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서양고중세철학 숙제>
1. 초기 자연철학의 주제
고대 그리스 철학 초기의 탐구주제는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 전체, 즉 자연에 대한 물음이었다. 크게는 자연에 대한 물음이라고 한 가지로 나타낼 수 있겠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 물음은 크게 두 가지 질문을 내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는 자연이 어떻게, 또 무엇으로 이루어져서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묻는 질문이다. 둘째는 ‘왜 변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는 우리가 감각으로 겪게 되는 사물의 변화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보였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없어지고, 성장하고 쇠퇴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가 바로 이 질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철학이 처음 시작되던 때, 밀레토스의 학자들은 첫째 문제에 집중해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물, 공기, 무한자 등의 다양한 답변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밀레토스의 학자들은 둘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예 하지 않거나, 자신들이 내세운 근원적인 물질이 스스로 운동한다는 정도의 미약한 답변만을 내놓았을 뿐이다.
이들의 변화의 문제를 설명하지 않았던 이유는, 물질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 물질에 영혼이나 신적인 힘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원시적 견해의 연장선상에 있는 생각이다.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지만, 아직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고대의 미신적인 방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한 세대 뒤에 등장한 철학자들은 운동과 변화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변화에 대해 설명하는 것 또한 자연에 대해 연구하는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었다.
2.
변화 문제의 대두
2.1. 헤라클레이토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자연의 변화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이론을 편 철학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많은 신화적 전기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신빙성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헤라클레이토스와 관련된 단편은 그의 로고스logos 개념과 기독교적인 로고스logos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한 책에서 주로 발견할 수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그는 『자연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다고 한다.
밀레토스의 학자들이 말하는 근원arche으로서의 물질을 결정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불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근원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헤라클레이토스는 근원으로서의 어떤 물질을 거부한다. 이 세계는 우리가 보는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 구성되거나 만들어진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생성과 소멸, 감각할 수 있는 양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밀레토스 학자들의 물질과 변화의 관계는 역전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떤 근원적 물질이 아닌, ‘변화’를 세계의 본질로서 이해하고 그것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개체가 변화한다면, 그 개체가 변화하기 전과 변화한 후는 같은 개체일까 다른 개체일까? 변화의 원리 자체만으로는 이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변화의 원리나 문제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동일한 개체라고 인정하며, 실제로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변화의 이전과 이후에도 그것을 동일한 개체로서 인정하게끔 만드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속성이 바로 로고스logos이다.
로고스는 변화와 자기동일성-개체동일성을 동시에 설명하기 위한 원리이다. 이전의 철학자들에게서 변화란 의지적인 성격이 강하므로, 규정할 수 없으며 무규칙적이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가 설명하는 로고스는 이성적이고, 보편적이다. 즉, 자연의 모든 개체 안에 내재하며 변화의 방향과 성격을 정해주는 원칙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자기동일성-개체동일성을 설명할 수 있다. 로고스가 함축하고 있는 변화과정은, 변화의 원리인 것과 동시에 어떤 개체가 그것일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모든 개체는 로고스를 함축하고 있고 논리적으로 “만물은 (로고스를 통하여) 하나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상적인 변화와 물질적인 인식에 얽매있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간은 로고스를 파악해야만 자연 내의 개체에 대한 이해와 자연 전체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로고스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혜이다.
2.2 엘레아 학파의 주장과 그에 대한 대응
이렇듯 근원적인 물질에서 변화로 질문의 초점이 옮겨온 가운데,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학파가 나타났다.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는, 이 세계에는 존재와 변화가 동시에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말은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존재의 변화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존재가 변화한다는 것은, 첫째 존재가 비존재가 될 수도 있으며, 둘째 비존재에서부터 존재가 생겨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첫째 경우, 존재가 비존재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라고 부를 수 없을뿐더러, 변화를 겪는다는 것 자체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존재의 속성에서 어긋난 것이다. 둘째 경우는, 비존재에서 존재가 생겨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존재는 그야말로 무(無) - 아무 것도 없음이며, 따라서 존재를 위한 어떤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엘레아 학파의 이런 주장은, 당시 고대 그리스의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게 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던 존재 개념에서 출발하여 아주 비상식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과정은, 이전의 철학자들처럼 주장이나 의견, 가설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치밀하고 정교한 논리적 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엘레아 학파 이후의 철학자들은, 엘레아 학파의 전제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변화를 설명해야하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엘레아 학파 등장 이후의 자연철학은 대개 이런 노력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엠페도클레스는 시칠리아 섬 남부 연안의 도시에서 태어났다. 이는 그가 직간접적으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또한 태어나고 죽은 해가 확실하지 않다.
