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연구 발제. 존 롤즈, 『사회정의론』(황경식 옮김) 5장 요약>

 

41. 정치경제학에 있어서의 정의의 개념

 

   롤스는 이 절에서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비롯한 여러 정의의 원칙들이 제도, 정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칙에 가해지는 비판이 어떤 점에서 옳지 않은지에 대해 답변한다. 정의의 원칙들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실제 시행되는 정책들으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롤스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칙이 지니는 계약론적 성격이 부정의한 현실적 체제를 정당화해줄 수 있다는 비판에 대해, 원초적 입장에 대한 해석, 그리고 다른 정의관들 역시 이상적인 정의로운 인간에 대한 관점에 합의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들어 반박한다. 그러므로 정의의 두 원칙을 포함해 정치경제학은 실증적 연구이면서도 동시에 반드시 정의에 관한 특정한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이 절의 내용이다.


   정치경제학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적용될 제도나 정책을 고안하는 학문이다
. 그러므로 어떤 정책이 다른 정책에 비해 더 낫다는 점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반드시 요청되고, 이것이 공공선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은 단순히 경제적 측면 뿐만 아니라 도덕적, 정치적 측면까지도 고려하게 된다. 롤스는 자신이 제시한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칙이 정치경제학에서의 공공선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의 두 원칙은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되는 것인데, 이 구조는 어떻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지, 그리고 나아가서는 어떤 욕구가 충족될만한 것인지 또는 충족되어서는 안되는지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정의의 원칙은 그 구조가 어떤 상태일 때 정의로운지에 관한 기준이며, 이를 통해 어떤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지 또는 충족될 수 없는지에 관한 관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정의의 두 원칙은 정치경제학적인 한 입장이 되고, 공공선의 기준이 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기본적으로 원초적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 도출해낼 합의라는 계약론적 성격을 지닌다
. 그러나 정의에 관한 계약론적 입장은, 사람들이 실제로 지금 믿고 있는 신념에 대한 합의가 정의에 대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 즉 정의에 관한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롤스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제시되는 정의의 두 원칙은 계약론적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지금 구체적으로 믿고 있는 신념을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계약론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의 두 원칙에 합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사회적인 기본적 가치 이외의 구체적인 다른 가치들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보들을 알지 못한다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을 알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특정한 가치에 대해 편파적일 수 없고 따라서 이들이 합의하는 원칙 또한 특정한 가치에 대해 편파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약론적인 방식으로 정의의 원칙이 설정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 첫째는 그 정의의 원칙이 좋은 것에 관한 관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부정의한 것에 관한 욕구가 그 계약에 의해 도출된 원칙에 의해 제한되거나 부정된다는 것이다. 둘째, 제도는 그 정의의 원칙에 반대되는 부정의한 행위들을 규제하고, 반대로 그 원칙에 부합하는 행위들을 권장하도록 조직된다. 이런 측면에서 정의의 원칙과 제도는 그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회에서 존중받을만한 사람의 모습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계약론적이라고 해서
, 그 때문에 사람들이 지금 실제로 믿고 있는 신념에 의해 정의의 원칙이 좌우될 것이라는 비판은 받을 수 없다. 또한 정의의 두 원칙은 이상적인 인간의 모델을 완전주의적으로 미리 설정하지 않고서도 사람들이 실제로 믿는 신념과 독립된 정의에 관한 기준, 그리고 그러한 기준을 준수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델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정의의 두 원칙은 현실적인 좋은 것들이나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유를 희생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이런 선택들이 빈번하게 이뤄지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정의에 관해 숙고할만한 적절한 상황에 놓인다면 그의 정의감은 반드시 정의의 두 원칙을 선택하도록 그를 인도할 것이다.


   현재 정의에 관한 유력한 입장인 공리주의는
, 이런 식으로 이상적인 인간의 모델을 설정하지 않고 모든 욕구를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롤스가 보기에 이런 비판은 옳지 않다. 정의에 관한 공리주의적 관점 역시 전체의 일반적인 효용을 증가시키는 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이상적인 인간의 모델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적 관점이 놓치고 있는 것은, 전체의 일반적인 효용이 좋은 것에 관해 사람들이 지금 믿고 있는 신념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어떤 조건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공리주의적인 정의는 그 내용이 바뀌며, 그 신념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다.


   반면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합의해야 하는 당사자들로부터 구체적인 정보들을 배제하는 과정을 통해서 정의에 관한 독립적 기준을 제공한다
. 또한 이런 기준은 거의 모든 합의 당사자들에 의해 합의될 것이라고 간주한다. 이런 식의 독립적이고 계약론적 동의가 가능한지 묻고, 그것이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칙들은 단지 정의에 관해 생각하는 과정에서 배제해야 할 요소들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을 실제로 수행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정의에 관해서 동일하거나 아주 유사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정의의 두 원칙은 그런 결론이 반영된 관점에 관한 표현이다. 이런 모습은 정의에 관한 전통적인 연구들에서도 유사한 과정을 거쳐 어떤 '적절한 관점'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적절한 관점 사이의 차이, 즉 정의에 관한 입장의 차이는 정의에 관해 생각하는 과정에서 배제해야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관한 생각의 차이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칙이 지니는 특징 또한 그런 요소들이 무엇인지에 관한 생각, 즉 원초적 입장에 대한 해석에 의존한다

 


42.
경제 체제에 대한 논의

 

