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나마 올리는 현대윤리학연습(2012년 1학기) 발제.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15장 요약>

매킨타이어의 이 글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첫째, 덕에 관한 여러 다른 생각들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덕들이 모두 공유하는 덕의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덕의 본성이라고 부르려고 시도한다. 셋째는 그 덕의 본성을 사회적이고 내면적인 의미의 실천과 관련하여 규정한다. 넷째는 그와 같은 덕에 관한 규정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은 덕의 규정과 관련하여 추가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덧붙인다.

 

차이점

 

덕목에 대한 생각이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그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 제인 오스틴, 그리고 벤자민 프랭클린을 사례로서 들고 있다. 그는 이 다섯 경향들은 각각 아주 다른 덕목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지 시간이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의 차이일 뿐만이 아니라,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존재했던 차이이기도 하다. 호메로스는 어떤 것이 뛰어난 것을 덕으로서 정의한다. 따라서 신체적인 강함(physical strength) 또한 호메로스에게는 덕목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목과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는 신체적인 강함보다는 정신에 더 많은 비중을 부여했다. 반면 통이 큼(magnanimity, megalopsuchia)과 아낌없음(munificence)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매우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이지만, 반대로 기독교의 교리는 통이 큼과 반대되는 겸손(humility)을 칭찬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 관해서 알지도 않았을 믿음, 바람, 사랑같은 덕목들을 강조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 둘은 부자와 노예가 어떤 덕목들을 가지고 있고 덕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관점도 완전히 다르다.

이들을 가까운 시대의 두 사람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은 변하지 않음(constancy)을 모든 덕목의 전제조건이라고 말한다. 또한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덕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명예와 이해타산을 생각하여 행해진다고 생각했지만, 오스틴은 그것이 온화함(amiability)의 모상이라고 생각했다. 매킨타이어는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군인의 용기를 진정한 용기의 그림자라고 생각한 것과 유비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얻으려는 욕구(the drive to acquire)를 그 자체로 덕목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기존의 덕목들에 격률을 정해, 그것에 복종하는 것을 덕으로 설명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의 덕 목록이 단지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첫째, 덕에 관한 각각의 개념은 여러 덕목들을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으로 나누고 질서짓는데, 그 질서가 그가 생각하는 덕 개념이 다른 덕 개념과 어떤 차이를 나타내는지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이 된다. 둘째, 덕과 사회적 질서 사이의 관계가 다른 것이 각각의 덕의 개념이 다른 것에 반영된다. 셋째, 진정한 덕과 그 덕을 따라하거나 그림자에 불과한 덕을 구별하는 것이 덕에 관한 개념마다 매우 다르다. 따라서 역사 전체를 관통하여 덕 개념에 부여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없다는 결론을 쉽게 맺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구체적인 덕목에 대한 사례뿐만이 아니라, 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호메로스에게 덕은 그것을 표현하여 그의 사회적인 역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성질이다. 또한 그 사회적인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나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고, 따라서 가장 중요한 덕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호메로스가 생각하는 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호메로스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각 사회적인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는 제인 오스틴도 호메로스와 비슷하다. 그녀는 여러 덕목들이 사회적 역할에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매킨타이어는 모든 덕목들이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변하지 않음constancy에 대한 주장을 가리키는 듯 하다.) 그녀의 견해가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적 역할보다는 한 종류로서의 인간으로서 해야할 것을 덕이라고 보았다. 인간에게는 좋은 삶을 살아야한다는 목적(telos)이 있는데, 이 목적은 어떤 인간의 성질이 덕목들이 되는지를 결정한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이러한 좋은 삶과 덕목들 사이의 관계는 내면적(internal)인데, 그는 내면적이라는 말을 수단의 성격을 정하지 않고서는 목적이 충분히 규정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덕목들을 실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덕목들 또한, 그 구체적인 목록이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최종적인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점에서 논리적인 구조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다. 무엇이 덕인지 탐구하기 위해서는, 좋은 삶 즉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파악해야하고, 그것에 대한 수단을 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면 덕에 관한 벤자민 프랭클린의 정의는 공리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덕에 관한 정의들과 차이가 난다. 덕은 성공, 즉 현세(필라델피아)와 천국에서의 번영(prosperity)을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그는 효용성(utility), 즉 유용함(useful)을 덕의 기준으로 삼는다. 매킨타이어의 정의에 따르면 이 관계는 내면적이기보다는 외면적인데, 다시 말해 수단의 성격을 정하지 않고서도 목적이 충분히 규정될 수 있다.

