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특강 발제.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Part 6의 Section 1,2 요약. 군데군데 틀린 해석으로 지적받은 부분이 있으나 수정하지 못했습니다>

 

 

  이 장에서는 개인들의 성격에 관해 다룬다. 처음에는 개인 자신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측면에서 다룬다.

 

 

 

Section 1 자기 자신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덕, 신중에 관해

 

 

  (1-5) 모든 사람들에게 첫째로 고려되는 신경씀(care)의 대상은 몸의 보존과 그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우리에게 이런 대상들을 해치는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방법을 우선적으로 가르친다. 또한 사람들은 자라나면서 몸의 보존과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심스러움(foresight)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배운다. 이런 신경씀과 조심스러움을 몸에 익히면서 사람들은 조건(fortune)을 유지하고 증가시키는 기술들을 익힌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좋은 조건(advantage of fortune)을 가지고 있기도 한데, 명예(credit)나 지위(rank) 에 대한 존중은 이런 좋은 조건의 정도의 차이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존중의 대상이 되려는 욕망은 우리의 모든 욕망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 몸에 필요한 것이나 몸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을 향한 욕망은 이런 존중의 대상이 되려는 욕망에 비하면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지위나 명예 등은 특정한 행동이나 그 행동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감정들(신뢰, 경의, 선한 의지)에 달려있다. 신중의 덕은 이러한 건강함, 조건, 지위와 명예 등에 신경쓰는 태도에 관한 표현이다.

 

  (6-10) 일반적으로 안좋다가 좋아질 때 느끼는 기쁨보다 좋다가 안좋아질 때 느끼는 슬픔이 훨씬 크다. 그러므로 신중의 덕이 추구하는 가장 주요한 상태는 현상유지(security)다. 신중한 사람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행복함을 보존하고, 적어도 손해가 나지 않게끔 행동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진짜 지식과 기술, 근면성실함(assiduity and industry), 구두쇠(parsimony)에 가까운 절약(frugality)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신중한 사람의 행동거지는 진지하고 진심을 다해(earnestly) 공부하고, 진정성있고(genuine), 속이거나 현란하게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화법이 간결하고 겸손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업적을 자랑하고 다른 집단을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고, 간혹 그들과 교류를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로부터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의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다. 신중한 사람의 말은 신의성실하고(sincere), 거짓말 한 것이 들켜 불명예를 입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침묵을 지킨다. 신중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잔잔하지만 오래 가는 우정을 맺고, 젊은 날에 맺을만한 열정적이고 즉흥적인 관계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성이 좋지는 않다. 재미있는 수다를 떨거나 놀기 좋아하는 모임(convivial societies)에는 가지 않는다. 이들이 그의 삶의 방식인 절제나 근면함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중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귀에 거슬리지 않는 말을 하고, 불쾌하고 무례한 것을 싫어한다. 자신을 낮추길 좋아하고, 사회에서 통용되는 예법과 의식들을 존중한다. 이런 사람들은 탁월한 능력으로 큰 업적을 성취한 위인들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좋은 모범이 된다(보통 위인들을 닮으려는 사람들은 능력은 닮지 않고 나쁜 것만 배우는 경향이 있다).

 

  (11-13) 신중한 사람은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미래에 얻을 더 길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위해 현재의 여유와 즐거움을 희생한다. 이런 성향은 공정한 관찰자(가슴이 따뜻한 사람, the man within the breast)의 완전한 시인의 대상이다. 공정한 관찰자는(신중한 사람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감내한다는 둥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같은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 아마도 사람들이 현재의 여유와 즐거움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근면성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실제로도 그렇다. 신중한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면서 수입이 꾸준히 늘어나고, 조금씩 근면성실의 강제 그리고 여유와 즐거움의 부족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는 힘들었다가 즐거워진 것이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가 즐거워진 (근면성실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두 배의 만족을 느낀다. 또한 이렇게 얻은 온전한 평온(secure tranquillity)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새로운 일이나 모험을(enterprises and adventures) 벌이지 않고,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주 주도면밀하게 진행해서 자신의 상태가 안좋아지지 않도록 한다. 또한 신중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르는 분야에 관해 떠들고 다니는 사람(buster)도, 오지랖 넓은 사람(meddler)도, 상담가나 충고자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영향력을 가진다고 잘난 척하지도 않고, 당파와 파벌을 싫어하고, 야망이 없다. 공적인 일에 종사하더라도 자신이나 자기 일파(country)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성취할 수 있는 위대한 업적보다도 평온함을 선호한다.

