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애리얼리, 『상식 밖의 경제학』 요약
경제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가설은 단연 사람들은 계산적인 합리성에 따라 이익과 손해를 따져 행동한다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개념이다. 이것은 몇몇 상황에서는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는 그렇게 한다고 믿고 있다. 『상식 밖의 경제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상식이란 바로 이 개념이다. 이 책이 이러한 상식에 맞서서 보여주는 것은 두 가지 라고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계산적인 합리성과 얼마나 동떨어져있는지에 관한 내용이고, 나머지 하나는 계산적인 합리성에 따라 행동해야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모든 규범들이 주어진 조건에 따라서 얼마나 무력해지는가에 관한 내용이다.
또한, 책의 제목에는 경제학이라는 말이 붙어있지만, 이 책의 내용은 사실상 경제학에 관련되었다기보다는 심리학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린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보여주는 경제학의 한 조류(행동경제학)은 경제학적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단지, 실험들이 증명하고자 하는 주제와 목표들이 경제학에서 전통적으로 다루던 주제들일 뿐이다. 특히 이 실험들은 경제주체의 작은 단위인 개인의 행동, 특히 구매와 소비 행위에 집중되어있다.
적어도 이 책의 모든 실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한다고 본다. 여기에서 최선의 선택이란, 자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소유하고 있는 것을 지키는 행위를 선택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선택은 합리성에 부합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의 실험들은 우리의 최선의 선택이 여러 조건에 따라서 합리성에 부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에게 많은 실험을 가함으로써, 이런 행동들이 우발적이지 않고 일정한 유형으로 반복된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선택과 합리성이 일치하지 않는 여러 사례들을 통해서, 인간이 조건에 따라 얼마나 다른 행동들을 하는지 또한 보여준다. 이런 내용은 주로 책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합리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규범을 포함한 여러 윤리적, 경제적 사고들은 실험대상에게 부여된 조건에 의해서 쉽게 포기되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인간은 실제로 이런 포기를 너무나도 쉽게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고 싶을 때, 다시 말해 그의 선택과 윤리성 또는 합리성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렇게 부합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게 가장 우선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마지막으로 이런 결론을 도출하거나 또는 세워놓았던 여러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심리학적 실험의 방법이 쓰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방법을 통해 최소한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서 경제학 이론의 체계를 세우는 데 필요한 것들만을 취사선택하지는 않게 만들 수 있다. 또한 특정한 조건에 따라 반응하는 인간의 유형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어떤 제도나 규범에 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경제학의 여러 측면들을 교정하는데 행동경제학은 반드시 필요한 분야다.
로버트 하일브로너, 『세속의 철학자들』 요약
경제학자들은 각 경제주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제 현상들을 분석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경제학자다. 하지만 동시에, 그 경제행위들의 규범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사상가 또는 정치사상가적인 성격이 있기도 하다. 실제로 20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몇몇 경제학자들은 일종의 철학자를 겸직으로 삼는다. 하일브로너는 경제학자들의 이런 철학적인 측면에 중심을 두어 경제학사를 서술하였다. 이것이 『세속의 철학자들』이 단순히 『위대한 경제학자들』이 아닌 이유다. 그는 자신의 저술의 이런 특징을 조셉 슘페터의 ‘비전’ 이라는 개념에 빗대어 설명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도 이 책은 어떤 미래가 바람직한지 그리고 그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갈지에 대한 각 경제학자의 구상들이 그의 학설과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강조된다.
그 모습이나 체계는 다르지만, 이 비전이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 또는 없느냐에 따라서 여기에 등장한 경제학자들을 나누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정적인 비전을 대표하는 사람은 단연 맬서스일 것이다. 그가 제시한 비극적인 모습 – 인구의 폭발적 증가, 이들을 다 먹일 수 없는 만큼의 식량생산에 따른 이른바 ‘자연적인 인구 조절’ - 은 어떤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자본주의적인 사회는 자신의 노력을 들인 사람들(노동자와 자본가)이 소외되고, 반대로 가만히 있는 사람들(지주, 유한계급)이 이득을 본다는 점에서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리카도와 베블런도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제시한 홉슨, 적어도 자본주의 단계란 자신을 파괴하는 체계를 따라 움직이는 비극의 무대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마르크스 같은 이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힌다.
