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ael Stocker의 논문 'The Schizophrenia of Modern Ethical Theroies'의 번역. Roger Crisp & Michael Slote의 『Virtue Ethics』의 3장.>


  근대윤리이론들은, 아마 몇몇 존경할만한 예외와 함께, 단지 근거들, 가치들, 그리고 정당화하는 것만을 다루었다. 그들은 동기들과 윤리적인 삶의 동기를 부여하는 구조와 강제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실패했다. 그들은 단지 이것을 하는데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것을 하지 않는 것에 의해 윤리이론들로서도 실패했다 – 내가 이 논문 안에서 앞으로 논증할 할 것처럼. 나는 또한 두 가지 서로 연관이 있는 임무를 시도할 것이다: 동기부여가 윤리이론과 윤리적 삶을 의무지운다는 몇몇 강제들을 드러내보이는 것; 그리고 이성과 동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진척시키는 것.


  한 좋은 삶의 한 가지 특징은 한 사람의 동기와 그의 근거들, 가치들, 정당화들 사이의 조화이다. 그가 가치를 매기는 것 – 그가 좋고, 잘되었고, 옳고, 아름답고 등등이라고 믿는 것 – 에 의해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 영혼의 한 질병의 징조이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에 가치를 매기지 않는 것 또한 그 영혼의 한 질병의 징조이다. 이런 질병, 또는 이런 질병들은, 도덕적 정신분열증이라고 적절하게 불려질 수 있다 – 질병들은 그의 동기들와 그의 근거들 사이의 갈라짐이기 때문이다.(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근거들’은 또한 ‘가치들’과 ‘정당화들’을 대표할 것이다.)


  반대로, 그가 나쁘고, 아프고, 못생기고, 깎아내릴 것이라고 믿는 것을 하며 움직여지는 존재에 의해, 이러한 정신분열증의 한 극단적인 형태가 특징지어질 것이다; 반대로, 그가 하길 원하는 것에 의해 불쾌해지고, 무서워지고, 당황하게 되는 것에 의해서. 아마도 이런 경우들은 두믈 것이다. 그러나 근거들과 동기 사이의 어떤 더욱 적절한 정신분열증은, 그 의지의 부족의 많은 사례들 안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것처럼, 우유부단함, 죄책감, 부끄러움, 자기기만, 합리화 그리고 그 스스로에 대한 짜증은 아니다.


  우리는 정말 최소한은 우리의 주된 가치들에 의해 움직여져야 하며, 또한 우리는 우리의 주된 동기들이 찾는 것에 가치를 매겨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한 좋은 삶을 이끌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해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조화는 한 좋은 삶의 한 증표다. 게다가, 그는 아마도 인간의 삶이 몇몇 이러한 조합 없이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해 놀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경우 안에서 어떤 조화를 갖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만약 자기성찰의 권위주의자들이 그들의 도덕적 가정교육에 의해 속박당함을 느낀다면 우리에게 좋다.; 저것은, 그들이 그들의 동기들에 대해 그 이성을 채택한다면 더욱 좋다. 세계와 그의 희생자들이 그가 해야 한다고 그가 생각했던 것을 하기 원하지 않은 아이히만을 가지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더 좋다.


  이것은 모든 노력의 영역 안에서 이런 조화가 필연적이라거나 또는 심지어 가치가 매겨진 것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 안에서, 이것은 이렇지 않다. 예를 들어, 공기 빠진 타이어를 고치려는 것 안에서 한 사람의 동기는 대부분 그 방식을 다시 해보는 것과 거의 무관하다.(많은 이러한 경우 속에서, 한 사람은 심지어 의도된 결과에 가치를 매기는 것도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심지어 모든 도덕적으로 의미있는 영역 안에서 이런 조화가 필연적이라거나 또는 가치가 매겨진 것들을 성취하는 데 특별히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많은 도덕적으로 의미있는 직업들, 환자를 간호하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은, 더욱 많이 동기에 대해 고렿지 않아도 잘 동일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밀에 의해 결합된, 윤리학의 아주 큰 부분을 위해 로스가 논증하는 것처럼, 가치와 동기 사이의 조와나 부조화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이 간단하지는 않다: 당신은 옳고, 의무로 부과된 것이며, 당신의 동기가 그 행동을 위해서 무엇이든 간에 관계없는 당신의 의무를 할 수 있다. 만약 약속을 지키는 것이 당신의 의무라면, 당신은 당신이 의무를 위한 존중에서 벗어나서, 당신의 호평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또는 다른 어떤 것에서 약속을 지키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그 의무를 충족한다. 동기부여하는 것은 옳음, 의무적으로 부과됨, 의무가 고려된다는 것과는 매우 멀게 무관하다.


  옳음, 의무적으로 부과된 의무가 고려되된다 것과 매우 멀리 있는 이런 시각의 의심스러운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첫 번째는 심지어 여기에서 조화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무는 하지만 젅혀 혹은 거의 원하지 않는 것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질까? 둘째, 의무, 책임, 그리고 옳음은 단지 윤리학의 하나의 부분 – 게다가, 단지 한 작은 부분, 한 건조하고 사소한 부분 – 이다. 개인적인 또는 개인 사이의 관계와 활동의 가치들의 전혀 다른 영역이 있다; 그리고 또한 도덕적인 좋음, 잘함, 덕의 영역도. 두 경우 모두 안에서, 동기는 가치있는 것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두 경우 모두 안에서, 동기와 이성은 반드시 현실화된 가치들을 위해 조화 속에 있어야만한다.