   이 절에서는 정의의 두 원칙에 부합하거나 또는 이를 지지하는 경제 체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고 그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재산소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이 둘에 해당한다. 이 둘의 차이는 생산 수단의 사유의 비율에 따라 나타나며, 각 체제에 알맞는 공공재 생산의 방식이 있다. 사회의 기본적 제도는 공공재의 생산을 결정하는데, 이는 공공재가 지니는 무임승차자 문제와 외부성 문제 때문에 그 생산에는 반드시 강제와 의무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를 통해 롤스는 특정한 경제 체제에서 시행하는 제도, 정책과 정의의 두 원칙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의의 두 원칙이 받아들일만한 경제 체제를 지지한다는 것이 밝혀지면, 우리는 이 정의의 두 원칙을 정치경제학에서의 정의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경제 체제는 재화의 생산과 소비의 방식과 수량 등을 규정하는 제도를 뜻한다
. 그러므로 특정한 경제 체제는 공공재를 생산하는 특정한 방식을 지닌다. 만약 정의의 두 원칙이 정치경제학에서 정의의 원리로 인정된다면, 공공재의 생산은 정의의 두 원칙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


   공적 영역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눠진다
. 하나는 생산 수단의 소유와 관련된 영역이다.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서는 공적 영역의 생산 수단 소유 비율이 높으며, 재산소유 민주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반대로 그 비율이 낮다. 다른 하나는 공공재의 불가분성과 공공성이다. 사람들은 다들 공공재를 원한다는 점에서 공공재는 공적이고, 공공재는 사유재처럼 임의적인 비율로 나눌 수 없고 모두가 똑같은 양을 받아야한다는 점에서 불가분적이다. 이 두 가지 특성 때문에 공공재의 생산은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서 규제되어야 한다.


   공적 영역의 문제는 이 두 성격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 하나는 무임승차 문제다. 만약 공공재를 생산하는 제도만 유지된다면, 공공재는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모든 사람들은 그 혜택을 입게 된다. 그런데 생산되는 공공재에서 개인이 내는 비용의 비율이 매우 적다. 그 비용을 내든 내지 않든 공공재는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제공된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공공재를 향유하려 시도한다. 그러므로 공공재의 생산에 따르는 비용을 모으고 그것을 부담하지 않으려 할 때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 국가 또는 특정한 기관에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구속력은 타인도 자신처럼 행위할 것이라는 신뢰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다른 하나는 외부성이다. 공공재의 생산과 소비는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지지만, 그 생산과 소비는 그 개인이 계산에 넣은 자기 자신의 복지 향상 이외의 다른 공공적 차원에 영향을 미친다. 보통 이런 외부적 요소는 그것을 처리하는 데 실제로 드는 비용보다 훨씬 낮은 가격이 매겨지고 있다. 따라서 법과 제도는 이런 외부성을 교정해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 아무리 정의로운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공공재의 생산과 소비는 정부의 규제 아래 놓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사람들에게 그런 정의가 언제나 지켜진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는 그러한 규제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립과 확신의 문제와 연결된다. 아무리 정의로운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고립된 상태에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면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고립된 상태에서도 전체 이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도와 정부의 역할이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행위한다는 확신이 있을 경우, 정의로운 행위는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그 체제가 모든 이의 관점에서 볼 때 우월하며(고립된 상태에서의 판단), 그것이 없을 때 생겨날 상황보다 더 낫다는 데 대한 공공적 확신(자신의 판단에 관한 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벌을 다루는 어떤 방도가 확립되어야 한다.


   공공재의 생산과 생산 수단의 공유는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
. 공공재의 생산 수단이 사유되었을 경우, 우리는 공공재의 생산에 따르는 비용을 그 소유자에게 지불함으로써 필요한 만큼의 공공재를 얻을 수 있다. 그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치적 과정을 통해 결정한다. 반면 생산 수단이 공유되었을 경우, 얼마나 생산할 것인지를 협의함으로써 필요한 만큼의 공공재를 얻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필요한 만큼의 공공재를 얻을 수 있는, 윤리적으로 적절한 정치적 절차가 있다.


   공공재와 사유재를 가리지 않는 재화 전체에 관해 고찰해보면
, 이는 반드시 시장 체제의 문제와 결부된다. 그러나 롤스가 보기에 일반적으로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는 시장 체제가 쓰일 것이라고 가정한다. 재산소유 민주주의의 경우 소비시장에서 나타난 선호가 생산과 분배의 척도가 될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시장과 비슷한 방식으로 선호가 반영된 민주적 결정이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재화의 생산과 분배의 척도가 되는 자유로운 시장과 생산 수단의 사유 사이에는 큰 연관이 없으며, 이 둘이 동시에 등장한 것은 우연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유로운 시장과 생산 수단의 사유를 결부시켜 시장을 설명하는 일반균형이론이 시장의 상태를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는 있다
. 그 이론은, 그 두 가지 요소의 결부와 아울러 가정되는 몇 가지 조건을 통해, 가격이 생산과 분배의 적절한 지표가 되고 사람들이 그에 따라 생산행위와 분배행위를 하는 방식에 관해 설명한다. 물론 이 조건들이 실제로 달성되기 힘들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조건들은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가 달성되는 한 방식에 관한 설명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시장 체제는 필요한 몇 가지 제도가 동반될 경우 정의의 두 원칙에 부합하는 경제 체제가 된다
. 특히 직업선택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다. 경쟁 체제에서 생기는 것 같은 수입의 차이가 없을 경우, 우리는 명령으로 통제되는 사회의 특정한 측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기가 어렵다. 또한 시장체제는 재화를 분산시킨다. 생산 수단의 소유의 여부와 관계 없이, 생산 수단을 운영하는 사람은 가격을 지표로 삼아 생산 계획을 작성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경쟁 환경에서 기업은 기술 발전에 따른 원가 절감 이외에 다른 시장지배전략을 사용하지 않는다. 시장을 규제하는 제도와 법률은 민주적인 정치적 제도에 따라 설정된다.


