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ael Slote의 논문 'Agent-based Ethics' 번역. Roger Crisp & Michael Slote가 편집한 『Virtue Ethics』의 12장.>
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 - 마이클 슬롯
덕윤리학에 대한 관심의 엄청난 부활은 최근 자리를 내어주고 있지만, 그러나 이 논문 속에서 나는 근본적으로 탐사되지 않아왔던 몇몇 중요한 덕윤리학적인 가능성에 대해 논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윤리학에 대한 관심의 기본적인 초점이 되어왔지만, 그러나 우리(또는 우리 중의 몇몇)이 아리스토텔레스 안에서 찾은 것보다 더 행위자에 기반한 특징 안의 덕윤리학을 설득하는 것은 가능하며, 또한 나는 여기에서 이 가능성을 탐사하려고 하고, 또한 왜 이러한 더욱 근본적인 한 접근법이 과격하거나, 오해되거나, 불충분하거나, 또는 그것이 때때로 그렇다고 주장되어온 것처럼 명백하게 가망이 없는 것으로서가 아닌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행위자 기반 대 행위자 초점 덕윤리학
덕윤리학을 향한 하나의 행위자에 기반한 접근법은 행위들의 도덕적인 또는 윤리적인 상태를 동기들, 성격특성들, 또는 개인들의 독립적이고 근본적인 탁월한(의무적인 것에 반대하여) 윤리적 특성화들로부터 전체적으로 고려된 것으로서 다루고, 또한 이러한 행위자에 기반함은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반을 두지 않으며, 적어도 표준적인 해석의 한 종류 위에 있다. 확실히,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행위의 평가에 대해 한 것보다 더 행위자들과 성격특성들의 평가에 대해 더 큰 강조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한 행위는 만약 그것이 고귀하거나 덕스러운 개인이 행위한다면, 그리고 그가 덕스러운 개인이 행위 안에서 덕의 기준이라고 말하는 한 경우에 고귀하고 꽤 괜찮은 것이다. 그러나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적절하게 지도되거나 또는 순간적으로 영감을 받은 개인들도 꽤 괜찮거나 좋거나 덕스러운 행위들을 심지어 그 개인들이 그들 스스로 좋거나 덕스럽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허락했고, 또한 게다가, 그는 덕스러운 개인을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좋거나 꽤 괜찮거나 옳게 하는 것인지 알거나 똔 감지할 수 있는 누군가로서 특성화했다.
이런 언어는 명백하게 덕스러운 사람은 그것을 고를 것이거나 골라왔기 때문에 그것을 하면 고귀하게 되는 – 또는 용기 있는 – 경우의 존재가 이런 상태를 간단하게 가진다기보다는, 오히려 덕스러운 개인은 그것이 하면 고귀한 것 – 예를 들면, 용기있는 것 – 이기 때문에 고귀하거나 덕스러운 것들을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심지어 옳거나 꽤 괜찮은 행위들이 규칙에 의해 정의될 수 없는 경우에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그들을 옳거나 꽤 괜찮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개인의 한 특정한 종류에 의해 한 특정한 방식으로 선택되어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옳거나 꽤 괜찮거나 고귀한 것으로서의 그들의 상태는 어떤 방식으로는 행위자 평가에 대해 독립적인 것처럼 다루어지고, 또한 이것은 우리가 그것을 바로 위에서 규정한 것으로서의 행위자에 기반함과 양립하지 않는다.(만약 덕스러운 개인이 꽤 괜찮거나 옳은 것의 기준이라면, 저것은 아마 간단하게 그녀가 꽤 괜찮거나 옳은 것을 알기에/감지하기에 가장 좋은 가능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것(널리 해석된 것으로서의)과 비슷한, 행위들에 대해서보다는 덕스러운 개인들과 개인적인 특성들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또한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행위자에 초점을 맞추는 한 덕윤리적 이론을,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비슷하지 않은, 행위들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상태들을 동기들, 특징들, 또는 그것을 수행하는 개인들의 내적인 삶에 관한 독립적이고 근본적인 윤리적인/탁월한 사실들(또는 주장들)로부터의 전체적인 고려로서 다루는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들으로부터 구별해야만 한다. 뒤엣것과 같은 관점들은 명백하게 덕윤리학의 극단적이고 근본적인 형식을 대표하며, 또한 게다가 그것은 다소간 이러한 행위자에 기반함의 뚜렷한 역사적 사례들을 찾기 어렵다. 사실, 내가 찾은 행위자에 기반함의 단 하나의 절대적인 뚜렷한 사례는 19세기 영국 윤리학자인 제임스 마티뉴이다. 행위자에 기반함의 다른 가능한 역사적 사례들 – 적어보자면, 흄, 레슬리 스티븐, 니체, 아벨라르,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칸트 – 은 이러한 해석을 향해서 반대의 다른 형식들을 제공하며, 또한, 심지어 우리가 개인적인 영혼의 건강과 덕을 향한 참고에 의해 우리가 행위들을 평가한다고 주장한 플라톤도, 좋음의 형상은 영혼의 평가, 적절하게 평가하고 또한 좋음의 형상에 고유한 가치에 의해 지도될 때 덕스럽다고 평가하는 영혼보다도, 먼저 평가의 단계를 표현한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확장하면, 플라톤의 관점은 행위자에 기반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형상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플라톤적인 접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의 한 방법이 있을 것이라 믿고, 또한 내가 이제 쓰게 될 행위자에 기반함의 첫 형식은 플라톤 안에서 그의 근본적인 영감을 갖는다. 내가 쓰기 시작할 행위자에 기반함의 다른 형식들은 마티뉴의 도덕이론 위에서 더욱 그럴듯하게 간략화된 변형인 것처럼 보이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을 발전시키는 것의 특별한 방식들에 관해서 내가 더 많이 이야기하기 전에, 반드시 첫째로 답변되어야만 하는 행위자에 기반함의 전체적인 생각에 대한 몇몇 매우 심각한 반대들이 있다.