 

공통점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해서, 덕에 관한 이론에은 적어도 사회적 역할,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 성공과 관련되었다고 주장하는 세 가지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단순히 덕이라는 언어를 시대를 초월해 다르게 쓰고, 따라서 그 사회적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다 다르기 때문에 모두 다 다르게 볼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보았던 다섯가지 사례는 제도적인 주도권(institutional hegemony)을 요구하는 것이 공통적이다. 덕에 대한 모든 정의들은, 특정한 제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덕목들이 주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덕에 관한 위와 같은 이론들에서 추론해볼 수 있는 덕에 관한 이론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것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미 정의되고 설명되어 온 방식 안에서 사회적이고 또한 도덕적인 삶의 일정한 특징들에 관한 몇몇 우선적인 생각에 관한 수용을 요구한다는 점이다.(it always requires for its application the acceptance of some prior account of certain features of social and moral life in terms of which it has to be defined and explained.(p.123)) 덕은 이차적인(secondary) 개념이다. 덕에 관한 이론들의 이러한 공통점을 규명하고 덕 개념의 핵심적인 개념규정을 위해서, 그는 적어도 실천(practice), 한 인간의 삶의 서사적 질서(narrative order), 그리고 한 도덕적 전통을 구성하는 것(what constitutes a moral tradition)이라는 세 가지에 대해 설명해야한다고 적고 있다.

그가 지적하는 실천 개념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이미 행해져왔던 특정한 유형이나 전통들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잘 싸우고, 가정을 잘 꾸리며, 조언을 잘하고, 이야기를 잘 하고, 연주를 잘하고, 기하학을 잘하는 것들이 고대의 덕목들이다. 인간이 행하는 여러 실천들은, 이런 덕들이 보여지기 위한 배경(arena)을 제공한다. 그는 실천을 탁월함을 달성하려는 인간의 힘들과, 목적들 그리고 관련된 선들의 인간의 개념규정들이 체계적으로 확장된 결과와 함께, 활동의 저 형식에 적절하고 또한 부분적으로 확정적인 탁월함의 저 표준들을 달성하려 노력하는 것의 과정 안에서 활동의 저 형식에 내적인 선들이 현실화되는 것을 통한 사회적으로 나타난 협동적인 인간의 활동의 모든 통일되고 복합적인 형식(any coherent and complex form of socially established cooperative human activity through which goods internal to that form of activity are realized in the course of trying to achieve those standards fo excellence which are appropriate to, and partially definitive of, that form of activity, with the result that human powers to achieve excellence, and human conceptions of the end and goods involved, are systematically extended. p.124)’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설명이 매우 복잡하여, 그는 사례를 들어서 이것을 설명한다. 7살 아이에게 체스를 가르치려 할 경우, 우리는 사탕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아이에게 체스를 가르칠 수 있다. 이 아이는 사탕을 먹기 위해 체스를 두겠지만, 우리는 아이가 먼훗날 체스 자체에서 오는 재미를 느끼길 바란다. 이 경우 두 가지 선함이 있는데, 하나는 외면적인 선함 즉 사탕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적인 선함, 즉 체스의 재미다. 외면적인 선함은 다른 활동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내면적인 선함은 체스를 두는 행위에서만 구할 수 있다. 또한 이 내면적인 선함은 체스라는 복합적인 배경 아래에서만 그 의미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내면적인 선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내면적인 선함을 규정하는 실천에 참여하고 그 실천이 이미 규정한 내면적인 선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또한 내면적인 선함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는 초상화의 역사의 사례를 들어서 이것을 설명한다. 하나는 그 실천 속에서 만들어낸 생산품의 탁월성(the excellence of the products), 즉 뛰어난 초상화이다. 둘째는 생산품의 탁월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특정한 종류의 선(the good of a certain kind of life)이다. 각각의 실천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실천의 역사를 통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물론 이것이 비판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수용하지 않는 활동은 실천이라는 의미를 획득할 수가 없다.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기준에 들어맞는 활동을 해야만한다. 그러므로 이런 내면적인 선함을 성취했을 경우, 이것은 단순히 나의 선함일 뿐만이 아니라 그 실천에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 즉 공동체에 대해 선하다. 내면적인 선함을 성취한다는 것은 생산품의 탁월성을 끌어올렸다거나, 또는 탁월함의 기준을 수정하거나 혁신하는 창조적인 실천을 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따라서 모든 실천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높아진 탁월함을 성취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의 개념에 비추어 덕은 다시 정의된다. 덕은 실천에 내적인 저런 선들을 성취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는 경향이 있는 것의 소유와 훈련 또는 어떤 이러한 선들을 성취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효과적으로 막는 결핍이라는 한 습득된 인간의 특성(A virtue is an acquired human quality the possession and exercise of which tends to enable us to achieve those goods which are internal to practices and the lack of which effectively prevents us from achieving any such goods. p.128)’이다.