   반면 사회주의적 제도
(생산 수단의 공유)와 자유로운 시장이 결부될 경우, 가격의 기능을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가격은 특정한 재화를 생산한 사람에게 돌아갈 보상을 표시해주는 동시에, 어떤 재화가 누구에게 어떻게 돌아가야 가장 잘 활용될 것인가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경제적 효율을 위해 민주적인 정치적 과정을 거쳐 가격을 설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원활한 경제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인 정치적 과정이 동반된 사회라면 경제 체제가 재산소유 민주주의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자유 시장은 꼭 필요하다
. 각 경제 체제에서 시장의 역할은 다르다. 이 둘 가운데 실제로 어느 쪽에 가까운 제도나 법률을 설정할지에 관한 것은 그것을 결정하는 공동체의 역사적 특성에 맡겨진다. 단지 여기에서 시장이 중요성을 띄는 이유는 그것이 이상적인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기반한 재산소유 민주주의가 정의의 두 원칙에 부합하는 여러 제도들 가운데 더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에 기반한 설명이 자주 등장할 것이다.

 


43.
분배적 정의과 배경적 제도

 

   롤스는 이 장에서 재산소유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이뤄지는 여러 정책들이 어떻게 정의의 두 원칙을 실현하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이 제도는 적절한 배경적 제도들과 이 제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들에 의해 경제 활동이 정의의 두 원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적절히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이런 배경적 제도들과 기관들 없이 사회가 운영된다면 이는 결국 정의의 두 원칙을 이탈하는 지배적인 힘이 나타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경제 활동을 조정하는 배경적 제도는 적절한 정치적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받는 사회에서 시행된다고 가정된다. 여기에서 적절한 정치적 자유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비슷한 능력과 의도를 가지고 있을 때 그에 필요한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 등을 의미한다.


   이런 배경적 제도에 필요한 부속기구는 일반적으로 네 개로 분류할 수 있다
. 첫째는 할당 기구다. 이들은 가격이 재화의 수요와 공급을 나타내는 정확한 지표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시장의 효율성을 항상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하도록 규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둘째는 안정화 기구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직업 선택의 상황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다. 셋째는 이양 기구이다. 시장은 사람들의 최소 필요를 고려하지 않은 분배 방식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최소 필요에 해당하는 재화를 사람들에게 이양해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최소 필요의 양이 얼마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회 각각마다 다르며, 만약 이것이 정해진다면 그 이외의 재화는 시장을 통해 할당하고 분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넷째는 분배 기구다
. 이 기구에는 특별히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과세와 재산에 관한 정책을 통해서 정의의 두 원칙을 위협할만한 정도의 부의 축적을 방지하고,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각 소유자의 부의 양을 조정하고 부를 되도록 널리 분산시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의의 두 원칙을 실현하려는 집행 과정에 필요한 재화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런 정책을 세우면서도 동시에 정의의 두 원칙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 입법부의 과제이다. 이런 역할을 하는 데는 소득세보다는 비례소비세가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재화를 생산하는 데 기여한 것보다 재화를 소비하는 데에서 세금의 원천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람들의 상식적 정의관 그리고 모두를 동일한 세율로 대한다는 점에서의 평등의 원칙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에서는 다소간 부정의한 방법도 사용된다. 분배 기구의 두 영역은 정의의 두 원칙으로부터 도출된다. 첫째는 자유를 해치지 않을 만큼의 정돈되고 넓은 범위에 퍼진 재산 소유의 정도를 통해 기본적 자유를 지켜야 한다. 둘째는 재정을 마련해 차등 원칙을 실현시켜야 한다.


   재산소유 민주주의의 경우 이러한 배경적 제도가 갖춰지면
, 정의의 두 원칙에 따르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런 제도를 통해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가해지는 비판을 상당한 부분 면할 수 있다. 나아가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또한 정의의 두 원칙을 지지한다. 이런 제도 아래서는 가격이 아닌, 민주적으로 정치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재화의 정의로운 분배가 달성될 수도 있다.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분배의 과정으로서의 시장 자체가 문제가 있으며
,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타적인 인간들이 모여 있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롤스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측면에서, 시장 이외의 구상 가능한 분배의 방법(관료제)이 시장보다 더 정의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정의의 두 원칙은 인간의 이타적 측면이 어디까지 발휘되는가에 관한 현실적인 한계를 고려하여 설정된 것이다. 만약 완전히 이타적인 사람들이 제도를 설정한다면 그것은 정의를 넘어선 사회와 제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롤스는 다섯 번째 기구인 교환 기구가 필요한 경우에 관해서 논의한다
. 정의의 두 원칙에 부합하게 제도와 정책이 설정되어 운용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재화의 생산과 분배가 공공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같은 재화를 시장을 통해 생산하고 분배할 때보다 더 큰 이익이 생길 수도 있다. 이 경우, 정의와 관계없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공공적인 비용을 부담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럴 때 교환 기구가 개입해 공공적 비용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생긴 이익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와 정책을 고안한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하는 난점이 있다. 이런 공공적 정책을 통해서 발생하는 이익은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이 고려할 수 없고, 따라서 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44.
세대 간의 정의 문제

 

   이 절에서 논의할 내용은 세대 간의 정의 문제, 특히 저축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저축의 문제가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는 저축 문제가 정의의 두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저축은 현재 세대가 미래 세대를 위해 자원의 일부를 비축해두는 것인데, 이 상황에서 저축을 시작하는 세대는 모든 세대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이득을 본다. 윗 세대로부터 받은 것 없이 비축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축은 가장 이점이 적은 세대인 저축을 시작하는 세대에 이득이 되지 못하므로 정의롭지 못한 제도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롤스는 세대가 이어지는 것이 언제나 똑같은 방향이고, 저축의 목적을 부의 증가가 아닌 정의로운 사회의 유지라고 본다면 저축은 원초적 입장에서 합의될 수 있는 제도, 즉 정의로운 제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에 관한 모든 논의는 세대 간의 문제를 고려해야만 더 견고한 논의가 될 수 있다
. 이런 측면에서 원초적 입장에서 합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여러 대표적 개인들은 한 개인이 아닌 여러 세대를 대표한다. 그리고 이들은 미래 세대까지 영향을 미치는 장기적인 전망이 더욱 나아지도록 합의하려고 한다. 저축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데, 적절한 비율로 설정해야 현재 세대의 정의를 위한 사람들의 욕구를 떨어뜨려서 정의로운 상태가 침해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미래 세대가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게끔 하기 위한 자원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익 전체에 대한 저축의 비율을 수치로서 확정하는 것은 사회에 따라 다르며
, 그 자체를 정확히 도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롤스는 이것의 구체적인 수치가 아니라 정의롭게 이것을 확정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리주의적인 정의의 원칙에 따라 저축에 접근하는 것은, 특정한 경우 우리의 도덕적 감정과 일치하지 않는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올바르지 않다. 예를 들어 기술의 발전이 상당한 수준의 효용의 창출을 보장하기만 한다면, 공리주의의 정의의 원칙은 현재 세대들에게 최소 필요와 무관하게 수입의 거의 전부를 저축하라고 결론지을 것이다.


