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연습 발제>

 

우리의 지식 주장들은 때때로 우리가 실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오류에 빠진다. 이것은 모든 지식 주장을 위한 정당화를 약화시키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경험적 믿음들은 대부분 지식이지만, 가끔은 그 경험적 지식들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 이는 우리가 추론 과정에서 저지른 실수 때문일 수도 있고, 특정한 인식적인 조건이 만들어낸 결과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실수를 알고서 그 믿음을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추론된 믿음을 지식으로 수용할 수도 있고, 다른 인식적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 생겨난 믿음과 기존의 지식을 비교해 검토해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교정의 과정은, 실수를 저질렀다거나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있지 않다는 등의 ‘오류’에 우리가 빠졌다는 것을 저 알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대개 오류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시간을 들여서 그것을 교정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회의주의적 논증은 우리가 결코 ‘오류’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 수 없는 경험적 믿음이 가능한 인식적 조건을 제시한다. 이들은 ‘꿈 논증’과 ‘악마 가설’로 불린다. 이 두 논증이 일관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우리의 지식은 모두 실재와 비교했을 때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 둘째, 우리 스스로의 인식적 능력은 지식에 속하는 그 믿음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어떤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이 우리의 인식적 능력에만 포함되는 과제라면, 우리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인식적 조건 속에 있을 경우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를 하더라도 거짓인 믿음을 정당화할 뿐, 그 믿음을 지식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논증은 ‘만약 악마가 있다면, 모든 경험적 지식은 거짓이다.’고 형식화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논증은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논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제인 ‘악마가 있다’는 것(또는 통 속의 뇌, 영화 《매트릭스》, 《트루먼 쇼》 등 회의주의적 의심을 유발할만한 모든 전제)이 우리의 평범한 인식적 능력을 훨씬 뛰어넘어야만 알 수 있는, 그러므로 지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믿음들에 관한 신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논증이 그 의도에 따라서 지식에 관한 우리의 주장을 약화시키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그 논증에서 제시된 인식적 조건이 참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가 이 조건에 관한 믿음들을 인식적 능력을 통해 지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두 조건이 충족된다면, 기존의 지식을 조건에 관한 믿음들과 함께 검토해보고 경험적 믿음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악마 가설의 문제점은 둘째 조건을 무시한 채 첫째 조건만 충족시키면 경험적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조건이 거짓인 믿음을 산출한다는 것을 확인할만한 어떤 능력이 없는 한, 그 조건은 단지 우리의 인식적 능력을 구성하는 요소 또는 우리의 인식을 제한하는 사항으로서 작용할 뿐이며, 우리는 그렇게 산출된 거짓인 믿음을 가지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산출된 믿음은 다른 믿음과 비교되어 각각 다른 지위를 부여받지 않는 한, 어떤 대상에 관한 유일한 믿음이 되므로 회의주의적 입장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만약 악마 가설만으로도 우리가 지식에 관해 회의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고실험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없는 것에 관해 믿고 그것을 다른 이에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이른바 ‘회의주의적 독단’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적 태도를 정당화하기 둘째 조건, 즉 우리의 인식적 능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비교대상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 주장들은 때때로 우리가 실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오류에 빠진다는 것은 지식에 관한 우리의 정당화를 약화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흔히 《매트릭스》의 네오나 《트루먼쇼》의 트루먼이 악마 가설과 유사한 세계에서 빠져나와 실재를 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비교대상을 얻은 것 뿐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아는 두 세계 가운데 어떤 것이 실재인가 판단하고 지위를 부여한다. 그것을 부여하는 과정은 주변 사람들의 태도나 환경 그리고 여러 믿음을 통한 인식적 정당화이다. 그러나 그 정당화의 과정이 이전에 ‘한 세계’만 알고 살던 시기의 정당화 과정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이 사례를 통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오류가 지식에 관한 정당화를 약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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