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연습 발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은 플라톤이 그렇게 정의한 이래로 지식에 관한 가장 확고한 정의로 여겨져 왔다. 이 정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믿음 가운데서 지식을 가려내는 방법을 알려준다. 어떤 믿음이 참인 동시에 정당화되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닌 지식이다. 만약 지식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라면, 우리는 이 정의를 이용해서 우리의 믿음 가운데 지식을 가려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는 정의는, 단순히 특정한 믿음들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져야하고 또 그 믿음의 성격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이런 규범적 측면은, 지식을 정의하는 그 두 가지 조건이 충분하지 않다는 주장 때문에 논란에 휩싸였다. 이 주장은 우리가 추구해왔던 지식, 즉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는 대상이 사실은 그럴만한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후 인식론에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지식을 다시 정의하려고 시도해왔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즉 인간의 믿음을 지식과 지식 아닌 것으로 나누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묻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함으로써 지식의 규범성 문제를 없애버린다. 인간에게는 고유한 인식적 구조가 있다. 또한 같은 인간 종 사이에서도 서로가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대면한 세계의 모습은 나의 믿음 이상의 어떤 지위를 가질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의 믿음에 그보다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하려면 그 사람은 내 인식적 구조의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또는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어떤 사람은, 실제로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을 리 없거나 또는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회의주의적 전통은 최근에 인식론적 신빙론, 자연화된 인식론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에게 고유한 인식적 구조를 과학적으로 연구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인식론과 비교해봤을 때, 과학과 인식론 사이의 관계가 역전된다. 왜냐면 인식론은 과학이 학문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지를 판정하기 위해 시작된 철학적 탐구이기 때문이다. 만약 전통적 인식론의 입장에서 과학이 엄밀하게 규명될 수 없는 몇몇 전제들에 의존하며 그 성과를 철학적 규범성의 측면에서 지식으로 인정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면, 자연화된 인식론은 그런 ‘철학적인 의미의 지식’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며, 만약 그런 엄밀한 시험을 통과해야만 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믿음의 수준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머무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범성은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물음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자연화된 인식론의 한 흐름은 이것을 실재와 무관한 방식, 즉 상호주관성과 체계-믿음 관계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한다. 만약 어떤 믿음 b가 특정한 인식적 환경 속에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인정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 사이에서 보증된 믿음이다. 이것 이상의 참 개념을 요구하는 순간 우리는 전통적 인식론자들이 직면해야 했던 상당한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b가 그 사람들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보증되리라는 보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당화의 경우, 한 사람의 믿음 c와 그 사람이 믿는 체계 s 속의 믿음 d,e,f,… 가 논리적으로 거의 일치하면 정당화된다. 만약 c가 더 많은 다른 믿음들과 일관될 경우, 그것은 더 강하게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체계들을 넘어선 정당화를 요구할 경우 역시 참 개념에 관한 인식론자들의 어려움과 마찬가지로 난점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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