   반면 롤스의 정의의 두 원칙은 저축의 문제를 원초적 입장에서부터 접근하기 시작한다
. 이들은 자신이 실제로 살고 있는 사회의 구체적인 경제적 상황에 관해 알지 못하므로, 그런 상황에 알맞은 저축의 비율을 각각 계산하는 원칙을 선택할 것이다. “국민이 가난하고 저축이 어려우면 낮은 비율의 저축이 요구되어야 하고 반면에 보다 부유한 사회에서는 실제 부담이 작을 것이므로 보다 큰 저축이 합당하게 기대될 수 있다.” 정의의 두 원칙에 부합하는 사회가 될수록 저축율은 0에 가까워지는데, 이는 저축의 목적이 정의의 두 원칙에 부합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물질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축과 원초적 입장을 관련시키는 것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 하나는 원초적 입장의 대표적 개인들은 몇 세대를 대표할 뿐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어떤 세대에 속할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세대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한다는 점이다. 이는 저축을 시작한 세대를 제외한 모든 세대가 자신의 이전 세대에게 받은 양과 동등한 양을 미래 세대에게 물려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저축의 목적이 미래 세대의 부의 증대가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뒷받침해줄 물질적 기초의 제공에 있으며, 그러므로 이렇게 정의로운 사회에 점점 더 다가가는 데 필요한 부담을 모든 세대가 동등하게 지게끔 하는 것이 저축에서의 정의라는 점이다. 이런 저축에서의 정의는, 사람들이 실제로 저축을 할 때 자신이 윗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토대로 자신이 미래 세대에 물려줄 것을 계산하고 이 과정이 지속될 때 실현된다. 그러므로 가장 마지막 세대는 저축율이 0이며 동시에 가장 정의로운 상태에 도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최초의 세대에게는 이것이 부정의로 남는다
. 자신들은 받는 것이 없으면서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롤스가 보기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 조건이며, 이것을 역행할 수 있는 방식이 없다. 정의의 원칙은 이런 조건을 다루는 방식이 정의롭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이며, 따라서 이것을 부정의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최초의 세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세대가 이익을 본다는 측면에서 원초적 상황에 있는 대표적 개인들은 저축에 관해 이와 같은 원칙을 택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저축은 차등의 원칙이 아닌 다른 접근법을 택해야 하지만, 그 접근법은 여전히 원초적 입장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정의의 두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또 같은 세대 안에서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을 고려하는 원칙이 차등의 원칙이라면, 세대 사이의 문제에서 이를 고려하는 원칙은 저축의 원칙이 된다.

 


45.
시간에 대한 선호

 

   이 절에서 롤스는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선호가 없으며, 이것이 왜 정의의 원칙을 고안하는 데 고려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시간에 대한 선호란, 여러 시점의 이익들에 관해 시점에 따라 이익을 각기 다른 비중으로 계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원초적 입장의 대표적 개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각각의 시점에 얼마만큼의 비중을 두어야 할지 결정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리주의와 정의의 두 원칙 사이의 공통점이지만, 해석에서 약간의 차이가 난다.


   우선 공리주의에서 시간에 대한 선호에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살펴보자
. 공리주의적인 정의의 원칙에서 효용을 계산할 때 시간에 대한 선호는 고려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시점은 단지 시간의 앞과 뒤의 문제이며 효용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특정한 시점에서 발생하는 일정량의 효용이 다른 시점에서 발생하는 일정량의 효용보다 더 낫거나 더 덜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원초적 입장에서 시간에 대한 선호는 그것이 일반적이지 못한 기준이기 때문에 배제된다
. 시간은 시점에 따라 상대적이다. 만약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현재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고려할 경우, 어떤 시점은 다른 어떤 시점에 비해 미래이기 때문에 중요하지만 또 반대로 어떤 시점에 비해서는 과거이기 때문에 덜 중요해지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특정한 시점은 다른 어떤 시점에 비해 우월해질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이는 특정한 세대를 다른 어떤 세대들에 비해서 비중있게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선호를 배제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으로 간주하는 민주주의적 원칙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 구체적 개인은 현재에 대한 선호를 바탕으로 미래 세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을 결정한다. 완전히 민주적인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선택을 배제할 수는 없다. 롤스는 만약 이를 부정하는 방법으로 시간에 대한 선호를 배제하려고 한다면, 그보다 더 큰 부정의가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롤스는 시민의 불복종을 제시한다. 민주주의적 제도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 제도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제나 정의로운 판단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만약 민주주의적 제도가 충분히 민주주의적이라면, 이 제도는 정당한 방식으로 합의되었지만 명백하게 부정의한 정책에 관해 항의할 수 있는 합법적 방식을 규정해놓았을 것이 틀림없다. 어떤 정책을 명백하게 부정의하다고 판단한 사람은 이런 방식에 따라서 항의하거나, 정책이 제시하는 행동에 따르지 않고 정책을 변경하는 등의 행위를 할 수 있다.