  이런 이유들 그리고 이런 조화가 좋은 삶의 징표라는 이유 때문에, 이런 조화를 무시하는 모든 이론은 거대한 모험을 한다. 이런 조화를 어렵게 만들고 배제하는 모든 이론은, 만약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주 많고 강력한 방어의 요구 속에서만 선다. 내가 논증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근대윤리이론들이 – 이런 이론들은 영국말마따나 철학적 세계 안에서만 두드러지는데 – 이런 조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근대윤리학들에 대한 비판


  우리의 도덕적 삶의 복잡함과 광대함에 대한 반성, 즉 가치를 가지는 것에 대한 반성은 최근 윤리이론들이 확실히 의무, 옳음, 그리고 책임에 대해 과하게 집중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실패 – 과한 집중의 실패 – 는 동기 또는 가치를 향한 동기들의 관계를 다루지 않은 것의 실패를 위한 것 뺀 나머지에는 관대할 수 없었다.(따라서, 첫 실패는 둘째를 지지하고 또한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둘째 실패 안에서, 우리는 이런 과한 집중보다 더한 근대윤리이론들의 더욱더 심각한 실패를 찾을 수 있다 : 그들은 가치의 생생하게 중요하고 널리퍼진 영역 안에서 이성과 동기 사이의 정신분열증을 필요로 하거나, 또 다르게는 그들은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허약한 삶, 즉 가치 있는 것 안에서 깊게 불만족스러운 하나의 삶에 우리를 따르게 한다. 이것은 도덕적인 사람들, 다시 말해 가치있는 것을 성취하려고 하고, 이런 윤리이론들 위에서 행동하며, 그들을 그들의 동기들에 포함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그들을 그들의 동기들에 포함시키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 심각하게 부족한 한 삶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론들은, 이중적인 결함이 있다. 윤리이론들로서, 그들은 한 사람이 종합적인 방식 안에서 좋은 것을 성취하는 것을 불가능하게끔 만드는 것에 의해 실패한다. 마음, 근거들과 동기들, 그리고 인간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론들로서, 그들은 단지 심리학적으로 불편하고, 어렵고, 또는 심지어 지킬 수 없는 위치 안으로 우리를 집어넣은 것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삶을 핵심적으로 조각조각 쪼개놓고 일관성이 없게 만드는 것에 의해서까지 실패한다.


  내가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이러한 부조화의 방식은 쾌락주의적인 이기주의자들에 의해 유형화된 이기주의자들을 위한 문제를 고려하는 것에 의해 분명해질 수 있다.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는 개인의 즐거움의 중요한 원천이다. 그러나 저런 이기주의자들은 이러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 그들이 자기를 위한 즐거움의 동기를 향해 집착하는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을 위한 근거는 이기주의자들이 사랑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려고, 함께 어울리고 결정하고, 이런 것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 그들은 그렇게 (저런 한 행동을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에 대한 관련성이 적은 문제들을 떠나서 생각하면)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저런 즐거움을 줄 수 있게 계산된 여러 가지 것들을 할 수 있다: 아주 매력적인 대화를 갖는 것, 사랑하는 것, 맛있는 밥들을 먹는 것,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것들, 그리고 그 밖에도 아주 많은 것들.


  더 적지 않게, 이런 한 삶에는 필수적으로 부족한 어떤 것이 있다: 사랑. 한 사람이 사랑받을 사람을 위해 돌보는 것, 한 사람이 사랑받을 사람의 목적을 위해서 행위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은 사랑의 이러한 개념에 핵심적이다. 더 강하게, 한 사람은 반드시 사랑받을 사람을위해 돌보아야만 하고, 또한 마지막 목표인 것처럼 그 사람의 목표를 위해서 행위해야만 한다; 사랑받을 사람, 또는 사랑받을 사람의 복지나 이익은 반드시 한 사람의 고려와 행위의 마지막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


  당신을 위한 나의 고려사항이 – 또는 심지어 당신을 기쁘게 만들려는 나의 시도 – 문제없는 삶, 즉 나를 위해 개인적으로 즐거운 하나의 삶을 이끌려는 나의 욕망으로부터 온다는 것의 확장에, 나는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행위하지 않는다. 짧게 말해, 나는 나 자신을 위한 행복 – 또는, 더 일반적으로, 좋은 것 – 을 얻는 것을 마지막 목표로 당신을 향해 다양한 방식들 안에서 행위한다는 것의 확장에, 나는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행위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런 방식을 생각했을 때, 우리는 아마도 이기주의가 종종 핵심적으로 고독하다는 것이 주장되는 이유에 대한 몇몇 생각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핵심적으로 우리에 대한 그들의 효과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의 외적인 관계와 함께 생각되기 때문에, 한 사람은 어떤 다른 사람들 또는 심지어는 어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구별된다거나, 더 중요하다거나, 가치있다거나 또는 중요하지 않다. 개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중요하지 않고, 단지 우리에 대한 그들의 효과들만이 그렇다; 그들은 같은 효과를 그만큼 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것과도 핵심적으로 교체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제안하기에, 이것은 개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또는 이런 방식으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에 대해 생각한다고 믿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개념적, 그리고 그 만큼이나 심리학적인 이유들 때문에 그것은 사랑과 부조화스럽다.