행위자에 기반함에 대한 반대들
도덕적 평가에 대한 모든 행위자에 기반한 접근의 원리에서 틀렸다고 보이는 한 가지는 그것이 옳은 것을 하는 것과 옳은 근거들을 위해 옳은 것을 하는 것 사이의 널리 알려진 구별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의무감에 의해서보다는 해칠 마음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되어, 한 피고의 유죄를 입증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의해 그의 의무를 하는 집행자에 대한 시즈윅의 잘 알려진 사례는 이 문제적인 구별을 잘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한 그것은 아마도 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이 그것이 좋은 동기부여의 방식으로 옳음을, 그리고 나쁜 동기의 가짐의 방식으로 그름을 이해하는 방식 때문에 어려음을 갖게 되는 것으로 더 잘 보였다. 만약 그들이 도덕적으로 나쁜 동기들로부터 귀결될 때 그르게 된다면, 저것은 집행자는 해칠 마음(해칠 마음이 일반적으로 또는 이런 특별한 경우에 도덕적으로 비판받을만하다는 것을 가정한다면)을 벗어나서 어떤 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 안에서 그른 것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게 되는가? 그리고 저것은 행위자에 기반한 접근법의 더욱 불운한 결과가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즈윅 스스로는 만약 그가 해칠 마음으로부터 집행한다면 집행자는 그르게 행위한다는 생각에 특정한 그럴듯함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럴듯하지 않은 것은 단지 집행자는 집행할 아무런 의무가 없다는 주장 뿐이다. 그리고 저것은 만약 그가 해칠 마음으로부터 집행했다면 그는 그르게 행위한다는 행위자에 기반한 가정으로부터 따라나오지 않는다. 물론 시즈윅은 지적하길, 만약 그가 해칠 마음에 의해 충분히 동기가 부여되었다면, 집행자는 아마도 전체적으로는 또는 심지어 사실상 옳은 종류의 근거들을 위해서 그의 의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동기가 부여된 집행자가 그러므로 만약 그가 집행한다면 그르게 행위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만을 함의할 뿐이다. 그것은 그것이 그가 집행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으로 완전히 옳다거나, 또는 그러므로 그는 집행할 도덕적 의무 또는 법적인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이러한 한 의무가 행위자에 기반한 방식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만약 그가 집행하지 않았다면, 집행자의 동기부여가 또한 나쁘게 된다고 할 가능성을 가정해보자. 해칠 마음이 있는 집행자의 경우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저들은 종종 그를 집행하지 않게 이끌 동기들을 언급하는 것에 실패한다. 만약 집행자가 집행하지 않는다면, 현재 해칠 마음과 함께 또는 심지어는 해칠 마음의 소멸 안에서, 하나의 가장 가능할만한 설명은, 그가 그의 일을 하는 것을 위한 진짜 또는 진정한 고려와, 그것을 포함하는 공헌하는 사회적 역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고유한 해칠 마음에 의해 겁에 질린 채 그가 집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상상해보자. 이것은 또한 한 나쁜 동기, 공공의(또는 일반적인 인간) 선이나 또는 사회를 향한 그의 공헌을 만들기 위해선 불충분한 고려에 의해 동기부여될 것이다 – 내가 이제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의 적극적인 버전을 토론하는 것 안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기에 좋은 수단이 되는 동기.
어쨌든 동기들이 그들이 야기하거나 또는 그들을 표현하는 행위들을 평가하기 위한 기초라는 생각은 특별히 부적합한 결과들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옳은 것을 하는 것과 옳은 근거를 위해 옳은 것을 하는 것 사이의 차이 비슷한 어떤 것을 허용한다. 특별한 점에서, 그것은 우리에게 집행자는 집행할 의무를 가지는데, 만약 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일반적인 과정들 안에서(심장이 갑자기 멈추는 것, 신경의 파괴, 종교적인 전향, 그리고 이같은 것들) 그의 행위를 그르다고 만드는 종류의 것에 관하여 그의 동기, 또는 불충분하거나 불완전한 의무의 탓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만약 그가 집행한다면, 그는 그르게 행위한(행위할)한 것이라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다른 동기부여와 함께 그렇게 하는 것 안에서 옳게 행위해왔다고 또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 쪽 측면에서는, 옳은 것을 위해 한 사람의 의무를 한 것과 그러므로 옳게 행위한 것과, 또한 그른 근거들을 위해서 그의 의무를 한 것과 그러므로 그르게 행동한 것 사이를 구별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것은 옳은 행위와 옳은 근거들을 위해 옳게 행위하는 것 사이의 차이와 매우 가까운데, 그 근거들이 옳지 않을 때 그 행위 자체는 실제로 그르다는 것이 가정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런 생각이 그 자체에서 특별하게 그럴듯하지 않지는 않다는 것을 보아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아는 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에 반대하는 위에서 언급된 불평은 우리가 만들기를 성공해왔던 유형의 꽤 괜찮게 다듬어진 구별을 만드는 이런 관점의 무능력함에 관한 틀린 가정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반대할만하게 그리고 심지어는 도덕성/윤리학을 향한 어떤 이러한 접근에 대해서도 기괴하게 보이는 것으로 더욱 근본적으로 표현할 행위자에 기반함의 전체적인 생각에 대한 다른 반대도 있다. 만약 행위들의 평가가 근본적으로 행위자의 (내적 상태의) 저것으로부터 이끌려 나온다면, 그것은 만약 한 사람이 사람의 옳은 유형이거나 또는 내적 상태들의 옳은 유형을 소유하고 있다면, 한 사람이 실제로 하는 것은, 사람이거나 적어도 그의 행위라면, 아무런 지적인 도덕적 요청들이나 강제들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따라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행위자에 기반함은 윤리학을 향한 아주 자폐적이고 도덕폐기론적인 접근, 즉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삶이 – 다른 것들 가운데서 – 행동이나 행위의 특정한 기준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친숙하고 직관적인 개념을 근본부터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한 함축은 윤리학과 떡적인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어떤 누구의 관점으로부터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이고, 또한 게다가 이러한 한 번의 추론의 연쇄는 내게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성의 전체적인 생각을 거부하게끔 만드는 원인이 되는데, 내가 지금 한다고 믿는 것처럼, 방금 이끌려진 그 함축들이 사실은 행위자에 기반함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기전까지는 그렇다. 한 관점은 행위자에 기반할 수 있으며 또한 여전히 행위들을 옳거나 또는 존경받을만한 것으로 간단하게 다룰 수 없는데, 그들은 한 덕스러운 개인 또는 존경받을만하거나 또는 좋은 내적 상태와 함께인 어떤 누군가에 의해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또는 행위자에 기반한 이론은, 각각의 그리고 모든 행위에 덕스러운 행위자가 수행할만한 능력이 있다고 대우하는 것 속에서, 만약 그가 그 행위를 수행했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좋거나 또는 존경받을만한 것이라고 그녀가 한 것을 간주한다고 말하지 않아야한다.