   공리주의적인 정의의 원칙에서는 시간에 대한 선호를 고려함으로써 공리주의적인 원칙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상식과 어긋나는 결과들을 교정한다
. 예를 들어 미래에 대한 선호를 줄임으로써, 현재 세대에게 가해지는 저축에 대한 무리한 강요를 교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 자체가 원칙인 것이 아니라, 부정의한 결과를 교정하는 것이다. 이에 비춰볼 때 공리주의적인 정의의 원칙은 기본적인 원칙이 아니라 부차적인 원칙으로 그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 또한 공리주의적인 정의의 원칙이 우리의 삶과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에 대한 선호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등) 부차적인 원칙들을 채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원칙으로서의 정의의 두 원칙이 우월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46.
우선성에 관한 그 밖의 사례

 

   이 장에서 롤스는 정의의 두 원칙에서 분명하게 제시된 축차적 우선성에 대해 반박으로 제시될만한 논증을 검토하고 있다. 하나는 저축의 원칙을 선정하는 데에서 지적될만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욱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것이다. 만약 자유의 우선성을 무시하는 이런 제도들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미래 세대 또는 현재 세대는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롤스는 이것이 오해에서 비롯했거나 또는 잘못된 반박이라고 주장한다.


   저축의 원칙을 정할 때 우리는 각 세대에 그 분담이 동등하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 또한 같은 세대 간에 자원의 분배 또한 공평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현재의 저축이 훨씬 더 많은 미래의 부를 창출하게 되므로 현재 세대가 더 부담을 져야하고, 동시에 특정한 계층에게 훨씬 더 많은 분배가 이뤄지는 것 권장되기도 하는데, 케인즈가 설명한 1차 대전 이전의 자본 축적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기술과 경제는 나날이 급속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더 많은 저축이 권장되고, 상류 계층은 소비보다는 투자에 주력했기 때문에, 분배받은 자원 모두를 소비하는 하류 계층보다는 상류 계층에 부를 더 많이 분배하는 것이 미래 세대를 위해 권장되었다는 것이 이런 입장의 주요한 논증이다.


   그러나 이렇게 저축에서의 정의의 원칙을 어긴다면
, 하층 계급에게 그 원칙을 어기지 않을 때보다 더 적은 피해가 돌아가는가? 저축에서의 정의의 원칙에 반박하기 위해서는 단지 역사적으로 그런 사례가 있었다는 것을 밝혀야 할 뿐만이 아니라, 저 질문 자체에 논증적으로 그리고 당위적으로 답을 해야 한다. 이 사례를 밝힌 케인즈 스스로는, 그 시기에 노동자들의 아픔이 미래 세대들의 부의 증가로 정당화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우선성의 원칙에 반대되는 또 하나의 논증은 정치 엘리트이다
. 이들은 탁월한 능력을 타고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언제나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 그러므로 이들의 결정은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된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더 많은 정치적 결정에 관한 권리를 주어야 공동체를 위한 더 올바른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 만약 이런 교육이나 자질이 없는 사람이 결정에 참여할 경우,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자유의 원칙을 위배하면서 정치 엘리트 계급의 제도가 정당화된다. 이 경우에도 위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이 이득을 볼 것이라는 주장은 우선성에 대한 반박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 우선성에 대해 반박하려면, 만약 이렇게 정치적 자유를 불공평하게 분배할 경우, 그렇게 하지 않고 공평하게 분배했을 때보다 기본적 자유를 훨씬 더 많이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정의의 두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라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목표와 의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닌데, 이런 차이는 타고난 자질이나 가정환경 등의 우연적 요소에 의존하기 때문에 지금의 논의에서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런 논의들을 요약하면 우선성에 관한 논의가 확정된다
. 이렇게 확립된 우선성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상적인 상태에 관한 설명으로서 실제의 제도를 측정한 기준이 될 수 있다.

 


47.
정의에 대한 신조들

 

   이 절에서 롤스는 정의의 두 원칙과 정의에 대한 우리의 평범한 신조 사이의 관계를 검토한다. 이 믿음은 하나는 노력에 의한 분배이고, 다른 하나는 기여에 따른 분배다. 이 둘은 노동 시장을 통한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평범한 신조다. 그러나 이 둘 모두 기본적인 원칙으로는 채택할 수 없다. 우리는 두 믿음을 적절한 비율로 조절하거나, 또 다른 배경적 제도를 통해서 통제해야한다. 사회가 정의의 두 원칙에 부합하도록 조직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여기에 부합하는 배경적 제도가 필요하다. 이 제도는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로서, 제대로 자리잡고 운영되기만 한다면 그 결과는 언제나 정의롭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실제로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이 제도가 우리가 평범하게 믿는 정의에 관한 신조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또는 이런 제도가 정의에 관한 신조에서 비롯한 합리적인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정의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신조에는 노력에 의한 분배와 기여에 따른 분배가 있다
. 만약 어떤 기업이 임금을 책정하려 한다고 생각해보자. 먼저 고려해볼 것은, 그 기업이 조정하려는 임금의 양은 그들이 생산하고 판매하는 재화의 양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재화의 생산량과 노동력의 양은 일반적으로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이 생산했는가에 따라 임금을 결정하는 방식이 있다. 이것이 기여에 따른 분배다. 이 방식을 택하면 숙련된 노동자나 기술이 뛰어난 노동자가 더 많은 분배를 받는다. 반면에 그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직업 훈련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고 그것을 노동자가 부담해야 한다거나, 고용이 불안하다거나, 위험한 작업환경이 갖춰져 있는 등의 제약이 있을 경우, 그것을 임금에 반영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일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힘을 들이거나 감수해야 하는 것들을 참아내는 것에 관해 임금을 결정하는 방식이 있다. 이것이 노력에 의한 분배다

   그러나 이런 신조들은 서로 조율할 수 없고 충돌하기도 한다
. 상식적인 믿음은 이 두 가지를 임의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때로는 이 둘을 더해 노력에 따른 생산,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사정들을 고려해보면, 이 둘을 조정할만한 독립적 기준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정의의 두 원칙은 이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이 두 신조에 각각 적절한 비중을 부여한다.


