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연습 보고서>


1. 오류가능주의

  어떤 종류의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입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오류불가능주의(infallilbilsm)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을 거짓으로 만드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반대사례가 단 하나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내 친구 형진이 ‘나 어제 최종면접 합격했다’고 내게 이야기할 경우, 나는 ‘형진은 취직했다’는 믿음을 얻고, 이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반대사례가 있는 믿음이다. 예를 들어, 형진이 내게 거짓말을 했거나, 또는 서류상의 착오 때문에 면접합격통보가 잘못 전해졌을 경우, 이 믿음은 거짓이 된다. 그리고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진은 취직했다’는 틀릴 수 있고(fallible) 따라서 이 믿음은 (오류불가능주의에 따르면)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믿음이라도 그 믿음을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반대사례는 얼마든지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흔히 가장 엄밀한 지식이라고 불리는 수학적인 믿음만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거짓이 될 수 있다. 데카르트의 널리 알려진 논증에 따르면, 아주 뛰어난 악마가 우리를 언제나 속이고 있는 것은 가능하며, 만약 실제로 이 세상이 그렇다면 우리의 수학적인 믿음은 거짓이 된다. 그러나 이런 기준을 적용할 경우,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많은 믿음들이 거짓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오류불가능주의가 내세우는 지식에 관한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따라서, 틀릴 수 있는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이러저러한 기준만 만족한다면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생겨났는데, 이를 오류가능주의(fallilbilism)라고 한다.

  이 입장을 간단하게 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믿음은 틀릴 수 있다.(틀릴 수 없는 믿음은 없다.) 또는 (2) 모든 믿음은 틀릴 수 있게 정당화된다(fallibly justified). 오류가능주의는 모든 믿음들이 실제로 거짓이다 또는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와 구별된다. 틀릴 수 있게 정당화된다는 것은 틀릴 수 없게(conclusive)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것만 함축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류가능주의적인 정당화를 비결정적인(inconclusive) 정당화라고 한다. 오류가능주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다’고 말하는 많은 것들을 지식으로 인정하며, 동시에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의심(rational doubt)’을 할 여지 또한 만든다는 점에서 많은 인식론자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오류가능주의에게 남겨진 과제는 과연 비결정적인 정당화가 어떻게 가능하며,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정당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만약 그 기준을 밝혀낼 수 있다면, 그 기준을 만족하는 믿음은 적절하게 정당화된(adequately justified) 믿음이 될 것이고, 그것은 바로 지식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 리드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자료들은 그 자체로 정당화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자료가 틀릴 수도 있다는 다른 비교가능한 사례가 제시되기 전까지, 우리는 그 믿음이 틀렸을 가능성에 관해 전혀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료가 틀릴 수 있다는 다른 자료가 생겨날 경우 둘을 비교함으로써 어느 쪽이 옳은가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예전의 그 자료는 적절하게 정당화된 것이지 완전하게 정당화된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철학의 전통에서 이러한 정당화의 방법은 연역과 귀납 등등으로 다양하게 제시되었는데, 이런 정당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믿음은 대부분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오류가능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2. 게티어 사례

  게티어는 자신의 논문 「정당화된 참된 믿음은 지식인가?」에서, 자신이 두 가지 점을 주목한다고 밝힌다. 여기에서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란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식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생각됐던 것, 즉 (1) 어떤 명제 p는 참이다. (2) 어떤 인식주체 S는 p를 믿는다. (3) S는 p를 믿는 것에 정당화되었다. 를 가리킨다. 게티어는 이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면서도 ‘첫째, 한 사람이 실제로는 거짓인 명제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it is possible for a person to be justified in believing a proposition that is in fact false), 둘째, 모든 명제 p에 대해서, 만약 S가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고 p가 q를 수반하며 S가 p에서 q를 연역했고 그래서 이 연역의 결과로서 q를 승인한 경우, S는 q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for any proposition p, if S is justified in believing p, and p entails q, and S deduces q from p and accepts q as a result of this deduction, then S is justified in believing q)’에 주목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계영과 은지는 같은 회사에서 최종면접을 치르고 왔다. 그리고 계영은 안타깝게도 면접관에게 문자를 통해 은지가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고, 또한 면접장에서 은지가 그의 핸드백에서 미스트를 꺼내 얼굴에 뿌리고 다시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계영은 ‘(2-1) 은지는 취직을 할 것이다. 또한(and) 은지는 그의 핸드백 안에 미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충분히 정당화된다. 계영은 (2-1)에서 ‘(2-2) 취직을 할 그 사람은 핸드백 안에 미스트를 가지고 있다’를 연역적으로 추론해낼 수 있으며, 이를 믿는 것 또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런데 사실 합격한 것은 은지가 아니라 계영이었고, 합격통보문자는 계영을 놀래키기 위한 사장의 짓궂은 장난에 따른 지시사항이었다. 또한 계영은 몰랐지만, 면접시간에 늦을까봐 급히 들고 온 계영의 핸드백 안에는 미스트가 들어있었다. 이 경우에 계영이 (2-2)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상황을 가정해보자. 은지는 계영과 20년지기 친구이다. 은지는 계영이 20년 동안 기아자동차를 구입하고 애용하는 것을 보아왔고, 또한 방금 전 계영이 K9를 타고 가다가 잠깐 멈추어 ‘같이 타고 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에 ‘(2-3) 계영은 기아자동차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는 은지가 20년 동안 보아온 것, 그리고 방금 계영이 K9을 타고 가는 것을 본 것에 의해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리고 은지에겐 나윤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6개월 전에 받은 마지막 엽서 이후로 소식이 끊겨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대강 보스턴 쯤에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2-4) 계영은 기아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또는 나윤은 보스턴에 있다’고 마음대로 믿어버렸다. (2-3)을 전제로 (2-4)를 이끌어내는 것은 타당한 연역적 추론인데, 이 논증은 전제가 모두 참이면서 결론이 거짓일 수 없는 논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4)을 믿는 것 또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러나 사실 계영은 얼마 전 자기 소유였던 K7을 팔았고, K9은 새로 나온 기아의 차를 타보려고 계영이 빌린 것이었다. 또한 정말 우연히도, 나윤은 그 때 보스턴에 있었다. 이 경우, 은지는 (2-4)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3. 결론