 

  (14-16) 그러나 신중함은 이렇게 자신의 상황에 관해서만 신경쓰는 경우에는 가질만하고 고귀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신중함은 덕과도 함께일 수 있다. 개인을 넘어서서 더 고귀한 목적이나 덕(용맹함, 관용, 정의의 규칙에 대한 고려와 존중, 자기절제 등)과 신중함이 함께할 때, 그 상황을 신중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 이렇게 되려면 완전한 적절함에 맞춘 행동을 하는 습관과, 도덕적인 측면에 대해 세심하게 고려하는 지성이 필요하다. 반면 신중함은 악덕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완전범죄를 저지른 악당은 이 세계에서는 죄를 면한다. 이런 일이 빈번한 모임(society)에서는 아주 끔찍한 행위들이 친숙해진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체자레 보르지아는 이웃한 나라의 왕자들을 거짓으로 초대해서 죽였고, 마키아벨리는 왕자들의 아둔함을 탓하는 글을 남겼다. 게다가 그와 비슷하게 행동하는 것이 사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신중함과 결합된 악덕은 간혹 그런 일을 저지른 위인들에 의해서 이런저런 칭찬을 받는 반면, 정반대로 신중함이 동반되지 않은 이러한 행동들은 아주 비열하고 천박한 것으로 여겨지고, 보통 그 죄를 이 세계에서 치른다.

 

  그러므로, 신중함은 덕과 묶였을 때 가장 고귀하게 여겨지고, 신중하지 않음은 다른 악덕들과 묶일 때 가장 천하게 여겨진다.

 

 

 

Section 2 다른 사람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인의 성격에 관해

 

 

  서론

 

 

  (1-3)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거나 이롭게 하거나 둘 중에 하나의 측면에서 영향을 미친다. 불의에 대한 적절한 resentment는 공정한 관찰자의 시각에서 우리의 이웃의 행복을 우리가 상처내고 방해하는 것을 모든 측면에서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동기다. 다른 동기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정의의 규칙을 위반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주(state)나 커먼웰스(commonwealth)의 지혜는 이런 피해로부터 자신의 권위 아래 놓여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규칙들을 만드는데, 이것이 민법과 형법(civil and criminal law)이다. 물론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 또한 종종 덕을 동반하는 행동에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우리가 선행을 하도록 방향을 설정해놓고, 그것을 인간들이 활용하는 상황을 기획했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질서(order)이다. 질서는 개인들 사이의 질서와 모임들(society) 사이의 질서로 설명할 수 있다.

 

 

 

Chap 1 자연에 의해서 개인들이 우리의 신경씀과 주의에 들어맞게 되는 질서에 관해

 

 

  (1-4) 모든 사람은 우선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신경쓴다. 우리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내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게끔 만들어져있다. 그래서 자신의 기쁨과 아픔에 대한 감각이 본래적이고, 다른 사람의 기쁨과 아픔에 대한 감각은 반영이거나 상상이다. 자기 자신을 제외하면 같은 집에 사는 가족들이 애정(affection)의 대상이 된다. 가족들의 행동은 나의 행복과 불행에 영향을 많이 미치기 때문에, 가족들이 행복하도록 신경쓰는 것은 나의 행복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족들 사이의 애정 가운데서도 아이가 부모에게 느끼는 애정보다 부모가 아이에게 느끼는 애정이 더 크다. 이것은 아이의 연약함 때문에 아이의 생사와 성장이 부모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늙은이보다 기대되는 바가 많다. 그래서 아이의 죽음은 매우 슬프지만 늙은이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덜 슬프다. 그 다음에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낸 형제자매 사이의 우정인데, 이들은 마음이 가장 연약한 시기에 서로 공감하는 관계로 맺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런 가족들 사이에는 서로를 도와줘야 할 의무감이 지워지고, 이 의무감은 상호공감을 더욱 빈번하고 습관적으로 만든다.