   서로 다른 정의에 관한 생각이 동일한 정의에 관한 신조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 이 두 신조에 각각 얼마만큼의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정의에 관한 생각이 달라지기도 한다. 배경적 제도의 형태, 경제 환경의 추이, 노동력의 수요와 공급의 변화에 따라 이 비중은 변화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일정 정도의 비중을 각각의 신조에 부여하고 있다면, 그것은 위에 언급한 변화들이 축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교육 등을 통해 기회 균등이 보장되는 제도가 있는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공 가능한 노동력의 수준이 거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기여에 따른 분배라는 신조는 거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반대로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기여에 따른 분배가 매우 비중있는 신조가 될 것이다.


   반면에 이 두 신조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되는 원칙으로서는 역할을 할 수 없다
. 기여에 따른 분배 신조를 살펴보자. 여기에서 노동자가 분배받을 양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장이 원하는 재화의 종류와 양, 그리고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는 다른 노동자의 숫자이다. 만약 이것을 가장 기본적 원칙으로 채택하게 된다면, 그가 분배받을 재화의 양은 우연적인 시장의 조건에 의해 변하게 된다. 정의의 원칙들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연적 요소의 배제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신조과 왜 원칙이 될 수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의의 두 원칙에 따라, 이런 요소들을 분배의 과정에서 배제해줄 수 있는 배경적 제도가 이런 신조에 우선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나아가서 재화의 생산과 분배
, 노동의 공급과 수요를 시장 체제에 의존할 경우 반드시 착취가 발생한다는 견해도 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여기에 세 가지 측면에서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는 언제나 배경적 제도를 통한 적절한 규제가 강조된다는 점이다. 이런 제도는 이상적인 형태로서, 지금 운영되는 제도가 어떤 의미에서 부적절한지를 판가름하며 또 어떻게 고쳐야할지 보여준다. 둘째로 시장은 가격을 지표로 삼아 재화와 노동을 조정하는데, 착취가 발생한다는 것은 가격이 올바르지 않은 지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의 두 원칙의 입장에서 이는 부차적인 실패이며, 다른 부차적인 제도를 통해 보완될 여지가 있다. 셋째는 기본적 자유를 보장하는 부차적인 제도로서 다른 것 보다는 시장이 자유에 더욱 부합하는 제도다. 시장은 기본적 자유에 포함되는 여러 요소들, 즉 직업 선택의 자유라든가 생산 계획의 자유 등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48.
합법적 기대치와 도덕적 응분

 

   롤스는 노력에 의한 분배와 기여에 따른 분배와는 별개로, 분배의 방식으로서 전통적으로 거론된 도덕적 덕에 따른 보상으로서의 분배를 논한다. 그가 보기에 이렇게 분배를 논하는 것은 그 기준을 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합법적 기대치와 도덕적 응분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정한 행위에 대해 처벌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게끔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동시에 그 행위 자체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러나 정의의 원칙들은 그에 따라 잘 조직된 사회를 조성하기 위해 채택되는 것이지 도덕적 행위를 권장하려고 고안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덕적 처벌과 합법적 보상을 대응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분배가 도덕적인 보상으로서 이뤄지는 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다
. 이는 전통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왔으며, 그 사람들은 이런 사회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정적으로 이런 의견은 분배의 과정을 시장에 의존하지 않기 위한 의도에서 발생했다. 한 사람의 도덕적인 가치는 재화의 생산과 분배,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변화와 관계가 없다. 이는 우리의 상식적인 도덕적 판단에서 중요하게 고려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의의 문제는 내가 공동체에 속해서 일정 정도 기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요구할 수 있는 권리와 그에 대한 분배에 관해서 다루는 것이다
. 따라서 분배의 문제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와 제도가 규정한 의무와 권리를 통해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지, 사람의 도덕적인 가치에 따라 논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상식적인 도덕적 판단은 단지 그런 가치를 항상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을 뿐, 원칙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분배의 문제는 도덕적으로 우연적인 것과 항상 결부되어 있다. 이런 우연적인 것은 도덕적인 능력과 거의 독립적으로 자신의 영향을 발휘한다. 정의의 두 원칙은 이런 우연적인 것을 처리하는 방식이며, 이에 따라 잘 조직된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정의감을 가지고 제도와 정책을 올바르게 실천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모두 정의감을 같은 정도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분배를 같은 정도로 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보상이라는 것은 부차적인 원칙이지
,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될 수 없다. 이는 사유재산 제도와 형법의 절도죄 사이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절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유재산 제도가 필요하다. 사유재산 제도는 분배의 방식을 가리키는 원칙이며, 절도죄는 지켜져야 하는 사유재산을 지키지 않고 빼앗음으로써 위반한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보상이 기본적인 원칙이 된다는 것은, 절도죄를 처벌하기 위해서 사유재산 제도를 고안하는 꼴이 된다. 또 정의의 두 원칙에서 중요한 것은 그 제도 아래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가 모두 다른 삶의 목표를 가지고서 좋은 것들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런 각자의 삶은 제도에 의해서 존중되고, 그에 필요한 것을 분배받는다. 이를 위반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위반으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을 권리가 생겨난다. 정의로운 체제가 정당한 각자의 몫을 확보해준는 것은, 실제로 도덕적인 가치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합법적인 기대치와 도덕적인 보상 사이를 더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
, 권리가 있다는 말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을 구분해보도록 하자. 어떤 개인이 특정한 재화를 분배받기 위한 어떤 목표를 달성하려고 충분히 애를 썼다면, 그는 그 재화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면 그는 그런 분배를 받을 권리가 없다. 만약 주변 환경이 조금 더 이상적이라면, 충분히 애를 쓰면 거의 모두 목표가 달성될 것이며 분배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적인 가치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제도가 보장해주는 바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혼동이 생기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분배적 정의와 응보적 정의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비도덕적인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그 처벌을 통해 제도적으로 도덕적인 의무를 강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하지, 그런 비도덕적인 행위를 합리적 계산을 통해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행위로 간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하지는 않는다.

