는 필요하지 않으며, 한 단계 더 추상화된 비선형적 상상력이 등장한다. 현대의 매체기술은 이런 구조에 기반해 작동된다. 매체장치들은 세계를 완전히 낱낱이 해체한 뒤 다시 재조립한다. 인간은 이런 매체들을 통해 인식하고, 더 이상 세계 자체와 매체가 보여주는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이것이 매체 개념의 필연적 귀결이다. 매체와 사유의 선형성은 매체장치의 기술적 발전 때문에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고, 선형성에 기반을 둔 근대적 주체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7.
주체에서 기획으로

 

   플루서의 생각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주요 입장을 매체이론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우리의 세계에는 명석판명한(견고한) 대상성이 없다. 대신 세계는 일종의 장으로서, 수없이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특정한 매체는 이 장을 해체하고 재조립시켜서 그 가능성들 가운데 몇몇을 펼쳐놓는다. 대상의 특성이 이렇게 바뀐다면, 그것을 다루는 주체의 특성 또한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주체는 가능성들 가운데서 어떤 것을 재조립해서 현실로 승인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주체적 행위는 투사(기획)적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뀐다.


   투사적 행위자들은 의미없는 장 속에 의미를 부여한다
. 의미와 의미 사이의 소통은 계산으로 이뤄진다. 단지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장 속에서 각자가 전혀 다른 투사방식으로 현실을 승인하기 때문에(즉 각자의 계산방식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완벽한 계산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투사적 행위자에게는 동일한 코드가 전혀 다른 현실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매체이론은 시학
poesie로 마무리된다. 그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며 어떤 일을 중요하다고 간주할 것인지는, 아직 다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세계는 매체를 통해 점과 여백으로 흩어져 재조립되고, 주체는 가능성의 장 속에서 특정한 가능성들을 끄집어내는 투사적 행위자의 좌표로 표시된다. "점에서 점으로의 전환"이라는 말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니는 듯 하다. 플루서는 이런 진단을 통해 새로운 매체환경 속에서는 의사소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구성적 성격을 그리고 우리의 구성적 특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세계의 구성의 권리를 내주고 기술파시즘에 종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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