  이런 방식의 사랑을 가진다는 것은 더욱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마도 가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심각한 실수가 된다. 이런 사랑은 단지 근대적인 낭만이나 성애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가족의 구성원들 사이의 사랑,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을 위해 우리가 가진 사랑, 그리고 또 다른 것들 또한 아니다. 대체 그들의 고유한 이익을 향한 수단인 경우를 제외하면 다른 어떤 사람을 위해서도 돌보지 않았던 사람이 가진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그리고, 오직 그들이 다른 사람의 이익에 봉사하는 방식을 위해서인 경우에만 그렇고, 그들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얻은 사람이 가지는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단지 다른 이의 목표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 또는 그 사람의 목표를 위해서 그 사람을 돌보는 것에 대한 개념은 사랑에 핵심적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것은 친구와 모든 애착하는 관계들에 핵심적이다. 이것 없이는, 가장 좋은 상태에서도 우리는 좋은 관계, 친근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스하게, 이런 돌봄과 존중은 동류감정과 공동체를 위해서 중요하다.


  더 진행하기 전에, 이기주의에 대한 이 비판과 좀 더 표준적인 것을 대조해보도록 하자. 나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나아간다: 쾌락주의적 이기주의자들은 그들의 고유한 즐거움을 행위들, 활동들, 삶의 양식들의 유일한 정당화에서 취한다; 그들은 이런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가 가장 큰 개인적인 즐거움(의 원천) 사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저런 관계들에 들어갈 좋은 이유를 그들의 고유한 토대 위에서 가진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즐거움, 이런 크게 좋은 것들을 가지려면 요청되는 방식들 안에서 행위할 수 없는데, 그들이 자기를 위한 즐거움의 그들의 동기 위에서 행동할 경우 그렇다. 그들은 의도적인 사랑받을 사람들과 친구들 등등의 목적을 위해서 행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랑할수도, 친구가 되거나 가지는 등등을 할 수 없다. 이러한 큰 개인적인 좋은 것들을 성취하려면, 그들은 이런 이기주의자적인 동기를 거부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동기 속에서 그들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의 근거들과 도기들은 그들의 도덕적 삶을 정신분열증적으로 만든다.


  이기주의자들에 대한 표준적인 비판은 그들의 단순히 이런 이기주의자적이지 않은 좋은 것들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 행위에 대한 그들의 경로는, 그 원리의 성질 때문에, 타당한 방식 안에서 그들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참여시키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멀어지게 한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비판은 명백하게 옳지는 않다. 내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이 이기주의자들이라는 것을 그들이 잊도록 허용할 정책, 즉그들이 그 사람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처럼 이런 마지막 목적들과 동기들을 발전시키도록 허락하거나 심지어 북돋아주는 정책에 대한 이기주의자들의 수용함 속에서 부조화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몇몇 질문들이 이런 답변에 대해서 질문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전환된 사람은 여전히 이기주의자가 되는가? 그 사람이 이기주의자로 남는다는 것은, 이기주의의 방어를 위해서, 중요한가? 또는 단지 그 사람이 이기주의자에 의해 시인될 방식 안에서 사는 것만이 중요한가? 물론, 이기주의자인 사람이 그/그녀 스스로의 의식적인 조절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기주의자적인 동기에서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을 향한 그 사람의 전환에 핵심적이다. 이것은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의 전환된 스스로가 이기주의자적으로 시인된 목표들을 성취하는 것을 증가시키는 가를 재고 알아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일으킨다. 만약 그들이 충분한 개인적 즐거움 – 또는, 더 일반적으로, 충분한 좋은 것 – 을 얻을 수 없는 경우 그런 전환들을 다시 고치는 것을 그들에게 허락할, 모든 경우에서 즉시 일어나는 그들의 이기주의자적이지 않은 전환들로부터 그들을 깨울 정신적인 알람시계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 나는 이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의 이상적인, 심지어 아주 만족스러운, 삶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반드시 숨겨야만 하는 사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나쁘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 자신(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반드시 숨겨야만 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을 상상해보라. 여전히, 아마도 이것은 가능하다. 만약 그것이 된다면, 그것은 이기주의자들이 아마도 이런 둘째 비판에 직면할 수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비판을 건드리진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동기들 속에 그들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 그들은 두 갈래로 갈라진 것, 즉 좋은 것을 성취할 때 정신분열증적인 삶을 이끌어야만 할 것이라는 것.