 

  (5-7) 형제자매의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인 형제자매들 사이에 머무르며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좋은 유대관계(agreement)를 맺는다. 그러나 이들의 유대관계는 그들의 부모인 형제자매들의 유대관계에 의존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 가족의 구성원은 아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중요성은 형제자매들보다 훨씬 덜하다. 그래서 보다 덜 교류하는 친척은 다른 가족들에 비해 덜 중요하다. 거리가 멀면 애정도 그만큼 낮아진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애정은 습관적인 공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상호공감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이것이 습관화되어 애정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특정한 상황 속에서는 애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기대한다. 그래서 아이를 보고도 무덤덤한 부모,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아이는 증오와 공포의 대상처럼 보인다.

 

  (8-11) 이런 사례들이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상호공감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일반원칙에 대한 존중은 그런 애정과 비슷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부모와 자식 또는 형제자매들이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는 어떤 경우, 같은 집에서 사는 만큼의 애정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가족들은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지는 않으며, 같은 집에서 같은 가족구성원으로서 같이 살아가길 바란다. 때로는 보고 싶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그들이 만났을 때는 이런 애정을 강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같이 만나서 오랫동안 지내다보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같이 살아가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부족한 공감능력 때문에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곧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식을 것이고, 일반적으로 가족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애정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함은 거의 즐길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반적인 규칙 자체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안되는데, 그것은 가족들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아이들을 멀리 떨어져있는 학교나 대학, 수녀원이나 신부수업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제도는 가족적인 도덕(domestic morals)과 가족적인 행복(domestic happiness)을 해친다. 가족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아이의 공감능력을 키운다. 학교를 가야한다면 통학을 시키는 것이 좋다. 어떤 공공교육도, 그것을 통해 잃어버리는 가족적인 도덕과 행복을 같거나 비슷한 정도로 보충해줄 수는 없다. 가정적인 교육은 자연의 제도이고, 공공교육은 인간의 고안물이다. 어느 것이 더 현명한지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이른바 ‘핏줄의 힘’이라고 불리는 것이 비극이나 소설에서 중요한 장치로 쓰이지만, 이런 것은 비극이나 소설 밖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같은 집에서 함께 자라나지 않았는데도 신비한 힘에 이끌려 서로를 알아보는 것으로 가정되고 있다.

 

  (12-16) 시골지방(pastoral countries)과 법의 지배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지방(country)에서는 같은 가문(family)의 모든 후손들이 서로 이웃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이들은 스스로를 공동으로 방어한다. 의견일치와 분열에 따라 유대가 강해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한다. 또한 다른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과의 교류보다 자신들끼리의 교류가 훨씬 더 빈번하다. 반면 법의 지배가 제대로 자리잡은 것처럼 보이는 상업적인 지방(commercial countries)에서는 후손들이 모여 살아야 할 동기가 없으므로 뿔뿔이 흩어진다. 교류에 관한 기억도 곧 잊혀진다. 이런 상태는 문명화가 진행될수록 심해진다. 이런 지역에서는, 잘 배치된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이 만들어진다. 이는 가족들 사이에 있는 애정과는 같지 않다. 우정의 상대는 직장동료들, 거래처들이고, 이들은 또 다른 형제들이라고 불린다. 이런 관계는 necessitudo라는 라틴어의 의미에 함축되어있다.

 

  (18) 이렇게 생겨난 어떤 우정들 가운데서는, 좋은 행동들에 관한 경의와 시인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들도 있다. 이런 우정은 자연적인 공감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덕있는 사람들은 그 행동들 속에서 완전한 신뢰감이 느껴진다. 이런 의미에서 악덕은 언제나 변덕스럽고, 오직 덕만이 규칙적이고 질서가 있다. 또한 이런 덕에 대한 사랑에 기반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덕있는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덕있는 사람들 사이의 우정은, 둘 이상의 관계를 맺는다는 이유에서 생기는 질투나 취미, 가벼운 성격적 특성에 의해 맺어진 우정과는 다르다.