그러므로 (거칠게) 자비로움이 유일하게 좋은 동기이고 또한 행위들은 그들이 자비로운 동기부여들을 전시하고 표현하는 것을 확장할 때 옳고, 존경받을만하며, 또는 좋다는 아주 간단한 관점을 고려해보자(우리는 또한 만약 그들이 자비로움의 반대를 전시하거나 또는 자비로움 안에서 어떤 불충분함일 때 그 행위들은 그르거나 또는 나쁘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이것을 확장하면 이런 관점은 자비로움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고유하게 존경받을만하거나 또는 도덕적으로 옳다고 간주하는데, 그것은 행위자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존경받을만한 내적인 상태와 함께인 덕스러운 개인은 타협되고 감소된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녀의 행동 또는 행위의 존경받을만함과 선함 없이 (그녀의 힘에 책임이 있는 것들 가운데서) 그/녀가 만족할만한 어떤 행위들을 간단하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자유의지의 양립가능론의 단지 몇몇 합리적인 형식을 가정한다면, 한 자비로운 행위자는 그녀의 자비를 표현하거나 또는 전시하는 데 실패하는 많은 행위들을 선택할 전형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한 사람이 전체적으로 또는 완벽하게 자비롭지 않다면, 한 사람은 아마 그 반대나 또는 그러한 동기 안에서의 결핍을 전시하는 행위를 선택하는 능력이 더 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한 사람이 자비롭고 또한 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한 개인을 본다면, 한 사람은 아마 도울 것이고, 이렇게 하는 것 속에서 그의 자비로움을 전시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돕기를 거부하는 그의 힘 안에서도 추정가능한데, 그리고 만약 한 사람이 그렇게 했다면, 그의 행위들은 자비로움을 전시한 것이 아니게 되며 또한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행위를 할 수 있었거나 했을 때보다 덜 존경받을만하게 된다고 추정가능하다. 물론, 진정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자비로운 사람은 돕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녀가 그렇게 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거부와 그 행위들 그것이 자비로움을 모든 도덕적 평가의 시금석으로 만드는 간략화된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에 따라 존경받을만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래서 행위자에 기반함이 한 사람이 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문제삼을 수 없다거나 또는 그것이 만약 한 사람이 충분히 좋은 동기를 가졌을 경우 문제삼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의 행위들 안에서 자비로움을 표현하고 전시하는 사람은, 행위자에 기반한 방식 안에서, 자비로움을 표현하거나 또는 전시하지 못하게 되었을 (아마도 삼가는 것을 포함한) 행위들, 즉 다시 말해, 그녀가 아마도 수행했거나 수행했을 수 있는 다른 행위들에 비해 윤리적으로 우선하는 것으로서 간주될 행위들을 수행한다. 행위들은 그러므로 그저 거칠게 소개된 유형의 행위자에 기반한 이론에서는 존경받을만하다거나 덕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데, 단지 그들이 사실 존경받을만하거나 또는 존경받을만한 동기부여를 소유해한 누군가에 의해 행해졌거나 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 만약 그들이, 존경받을만한 것 또는 덕스러운 것으로서 적합해지기 위해서, 발생했다면, 그들은 전시해야하고, 표현해야하고, 또는 이러한 동기부여를 진전시키거나 또는 그들이 전시했었을 등등의 이러한 동기부여가 되어야 한다.
같은 방식에 의해서, 행위들은 단지 그들이 나쁘거나 불충분한 동기를 전시하는 경우에만 그르게 또는 책임에 반대되게 간주될 것이며, 또한 이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이 ‘“해야 한다”는 “할 수 있다”를 포함한다’는 것과 전체적으로 들어맞는다는 한 가지를 의미한다. 양립가능론이 주어지면, 심지어 해할 마음이 있는 사람도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의 어떤 특별한 행위로부터 삼가는 힘을 가지고, 또한 삼가는 것이 전시되거나 그의 해할 마음이 있음으로부터 올 아무런 방식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도덕적으로 허용할만하다. 그러나 행위자에 기반함이 행위들은 만약 그들이 나쁜 동기들로부터 전시하고 진행한다면 그른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행위자에 기반한 이론들이 불가피하게 인간의 행위를 아무런 도덕적인 기준들이나 요청들에 종속되지 않는 것으로서 다룬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참은 아니다.
그러나 심지어 이런 은유는 반드시 경고와 함께 따라야만 하는데, 그것은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에는 세계와 도덕적 행위자 사이를 딱 들어맞게 하는 방향이 전부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 행위자로부터 세계로, 그리고 이것은 또한 어떻게 윤리학의 어떤 이러한 형식도 그럴듯하고 적절할 수 있는지 한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세계로부터의 자폐와 고립의 한 종류를 제안한다. 그러나, 행위자에 기반함은 사실 세계에 관한 사실들로부터의 고립이나 또는 무관함을 포함하지 않으며, 한 사람은 만약 한 사람이 얼마나 이러한 이론들이 동기부여의 종류들을 근본적으로 존경받을만한 불변하는 바람으로 명시하는지 그리고 세계를 그 입장 안으로 집어넣을 필요가 있는지를 고려한다면 이것을 안다. 예를 들어,만약 한 사람이 진짜로 자비롭다면, 한 사람은 그저 그가 본 첫 번째 사람에게 단지 좋은 것들을 던지거나 그들을 주지 않을 것이다. 자비로움은 한 사람이 명백하게 가난하고 그들이 가난하다는 확장한 것에 관해 돌보지 않는다면 완전히 충족된 의미 안에서의 진짜 자비로움이 아니며, 또한 이러한 돌봄은, 또한, 표준적으로 한 사람의 자비로움이 진짜로 유용할 수 있다는, 적절한 사실들을 아는 것에 대한 요구와 노력을 들이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심지어 만약 보편적인 자비로움이 도덕적인 가치의 가장 밑층이라면, 이런 한 동기로부터 행위하는 어떤 사람은 반드시 그/녀를 둘러싼 세계에 열려있어야만 하고, 접점을 찾아야하며, 또한 영향을 받아야만 한다 – 그/녀의 결론들은 우리의 대부분이 도덕적으로 적절한 사실들이 되게 따르는 것으로부터 오는 근사한 인과적/인식론적 고립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바로 위에서 언급된 걱정들은 실제로는 아무런 토대가 없다.
그것이 처음으로 행위자에 기반함을 반대해 공격하는 것을 부추기는 자폐증과 도덕폐기론의 부담을 가라앉히는 동안에, 나는 이제 – 아주 짧게 말해, 난 걱정스럽다 – 어떻게 행위자에 기반한 접근들이 윤리학의 현재 기후 안에서 가장 발전될 수 있는지를 고려해보려한다. 행위자에 기반한 접근법들의 다소 드문 역사를 바라보자면, 그것은 나에게 기본적으로 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행위자에 기반함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는 두 가지 가능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들 가운데 하나를 나는 ‘차갑다’고 부르고, 다른 것은 ‘따뜻하다’. 나는 플라톤이 개인적인 행위의 도덕성을 건강과 영혼의 덕에 연관시켰다는 것을 처음에 언급했는데, 그러나 『국가』(4권) 안에서 플라톤은 또한 모든 좋은 인간 행위의 내적인 시금석이 되는 것을 그가 따르는 것을 전달하는 강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리고 나는 건강과, 특히 강함에 관한 생각들은, 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의 한 종류를 위해 탁월한 기초로서 제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도적인 고려의 어떤 종류도 건강과 강함과 같은 개념으로부터 이끌려질 수 있는지에 대해 놀라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이런 첫 번째 종류의 행위자에 기반한 접근법들은 ‘차가운’ 것으로서 편리하게 분류될 수 있다.