  이것은 아마도 이기주의로서의 이러한 윤리이론들만의 실패로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의 행위가 옳고, 의무적이고, 또는 즐거움과 고통(또는 그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된 사항)을 고려하는 것 안에서만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런 공리주의들을 생각해보자. 이런 한 관점은 행위를 위한 단 하나의 좋은 근거는 즐거움과 고통의 대결이며, 그리고 그러므로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에 높게 가치를 매겨야 한다는 것을 가지고 있다. 이제, 당신이 이런 공리주의자들의 근거를 당신의 행위들과 어떤 한 사람을 향한 생각 속에 당신의 동기로서 구체적으로 표현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을 향한 당신의 관계가 무엇이든, 이것은 필연적으로 사랑이(또한 우정도, 애착도, 동류감도, 또는 공동체도) 아니다. 당신이 가정한 그런 사랑을 한 그 사람은 그/그녀 자신을 위하지 않게, 그러나 즐거움의 원천으로서 더욱 당신의 생각과 행위에 참여할 것이다.


  이 문제는 즐거움이 유일한 선한 것으로 취해진다거나, 유일한 옳음을 만들어내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는 것은 무어의 형식주의적인 공리주의, 즉,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정의하고 있었던 주장하는 것이 없이, 우리에게 좋음을 최대화하라고 말하는 것을 고려한다. 만약,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고 또는 무어가 동의한 것처럼, 사랑 관계와 이 같은 것이 좋은 것이라면, 얼마나 여기에 어떠한 부조화도 있을수 있을까? 한 동기와 여전히 사랑인 무어의 정당화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 만약 당신이 선함의 목적을 위해서 그 관계를 계속하기를 시도한다면, 심지어 이런 활동들에도 핵심적인 수행이 없을 것인데, 참여하는 사람들이 훨씬 적다. 선함에 포함되는 것에 한해서, 당신은 스키를 타거나 또는 시를 쓰거나 또는 상큼한 식사를 하거나 하는 것 만큼이나 잘 사랑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 좋음, 사랑의 좋은 것 – 그것을 이제 단지 좋다는 것이 아닌 좋은 것으로서 또는 이 좋음으로 다루는 것 – 에 대한 어떤 특별한 것이 있다고 답변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안에서, 개인들이 고려되는 한에서 다시 비인격성이 있다. 이 좋음에 대해서만큼 이끌어내는 모든 다른 사람은 사랑받을 것으로서 사랑의 대상이 적절히 될 것이다. 이것을 향해 찾아질 것인 저 좋음이 있다는 것은 아마도 답변받게 될 것이다 –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속성, 즉 이런 사람들을 함께 묶어주는 속성에 대한 출현과 함께. 그러나 이제 좋음의 감각이 찾아진다는 것, 또는 그 이론이 여전히 우리에게 좋음을 최대화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사실, 그 이론은 우리에게 이 좋음을 제공해주지만, 이제는 그것의 좋음으로부터 좋은 것, 즉 사랑을 분리시킬 수 없다. 이것은 간단하게 무어의 공리주의가 아니다.


  단지 이기주의와 공리주의의 더 나은 방식들은 근거와 동기 사이의 정신분열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 그리고 단지 그들은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공동체를 허락할 수 없기 때문에 – 우리는 요즘의 규칙공리주의에 이렇게 했다. 그리고 요즘의 의무론들에게도 이렇게 할 것이다.


  이런 이론들 안에서 부족하게 되는 것은 간단하게 – 또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게 – 사람이다.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 모두가 다른 사람이 가치있는 것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람 – 단지 사람의 일반적인 가치 또는 심지어 일반적인 가치의 제작자 또는 소유자로서의 사람이 아닌 - 은 가치있게 매겨져야 한다. 사랑을 고려할 때 이런 이론들의 실패는, 한 경우를 취해보면, 그들이 사랑에 가치를 매기지 않은 것(종종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받을 것에 가치를 매기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순한 사랑, 말하자면, 일반적인 사랑과 심지어 이 사람에 의해 일반적으로 예증되는 사랑에 가치를 매기가 그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내가 비판하고 있는 그 이론들의 신봉자들이 그렇게 하는 만큼 당연한 의도적인 사랑받을 이를 놓친다.


  그러나, 이런 이론들과 함께인 문제는 가치있는 것으로서의 다른 사람과 함께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 또는 그리 간단하지 않게 – 가치있는 것으로서의 사람들과 함께이다. 단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여 하는 것처럼, 근대윤리이론들은 우리 각각을 사랑하는 것, 돌보는 것, 또 우리 스스로에게 가치를 매기는 것으로부터 떨어뜨린다 – 사랑하는 것, 돌보는 것, 우리의 일반적인 가치 또는 우리 스스로를 일반적인 가치를 만드는 사람 또는 소유한 사람으로 가치를 매기는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이런 외부적으로 지배되는 이론들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만큼이나 자아의 사라짐 또는 나타나지 않음이 있다. 본질적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것에 대한 이런 외부적으로 지배되는 우주는 유아론적이지 않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결여되어있다.