 


49.
절충론과의 비교

 

   이 절에서 롤스는 공리주의적인 정의의 원칙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제한해서 생겨나는 절충적 생각과 정의의 두 원칙을 비교한다. 이런 절충적 생각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정의의 두 원칙과 마찬가지로 최소필요에 관해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제도와 정책을 이끌어내는 데 더 좋은 기준을 제시해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의의 두 원칙보다 절충적 생각을 더 선호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최소필요에 관해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점은 정의의 두 원칙 역시 마찬가지이며, 제도와 정책에서 효용을 이끌어내는 데 사용되는 여러 원칙들을 엄밀하게 들여다보면 결국 불확실하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절충적 생각은 공리주의적인 정의의 원칙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규제한다
. 여기에서 공리주의적인 접근은 부차적인 원칙이 되고, 여러 규제들이 제1원칙이 된다. 그러므로 롤스가 보기에 이런 절충적 생각들에 대해서는, 고전적 공리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이었던 자유의 우선성이 유효하지 않다. 절충적 생각은 충분히 자유의 우선성을 고려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공리주의적인 원칙을 규제한다. 이런 점 때문에 상식적인 수준에서 절충적 생각은 주목받는다. 정의의 두 원칙이 절충적 생각에 비해 선호될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고전적 공리주의에 대한 반박과는 다른 논증이 필요하다.


   자유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평균 공리의 원칙이라든가
, 편차를 보정한 평균을 적용하는 것으로 차등의 원칙을 대체하는 것이 이런 절충적 생각에 해당한다. 이른바 평균 공리를 통해서 최소필요를 설정하고 모든 이에게 그만큼은 공평하게 확보해주려는 것이 이런 절충적 생각의 의도다. 그러나 롤스가 보기에 그 결과 만들어질 제도들은, 사실 차등의 원칙이 적용되었을 때 만들어질 제도들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리에 관한 왜 다른 원칙들 대신에 평균 공리의 원칙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 롤스는 바로 이 이유가 차등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도덕적, 윤리적 선택에 의해서 평균공리의 원칙이 채택된다. 우리는 누군가 제도와 정책을 구상할 때 실제로 그 두 원칙 가운데 어느 것을 기준으로 삼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런 논증을 통해서 평균 공리의 원칙이 차등의 원칙보다 더 선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다. 평균의 편차를 보정하여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의 위치를 더욱 더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런 보정의 기준을 어디에 둘 지는 다소 임의적이다. 또한 이 방법이 표방하는 것 역시 그들의 지위를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차등의 원칙과 그 의미가 같다.


   차등의 원칙은 평균 공리의 원칙 등이 요청되는 근거에 관한 설명이다
. 또한 다른 부차적인 원칙들과 결합해서 정의로운 제도와 정책을 조직하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정의감에 부합하는 결과를 이끌어낸다. 다른 원칙들의 경우 일상적인 정의감이 갈등을 일으키는 많은 다양한 구체적 사례들에서 조정에 실패할 것으로 예상되는 데 반해서, 정의의 두 원칙은 명확한 우선성을 통해 이런 조정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롤스가 생각하기에 정의의 두 원칙은 이런 측면에서 다른 정의의 원칙들에 비해 그 적용의 범위가 훨씬 넓고,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사례들에 관한 판단도 포함한다. 또한 이런 측면은 공공의 이익에 호소한다는 민주주의적인 상식에도 부합한다. 공공의 이익이란 특정한 계층이나 집단의 이익이 아니며, 특히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에게 주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절충적 생각은 차등의 원칙이 제기하는 엄격한 요구를 피해갈 수 있다는 이유에서도 주목받는다
. 그러나 절충적 생각은 이런 엄격한 요구를 피해가는 대신 효용의 적절한 수치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다는 문제를 일으킨다. 개인들은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다른 집단의 이익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런 평가에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계산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공리주의적인 원칙은 이런 의견들을 조정할만한 기준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반대로 정의의 두 원칙은 그런 기준을 제공해줄 수 있다.


   이런 계산의 부정확성에 대해
, 한정된 범위 내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몇몇 이론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개인은 효용의 몇몇 수준을 구분할 줄 알고 이는 모든 개인에게 공통적이라고 가정한다면 적절한 효용 계산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또 다른 이론에서는 개인의 기대효용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이 그런 복잡한 관계를 모두 이해하는 상태에서 그것에 따라 결정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수학자적인 수준에서나 가능할만한, 비현실적 가정이다. 결국 행복과 복리의 개념은 충분할 만큼 명확한 것이 아니며 적절한 기수적 척도를 정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는 그것이 쓰이게 될 도덕 이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개인의 효용이 계산이 부정확한 만큼
, 전체의 효용 또한 계산이 정확하지 않다. 보통 사용되는 방법은 특정한 상황 아래 놓인 한 사람의 효용 최소치를 0, 최대치를 1로 계산하고 각 사람들의 효용 수치를 더하는 것이다. 효용 최소치를 0으로 두고, 모든 대안들의 효용의 합을 1로 두는 방법도 있다. 앞쪽은 고전적 공리주의의 원칙에, 뒤쪽은 평균 공리 원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계산법은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선호체계와 만족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며, 공리의 개념을 특수하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개인 효용을 더하는 계산법을 채용할 경우, 사람들을 가난한 상태로 유지시키는 것이 효용을 더 늘리는 방법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다. 또한 여러 경우에 관한 확률 계산이 효용 계산에 개입할 경우, 사람들이 편향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롤스는 이런 부정확함이 해결되어도 절충적 생각이 정의의 원칙으로서 채택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 개인의 효용을 계산하는 방법이든 전체의 효용을 계산하는 방법이든 그들 사이에 주어지는 도덕적 비중은, 적어도 공리주의적인 원칙 아래에서는 동일하다. 이들의 옳고 그름 또는 비중을 판별해줄 기준은 이런 계산법에 대해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과정 자체가 가치 판단의 과정이다. 또한 공리주의적인 원칙을 택했을 경우 발생할 문제는 명백한데 반해 정의의 두 원칙을 택했을 때 발생할 법한 것으로 간주되는 결과는 불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한 정의의 원칙으로서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택해야 한다.