  오류가능주의의 입장은 게티어가 주목하는 두 가지 요점 가운데 첫 번째 주장이다. 게티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오류가능주의자의 입장에 설 경우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지만 지식이라고 볼 수 없는 무한한 사례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류불가능주의자들에게는 거짓일 수 없게 정당화된 믿음만이 지식이기 때문에 게티어 사례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 오류가능주의자들에게는 거짓인 믿음들도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 정당화된 거짓인 믿음들로부터 참인 믿음을 이끌어낸다면, 그것은 정당화된 것인가? 만약 이것을 정당화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참인 믿음을 지식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이 게티어 사례가 보여주는 문제이다.

  위의 두 사례에서, 계영과 은지는 어떤 믿음을 지식이 되도록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가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여러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우리의 믿음을 지식으로 만들어주는 데는 실패했다. 거짓인 명제 (2-1)은 참인 명제 (2-2)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2-1)을 정당화하는 조건을 통해서 (2-2)를 정당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4)도 마찬가지다. 은지는 (2-3)에 정당화되어 (2-4)를 정당화하고 참이라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 (2-3)은 거짓이며 그 외의 명제(‘나윤은 보스턴에 있다’)가 참이기 때문에 (2-4)는 참이다.

  또한 게티어 사례가 지식에 대한 정의에 포함된 ‘정당화’라고 불리는 것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 정당화는 인식주체가 어떤 믿음들이 여러 방법에 의해 서로 이유와 결론의 관계로 묶여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거짓인 믿음들에서 참인 믿음을 연역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각 믿음들의 진리값과 상관없이 그 참인 믿음이 ‘정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참인 믿음들에서 거짓인 믿음을 연역한다고 하더라도 거짓인 믿음이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정당화를 다른 것으로 설명한다면, 게티어의 문제를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외부의 사실들로부터 직접적으로 반영되어야만 정당화된다고 말한다면, 게티어의 사례에서 이후에 연역된 참인 명제들은 직접 반영된 것이 아니므로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지식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게티어 사례가 오류가능주의자들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라면, 오류가능주의자들은 두 가지 어려움에 빠지게 되며, 여기에 각각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첫째, 아무리 정교하고 엄밀한 방법을 개발하고 또한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결코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떤 믿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오류가능주의자들은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정당화의 기준을 마련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게티어 사례는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정당화 이외의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지식의 기준에는 정당화된 참된 믿음 이외의 조건이 더 추가되어야 한다.

  이는 더 나아가서,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는 정당화와 무관하다는 점을 함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아무리 오류가능주의자들이 정당화를 정교하게 기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식주체가 무엇인가를 확신하는 상태를 뜻한다면, 그것은 그 믿음의 진리값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당화가 될 것이다. 그렇게 정교하게 정당화된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식에 관한 오류가능주의적인 개념이 과연 가능한지에 관해 더욱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즉, 오류가능주의자들의 생각처럼 정교한 정당화과정을 통과한 거짓일 수 있는 믿음이 우리의 지식을 구성할 수도 있다면, 우리의 지식 가운데 중요한 몇몇들 또는 전체가 거짓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지식들을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만약 정당화와 상관없이 언제나 참인 어떤 믿음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만 한다면, 정당화의 방법을 설계하고 그것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역설하는 것보다 그 언제나 참인 믿음들에 우리의 정당화를 의탁하는 것이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지식을 얻는 데 더욱 믿을만한 수단이지 않을까? 절대적이고 확실한 지식을 찾으려는 많은 시도들은 대부분 이러한 생각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믿음의 진리값과 무관한 정당화는, 그 믿음의 참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 참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만을 지지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토대로서 인정받기에는 부족해보인다.


- 참고문헌
 

김기현, 『현대인식론』, 민음사, 1998
K.레러, 『현대 지식론』(한상기 옮김), 서광사, 1996

Gettier, E.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from Analysis, Vol.23 (1963)
Hetherington, S. “Fallibilism” in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s) J. Fieser and B. Dowden (20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