  이런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들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그들을 돌보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약해지고 소진된다. 그것은 우리를 너무 개방적이고, 너무 상처입기 쉬운 위치로 밀어넣는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보게 되어야 할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하는 것 – 개인적으로 그리고 모임들 안에서 짝들 만큼이나 작고 또한 사회만큼이나 큰 것에서 취하는 – 즉, 일반적이고 또한 특별하지 않은 가치의 단순한 수단들 또는 용기들로서, 핵심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외부적으로 보고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다뤄지거나, 또는 우리가 다뤄진다고 믿게 하는 것이 이런 방식으로 하게 된다.


  아주 적어도, 이런 방식들은 비인간화한다.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은 어떻게 사랑과 우정같은 이런 개인적인 관계가 가능한지, 어떻게 그들이 인간의 삶의 더 큰 방식과 구조들과 관계를 맺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 그리고 아마도 그들만이 – 인간의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게 구성하는 이런 관계들의 발전을 허락하는지 보여줄 꽉찬 규모의 철학적 인간학을 요구한다: 요약하자면, 어떻게 그들이 좋은 삶의 꽉 참, 즉 에우다이모니아의 삶을 만들어내는 데 함께 일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이것을 말하면서, 가치 있는 한 사람에 대한 개념 속에, 한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것에 대한 개념 속에 많은 불투명성들과 어려움들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유념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것에 대해 생각할 때 – 예를 들면, 무엇에 우리가 가치를 매기는지, 그리고 왜 가치를 매기는지 – 우리는 사람을 빼먹고 또한 일반적인 가치의 제작자 또는 소유자로서의 사람 또는 인간의 일반적 가치들로 마무리하거나, 또는 그들을 빼먹고 또한 거의 특별하지 않은 자아로 마무리하는 것 둘 중에 하나로 이끌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 안에서, 아마도 우리는 이기주의자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들의 본능은, 적어도, 그들 스스로를, 각자 스스로를, 그들의 가치들 속으로 넣는 것을 허락하게 되어야만 한다. 이것 바보같음의 위험 – 적어도, 그들의 시점의 표현의 완벽한 상실의 위험 –에서 그들이 자신을 위해서 좋은 것에 대해 매력적이고 좋다는 매력을 찾는 것은 반드시, 단순히 좋은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탁월하기까지 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 주목했을 때, 그것은 아마도 내가 하려고 시도하는 것들의 몇몇 또는 내가 하지 않아왔던 몇몇을 다시 말하는 데 도움을 준다. 처음부터 계속 나는 만약 그들이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의 아주 큰 좋음들을 현실화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동기의 종류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려하고 있다. 또한 나는, 만약 우리가 이런 동기들로서, 즉 우리의 동기들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 최근의 윤리이론들이 최고로 좋거나 또는 옳다고 주장하는 저런 다양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저런 동기들을 가지는 것을 못할 것이다.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 등 이와 같은 다른 상태들과 활동들은, 핵심적으로 특정한 동기들을 구성하고 또한 핵심적으로 특정한 다른 것을 제외한다: 이런 제외된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정당화들, 목적들, 가장 최근 각광받는 이런 윤리이론들의 좋은 것들을 형성하는 동기들을 찾는다. 최근의 윤리이론의 가치들을 한 사람의 동기들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사람들을 외면적으로 다루는 것이고 또한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를 – 다른 사람들과 그 스스로 둘 다에서 – 제외하는 것이다. 이런 최근의 윤리이론들을 붙잡아두고 있는 동안 이런 거대한 좋은 것들을 얻는 것은 근거와 동기 사이의 정신분열증을 필요로 한다.


  나는 만약 당신이 성공적인 사랑관계, 우정 등등등을 가진다면, 당신은 정당화들, 목적들, 이런 이론들에 의해 가정된 좋은 것들을 성취하는 것을 못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아왔다. 당신은 이들을 성취할 수 있는데, 이런 이론들을 직접 살려고 시도하는 것에 의해서는 아니다. 또는, 더욱 분명하게, 당신이 이런 이론들을 직접 살려는 것의 확장은, 그런 선들을 성취하는 것에 실패할 것이라는 것의 확장이다.


  나는 오직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의 개인적인 감정을 향한 고려 속에서만 부조화, 갈라짐, 정신분열증의 책임을 추진해왔다는 것까지 했다. 저것들의 중요성은, 내가 생각하기에, 나날들을 지속시키는 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더한 영역을 보자: 이해, 지혜를 위한 탐색으로서 취해진 연구. 내가 여기에 덜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한 몇몇 것들의 많음은 적용을 충전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다음에 보일 것은 단지 특별한 경우이지만, 그러나 생각할만한 가치는 있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정신병동을 바라보고 있고, 또한 자연스럽게 나갈 것을 강하게 바랄 것이다. 당신은 정신과의사에게 당신이 풀려나게 되는 것은 언제인지 물어본다: 그는 ‘조금만 이따가요.’ 라고 대답한다. 당신은, 그가 진짜 믿는 것을 환자에게 말하는 것 대신에, 그는 그들에게 그가 믿는 것이 그들이 듣기에 좋은 것을 말해준다.(또는 그들이 믿는 것이 좋다고 그가 믿는 것.) 아마도 당신은 그의 의학적 이론들과 당신에 대한 그의 믿음들을 발견하는 것에 의해 그의 코드를 깰 수 있을 것이다. 덜 하지 않게, 그와 함께 하는 당신의 더 나은 대화는 – 만약 그들이 그렇게 불려질 수 있다면 – 연구의 모형이 되기 매우 어렵다. 나는 우리가 아마도 신의 영광을 위해, 가장 큰 즐거움을 위해, 또는 심지어 가장 큰 선을 위해 그들의 고유한 목적을 위한 연구 안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직면했을 때 하나의 다른 위치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마도 그들의 코드들을 잘 깰 수 있을 것이다 – 예를 들면,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이 학문적인 승진을 위한 그의 가장 큰 기회는 특정한 영역 안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덜하지 않게. ...