엠페도클레스는 ‘존재가 무한히 많다’고 주장함으로써 엘레아 학파의 입장을 극복하려고 했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이 네 가지 물질적 요소 - 흙과 물, 불과 공기에 의해 물질적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는데, 이 네 가지 물질적 요소들이 엘레아 학파의 ‘존재’의 속성을 띈다. 네 가지 물질적 요소들은 만들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또한 그 자체로서 충만하고 단일하여 요소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요소들이 무한히 많으며, 여기에 신적인 성질이 내재해있다는 주장을 편다. 이런 신적인 요소를 사랑과 미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 둘은 어떤 종류의 힘이다. 사랑은 네 가지 요소가 서로를 끌어당겨 어떤 사물을 만들어내는 힘이며, 미움은 반대로 서로를 밀쳐내어 어떤 사물을 해체시키는 힘이다. 우리가 감각하는 물질은, 이 네 가지 물질이 두 가지 힘에 의해서 뭉치고 흩어진 결과물이다.
아낙사고라스는 기원전 500년 경에 소아시아에서 태어나, 스무 살 때 아테네로 이주하였다고 알려져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밀레토스의 학자들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가 자신의 철학의 중심주제로 삼았던 것 역시 자연이었으며, 따라서 그도 자연철학의 계승자로 분류해볼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는 변화의 원인-원리로서의 정신nous을 가정하여 엘레아 학파의 주장에 대응하려 했다. 아낙사고라스의 정신은 이성적, 합리적 원리로서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으며 원리가 되어 현상의 변화의 법칙으로서 작용한다. 이를 통해 물질-현상적인 존재와 그것의 원리로서의 정신을 설정하여 변화와 물질의 영속성 모두를 다 설명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정신의 발견은, 무규칙한 의지가 내재했다고 생각하고 변화를 이해했던 기존의 이해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한 생각이다. 변화를 서로 분리해냈을 뿐만 아니라 변화의 과정에 법칙성을 부여하였다. 이는 확실히 과학적으로 진일보한 사유라고 볼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를 통해서 이전에는 영혼과 물질 모두를 가리켰던 자연physis은, 온전하게 물질적인 자연만 가리키는 개념으로 바뀌었으며, 이는 원자론자들의 생각에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고대 원자론의 자연철학
레우키포스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주창하는 원자론은 항상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더불어 언급되고 있으며, 순수하게 레우키포스의 이름으로 전해는 단편은 오직 두 개 뿐이다. 출생지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데모크리토스는 그리스 북부에서 태어났는데, 출생년도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많은 지역을 여행했고, 스스로가 굉장히 폭넓은 분야에 저술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자연철학 이외에도 사회나 윤리학,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이에 대해 저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대 원자론의 기획 역시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와 같다. 엘레아 학파가 제시한 ‘존재’의 조건을 만족시키면서도, 우리가 현상으로 경험하는 변화에 대해 설명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는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비단 고대 원자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상계에 몸담고 있던 사람 모두가 풀어야만 하는 숙제이기도 했다. 이는 존재/비존재의 문제, 생성/소멸의 문제, 변화의 문제 그리고 지식의 확실성 같은 것들로 표현할 수 있다. 원자론은 이 모든 문제를 하나의 이론으로 해결하고자 고안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현상과 실재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한 설명이다.
고대 원자론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실재의 모습을 철저하게 물질적으로 그려내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당시에 자연철학자들은, 생각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철학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신화적인 사고방식의 흔적 또한 보여주고 있었다. 이전 철학자들이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어떤 신적인 힘, 영혼 같은 개념이 그런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원자론은, 세계를 영혼이나 신이 거의 배제된, 물질적인 성질을 중심으로 설명해냄으로써, 인간의 관찰과 이성으로 자연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자연철학의 목표에 한발짝 다가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원자론이 현상과 실재, 변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불변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로서 원자를 설정한다. 그렇다면 원자의 세계 즉 실재의 세계는 원자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가정으로 영원하다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그 자체로 충족되어있고 불가분한 존재라는 가정으로 불변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킨다. 동시에 원자들의 형태와 배열을 통해 우리가 감각하는 현상세계가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고대 원자론의 아이디어는 어느 정도 엠페도클레스의 주장과 유사한 점이 있다. 고대 원자론자들이 엠페도클레스의 주장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확실하게 밝힐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엘레아 학파의 ‘존재’ 개념을 만족시키면서도 현상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존재의 ‘다수’성이라는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 즉,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단일하고 충만하여 변화가 없지만, 그 존재가 무한히 많으며, 존재의 작용을 통해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가 구성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이 존재를 ‘원자atom’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원자는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상태atoma’라는 뜻이다.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상태로 어떤 실체를 정의함으로써, 엘레아 학파의 존재 개념에 합치하는 어떤 실체를 상정하는 것이다.