반대로, 도덕성에 대한 제임스 마티뉴의 행위자에 기반한 개념은 동정심을 세속적인 동기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다루고, 또한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을 보여주는 것에 가장 가까이 오게 되는 철학자들 중 몇몇(흄, 허치슨, 그리고 요즘은 호르헤 가르시아)은 동정심, 또는 어느 정도 더욱 일반적인 의미를 사용하면, 동기로서의 자비로움에 대해 특별한 강조를 위치시킨다. 나는 뒤의 개념이 우리의 관심을 받을 만하고, 또한 이런 관점의 두 번째 종류가 인도적인 고려를 분명하게 그것의 탁월함에 대한 토대 안에서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따뜻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건강함과 강함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는 내가 알고 있는 자비로움에 대한 어떤 논의보다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나는 강함에 대한 차가운 생각에 정착된 것으로서 행위자에 기반함을 고려하는 것을 처음으로 해보겔 것이다. 그러나 건강함과 강함에 대한 은유들/이미지들은 또한 스토아학파, 스피노자, 그리고 니체 안에서도 또한 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후자의 그 누구도 윤리학에 대한 한 행위자에 기반한 고려의 완전하게 깔끔한 사례를 제공해주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여전히, 이런 관점들은 플라톤을 홀리고 또한 플라톤에게 영향을 준 같은 개념 주위에서 영역을 형성하고, 또한 그들은 플라톤의 덕윤리학적 접근의 근대적 버전으로,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인간 행위의 도덕성에 대한 이해하기의 유일한 토대로서, 그것의 형식의 다양함 안에서, 내적인 강함에 대해 고려하는 현명한 행위자에 기반한 이론으로 추정되는 것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내적인 강함이라는 도덕성
플라톤에게, 좋은 행위는 영혼의 강함(또는 건강함 등)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의 결과주의적으로 보이는 생각이라는 방식으로 이해되지만, 그러나 내게 그것은 내적인 강함을 표현하거나 전시하는 행위에 대한 생각으로 탐색하는 것을 더욱 희망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며, 우리가 그것을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워보이는 것처럼, 내적인 강함으롯의 그 도덕성은 그 기초 위에서 (형상의 가정된 가치를 보여주는 어떤 것도 만들지 않고) 진행될 것이다.
이제 내면적으로 강하게 존재함에 관하여 직관적으로 존경받을만한 어떤 것, 어떤 다른 관념들에 보여주기 또는 다른 관념들로부터 방어하기가 필요하지 않은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은, 아마도 내적인 특징과 내가 내적인 강함에 대해 말하는 것 속에 생각하는 동기의 여러 종류들에 관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존재함에 의해 더욱 그럴듯하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럴듯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어떤 동시대적인 관련있고 총괄적인 도덕성은 내적인 강함에 관한 생각 안에서 단독으로 기초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들을 속이지 않는 것과 함께, 그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것과 함께, 내적인 강함이 사람에 속하는 종류의 무엇이 되기와 함께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물들의 이런 유형들에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도덕성의 한 일반적인 기초로서 기능할 수 없다.
같은 문제, 같은 질문이 『국가』 안에서 도덕성에 대한 플라톤의 방어와 함께인 연결 속에서 떠오른다. 『국가』는 왜 속이지 않고, 훔치지 않는 등에 대한 합의감 속에서 모든이가 도덕적이거나 정의로워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의 문제와 함께 시작하는데, 그러나 플라톤은 영혼의 건강함 또는 강함의 방식으로 정의를 규정하는 것으로 마치고, 또한 왜 이러한 영혼이 불의하거나 또는 반도덕적인 행위들로서 보통 고려되는 것들로부터 삼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전혀 적절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심지어 선의 형상에 대한 요구는 단지 이런 어려움들과의 연결 속에서 속임수의 형식으로만 보일 뿐인데, 심지어 플라톤이 건강한 영혼은 반드시 선에 의해 지도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거짓말하고, 훔치는 것들과 같은 것들로부터 떨어지게 향하게 하는 이유를 아는 선에 관하여 충분히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문제가 내적인 강함의 개념에 기초적으로 요구하는 어떠한 차가운 행위자에 기반한 이론에서도 발생하지 않는가? 그것은 확실히 그렇게 나타나는데, 그러나 아마도 그 나타남은 강함의 특정한 종류와 지금까지 크게 봐서 주목받지 않아왔던 다르게 고려하는 도덕성 사이의 관계들을 가리키는 것에 의해 사라진다. 자기신뢰의 형식 속에서 강함이 다른이들의 잘 사는 것을 위한 고려를 어떻게 일으키는지 고려하는 것에 의해 시작해보도록 하자.
많은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들의 자기신뢰를 질투하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들을 하는 하려고 그들 또는 다른이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계속하기보다는 그들처럼 되려고 한다. 게다가, 그 자신을 위해서 무엇들을 하는 것을 배우고 또한 가끔 세계 속에서 그의 고유한 방식을 만들려는 노력은 우리가 아주 잘 생각하는 내적인 자기충족의 한 종류를 표현한다. 우리가 기생하는 것이라고 부를만한, 반대적인 욕망들은,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기에는, 원래부터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실질적인 정도 안에서 그의 고유한 것 위에서 새롭게 나아가려는 것보다는 다른 이들 위에서 자기의 의지에 따라 의존적으로 남아있는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애처롭거나 약해보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또한 약한 의존적인 상태에 대한 비난이 비난당하는 이의 능력보다는 그의 동기부여에 대해 더욱 의존한다는 것에 주목하자. 그의 가족 둥지를 벗어날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려고 의지하지 않는 한 사람은 의존적이고 약하며 또한 그의 동기부여 때문에 기생충이라고 고려된다. 기생하는 것에 대한 비난은 노력은 하지만 전체적으로 자신을 지지하게 되는 데에 또는 비슷한 위치 안에서 어머니를 돌보는 데 실패하는 장애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어쨌든 내적인 강함에 모든 것을 기초하는 한 도덕성은 동기부여적인(성취하는 것에 반대해서) 자기신뢰는 내적인 강함과 자기충족성을 설명하며 또한 그러므로 고유하게 존경받을만한데, 동기부여적인 기생하는 것이 의존성의 형식이며 또한 원래부터 약하고 당치도 않은 것이라는 점에 반대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한 동기를 전시하는 행위는 옳고 심지어 좋은데, 후자를 전시하는 그런 것들이 그르다는 것에 반대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강함과 자기충족성에 관한 우리의 탁월함에 대한 직관들에 이러한 방식으로 요청하면서 또한 다른 더한 논증들을 다시 밟지 않고, 강함으로서으 도덕성은 그러므로 적어도 행위자에 기반함의 사례에 훨씬 더 된다. 