  (모든 여기 제시된 것의 ‘그러나 만약 그가 늙은 교수를 향해 가장 큰 즐거움인 것이 승진을 늘려줄 것이라고 믿게 된다면; 그리고 우리는 그가 진짜로 믿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는 나머지 의심인가? 그리고 그것은 ‘그러나 만약 그가 이러한 진리에 가치를 매기는 것을 제거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짜로 가치를 매기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로부터 핵심적으로 다른가? 아마도 만약에, 단순한 지식이 아닌, 이해력이 목표라면, 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동기들과 그들의 평가가 명백하게 고려된 이런 영역들 안에서, 윤리이론들은 우리를 이런 부조화 또는 도덕적으로 실패한 삶과 만나게하는 것으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대의 몇몇 확장을 향해 만나게 된다. 그러나 심지어 도덕적으로 잘한 일과 못한 일, 도덕적으로 칭찬받을만함과 비난받을만함, 도덕적인 덕들과 악덕들에 대한 고려 안에서도, 이 상황은 완전히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외면성의 문제와 비인격성, 그리고 부조화에 접속됨이 일어난다.


  표준적인 시점은 도덕적인 선한 의도가 도덕적인 선한 행위의 핵심적인 구성요소라는 것을 가진다. 이것은 충분히 옳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점 위에서, 더 나아가, 도덕적인 좋은 의도는 그의 좋음 또는 옳음의 목적을 위한 한 행위를 하려고 하는 의도이다. 그러나 지금, 긴 아픔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 당신은 병원 안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매우 지루하고 불편하고 스미스가 다시 한 번 올 때 혼란스러울 것이다. 당신은 이제 그가 아주 괜찮은 동료이고 또한 진정한 친구라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도 더 확신되어야 한다 – 당신을 응원하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을 쓰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모든 길을 여행하는 등등의. 당신은 당신의 칭찬과 그가 생각하는 것의 그의 의무인 것, 그가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려고 그가 언제나 시도하려는 것에 그가 저항하는 것을 고마워하는 것들에 대해 감정이 과잉될 것이다. 당신은 가장 먼저 그가 도덕적인 짐을 줄여주는 것, 자기 반대의 친절한 형식 안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두 가지를 많이 말하면 할수록, 그것은 그가 글자 그대로의 진리를 말해주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가 당신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핵심적으로 당신 때문이 아닌데, 그것은 당신이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그의 의무, 아마도 기독교이 또는 공산주의자 또는 어떤 무엇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또는 단순하게 그가 더욱 응원하는 것의 필요 안에 있는 누군가 그리고 응원해서 더 좋게 될 누군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연하게도 여기에는 어떤 부족함이 있다 – 그리고 도덕적인 잘한 일 또는 가치의 부족함이다. 이 부족은 두 가지 관련된 점에서 책임이 지워진다: 다시 말해, 이것의 나쁜 방식은 적절한 동기가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적어도 이 경우 안에서, 이것의 나쁜 방식은, 다시 말해, 핵심적으로 외면적이다.



  몇몇 질문과 결론을 맺는 소견


  나는 윤리이론들의 근거들, 가치들, 정당화들은 우리의 동기들 안에서 그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허락하면서도 여전히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동시에 좋은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가정해왔다. 그러나 왜 이것을 가정하는가? 아마도 우리는 간접적인 수단을 북돋우는 것으로써 윤리 이론을 취해야만 한다 – 어떤 다른 것을 찾는 것에 의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 예를 들면, 몇몇은 모든 이의 그것을 찾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의 그/녀의 고유한 잘삶을 찾는 것에 의해서, 모든 것의 경제적인 잘삶이 현실화된다고 말한다. 또는 아마 우리는 좋은 것 그리고 옳은 것에 대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단지 지표들을 주는 것으로서만 윤리이론들을 취해야 한다.


  간접적인 것의 이론들은 그들의 특별한 문제들을 가진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얻게 되는 큰 위험이 있다. 또한, 이러한 연관된 두 가지 문제들이 있다. 간접적인 것을 변호하는 한 이론은, 어떤 행위를 위해서 어떤 동기들이 적당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면서, 동기부여의 다른 이론들에 의해 논증되는 것이 필수다. 이런 한 이론은 또한, 동기와 진짜 목표 사이의 연결, 간접적인 연결을 설명해야 한다.