하지만 이 책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긍정적 비전이다. 경제학 자체가 아담 스미스라는 거대한 비전과 함께 시작하기 때문이다. 각 개인들이 자신에게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경제현상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논증의 핵심적인 결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별다른 경제학적 입장이 있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일브로너는 오웬, 생시몽, 푸리에 등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을 경제학사의 한 부분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경제사상을 포함해 사회, 정치, 철학의 여러 부분에서 낙관적인 의견을 표명했던 밀 또한 긍정적인 비전을 가진 인물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인즈는 자신의 경제이론과 경제정책을 통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미래를 상정했다는 점에서 이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비전이 흐릿하거나 없는 학자들 또한 있다. 마셜 같은 인물은 경제학에 수학, 한계효용, 수확체감을 도입함으로써, 이상적인 경제적 형태를 제시하기보다는 현재 일어나는 경제현상들을 설명하는 데 더욱 치중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설명의 정확함과 엄밀함을 향상시켰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위대한 경제학자로 대우받을 수 있다. 또한 슘페터는 창조적인 기업가 정신을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보았지만, 이런 기업가는 기존의 시장을 수정하거나 파괴한다.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 원천에 바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꿰뚫어보는’ 기업가적 비전이 자리한다. 이런 면에서 슘페터는 경제학적 입장의 엄밀함과는 별개로 경제학과 경제학자, 또는 자본주의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질을 통찰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토드 부크홀츠,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요약
반면 부크홀츠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는 각 경제학자들이 정식화한 입장들이 현재 우리의 경제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에 중점을 두고 책을 풀어나가고 있다. 따라서 하일브로너와는 달리, 그 경제학자의 학설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별다른 경제적 입장이 없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과 슘페터가 경제사상사에서 제외되는 대신 경제학 자체의 정식화에 성공한 마셜이 크게 부각된다. 또한 케인즈 이후에 그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대표적인 세 학파들에 대한 소개도 추가되어있다.
모든 경제학사 연구가 그렇듯이 이 책 또한 아담 스미스로부터 시작한다. 아담 스미스 이래로 경제학자들이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 개인의 경제행위와 그 경제행위로 이루어진 사회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 문제를 경제적으로 처음 정식화했으며, 시장과 노동분업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이후 경제학은 주로 시장의 작동원리와 경향을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삼아왔으며, 바로 이것이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 책의 중심적인 대립축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경제학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연구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시장 자체를 보는 시선이 다른 마르크스라든가, 시장보다는 시장 속의 개인들을 지배하는 다른 요소들을 연구하는 제도학파 경제학자들(베블런, 갤브레이스), 그리고 시장의 자기회복 능력을 크게 믿지 않은 케인즈, 시장을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고 경제원칙의 지배를 받는 요소로서의 정부를 분석하는 뷰캐넌,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심리학에 더욱 가까운 행동경제학에 이르는 흐름들이 그렇다.