공간이란 아무 것도 없는 빈 곳을 의미하는데, 이것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들은 엘레아 학파이다. 특히 정수비례로 표현되는, 무한히 분할가능한 공간에 대한 역설은 제논의 역설에 잘 표현되어있다. 언뜻 보면 현상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것이지만, 실재의 세계에 대한 사유를 통해 공간을 부정하는 작업을 해나간 것이다. 엘레아 학파 이후에 등장한 엠페도클레스나 아낙사고라스 역시, 무한히 다수인 존재가 이 세계를 꽉 채우고 있을 뿐 공간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고대 원자론에서는 공간 역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공간은 실재한다’는 원자론자들의 주장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실체로서의 원자들은 그 수가 무한하긴 하지만, 그것이 세계를 꽉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원자가 위치한 그 밖의 어떤 곳들이 있으며, 이것이 공간kenon인 것이다. 존재는 정의에 따라서 자기 안에 공간을 함축할 수 없지만, 자기 밖에 공간이 있는지 없는지는 말해줄 수 없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이 부분에 주목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공간은 다른 존재-원자들과 존재론적으로 동격인 어떤 존재가 아닌, 원자가 존재하기 위해선 논리적으로 반드시 선행되어야하는 ‘무엇’이다. 비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의에서는, 비존재가 존재와 똑같은 차원에서 존재하는 속성을 띄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다. 하지만 공간으로서의 비존재는, 존재가 존재하기 위한 배경 혹은 선행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허공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존재가 운동하는 것이다. 존재가 하나이건 여럿이건, 세계가 그 존재들로 꽉 차있다면, 양쪽 다 운동이 불가능한 세계라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자와 허공은, 원자론에서 변화를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선 원자의 졍의를 통해 엘레아 학파가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공간을 규정함으로써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이를 통해서 원자론자들은 변화의 문제를 원자와 허공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변화는 허공 속에서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원자들이 운동한 결과인 것이다. 이를 우리는 관습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변화는 세 가지 조건으로 바꾸어서 설명된다. 형태, 배열과 위치가 바로 그 조건이다. 이는 원자의 모양, 서로 다른 원자들의 배열, 그리고 그 배열 가운데서 각각의 원자가 자리잡은 곳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허공 속에서 무수히 바뀌는데, 이 가운데서 우리는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다.
변화를 위해 설명하는 원자의 ‘운동’이라는 개념은, 변화의 설명방식과 함께 주목해보아야 할만하다. 이전의 변화와 운동에 대한 설명과는 달리, 고대 원자론자들은 운동과 변화를 무목적적이라고 설명한다. 이전의 철학자들에게 운동과 변화란, 어떤 이상적이고 목적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활동이었거나, 어떤 신적인 힘 혹은 개체가 그런 상태로 향해 이끌어나가는 작용이었다. 하지만 고대 원자론자들에게 운동이란 ‘그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일 뿐, 거기에 특별한 규칙이나 방향같은 것은 없다고 믿었다.
* 참고문헌
『고대 그리스 철학』프리도 릭켄 지음, 김성진 옮김, 서광사
『그리스 철학의 이해』강대식 지음, 민음사
『서양철학사』 S.P.램프레히트 지음, 김태길·윤명로·최명관 옮김, 을유문화사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새뮤얼 이녹 스텀프·제임스 피저 지음, 이광래 옮김, 열린책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김내균 지음, 교보문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등 옮김, 아카넷
『종교에서 철학으로』F.M.콘퍼드 지음, 남경희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희랍사상의 이해』박종현 지음, 종로서적
『희랍 철학 입문』W.K.C.거스리 지음, 박종현 옮김, 서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