  둘째, 사회의 경제학으로서의 이러한 큰 규모와 다양한 사람들의 요소 안에서 간접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생각의 무엇에 대한 고려 안에서, 윤리학으로서 한 사람에게 아주 닫혀있고 또 내면적인 이런 것은, 간접적인 것의 대화는 수용불가능과 좌절을 둘 다 겪는다. 우리는, 적어도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적어도 그렇지 않은데, 간접적인 것에 의해 행동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들 안에서, 우리의 동기는 우리의 근거를 하는 것으로서의 사랑받는 누군가, 친구 등등등과 함께 직접적으로 하는 것을 갖는다. 사랑스런 아이 또는 부모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 안에서, 최근의 윤리 이론들 안에서 토대가 다져지는 이유들을 나타낼, 또는 심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간접적인 것의 대화는 좌절하는데, 행위 그리고 이해의 실패에 대한 느낌 안에서, 우리는 그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필수적인 사랑으로서의 이런 할동들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믿기 시작하는 한 순간 때문에,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들을 계속할 수 있게 되는 자기기만을 향한 것과 같은 종류에 의해 그렇게 된다.


  이런 윤리이론들에 대한 한 부분적인 방어는 그들이 근거와 동기 둘 다로서 봉사할 수 있는 것을 공급하는 것이 의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결정하는 것들이 아닌, 좋음과 옳음의 지표들을 공급하는 것만을 의도한다. 형식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윤리이론들을 취하는 것 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 우리는 이런 이론들, 그에 대해 행동될 수 없는 이론들에 고려되어야만 하는가? 왜 근거와 동기 사이의 조화를 허용하는 이론을 간단하게 가질 수 없는가? 그리고 게다가, 우리는 이런 이론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것인가? 사실, 우리가 분석하기 이전에 갖는 시각은 아마도 지표 이론들 사이에서 판단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아마 옳은 지표이론을 찍어내는 결정적인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지표가 옳은지, 왜 그것이 작동하는지 아는 결정적인 이론을, 왜 그것이 지표화되는지에 대한 것이 좋은지를 알기 위해 필요하지 않게 될까?


  최근 이론들의 다른 부분적인 방어는, 먼저, 그들은 옳음, 부여된 것, 의무감에 고려되며, 윤리학의 전체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이런 제한된 영역 안에서, 그들은 부조화와 정신분열증으로부터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방어의 몇몇 확장은, 특별히 그의 두 번째 점에 대해서, 이미 다루어졋다. 그러나 더 말해져야만 한다. 그것은 최근의 윤리학자들은 도덕성에 대해 크고 극단적으로 중요한 영역들을 무시해왔다는 것에 의해서 충분히 분명해진다 – 예를 들어, 개인적인 관계의 것과 잘한 일에 대한 그것. 이것을 확장하면, 이 방어의 첫 번째 점은 옳다. 그러나, 매우 분명한 것은, 이런 이론들이 단지 부분적인 이론으로서만 발전되는지 아닌지, 또는 의무 등등이 진짜로 전체, 또는 적어도 윤리학의 단지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제안자에 의해 믿어지는지 아닌지이다.


  우리는 아마 과거의 동기부여와 믿음을 잊을 것을 충고받고, 또한 간단하게 이런 이론들을 바라보고 또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 용도를 안다. 아마도 그들은 의무와 등등의 시각과 중요함에 대해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것은 그들 고안된 개념들에 대해 옳을 수 있다는 것보다 덜하지 않다. 답변 속에서, 몇몇 논점들은 만들어져야 한다. 첫째, 그들은 이런 개념들, 심지어 필요 이상의 일을 하는 것과 자기고려의 개념에 대한 간략한 연구가 나타내보이는 것으로서의 그 개념들에 대해 실수했다. 둘째, 이런 이론들은 위험하게 잘못 인도하고 있다; 그들은 윤리학의 전부가 외부적으로, 법적인 모형처럼, 지표의 방식 안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으로서 모두가 함께 쉽게 취해진다는 것 때문이다.(‘법적인 모형’에 대해서는, 밑을 보라.) 셋째, 부분적인 이론으로서의 이런 이론들에 대한 접근은 윤리 이론들 안에서 종합의 엄격한 어려움을 제기한다. 이런 이론들은 이런 고려하기, 예를 들면, 개인적인 관계들로부터 많이 다르다면, 어떻게 그들은 모두가 종합되는가? 물론, 이 셋째 논점은 아마도 의무의 이런 이론들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게 아니라, 단지 거대한 다양성과 우리의 도덕적 삶의 복잡함에 대한 인지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즘의 도덕이론들이 어떻게 곡예하는 도덕적 삶 또는 부조화, 정신분열증 가운데 하나를 요청하게 되는지 질문될 것이다. (다소간 사변적인) 답변들의 한 부분은 이런 이론들 안의 의무, 옳음, 그리고 부여된 것의 탁월함에 대해 감싼다. 이런 탁월함은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관계들을 감소시키는 기회 속에서 발전된 이론들에 딱 들어맞는다; 사람들을 함께하게 묶는 그 끈과 다양한 기획들의 마찰을 감소시키는 것이 더욱 더 적어지는 애착일 때의 기회; 상업적 관계들이 가족(또는 가족 비슷한) 관계들을 대체할 때; 개인주의를 성장시키는 것. 그것은 또한 이런 철학자들의 주된 고려와도 딱 들어맞는다: 법적인 것. 법적인 것에 대해 고려할 때, 그들은 의무, 옳음, 부여된 것에 대해 고려한다(물론, 그러면 질문은, 왜 그들은 법적인 것, 특히 이런 방식에 대해 관심이 있는가? 이것의 몇몇 작은 확장은 답변되었지만, 이것에 대해 더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런 재판관의 관점에서부터 도덕성을 바라볼 때, 이런 법적인 것을 모형으로 취할 때, 동기부여는 아주 쉽게 부적절하게 된다. 그 재판관은 행해지거나 행해지지 않은 다양한 것들을 원한다; 왜 그들에게 그것이 해졌는지 또는 해지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 사람은 행위에 대해 셈해보고 알 수 있지만, 동기들에 대해서는 아니다(이것은 또한 우리의 감정들과 감정적인 가능성들의 일반적인 가치절하와 함께 묶인다 – 감정들을 단지 느낌들이나 충동들로 취하는 것, 아무런 이성적이고 인지적인 내용이나 강제와 함께이지 않고; 또한 우리를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나 고통을 피하는 사람들로 취하는 것 –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덕을 향한 욕망들이 사람들에 대해 극단적으로 강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는 것 잊게 하고 거부하게 하는 것.). 이런 것과 연결되는 것은 법적인 것 또는 간단하게 제3자의 시점,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행복한 경우, 그들이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만 하는 경우,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을 더 잘 얻는다고 우리를 확신시키는 그런 시점이다. 그 결과는 원인을 보증한다 – 경험적인 감각 속에서(한 사람은 아마도 인식의 근거ratio cognoscendi와 존재의 근거ratio essendi에 대해 일반적인 경험주의자적인 혼란이 여기서 작동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놀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다양한 요인들은 아마도 이것이 더욱 주목할만한 전도라고 설명하는 것을 도와준다(마르크스의 개념을 사용하여): 그 ‘결과’, 즐거움과 그와 같은 것들을, 그 ‘원인’, 좋은 활동으로 취하는 것.