또한 다른 대립축이 만들어져있기도 한데, 그것은 시장의 조절능력 –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 – 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다시 말해 경제주체로서의 개인들의 최선의 선택과 사회의 번영 사이의 연결이 과연 얼마나 자연스럽고 강한가에 관한 믿음이라는 축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 둘 사이에 관계가 깊다는 것을 밝히면서 경제학을 시작하였지만, 당시에도 그의 입장에 대해서 반대하는 여러 학자들이 있었다. 그 뒤에 등장한 마샬이나 밀, 그리고 이후의 통화주의자들이나 합리적 기대 가설을 믿는 이들은 아담 스미스의 입장에 서고, 반대로 제도학파나 케인즈와 케인즈주의자는 스미스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공공선택학파나 행동경제학은 이 두 가지가 거의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아담 스미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 대립축이 경제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이렇게 주요한 두 가지 문제, 그리고 그 밖에 각 경제학자들을 둘러싼 여러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한 문제들에 대한 각각의 입장을 대체로 평이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종종 글쓴이의 시각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들을 미루어보았을 때 대체로 그는 아담 스미스의 입장과 경제학의 전통적인 연구주제와 방법에 대해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는 케인즈 이후의 경제학의 흐름에 관한 서술이다. 책의 서술전략으로서는 케인즈 이후에는 케인즈의 입장의 여러 부분을 대상으로 반대의견을 낸 학자들을 다루는 것이 맞고 또한 유리하겠지만, 케인즈주의자들이라고 하여 꼭 케인즈의 입장을 그대로 답습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요약과 감상
여러 경제학자들 사이의 차이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에 관한 차이인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매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하려 노력하는 존재일수도, 단순히 최선의 선택 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보에 대해 알고 완전히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행위하는 존재일수도, 또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임시변통 삼아서 이것저것 해보는 존재일수도 있다. 그래서 시장과 시장에서의 경제주체들의 행위에 대한 연구로 시작한 경제학은 이제 심리학과 만나서 행동경제학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는 데 이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은 어쩌면 경제학의 기틀을 마련한 아담 스미스 스스로가 내포하고 있던 성격, 즉 그가 『국부론』과 동시에 『도덕감정론』을 썼다는 사실로부터 이끌려나오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앞쪽은 경제행위에 관한 책인데 반해서, 뒤쪽은 행위의 적절함에 대한 판단의 과정에 관한 책, 바로 인간에 대한 어떤 이해나 입장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면 만약 아담 스미스의 대표적인 두 저술이 정합적이라면, 『국부론』에서 나오는 경제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도덕감정론』에서 그려진 바람직한 도덕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국부론』의 이해는 『도덕감정론』의 인간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도덕감정론』은 『국부론』의 일종의 논리적인 기초다.
따라서 그들의 개별적 행위가 총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맺는지는 그러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규정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이것은 사회가 개인들의 행위의 무대가 되고, 전체 사회의 경향이란 이런 개인들의 행위의 경향의 총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몇몇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이 연결은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한다. 즉, 개인의 최선의 선택과 사회의 번영은 어떤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언제든 그렇지 않게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경제학의 통찰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특정 계급에게 경제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을 때(맬서스), 불황일 때(케인즈), 여러 이익집단들로 인해 이해관계가 아주 복잡해질 때(뷰캐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체제 자체가 모순덩어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마르크스)도 있다. 그러므로, 이후 등장한 많은 반대적인 학설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행위가 사회의 번영과 연결되도록 하는 개입의 길을 상시적으로 열어놓은 케인즈의 입장은 많은 부분에서 납득할만하다.
또한 아무리 도덕적인 인간들이라고 하더라도,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그 도덕성이 결코 발휘될 수 없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행동경제학을 포함한 몇몇 심리학적인 실험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이렇게 행위하는 이유는, 결국 윤리적 덕목들을 지키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어떤 경제행위가 사회에 전반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가 바로 연결되지 않는 또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것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개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국가 또는 법은 개인들에게 도덕성을 직접 강조해야 하는데,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가 도덕률을 부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비도덕적인 개입, 즉 경제적인 요소들에 관한 조정을 통해 개인의 선택과 사회의 번영이 일치될만한 조건을 지속적으로 조성하는 일이 요청된다. 이는 개인의 최선의 선택에 따른 행동은 분명히 어느 정도는 규칙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정책이 이런 바람직한 조건을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를 (역시나 어느 정도는) 가늠해볼 수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