 

  (19) 우정을 통해 친절함이 베풀어진 대상은, 자연에 의해서 자신에게 자선(친절함)을 베푼 사람을 친절함의 특별한 대상으로 삼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그 사람은 자선을 베푼 사람에게 되갚거나 또는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들이 느끼는 고마움이 자선에 상응하지는 않지만,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고마움은 자선에 상응한다. 그런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자선을 베푼 사람은 오히려 그 덕있음이 배가되어 보인다. 자선이나 친절함이 베풀어지면 그것은 언제나 여러 다시 고마움 등의 형태로 돌아오고, 그래서 ‘친절함은 친절함을 낳는다.’고 말할 수 있다.

 

  (20) 이와 같이 친절함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실제로 우정을 맺고 있지는 않지만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구분이 생겨난다. 이 가운데, 지위의 구분과 모임(society)의 질서는 운이 좋은 사람, 부유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등에 대한 존중에 토대를 둔다. 인간의 비참함을 줄이는 것은 아주 불운한 사람, 가난한 사람, 가엾은 사람 등에 대한 동정심에 토대를 둔다. 흔히 도덕주의자들은 동정심과 자선을 강조한다. 그리고 지위나 질서에 대한 존중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옳지 않다. 자연은 지혜나 덕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보다는 태생과 조건 등 명백하게 보이는 것에 지위나 질서가 토대를 두어야 그것이 더욱 확고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혜나 덕 같은 것들은 아주 세심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잘 보이지 않고 틀리게 보일 가능성이 있지만, 태생이나 조건, 환경 등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더욱 확고한 토대 역할을 하기에 더욱 적합해보인다.

 

  (21) 그러므로 동등하게 덕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평범한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을 더 우러러보게 되고 그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요인이 평범한 사람에 비해서 위대한 사람이 더 많은데, 이 요인이 많으면 그 사람의 덕 또한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이나 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주제가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겪는 고난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2) 서로 다른 애정들이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때, 우리가 규칙에 의지해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힘든 일로 보인다. 이들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규칙에 따라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Chap 2 자연에 의해서 사회(모임)들이 우리의 자선에 들어맞게 되는(recommand) 그런 질서에 관하여

 

 

  (1-3) 개인들에게 해당하는 질서와 동일한 원리가 사회들에 해당하는 질서에도 적용이 된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그의 보호를 받고 있는 주(state)나 영지(sovereign)는, 우리의 행동이 그의 행복과 불행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또한 우리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은 주나 영지의 번영과 행복에 어느 정도 의지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연스럽게 애정의 대상이 된다. 다른 모임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면에서 앞서고 있으면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그것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반대로 뒤처지고 있으면 부끄럽다고 여긴다. 우리는 우리와 소속이 같은 위인들을 더욱 편파적으로 좋아한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애국자들은 가장 확실하게 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평한 관찰자의 시각에서 허용될법한 것들에 헌신한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애국자들은 감탄, 찬사, 경이의 대상이 된다. 반면 적과 내통하는 반역자들은 자기 자신만을 고려하고 자신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우리 종족(our own nations)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종족의 번영과 세력확대를 질투하기도 한다. 이들 사이에는 정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고 해도 가장될(pretend) 뿐이다. 그래서 이들이 성장하기 전에 먼저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우리 종족에 대한 가장 고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하는데, 로마의 대 카토의 연설문 마지막 문장이 좋은 예다. 이것은 다른 종족에 대한 광기를 일으키는, 강력하지만 조잡한 애국주의의 표현이다. 반면 아버지 스키피오(스키피오 나시카)의 연설문 마지막 문장은 적의 번영에 반감이 적은, 확장되고 깨어있는 생각의 자유로운 표현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사람들도 서로 이런 관계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의 군사력 증강에만 신경을 쓰고, 내적인 행복과 번영, 수확, 매뉴팩처들의 개선, 상업 규모과 치안력과 항구도시와 항만시설의 증가, 모든 인문학(liberal arts)과 분과학문의 연마 등에 경쟁심을 느낄 경우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것들이 진정한 경쟁의 대상이며,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이런 것들을 진작시켜야 한다.

