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연습 보고서>


1. 인식적 정당화와 '적절히 야기됨'

  ‘적절히 야기된 참된 믿음’은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지식의 정의 가운데 하나이다. 앨빈 골드먼은 ‘안다는 것에 관한 인과이론A Causal Theory of Knowing’이라는 논문에서 게티어의 논문의 사례가 지식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사실과 인과적causal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사람이 동전을 10개 가지고 있다든가, 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누군가가 어디에 있다고 추측하는 것 등은 그 사람이 취직을 한다든가 또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믿음을 낳는 인과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지식은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이다. 우리는 p라는 사실을 직접 인지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p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지표나 증거 e,f,g,h 등을 통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p라는 사실은 e,f,g,h 등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있기causally connected 때문에, 우리가 e,f,g,h 등을 통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런 주장은 특히 감각자료를 통해 지식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할 때 또는 이 과정을 정당화할 때 많이 이용된다. 이를테면 p라는 사실에 관한 우리의 감각적 정보들 e,f,g,h 등을 통해 우리가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식이다.


2. '적절한appropriate'의 의미 - 그럴듯하고 극단적이지 않은

  새로운 조건인 ‘적절한appropriate’과 ‘야기된caused’의 의미를 살펴보자. ‘적절한’은 적어도 사실 p와 증거 e,f,g,h 그리고 사실 p에 관한 믿음 사이의 인과적 연결이 아무렇게나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한다. 이 관계는 자연법칙에 의해서 연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번개가 칠 때, 우리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면 번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특별히 소리를 듣지 못하는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주 크고 둔탁한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번개는 순간적으로 많은 전기가 흐르는 현상이고 이것은 빛과 소리를 언제나 발생시키기 때문에, 번쩍거림과 크고 둔탁한 소리를 통해 번개가 쳤다는 것을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또한 이 연결은 신의 섭리, 혹은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전능한 악마의 속임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연결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관한 탐구는 우리의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들이 언제나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는 일반화된 규칙 정도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 사건을 적절하게 연결시킬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믿음이 필연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크고 둔탁한 소리와 강한 빛이 번개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는 않듯, 개별적인 어떤 사건이 다른 어떤 사건을 논리적으로 함축하는 일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적절한’은 ‘필연적인necessarily’ 관계와 반대되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필연적이라는 말은 논리적 필연성을 가리킨다. 위와 같이 지표나 증거와 사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들과 믿음 사이의 관계가 마치 동어반복처럼 논리적으로 필연적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 사실과 증거와 믿음이 우리가 믿는 것처럼 연결되지 않는 모순이 없는 세계를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번개가 쳤을 때 빛만 번쩍이고 소리는 나지 않는 세계 U2를 생각할 수 없지는 않다. 만약 내가 U2에서 살고 있을 때, 빛과 소리를 감지해서 번개가 쳤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일 것이다. 하지만 적절하다는 말은 이런 식의 반례들을 거부한다. 어떤 두 사건 사이에 적절한 인과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 세계의 논리적인 구조를 상당히 바꾸지 않는 한 두 사건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3. '야기된caused'의 의미 - 지식이 산출되는 과정과 방법

  믿음이 야기되었다는 것은 p라는 사실에 관한 증거들에 의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이 생겨났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p라는 사실로부터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바로 추론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증거들을 취합해 p라는 사실에 관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이런 ‘야기되는’ 과정에 반드시 개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을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인간의 지식이 지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나 방법에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황토색 풀로 뒤덮인 초원에서 ‘저기에 사자가 엎드려있다’는 지식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특정한 주파수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여 시각적인 정보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 방법으로는 황토색 풀과 사자의 황토색 털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인식적 정당화는 우리의 지식을 생산해내는 방법이나 과정에 의존한다. 만약 p라는 사실이 q,r,s 등으로 변화하고 그에 관한 증거인 q(e,f,g,h),r(e,f,g,h),s(e,f,g,h) 등이 만들어질 때 어떤 방법이나 과정이 그 다른 증거들을 취합해서 다른 지식을 생산해낸다면, 이 방법은 사실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사실에 대응하는 적절한 지식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에 믿을만하다reliable. 이 때문에 지식을 ‘적절하게 야기된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신빙론자reliabilist라고 부른다. 신빙론자들의 주장의 핵심은 바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방법이라면 그 방법이 ‘적절하다’고 표현하는 데 있다. 즉, 이 적절하다는 말은 사실 사이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사실 또는 증거와 우리의 신념 사이의 관계를 표현할 때도 쓰이는 것이다. 앨빈 골드먼은 이 ‘적절한’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각perception, 기억memory, 어떤 사실에 관한 지표나 행위 등에 의해 야기된 추론으로 올바르게 재구성할 수 있는 인과적 연쇄a causal chain, 그리고 이들의 조합이라는 네 가지 목록을 제시한다. 따라서 우리가 지식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과 완전히 배치되는 사고실험들, 즉 데카르트의 악령이나 영화 매트릭스의 거대 기계 등의 반례는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어,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없다.