 


50.
완전성의 원리

 

   롤스는 이 절에서 정의에 관한 목적론적인 생각의 한 특수한 형태인 완전주의, 그리고 그 완전주의가 완화된 형태로서의 직관주의에 대해 논한다. 완전주의와 직관주의는 그들이 표준으로 삼은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형태로 분배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최대한으로 달성한 삶은 완전한 삶, 좋은 삶의 표상이 된다. 그러나 롤스가 보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삶이 완전한 삶인가에 관한 유일한 합의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완전한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공리주의적인 정의의 원칙이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 완전주의에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에 대한 고려가 다른 정의의 원칙들에 비해 더욱 빈약하다.


   완전성의 원리는 엄밀한 것과 느슨한 것 두 가지로 나뉜다
. 엄밀한 완전성의 원리는 다양한 탁월함을 성취하는 것이 극대화되게끔 분배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개인들은 어떤 개인들이 이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하며, 제도는 이런 성취를 달성할 수 있도록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다. 느슨한 완전성의 원리는 이런 다양한 탁월함이 사회, 문화적 환경 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게끔 분배하는 것의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탁월함은 특별한 가치를 부여받고, 이것을 성취하려는 활동은 단순한 욕구의 충족을 위한 활동에 비해 더 높은 지위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최소 필요량을 제외한 경우, 언제나 탁월함을 성취하려는 활동에 더 많은 분배가 이뤄진다. 약한 완전성의 원리는 그 자체가 강한 완전성의 원리의 한 변형일 수도 있지만, 부차적인 원칙으로서 차이의 원칙을 대체할만한 것이기도 하다.


   정의에 관한 원칙들을 분류해보면
, 우선 목적론과 비목적론으로 나눌 수 있고, 또 다른 측면에서 이상을 고려하는 것과 욕구를 고려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공리주의는 목적론이면서 욕구를 고려한다. 완전주의는 목적론이면서 이상을 고려한다. 반면 정의의 두 원칙은 비목적론적이면서 이상을 고려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비목적론적인 정의에 관한 이론인 계약론적 접근을 통해서 욕구를 충족시킬만한 재화의 분배가 되도록 공평해야 한다는 이상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와 완전주의의 사이에 위치한다.


   엄밀한 완전성의 원리는 그것이 정의에 관한 한 사람의 관점일 수는 있다
. 그러나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되는 관점이 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추구하는 탁월함에 대한 기준 또는 삶의 방식을 신념으로 지닌다. 이들은 서로 다르며 때로는 충돌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 가운데 특정한 탁월함을 기준으로 제도와 정책을 편성한다면 반드시 다른 삶의 방식과 그 신념을 침해하게 된다. 원초적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무지의 베일이 걷힌 후에 자신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상황이 올 것을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엄밀한 완전성의 원리를 정의의 원칙으로서 택하지 않는다.


   대신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가장 넓은 범위의 자유를 우선적인 원칙으로 택한다
. 이는 자유의 우선성을 지지하는 논증과 동일하다. 그러나 롤스는 자신이 보통 완전주의적인 관점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많은 탁월함들이 실제로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구체적인 인간의 삶 속에서는 충분히 비중있게 고려될만한 이유가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단지 탁월함에 관한 그런 비중을 원초적 상황의 대표적 개인들이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탁월함들은 정의의 두 원칙에 부합하는 정의로운 체제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모임에 의해 충분히 추구될 수 있으며, 그것은 매우 권장할만한 일이다. 단 그들이 그런 탁월함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재화는 정의로운 방식으로 분배받은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탁월함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권리는
, 한 편으로는 모든 인간이 도덕적 존재라는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완전주의적 가치 판단으로부터 주어지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계약에 의해 규정된 정의로운 제도가 요구하는 의무를 이행할 경우 제도에 의해 보장되는 권리로서 주어진다. 정의의 두 원칙으로서의 계약론적 입장은 제도적 자유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반면에, 완전주의적 가치 판단은 제도적 자유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이 전제 없이도 충분히 자유의 제도가 성립하는 경우가 있고, 또 그 전제만으로 자유의 제도를 확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인간들을 자유롭게 한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의 탁월함을 모두 뛰어나게 발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완전주의적 정의는 이런 탁월함을 더욱 높이 성취하기 위해 이점이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많이 분배받는 것을 허용한다
. 여기에서는 고전적 공리주의의 경우에서처럼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되지도 않는데, 이런 탁월함들은 오히려 효용이 체감되지 않고 정비례하거나 증폭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완전성의 원리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용인하기 때문에, 원초적 입장의 대표적 개인들은 이 원리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정의에 관한 직관주의적 생각
(또는 느슨한 완전성의 원리) 역시 엄밀한 완전주의와 동일한 문제에 부딪힌다. 이들은 특정한 전통이나 환경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다른 전통이나 환경에서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또한 우선성의 문제를 남겨둠으로써, 실제로 정의의 원칙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풀지 못한다. 탁월함에 관한 생각은 개인들, 집단들, 사회들 사이에 언제나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의 원칙은 이들을 조정할만한 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롤스는 직관주의와 완전주의는 이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지만,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이들을 조정할 수 있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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