 

  (4-6) 자신의 지역(country)을 사랑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과 독립적이며, 조화롭지 않을 때도 있다. 만약 이 두 가지고 조화롭다면, 프랑스는 영연방에 비해 인구가 3배 정도 많으므로, 인류 전체의 측면에서는 프랑스의 번영이 더욱 높게 평가를 받아야한다. 그러나 영연방의 시민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류 전체의 측면이 아니라, 그것과 별개로 자신의 지역을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들이 어떻게 하면 인류 전체의 행복을 더 잘 진작시킬 수 있을까에 관한 자연의 계획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족적인 편견과 적대감은 바로 이웃한 종족 너머로는 거의 확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프랑스는 자연적인(natural)으로 간주되지만,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가장 넓은 범위의 공적인 자비로움은 이런 국가들 사이의 힘의 균형이나 평화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이런 것들을 기획하는 정치가들의 자질이다. 그러나 이들은 보통 자기 편의 이익에 대한 고려만 가지고 있다. 가끔은 그 고려가 확장되기도 하는데, 유럽 전체의 평화를 염원하는 프랑스의 전권대사 아보나 프랑스에 반대해 유럽의 자유를 확장시키려 한 윌리엄 왕 같은 사람이 그렇다. 현재 앤 여왕의 의회가 이런 정신의 일부를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7-10) 모든 독립적인 주는 각각 고유한 권력들(powers), 특권들(privileges), 면책권들(immunes)을 가지는 다양한 다른 집단들(orders)과 모임들(societies)로 분할된다. 모든 개인은 이들 중 하나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린다. 개인들의 이익이나 자부심 등은 그 집단과 연결되어있으며, 따라서 개인들은 자기 집단의 권력들과 특권들을 확장하고 싶어하고 다른 집단에 의해 침해당했을 때 아주 열심히 방어한다. 헌법I(constitution)은 이러한 집단들이 나누어진 방식과 각각의 권리들(권력, 특권, 면책권)을 형성하는 방식에 의지한다. 이러한 개별적인 헌법의 유지 여부는 침해로부터 자신의 권리들을 보호하는 능력의 정도에 달려있다. 헌법은 하위 부분들의 지위와 조건의 변화에 따라 다소간 교체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런 집단들과 모임들은 그들을 보호하는 주(state)에 의존적이다. 그러나 종종 주는 하위 부분들에게 권리를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정책을 위해서는 창조의 정신(spirit of innovation)을 발휘해야 한다. 이런 창조의 정신을 통해 주는 집단들과 모임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한다. 이것은 주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안정성과 영구성에 공헌한다.

 

  (11-12) 우리 지역을 사랑하는 것은 두 가지 원칙을 포함한다. 첫째는 헌법과 실제로 확립된 정부의 형태를 향한 존중과 존경이고, 둘째는 동료 시민들의 조건(condition)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만들려는 진지한 욕망이다. 첫째를 위반하면 시민이 될 수 없고, 둘째를 위반하면 좋은 시민이 될 수 없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대개 이 두 원리가 산출하는 행동들이 일치한다. 확립된 정부의 지원은 시민의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적인 불만과 파벌(faction)과 무질서의 시대에는, 이 두 원리는 양립불가능하게 보이는 서로 다른 행동을 산출한다. 즉 동료 시민들의 조건을 유지해주지 못하는 정부에 대해 개각이나 개혁 등의 조치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애국자들에게는 낡은 것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또는 새로운 정부를 구상하는 등 가장 뛰어난 수준의 정치적 지혜가 요구된다.

 

  (13) 외국과의 전쟁과 내전(civil faction)은 공공정신(public spirit)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무대이다. 전쟁에서 열심히 봉사한 사람은 종족 전체의 바람을 만족시키며, 그래서 보편적인 고마움과 찬사의 대상이 된다. 내전(civil discord)에서 서로 대립하는 각 파당의 지도자들은 자기 파당의 사람들에게는 좋게 보이지만 다른 파당의 사람들에게는 의심스럽고 나빠보인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얻은 영광은 일반적으로 내전에서 얻을 수 있는 영광보다 순수하다.