독립적이기고 기생충이 안되길 원하는 것의 존경할만함은 어떠한 누구의 행복을 위한 그것의 결과들의 한 기능이 아니지만, 그러나 여기서 보인 관점에 따르면, 어떠한 결과들로부터 분리되어 존경받을만하게 고려되고 그럴 수 있으며, 또한 나는 이런 생각이 우리의 대부분 안에서 공명하는 주의를 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우리는 그것이 좋은 결과들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사람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자기신뢰가 되는 것을 원하거나 성공하는 경우에 그렇다 – 그들은 스스로를 돕고, 또한, 우리가 짧게 볼 것처럼, 그들은 다른 사람 또한 도우려는 경향이 되게 될 것이다(나는 총체적인, 신이 좋아할만한 자기 신뢰의 시도가 우리의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욕구들과 함께인 존재들을 위한 어떠한 느낌이라도 만들어낼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존적인 약함에 대한 우리의 얕은 의견은, 결과들에 관한 가정들 위에서 기초로 되거나, 유일하게 기초로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한 사람 스스로에 관해 또는 우주에 관해 불쾌한 사실들을 마주하는 것에 집중하는 그것을 용기라고 생각해보자. 한 사람이 암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자기기만은 아마 한 사람의 삶의 끝을 덜 무섭게 만들고 또한 심지어 한 사람을 저렇게 돌보는 것들 위한 무엇들을 더 쉽게 만든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사실들을 마주하는 것은 더욱 더 존경할만하게 보인다. 그리고 직관적인 이러한 용기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하는 선이기 때문에 존경받지 않고,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용기를 찾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원래부터 존경할만하고 또한 아무런 더한 방어나 또는 정당화에 대한 필요가 없는 속에서 그것을 설명하는 내적이고 개인적인 강함을 찾기 때문이다. 모든 논증들, 모든 이론들은 직관적이거나 또는 납득시킬만한 가정들 안인 어떤 곳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고, 또한 이런 경우엔, 그러므로, 내적인 강함의 존경받을만함은 행위자에 기반함에게 적절한 종류의 밑바닥층 또는 기본적인 탁월함에 대한 가정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같은 방식으로, 쓸모있게 되려고 하고 다른이에게 총체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려는 욕망 – 우리가 동기부여적인(성취되는 것에 반대해서) 자기신뢰 또는 자기충족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 은 우리에게 어떠한 (더한) 논증 또는 정당화에 대해 독립적으로 우리에게 존경받을만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는 스스로 무엇들을 하고 또한 그의 고유한 돈을 벌려는 꾸준하지만 크게 보아서는 성공적이지 않은 노력을 만들어내는 장애인들을 존경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한 경우 안에서 이런 노력들은 아마도 그 장애인 개인을 좌절시키고 짜증나게 하고, 또한 그는 아마도 또한 그를 위해 행해지는 무엇들을 그가 간단하게 허락하는 경우보다 덜 행복하고 덜 만족스러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때문에, 우리의 동기부여적인 자기신뢰는 또한 다른이들로부터 그를 돌보는 것의 부담을 끌어올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다른이들로부터 무엇을 취하는 것에 아무런 불안함이 없는 어느 누군가와 비교한 것으로서 이러한 한 사람을 위한 우리의 존경은 그러므로 결과주의적인 고려 위에서 기초를 둔 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더, 우리는 고유하고 기본적으로 존경받을만한 어떤 것으로서의, 사실들에 직면하는 강함을 우리가 고려하느 같은 방식 안에서 강함과 자기충족성의 이러한 형식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래서 우리의 이 직전 질문은 단지 우리의 보통 다른 이를 고려하는 도덕성에 대해서 내적인 강함의 고려사항들 속에 얼마나 기초될 수 있는지이다.
기생충에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자기신뢰를 위한 우리의 존경은, 우선 첫째로, 다른 사람들의 잘 사는 것을 위해 헌신되는 활동에 대한 좋은 소재를 밑그림을 그리고 정당화하는 데 종종 쓰여왔다. 한 아이가 그의 부모에 의지하는 방식 안에서 사회와 다른이에 수동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기생의 한 사례로서 간주되고, 또한 그르고 또한 그 자체로 말도 안되는데, 우리가 한 측면에서는 복지적인 간섭에 관하여, 또는 다른 측면에서, 부유한 자들의 놀고 먹는 생활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든 이야기하지 않든 그렇다; 그리고 기생에 반대하는 한 사람은 그럴듯하게 유용해지길 그리고 사회에 공헌을 만들길 바랄 것인데, 다른이들에 의해서 그를 위해 행해져왔던 모든 것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그렇다.
게다가, 이런 욕망이 이기주의적이거나 자기이해적이지 않다는 것, 심지어 만약 한 사람의 자기이해가 다른 이에 의해서 지지되어왔다고 가정해도 그렇다는 것에 주목해보자. 여기에서 한 사람의 동기는 다른 이들이 아마도 미래에 한 사람을 더욱 도와주게 될 것이라는 목적으로 공헌을 만드는 것 가운데에서 수단적인 하나가 아니고, 한 사람을 돕는 것이 도와준 것은 이미 받았고 또한 균형을 맞추고 되갚으려는 숨은 동기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되갚으려하고 또한 사회와 특정한 다른이들에게 긍정적인 공헌을 만들려는 것을 요청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른 이에게 해를 낓이는 것과 다른이들의 잘사는 것에 공헌하는 것에 실패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나 자기신뢰 또는 비기생주의의 명령법은 또한, 약속을 지키고, 속이는 사람이 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등의 우리의 의무와 함께인, 우리의 평범한 도덕적 사고의 의무론적인 측면과 연결되어있다. 그들의 약속을 지키는 다른 이들 위에 놓여있고 또한 그들에게 한 다른이들의 약속지키기로부터 가치를 가져왔던 사람들에게는, 만약 그들이 그들의 약속을 지키는 것을 거절했다면 약속하기의 사회적 실천 위에서 기생하는 것처럼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말해질 필요가 있지만, 주어진 공간의 제한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아직 언급하지 않아왔던 내적인 강함의 몇몇 형식들을 고려하는 것으로 옮겨가야 한다.
우리는 자기신뢰의 감각 속에서 이해되는 자기충족성에 대해 말해왔지만, 그러나 이러한 자기충족성과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는 강함은 우리가 또한 잘 생각하는 것들 – 다시 말해, 그들의 욕구 또는 욕망 속에서 절제하는 이들에 의해서 보여지는 자기충족성 – 을 향한 고려 안에서의 자기충족성의 한 종류로부터 구별된다. 우리들 대부분이 욕망하는 많은 것들을 요망하지 않거나 또는 강하게 욕망하지 않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들에도 만족하는 사람들은 덜 가난해보이고, 덜 불쌍해보이고, 다른 이들이 그런 것보다 무엇들에 대해 덜 의존적이게 보이고, 또한 빈곤함과 의존성은 (내면이) 약해지게 되는 것의 방식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갈망할 수 있는 것들에서의 한 특정한 독립 또는 그것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의 자기충족성은 그 자체로 존경받을만한 내적인 강함의 또 다른 한 형식을 표현한다.