 

덕과 실천

 

이와 같은 정의로부터 그가 논증하려는 것은 핵심적인 덕목들(key virtues)은 모든 실천에 내재한 선들을 성취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핵심적인 덕목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없다면 어떤 실천에서도 내면적인 선을 성취할 수 없어야 한다. 그는 이것을 정의, 용기, 정직함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덕목들의 특징 비슷한 유형의 실천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점이다.

정직함은 그 덕목을 행하는 대상과 행하지 않는 대상 사이의 차이를 낳는다. 그 차이는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서로를 향한 신의를 깨뜨린다. 여기에서 정의는 동일한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해, 정의는 통일적이고 비인격적인 기준들에 따라 잘한 일이나 결과에 관한 존중 안에서 다른 이들을 다루는 것(p.129)’이다. 이것을 어길 경우에는, 마찬가지로 그 덕목을 행하는 대상과 행하지 않는 대상 사이에 차이가 생긴다. 용기는 그 자신을 손해나 위험에 내맡기는 능력(p.129)’인데, 이것은 실천과 관계맺는 개인들의 공동체 자체와 관련된 일을 위해서, 즉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공동체의 일을 행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능력이다.

만약 이런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사회에는 정의, 용기, 정직함에 관한 규칙들이 있어야한다. 이런 덕목들은 모든 실천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각각의 사회는 각각의 덕목들에 대해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또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덕들이 가치평가되지 않는 사회는 번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천은 많은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일종의 공동작업인데, 탁월성에 대한 평가는 공정해야(fairness)하고, 그 평가가 공정하기 위해선 정직함이 필요하며, 평가기준이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공정함과 정직함이 요구되고, 또한 탁월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험에 내맡길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실천과 덕의 관계를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 실천에 대비되는 두 가지 개념으로 기술적인 숙련과 제도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탁월함을 성취하는 데에는 기술적인 숙련이 필수적이며, 기술적인 숙련은 그 기술을 더욱 잘 발휘하는 것이라는 통일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이 실천과 그 실천에 내면적인 선함인 것은 아니다. 내면적인 선함은 통일적이지 않고 시대마다 바뀌어왔으며, 기술적인 실천은 이 선함을 변형시키거나 풍부하게 하는 데 더 큰 의의가 있고, 오히려 이것이 실천에 본질적이. 그러므로 실천에 들어서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져온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만들어온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실천을 위해서는 이런 역사를 배워야만 한다.

다른 하나인 제도는 외면적인 선함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실천과는 다르다. 제도가 관계를 맺는 대상은 물질적인 선, 권력, 지위와 같은 것들이다. 물론 특정한 실천을 보존하려면 그것을 제도화해야한다. 하지만 제도는 내면적인 선을 성취하려는 실천을 좌절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실천이 성취하는 공공선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제도가 실천으로서의 성격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대비되는 의미로서의 실천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의미의 실천은 정치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실천과 많이 다르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제도는 개인에게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매킨타이어의 관점에서 제도는 실천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 다시 말해, 실천(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은 제도적으로 권장되거나 요구된다. 그 이유는 다름아니라 제도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양식의 실천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실천, 즉 내면적인 선에 대한 가치평가가 없는 사회는 결국 홉스가 가정하는 형태로 이행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덕은 외면적인 선함과 내면적인 선함에 대해서 각각 다른 관계를 맺는다. 덕은 내면적인 선함을 성취하는 데 필수적이다. 반면 외면적인 선함을 성취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하기

 

여기까지 논의를 마치고 나서,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제시한 정의들을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하면서 차이점과 공통점을 말한다. 차이점은 두 가지다. 첫째, 덕들에 관해서는 목적론적이지만 그 기반이 목적론적 자연관 또는 형이상학은 아니라는 것. 둘째, 실천이 다양하고 그에 따라 내재적인 선함들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충돌이 있을 수 있으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파악한 것과는 달리, 개인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공통점은 세 가지다. 첫째, 자발성, 지적인 덕목들과 성격의 덕목들 사이의 구별, 자연적인 능력들과 정념들 모두에 관한 관계와 실천적인 이성 사용의 구조 등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 요구하는 구별과 개념에 관한 적절한 마무리(cogent elaboration)가 똑같이 요청된다는 점이다.