 

  (14-15) 그러나 자신과 대립하는 파당의 사람들까지 설득할 수 있는 온건함을 지닌 특정한 파당의 지도자의 경우에는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성과보다 더한 공헌을 하기도 한다. 그는 헌법을 다시 수립하고, 개혁자와 입법자로서의 덕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며, 그의 지혜로움에 의해 만들어진 법들은 후세의 평온과 행복을 보장할 것이다. 이러한 공공정신은 동료 시민들이 겪고 있는 불편함에 대한 진정한 공감에 토대를 둔다. 체계의 정신(spirit of system)은 이러한 공공정신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불평분자들의 파당은 지금 불편함과 걱정거리들이 있다는 것을 그럴듯하게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를 통해 미래에 얻게 될 보상으로부터도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개혁적 입법을 주장한다. 이들은 몇 세기에 걸쳐 시민들의 평화와 치안을 유지해온 제도들의 핵심적인 부분들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우리가 경험해본 적도 없고, 그 당파의 지도자들에 의해 현란하게 꾸며진 이상적인 세계 속의 공상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들은 처음에 자기 파벌의 세력 확장만을 꾀했겠지만, 이내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거대한 개혁을 기획한다. 그 지도자들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합리적으로 생각하게끔 도와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들에 의해서 그러한 불편함과 걱정거리들을 없앨법한 온건한 해결책들은 자취를 감춘다.

 

  (16-18) 공공정신이 발휘된 사람은 이미 확립된 권리들을 존중한다. 그 권리들이 악용된다고 봐야 하는 때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없애기보단 적절히 조정하는(moderating) 것에서 만족할 것이다. 그는 이성과 설득을 사용한다. 그것으로 극복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폭력을 사용하지는 못한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조정하려고 노력한다. 올바른 것이 아예 확립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개선(ameliorate)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본다. 가장 좋은 법이 확립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마치 솔론처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법들의 체계를 확립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반면 체계의 인간(the man of system)은 자신에 관련된 것만 가장 잘 아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신의 상상 속에서 완벽한 정부를 확립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현 상태의 유지에서 나오는 이득이나 그에게 반대할 편견들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체스판에서 말을 만지듯이 서로 다른 구성원들을 조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체스판의 말들 각각이 고유한 운동의 원칙(principle of motion)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는다. 입법자가 고려하는 방향과 사람들의 고유한 운동의 원칙이 일치한다면 그 모임은 행복하고 성공적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매우 불행할 것이고 무질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이나 정책의 완전함에 대한 생각은, 정치가의 관점을 바로잡는데는 필요하지만,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그것을 확립시키려 한다면 심각한 오만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자신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가장 높은 기준으로 세우는 것이다. 또한 커먼웰스 안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지혜롭고 가치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료 시민들은 그에게 들어맞아야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영지를 가진 왕자들(sovereign princes)이 매우 위험한데, 이런 오만함에 그들이 매우 친숙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제국이나 왕국의 개혁자가 헌법에 관해 생각하면 그들을 자신들의 의지를 거스르는 반대자라고 생각하고, 그 헌법의 그른 점들을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또한 주(state)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만, 자신이 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가장 큰 목표는 반대자를 제거하고, 귀족(nobility)의 권위를 감소시키고, 지방과 도시의 특권들을 없애버리고, 그들의 명령에 반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주(state)의 위대한 개인들과 위대한 집단들을 가장 쓸모없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Chap 3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관하여

 

 

  (1) 우리의 선행은 우리의 조국(country)보다 더 넓은 모임(society)으로는 거의 확장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선한 의지에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우주의 무한함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아야 하고 또한 그 불행에 반대하지 않아야 하는 죄없고 지각 있는(sensible) 존재를 생각할 수 없으며, 지각이 있으면서도 해를 끼치는(mischievous) 존재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화가 치민다. 오히려 그런 화를 낳는 의지(ill-will)은 보편적인 자비로움의 결과, 즉 그 악의 때문에 불행해진 죄없고 지각 있는 존재의 비참함과 resentment에 우리가 공감한 결과다.