재미있게도, 자기 충족적인 강함의 이 새로운 형식은 우리가 이타주의적 행동의 몇몇 더 심한 종류들을 정당화하도록 도와줄 수 있고, 반어적이지만 충분하게, 스스로가 공언한 이기주의자인 니체는 어떻게 이것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자기충족성의 한 이상인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욕망의 절제의 종류는 다른 이의 선에 특별하게 정향되지 않는데, 그런, 니체가 『선악의 저편』(제 260절), 『즐거운 학문』(제 55절), 그리고 많은 다른 곳들 안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 사람은 또한 무엇들에 대해서 충분한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즉 과다하려는, 한 자기충족적인 느낌에서 벗어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무엇들을 주는 것으로 옮겨지게 될 수도 있다. 니체는 ‘고귀한’ 주기의 이런 종류는 연민 또는 한 의무감에 기초한 주기보다 윤리적으로 우선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더한 판단으로부터 아주 떨어져서, 니체가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내적인 강함에 대한 우리의 이상의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더 나은 방식을 가리켰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다른이들에게 무엇들을 주기를 꺼리는 사람은 얼마나 그가 가난해보이는지, 애처로워보이는지, 그가 스스로를 위해 지키는 것들에 심하게 의존적인지를 문제삼지 않으며, 또한 이 세계의 좋은 것들에 관한 자기충족성의 부족함으로서 비판받을 수 있다.
자기충족성의 이러한 종류에 기초한 관대함이 주는 사람을 그/녀가 가진 좋은 것들과 함께 진정으로 만족된다는 점을 가정함에도, 그것이 이기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보자.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자신의 고유한 잘사는 것의 느낌에서 벗어나서 그 잘사는 것을 자극할 의도 또는 (필연적으로) 이전의 도움을 위해 사람들에게 갚으려는 의도를 하지 않고 관대하게 주고, 또한 그것은 그러므로 자기신뢰를 벗어나서 발전한 종류에 덧붙여지는 이타주의의 한 형식으로서 간주된다. 이러한 자기충족적인 관대함은 사회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도덕적 비판을 위한 시금석으로서 보다 널리 쓰여질 수 있지만, 그러나, 다시 한 번, 더 자세하게 들어갈 공간이 여기에는 없다.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은 내적인 강함의 차가운 개념은 이타주의와 참여에 대해 존경하는 것에 대한 여러 형식들의 한 방어를 허락하는 측면을 가진다는 것이다.
사실, 내적인 강함으로서의 도덕성 안에서 행동하는 역할과 함께인 모두, 즉 내적인 강함의 관념에 네 가지 기본적인 측면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세 개를 언급했다 : 사실과, 내가 보태려면, 위험함을 마주하는 용기; 자기충족적인 자기신뢰; 그리고 자기충족적인 절제와 관대함. 이제 나는 내적인 강함의 넷째 종류를 언급하려고 한다: 목적들과 의도들을 오랜 시간동안 지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이 어떤 의도 위에서 행동한다고 가정되는 그 시간에 (약하게 의지하는 존재가 아닌) 한 사람의 더 나은 판단에 따르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의지의 강함. 그럼에도, 나는 이 지점에서 강함으로서의 도덕성의 자세한 사항들 안으로 어떤 더 나아가는 것도 제안하지 않는다. 분명히, 만약 우리가 내적인 강함의 네 가지 다른 종류들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에 관하여 그리고 윤리적인 형상에 대해 직관적이고 철저한 고려를 산출하려고 그들이 얼마나 상호작용하는지에 관하여 어떤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에서 행위자에 기반한 한 덕윤리학을 발전시킬 더욱 기대되는 방법들이 아마도 있다고 나를 생각하게 해왔던 이런 전체적인 접근과 함께인 일반적인 문제를 가리키고 싶다.
아주 간결하게, 그 문제는 강함으로서의 도덕성이 자비로움, 동정심, 친절함,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을 단지 파생적으로 존경할만하고 또한 도덕적으로 선한 것으로서 다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적인 도덕의식에는 아주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동정심은 언제나 그것의 방식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때때로 정의에 대한 고려들에 반드시 양보해야만하며, 또한 행위자의 고유한 욕들에 어떤 주의도 주지 않는 한 동정심이나 관대함은 자기존중의 부족이게, 피학적이게, 도덕적으로 매력적이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심지어 만약 동정심이 다른 가치들에 의해 제한되고 적합해져야만 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우리와 함께 아주 중요한 기본적인 도덕적 가치로서 간주된다. 그리고 그것은 내적인 강함 또는 어떤 다른 다른 가치의 (차가운) 상상의 방식으로 정당화가 필요한 것으로서 그들을 고려하는 (따뜻한) 동정심, 자비로움, 그리고 우정은 우리가 대체시킨 탁월함에 대한 가치의 왜곡으로 보인다. (이러한 한 비판은 분명히 또한 자비로움에 대한 칸트의 생각을 건드린다.) 그러므로 나는 이 지점에서 확실히 이 문제에 면역된 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의 특정한 따뜻한 형식들을 소개하고 토론할 것을 제안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모든 도덕성을 탁월한 가치, 도덕적으로 존경받을만함, 자비로움의 하나 또는 다른 종류 위에서 모든 도덕성을 기초시키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마티뉴의 윤리적 이론의 유형들은 윤리학의 전체 역사 안에서 찾아낼 수 있는 행위자에 기반한 것의 가장 명료한 사례이며, 또한 나는 동정심과 자비로움에 기초한 덕윤리학의 장점들은 마티뉴의 이론의 구조 그리고 헨리 시즈윅이 그 이론에 대해 만든 비판들을 처음으로 고려함으로써 가장 좋게 가져다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
마티뉴는 가장 낮은 것에서부터 가장 높은 것까지 인간의 동기들에 관해 순위를 부여하엿고, 모든 도덕적 결정들은 두 가지의 저런 동기들 사이의 갈등을 포함한다고 그가 하는 것처럼 가정하여, 옳은 행위는 두 동기들의 더 높은 것으로부터인 행위이고, 나쁜 행위는 둘의 더 낮은 것으로부터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동기들에 관한 마티뉴의 위계질서는 (거칠게는) 다음과 같이 올라간다: 복수심; 감각적인 쾌락에 관한 사랑; 이익에 관한 사랑; 원한/공포/혐오; 야심/권력에 관한 사랑; 동정심;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신을 위한 숭배.
시즈윅은, 마티뉴가 순위를 매긴 동기들 가운데 하나 또른 다른 하나로부터인 행위의 선호가능성에 여건들과 지위들이 아마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이 위계질서의 경직성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마티뉴와 반대로 동정심보다는 오히려 원한으로부터 행위하는 것이 정의의 이유들을 위해 더 나은 때, 또한 감각적인 쾌락에 관한 사랑은 아마도 종종 사랑 또는 권력 또는 이익을 넘어서 우세(특별히 만약 후자가 주어진 넓은 무대에 이미 존재한다면)한 때가 있다. 시즈윅은 낮은 동기들 사이의 갈등은 가장 높게 매겨진 동기, 또는 대신에, 정의, 신중함, 또는 보편적인 자비로움 – 이들 중 어떤 것도 마티뉴의 위계질서의 더욱 특정한 동기들 사이에서 구성되지 않는다 – 과 같은 몇몇 최고의 조정된 일반적인 동기들에 나타냄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마티뉴의 낮은 동기들의 모든 갈등들은 신을 위한 숭배를 향한 참고 또는 자비로움과 같은 몇몇 조정되거나 ‘주요한’ 동기를 향한 참고에 의해 조정되어야만 한다.(이것은 만약 우리가 마티뉴보다 더 그럴듯하고 덜 까다로운 위계질서를 고안할 수 있다면 필요하지 않지만, 아무도 그것을 하는 것의 방식을 제시하지 못해왔다.)