  무어의 형식주의적인 공리주의와 도덕적인 좋은 행위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함께 이런 한 전도와 같은 어떤 것으로부터 아픔을 일으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것은 인과적이지 않고, 철학적이다. 그것은 이런 철학자들이, 이런 다양한 좋은 것들이 좋다고 모두 분류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좋음은, 오히려 반대적인 것 보다도, 이것 안에 있다는 것이 취해진다고 가정된다. 가장 일반적인 분류화는 소외되거나 또는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관련있는 것으로서 취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전도는 아마도 이 논문을 괴롭히는 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다: 왜 나는 요즘의 윤리학들이, 오히려 단지 그 이론들이 좋은 것과 나쁜 것, 옳고 그름을 만드는 것의 그들의 명명 안에서 실수를 했다는 것보다는, 정신분열증, 갈라짐, 부조화로부터 아픔을 준다고 말해왔을까? 그것은, 만약 우리가 그른 목표를 목표로 삼았을 경우, 우리는 우리가 진짜로 원하느것, 우리가 좋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을 성취하는 것이 그럴듯하지 않다는 것이 충분히 명백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실수 이상을 주장하는 나의 근거는 이 실수는 아주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와 밀접하게 관계맺어져있고, 그것은 진리의 많은 속성들을 낳는다. 오직 두 사례들(나쁜 운과 나쁜 결과들을 제외하면)만을 취해서, 좋은 활동은 즐거움을 안겨준다; 사랑은 명백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안겨준다. 그러므로, 이런 이론들이 좋은 것으로서 진척시키는 것을 좋은 것으로서 취하는 것 안에는 크게 말이 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이론들 위에서 행위하려 시도할 때, 우리의 동기 안에서 그들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할 때 - 우리 또는 다른 사람의 삶이 그 이론들에 의해서 시인되는지 아닌지를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에 반대하는 것처럼 - 그러면 아주 미친 방식 속에서, 그것들은 그르게 진행하기 시작한다. 사랑받는 사람들의 개성들은 그들의 결과들을 뛰어넘어가고, 도덕적 행위는 자기무능과 자기실패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모든 것에 대해 가장 큰 광기는 – 그리고 그들은 타락한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 첫째로, 세계는 점점 더 이런 이론들이 맞는 것이 되게끔 조장하는 이런 것들로 점점 더 만들어지고있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는 이런 이론들을 옳은 것으로 취하고 그러므로 사랑, 우정, 그리고 그같은 것들을, 아주 특정하지 않은, 단지 즐거움이나 어떤 것이든의 가능한 원천으로서 보게 된다. 우리는 이런 원인 때문에 이 결과들을 실수하고, 또한 결과로서 보이는 원인이 결과로서 보이는 원인으로부터 귀결되는 것이 실패할 때, 우리는 결과로서 보이는 원인을 가치절하하고, 추방하고, 아주 좋은 경우, 수단으로서 좋은 것으로 간주하며,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선들이 너무 좁고, 쓰며, 또한 비인간적인 이유에 놀라면서, 원인으로서 보이는 결과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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