 

  (2) 보편적인 자비로움은 우주의 모든 거주자들이 자연의 운동을 방향지어주고 언제나 행복의 가장 큰 양을 변치 않는 완전함에 의해서 결정짓는 위대하고 자비롭고 전지한 존재(신)의 직접적인 돌봄과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견고한 행복의 재료도 될 수 없다. 반대로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비춰봤을 때 이렇게 신이 없는 세계라는 혐의는 무한하고 불가해한 모든 영역이 비참과 불행으로 가득 찼을지도 모른다는,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우울한(the most meloncholy of all reflections)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상상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런 무서운 생각은 결코 번성할 수 다. 또한 괴로운 역경의 모든 슬픔도 현명하고 덕있는 사람들에게서 신이 존재하는 체계(the contrary system)의 진실에 관한 습관적이고 온전한 신뢰에서 나오는 온전한 기쁨을 결코 앗아갈 수 없다.

 

  (3) 덕있는 사람은 사적인 이익을 자기가 속한 사적인 집단이나 모임의 이익에 공헌(sacrificed)되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바라고 있다. 이런 집단이나 모임의 이익은 또한 국가(state)나 주권(sovereign)의 더 큰 이익에 공헌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바란다. 하지만 그것도 단지 부분적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같은 방식으로 앞의 모든 이익을 신이 직접 관리․감독하는 우주 전체, 모든 지각 있고 지적인 존재들의 모임의 더 큰 이익에 공헌해야 한다고 바라야 한다. 자비롭고 전지한 존재는 보편적인 좋음을 위해서 필요하지 않은 부분적인 악은 하나도 없는 체계를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는다면, 그리고 모든 사물들이 연결되어있고 서로 의존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자기 주변(본인, 친구, 모임, 조국)의 불행을 우주의 번영에 필요한 것으로서 생각해야 하고, 그래서 단지 불행을 감내함에 복종해야 할 것으로만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감내함을 진지하고 경건하게(devoutly) 소망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4) 이렇게 우주의 위대한 감독자의 의지를 감내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봐도 인간 본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좋은 병사들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아주 외로이 떨어진 진지(forlorn station)으로도 진군하며, 이것을 위험 없는 곳에 나아가는 것보다 더 기꺼이 받아들인다. 앞의 상황에서 그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뒤의 상황에서는 단지 일상적인 의무에서 오는 지루함만 느낀다. 앞의 상황에서 그들은 더 큰 체계를 위해 자신들을 공헌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순종적인 복종 뿐만 아니라, 종종 환희와 함께한다.

 

  군대의 어떤 행위자도 가장 위대한 우주의 행위자보다 더 끝없는 신뢰와, 열렬하고 열정저긴 애정을 받을만해보일 수는 없다. 개인적인 불행은 가장 큰 공익 속에서, 즉 현명한 사람은 자기 주변을 마치 우주의 외로이 떨어진 진지에 놓여지게 된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것이 단지 이런 분배에 복종하는 하찮은 감내함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기쁘게 껴안으려 노력해야 하는 의무라고 생각해야 한다.

 

  (5-6) 언제나 가능한 행복의 가장 큰 양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주의 무한한 작동을 고안하고 행동해왔던 이러한 신의 계획(idea)은 가장 숭고한 인간적인 관조의 모든 대상이다. 다른 것은 비교적으로 수단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관조에 능한 사람은 존경의 대상이 된다. 또한 어떤 종교적인 관점에서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다른 것들보다 우선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합리적이고 지각 있는 존재들의 보편적인 행복을 돌보는 것은 신의 일이지 사람의 일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상대적으로 하찮은 부분, 자기 주변을 돌보는 일이 할당되는데 이것이 그의 능력에 더 알맞기 때문이다. 그가 더 숭고한 것을 관조하는 데 빠져있다는(occupied) 것이 주변을 돌보지 않는 것의 변명이 되진 않는다. 또한 그런 관조하는 철학자들의 가장 숭고한 생각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작은 활동적 의무에 대한 무시를 거의 보충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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