4. 결론 : 정보와 지식의 구분은 가능한가

  대부분의 컴퓨터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컴퓨터에게는 인간이 컴퓨터에게 입력해준 문장이 그 문장이 지시하는 내용과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그 기준을 가질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적 정당화가 이런 기준과 능력에 의해 성립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절히 야기된 것은 자연적 사실일 뿐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 지식의 정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에게 인식론의 임무란 그렇게 야기된 믿음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지식이 될 수 있는지 즉 옳게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지식이 되기 전에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은 아마 정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만 정보와 지식은 구분할 수 있는 대상인가? 나는 여기에 아니라고 대답함으로써 지식 그 자체가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라고 답하고 싶다. 위에서 언급된 기준이나 능력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정보들 가운데 지식이 되는 것이 있다면, 정보들 가운데서 지식을 선별하기 위한 추가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정보들 사이의 차이는 사실의 차이 또는 방법의 차이로 인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어떤 정보들이 지식이라면, 정보들 가운데 지식을 선별하는 기준은 사실의 차이에 따른 기준 또는 방법의 차이에 따른 기준이 될 것이다. 이 두 기준 가운데 사실의 차이에 따른 기준은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이라는 정의에 이미 반영되어 있으므로(즉 이미 사실에 대해 참이므로) 남는 것은 방법의 차이에 따른 기준이다. 하지만 방법의 차이는 사실에 반응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 어떤 방법이 더 정당화를 잘하고 못하는지에 관한 문제일 수는 없다. 따라서 정보와 지식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방법의 차이 이외에 다른 평가기준을 도입해야만 성공할 수 있고, 이것이 왜 그런지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정보와 지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므로 인간이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짓거나, 또는 우리의 지식이란 정보 수준에서 더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한다.

  육안으로 보는 달과 망원경으로 보는 달 사이에 어떤 것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흔히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멀리서 보는 것 보다는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전제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은 황토색 풀숲 속에 엎드린 사자는 보지 못하지만, 흰색 탁자 위에 앉은 청개구리는 잘 본다. 적외선 카메라는 사자는 잘 포착하겠지만, 변온동물인 청개구리는 잘 보지 못할 것이다. 눈이 나쁘다는 것은 안구의 구조가 특정한 상태에 놓여있고, 그것이 다른 특정한 상태를 '기준으로 맞추어진' 주변환경과 이런저런 마찰을 일으킨다는 말이지, 그 눈이 대상에 대한 지식을 덜 정당화하고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론적 입장은 두 가지 난점에 직면할 것이다. 하나는 인식론에서 규범적 측면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belief-forming process에 초점을 맞추어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을 ‘정당화된 참인 믿음’으로 만드는 골드먼의 입장이 주목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믿을만한 방법’에 의해 생산된 믿음은 ‘믿을만한 믿음’으로 간주하고, 규범적 평가의 영역을 믿음 자체나 이유와 결론 사이의 정당화 관계에서 믿음을 생산하는 방법으로 옮긴다. ‘믿을만함’의 의미는 그 과정이 외부의 사실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그 과정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이 민감하다는 것은 어떤 믿음이 그 과정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단지 입력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사실과 출력으로서의 생산된 믿음 사이에 더 많은 대응관계가 있다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생산된 믿음이 변화한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세계가 변화했다는 믿음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세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관한 믿음은 얻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신빙론적 입장에서는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에 의해 세계와 믿음은 근본적으로 단절되어있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므로 인식론의 규범적 성격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임의적이나마 여러 방법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표준적으로 설정하여 그에 입각해 규범적 판단을 내리거나, 또는 신빙론적 입장 자체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둘째는 이런 인식론적 입장으로는 일반적 사실에 관한 믿음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관해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비판이다. 적절히 야기된 것은 사건 각각에 대한 정보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한 사건에 관한 정보들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까지 발생했고 앞으로도 발생할 모든 사건들에 관한 기술, 즉 일반적 사실에 관한 믿음들을 더욱 중요한 믿음으로 간주한다. 이런 일반적 사실에 관한 믿음들은 흔히 개별적인 사건들에 관한 정보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입력으로서 주어지는 세계는 이런 일반적 사실을 직접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반적 사실에 관한 믿음을 ‘적절히 야기된 참인 믿음’으로서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을 야기할 수 있는 입력으로서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인정한다면, 자연과학에서 지식으로 간주되는 거의 모든 믿음들은 아마도 지식으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다. 자연과학적 지식은 대부분 일반적 사실에 관한 명제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김기현, 『현대인식론』, 민음사, 1998
K.레러, 『현대 지식론』(한상기 옮김), 서광사, 1996

Alvin I. Goldman, "A Causal Theory of Knowing" from Journal of Philosophy, Vol.64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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