그 다음 시즈윅은 한 더한(실수인) 가정을 만드는 데로 나아간다. 그는 조정된 한 동기를 위해서, 그것은 반드시 저 동기의 궁극적인 목적들 또는 목표들을 향한 관계 안에서 조정되어야만 한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이것은, 만약 우리가 세속적인 동기들에 우리 스스로를 제한하고, 동정심은 마티뉴의 순위 안에서 가장 높은 세속적인 동기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다루고, 또한 결과적으로 최고로 조정된 것으로서 보편적인 자비로움을 고른다면, 행위들과 동기들은 보편적인 자비로움의 목표라는 방식 안에서 판단될 것이다 – 말하자면, 인간적인 또는 감각적인 행복. 어쩐 일인지, 우리는 행위에 기반한 시각의 더욱 질서 있고 통일된 형식이 아니라, 행위공리주의에서 끝났다. 그리고 이것은 시즈윅이 보편적인 자비로움이 목표로 삼는 특정한 목표들을 그런 행위들이 달성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또는 달성하는 경향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방식보다는 오히려 두 동기들이 보편적인 자비로움의 동기에 얼마나 잘 접근하거나 구현하는지의 방식으로 두 갈등하는 동기들 가운데 하나로부터인 행위들을 판단하는 한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의 가능성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한 친구를 그가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그 대신 즐거운 수영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안다고 가정해보자. 수영에 의해서 그 스스로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좋은 것은 그의 친구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보다는 덜한 큰 이지만, 그는 또한 만약 그가 수영을 한다면, 특정한 제3자들이 어쨌든 간접적으로는 이득을 얻을 것이고 또한 그 이득은 그의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위해 그가 내어줄 수 있는 어떤것에 비해서도 더 클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모든 경우에 제3자들에 관해 돌보아줄 수는 없고, 또한 그가 그의 친구를 신경쓴다고 하더라도, 그는 수영을 하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둘 것이다. 이 경우에, 행위공리주의의 실재주의와 가능주의 버전 모두 그의 행위를 그 환경 안에서 그에게 도덕적으로 가장 쓸모 있는 것으로서 간주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다른 대안보다도 그의 행복을 위한 더 나은 결과를 가지며, 또한 그것의 기대 가능한 유용함은 그의 친구를 도와주는 것에 관한 대안보다 더 큰데, 그 사람은, 수영에 의해, 직접적이고 간접적으로 그가 더 나은 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행위가 좋은 결과들을 가진다는 것을 기대하는 것 또는 아는 것과 저런 결과들을 만들려고 동기가 부여된다는 것 사이에는 한 차이가 있으며, 또한 만약 우리가 그들의 동기들이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접근하거나 구현하는지에 얼마나 가까운가에 의한 행위자에 기반한 방식 안에서 행위들을 판단한다면, 그가 하려는 이기적인 이유를 위해서 수영을 하러 가는 것은 그의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도우려고 찾고있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덜 좋을 것이며, 또한 이것은 행위공리주의의 표준적인 형식들이 이런 상황에서 관해서 말해야 하는 것에 관해 확실히 반대이다.
그러므로, 동정심이나 자비로움의 개념을 사용하여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들을 지배하려는 의도라면, 마티뉴와 같은 복잡한 관점들을 기반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공리주의자들의 방식 안에서 저런 목적들의 실제적이거나 가능한 사건들을 향한 참고에 의해서보다는 오히려 통일되고 일원론적인 방식 안에서 특정한 목적들을 찾는 동기로서의 보편적인 자비로움을 향한 참고에 의해 모든 것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공리주의에 관한 행위자에 기반한 유사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또한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이런 구별되는 도덕성은 – 마치 공리주의자들이 밖에서부터 안으로 가는 것처럼 – 우리가 아직 언급하지 않아온 몇몇의 인상적인 더 나아간 방식들 안에서 공리주의와 대조적이다.
공리주의자들과 결과주의자들은 동기들과 의도들을 행위들로서 같은 방식으로 평가한다 – 말하자면, 그들의 결과에 관한 방식으로(나는 여기에서 그것의 고유한 어려움들이 되는 것에 집중하는 것 때문에 규칙공리주의는 무시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동기가 보통은 도덕적으로 좋게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이 되는 그런 사람, 즉 한 병원의 건설을 위해서 돈을 주지만 단지 한 건물에서 그의 이름을 보기를 바라는 욕망 또는 정치적인 업적을 시작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관대함을 위한 평가를 가지려는 욕망에 의해서만 동기가 부여된 한 사람을 생각해보자. 공리주의자들과 결과주의자들은 전형적으로 그의 특별한 동기부여, 즉 저런 상황들 속에서 그의 동기부여는 도덕적으로 선한데, 그것이 동기들을 그들이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얼마나 잘 접근하는가에 관한 방식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 이런 동기부여를 도덕적인 선함보다 덜한 것으로서 다룰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서 보면 그렇다(심지어 만약 아주 나쁘지는 않다면). 물론, 우리가 한 사람이 하고 있는 이런 것들에 관해 연구할 때, 그리고 우리가 가정해본 그 사람의 이기적인 동기부여에 관해서는, 우리는 아마 그것을 환영하고 또한 그 사람이 문제의 상황에서 그들의 좋은 결과들(그리고 우리의 고유한 자비로움)이 주어진 그녀가 가진 이기적인 동기들을 그녀가 가졌다는 것을 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은 상황들과 관련해서 우리가 환영하고 그것이 일어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동기들과 우리가 도덕적으로 좋은 것으로 진지하게 존경하는 동기들 사이를 구별하며, 또한 결과주의는 동기들을 오로지 그들의 결과들의 방식으로만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의해 이러한 그럴듯한 구별의 부인과 붕괴로 이끈다. 반대로,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확실히 그것이 동기들의 도덕적인 평가는 그들의 결과들보다는 동기들로서 그들의 본래적인 성격에 의존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 구분을 허락하고 또한 동기들을 도덕적으로 더 좋게 또느 더 나쁘게 만드는 것에 관한 한 직관적인 개념정의에 더 가깝게 다가온다.