둘째, 즐거움(pleasure)과 즐김(enjoyment)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편의를 제공해줄 수 있다. 반면에 공리주의적이진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활동의 즐김과 성취의 즐김은 행위자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들은 성공적인 활동, 즉 탁월함을 성취하는 실천 속에서, 성취된 활동과 즐긴 활동이 하나되고 같아지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활동과 무관한 선도 있을 수 있는데, 만약 그런 선들을 성취하는 활동이 있다면 그것은 덕목이라든가 실천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덕은 결과를 고려하는 것과 상관없이, 실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적으로 선한 외면적인 선함은, 내재적인 선함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덕에 의해 방해받거나 거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불가공약적(not commensurable)이다.

셋째, 가치평가와 서술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말하자면, ‘덕을 행했다는 것은 서술일뿐만 아니라 가치평가이기도 하다. 다른 행위가 아닌 바로 그 덕을 행한 이유는 인과적으로 설명되는 대상, 즉 서술의 대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재적인 선을 성취하려 노력한 행위라는 점에서 가치평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그 실천이 악의(evil) 실천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악의 실천의 내재적인 선함은 무엇인가? 그는 이런 질문에는 두 가지 방식으로 답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적이고 내재적인 선이 있는 몇몇 활동들 가운데에는 단순히 악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나, 이런 것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과연 그의 실천 개념이 이러한 악의 실천들을 악이라고 평가할만한 기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덕들이 실천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 어떤 실천도 비판받을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의, 용기와 같은 덕은 악의 실천들을 비판하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덕은 단순히 실천 개념과 관계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덕은 더 넓은 범위의 인간의 삶과도 관계해서 설명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실천 개념은 인간의 삶의 부분이거나 또는 특정한 유형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좁은 맥락을 안고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방식, 즉 인간의 좋은 삶에 대한 설명은 이보다 더 큰 맥락에서 설명된다. 그의 설명은 전체로서 파악된(viewed as a whole) 삶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삼는다. 덕이 없는 사람이란, 특정한 실천들에서 실패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실패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실천이 요구하는 덕과 다른 실천이 요구하는 덕은 얼마든지 모순적일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실천에는 뛰어난 사람이 다른 실천은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시대를 앞선 그림을 그려 생계가 어려워진 화가라든가, 뛰어난 클래식 음악을 부르주아지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공산주의 혁명가같은 사람들이 그렇다. 또는 여러 실천들의 기준들 사이를 아무런 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오고 갈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실천에 연관하여 분석한 덕 개념이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설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답변이다. 다양한 실천들은 모두가 똑같은 지위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실천들 사이에도 질서와 위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양한 실천들은, 좋은 삶이라는 더 큰 개념 아래서 조직되고 구조화된다. 예를 들어, 상이한 실천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평가하여 정의롭게 자원을 분배할 때에는 이 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한다. 그렇게 해서 받을 자격이 있는 만큼만 받아갔을 때에야 공정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덕인 참을성(patience)에도 이것이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기다릴 수 있거나 기다려야하는 것들은 많지만, 그 모든 기다림에 동일한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전체적인 삶에 대한 목적 없이는 각 실천들 사이의 분열을 막을 수 없고, 이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하는가에 관한 맥락이 구성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실천들과 그에 속한 덕들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행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한 가지 덕이 있을 것이라는 몇몇 사람들의 생각과 함께 강화된다. 그러나 이것은 증명된 것이 아니기에, 질문되어야 한다. , ‘각 인간의 삶에 관해 한 단일체로서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는 아마도 각각의 삶을 그것의 좋음을 가지는 것으로서 구체화하려고 시도하는지 그리고 다시 말해 다른 어떤 것보다는 오히려 단일체의 한 종류로 그 또는 그녀의 삶에 관해 만드는 것을 개인이 가능하게 하는 것 안에서 그들의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서 우리가 덕들을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정당한가?(is it reationally justifiable to conceive of each human life as a unity, so that we may rty to sepcify each such life as having its good and so that we may understand the virtues as having their function in enabling an individual to make of his or her life one kind of unity rather than another?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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