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연습 발제>

 

 

방법론적 회의주의와 문제적 회의주의를 구별하는 것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방법론적 회의주의와 문제적 회의주의는 각각 의도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방법론적 회의주의는 지식을 찾기 위해 어떤 종류의 믿음을 지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과정이다. 모든 믿음은 지식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으며 다른 것에 의존적이지 않은 믿음 즉 절대적인 지식이 될 수 있는 믿음을 찾기 위해서, 모든 믿음들 가운데서 불확실하거나 의심해 볼 만 하거나 다른 것에 의존적인 믿음, 즉 단지 믿음에 불과하거나 상대적인 지식을 절대적인 지식의 후보들로부터 하나씩 배제해 나간다. 이 과정을 아주 철저하게 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배제되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절대적인 지식의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방법론적 회의주의는 일반적으로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자의 주장으로 알려져있는 ‘어떤 믿음도 지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어떤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방법론적 회의주의의 특징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데카르트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명백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성찰』의 요약에서 “전반적인 의심의 유용성은 단번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모든 선입견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고, (중략) 우리가 마침내 참된 것으로 발견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해 준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그는 이 책에서 착각, 꿈, 전능한 악마의 가설을 제시하여, 왜 어떤 믿음은 지식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에 관해 설명한다. 물론 그는 실제로 회의주의자는 아니기 때문에, 착각, 꿈, 전능한 악마의 가설이 왜 가설에 불과한지, 그리고 우리가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대개 그렇게 명백하게 드러난 대로 외부에 실재하며 그러므로 그 믿음은 지식이라는 것 또한 논증한다. 이 논증이 믿을만한 것인지와는 별개로, 그의 방식은 기존의 회의주의적 논증들을 차용해 반회의주의적 결론에 이르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의 전형인 것은 확실하다.

 

  회의주의를 방법론적으로 이용한 것은, 사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동 시대의 탐구 대상이자 지적인 풍토였던 문제적 회의주의의 영향이 크다. 여기서 문제적 회의주의란 어떤 종류의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과정을 뜻한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없는 이유를 탐색하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와는 방향이 완전히 반대다.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지식이 되기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고 어떻게 하면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알아본다. 그래서 지식에 관한 어떤 이론이 어떤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 조건을 제시할 때, 그 조건을 충족시키면 지식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입장은 지식의 조건에 관해서는 언제나 유보적이고 확답을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독단적 회의주의와는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문제적인)’ 회의주의인 것이다.

 

  이런 태도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피론주의 개요』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책을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고대의 회의주의가 문제적 회의주의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데카르트를 전후한 시대에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 책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가 이해한 회의주의란 바로 피론주의를 뜻한다. 이 책에 따르면 지식(진리, to alethe)을 탐구하는 사람의 태도는 세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는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독단주의자(dogmatichoi), 둘째는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독단주의자, 셋째는 주장하지 않고 탐구를 계속하는 피론주의자다. 셋째 부류의 인식론적 목표는 독단주의자들이 어떤 오류를 저지르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신중하지 못하게 진리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피론주의자들은 모든 믿음이 감각기관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믿음과 지식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게 보인다’는 현상(phainomenon, phantasia)에 관한 믿음은 확실성을 가지지만(지식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대상이 실제로 어떤가에 관한 믿음은 지식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어떤 대상이 실제로 어떤가에 관한 믿음이 생길 수 있다면, 그 믿음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는 여러 믿음에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현상적 믿음은 감각주체의 조건, 감각하는 상황의 조건, 감각주체와 감각대상 사이의 관계의 조건에 의해서 아주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믿음들은 모두 같은 정도의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믿음을 지식으로 해야할지 알 수 없게 되고, 현상에 관한 믿음들만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데카르트가 대답하고자 했던 회의주의도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그리고 자기 스스로는 해결했다고 생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만약 감각이 불확실하고 의심스럽고 상대적이라면, 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어떤 믿음도 지식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찰』의 「제 6성찰」에서 “신체에 이로운 것에 대해 모든 감각은 거짓된 것보다는 참된 것을 지시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중략) 오류의 모든 원인을 폭로한 오성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중략) 오히려 지난 며칠 동안의 온갖 과장된 의심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일축해 버려야 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성찰』과 『피론주의 개요』를 비교해보면 우리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와 문제적 회의주의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될 가능성에 관해 두 입장이 서로 완전히 다른 대답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 대답에 따라, 그 대답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회의주의적 논증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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