공리주의의 한 행위자에 기반한 유사함처럼,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하지만 최근에 공리주의와 직접 연결된 많은 비판들에 노출되어있다 – 그들 가운데는, 이런 관점들이 너무 큰 자기희생을 요구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문제는 아마도 공리주의와 결과주의가 과잉요구에 관한 비판을 다루려고 시도해왔던 방식과 유비하는 것으로서 다룰 수 있다 – 말하자면, 철저하게 그것에 반대해서 논증하는 것에 의하거나 또는 옳은 행위에 관한 그들의 원리(들)의 한 보정을 통해 그것을 조정하는 것에 의하거나 둘 중 하나. (공리주의적인) 결과주의의 한 만족스러운 버전은 옳은 행위는 단지 한 사람이 충분히 좋게 하는 것만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그러므로, 다양한 상황들 안에서 한 전체로서 고려된 인류를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게 좋은가에 관한 몇몇 행위자에 중립적인 개념정의를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에 관한 한 만족스러운 버전은 (우리가 이미 저 관점을 언급한 방식 안에서 이미 표시된 방식 안에서) 행위들은 그들이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충분히 가까운 (기초가 되는 도덕적인 특성과 함께인) 한 동기로부터 왔다면 옳다 – 가장 높은 동기, 즉 보편적인 자비로움을 구현하는 행위들만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것보다는. 그의 시간의 대부분을 헌신하는 어떤 한 사람, 말하자면, 소비자들의 권리 또는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아마 그러므로 옳게 행위하고 사는 것으로 간주할 것인데, 심지어 그 사람이 인류의 복지와 함께 보편적으로 고려되지 않더라도 또는 때때로 단순히 스스로 즐거우려는 것에 선호되지 않더라도 그렇다. 따라서 우리에게 과잉요구에 관한 비판과 만나는 것을 허락해주는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에 관한 버전들이 있는데, 심지어 우리가 행위할 때 우리가 언제나 도덕적으로 가장 좋은 동기들 또는 도덕적인 특성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관점의 버전들에 맞서는 힘을 저런 비판이 가진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몇몇 형식들은 인간의 잘 사는 상태에 관해 그리고 특별하게는 고통을 뛰어넘는 쾌락의 균형의 요소로서 모든 웰빙을 다루는 것을 위한 한 너무나도 좁은 개념정의를 가지는 것 때문에 비판된다. 이런 비판은 결과주의의 (특정한) 다원적인 형식을 주장하지도, 그리고 충분히 흥미롭게도 그것을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에 적용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후자는 인간의 잘 사는 상태에 관한 어떤 특별한 개념정의도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우리에게 그 사람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 없이 인간의 잘 사는 상태를 위한 한 사람의 고려와 동정심을 존경하는 것 또는 인간의 잘 사는 상태를 구성하는 것에 관한 한 확고한 관점을 가진 우리 스스로를 존경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완전히 반긴다.
마지막으로, 공리주의는 의무론의 특정한 측면들을 고려하는 데 무능력하다는 비판을 받아왔고, 그리고 이런 비판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또한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으로 확장된다. 엄격한 의무론은 우리에게, 어떤 위협하는 제3자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부터 집단의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당사자를 포함해서 집단의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쁘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칸트주의 윤리학이 실로 우리가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삼각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평범한 생각이 실제로 이러한 요구들을 주장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버나드 윌리엄스를 예로 들면, 그는 나머지를 구하려고 하나를 죽일까 말까라는 의문은 공리주의가 허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는 공리주의자들은 대개 이런 한 경우 안에서 할 것에 관해 옳은 대답을 줄 것이라는 것 또한 인정하였다. 게다가, 자비로움이 전체적으로 사람들을 위해 한 사람에게 고려된 좋은 것 또는 가장 좋은 것을 하려는 욕망뿐만 아니라 이들 중에 어떤 누구도 해롭거나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는 욕망 또한 포함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에 왜 우리가 무서워지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데, 심지어 결국에 저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해야한다고 그것이 주장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결고주의와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 양쪽이 모두 좋은 많은 친숙한 비판들에 노출되어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 비판들을 향해 대답할 방법들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게다가, 그들은 도덕성을 향한 많은 다른 접근들을 뛰어넘는 체계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의 상대적인 체계성 또는 통일된 구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제안한 것처럼,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그것의 더욱 친숙한 공리주의/결과주의적인 유사함을 뛰어넘는 직관적인 이점들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내가 아는 한 이전에 분명하게 언급되거나 방어되지 않아왔던 시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양한 방식들 안에서 공리주의와 결과주의보다 더욱 상식적이고 그럴듯하며, 또한 동시에 자비로움과 보편성의 관념에 관한 그것의 신뢰는 그것을 후자의 관점들의 방어자들에게 매력적이게 만들어야만 하며 또한 그들이 스스로에게 그들의 고유한 교의들에 관한 한 행위자에 기반한 내면적인 버전을 수용하는 것이 더 좋게 되지 않는 것인지 묻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만약 결과주의와 공리주의가 동시대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나타난다면,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기반한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성 또한 그렇다.
돌봄으로서의 도덕성
그러나, 우리는 아직 행위자에 기반함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다 논하지 않았고, 또한 이 지점에서 나는 우리가 한 행위자에 기반한 덕 윤리학 안에서 자비로움에 관한 생각을 활용하는 한 최종적인 방식을 고려해보았으면 한다. 몇몇 교육자들과 철학자들은 요즘 돌봄의 한 윤리학 또는 도덕성에 관한 생각을 탐색하고 발전시키고 있으며, 또한 나는 이제 이 생각을 따뜻한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의 한 새로운 종류에 관한 방향 안에서 진전시키고 명확하게 하고자 한다.
편파적이고 또한 자기중심적인 자비로움에 관한, 즉 다른 이를 위해서보다 몇몇을 위해서 더 돌보는 것에 관한 한 이상형 안에서 한 행위자에 기반한 윤리 이론을 근거짓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적어도 이런 한 관점을 위한 그 가능성을 모든 덕은 신을 위한 사랑에 기반한다(아우구스티누스가 많은 지점에서 그의 논증들 속에 행위자에 기반하지 않는 요소들을 수용하는 것처럼 나타날지라도)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 안에서 찾는다. 그러나 다른 이들보다 더 몇몇 사람을 향하는 돌봄 또는 자비로움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한 순수하게 세속적인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을 발전시키는 것 또한 가능하고, 또한 그것은 내가 다음에서 고려하길 바라는 이 가능성이다.
그녀의 윤리학을 새롭게 하는 『다른 목소리로』 속에서, 캐롤 길리건은 남성들은 도덕성을 권리들, 정의, 그리고 자율성의 방식 안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면 여성들은 더 빈번하게 도덕에 관해서 돌봄, 책임,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상호관계의 방식 안에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넬 노딩스는, 『돌봄 : 윤리와 도덕교육을 향한 한 여성적 접근』 속에서, 명확하게 돌봄에 관한 생각 주변에 중심을 둔 한 ‘여성적인’ 도덕성을 그것의 고유한 권리 속에서 명확하게 표현하고 방어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노딩스를 읽을 때, 그 사람은 그녀가 돌봄에 관한 그녀의 윤리학을 행위자에 기반되게끔 의도했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불분명하게 남게 된다. 행위자에 기반함의 개념은 단지 요즘에야 윤리이론의 한 도구가 되어왔고, 또한 불과 몇 년 전에 책을 쓴 노딩스에게 그의 작업을 저 개념을 향해 관련있게끔 하길 기대하는 것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나 주어진 요즈음의 발전들, 특히 덕윤리학 안에서의 발전 때문에, 돌봄의 도덕성이 행위자에 기반한 것처럼 보일 수 없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에 따라 더욱 확고하고 규정된 이론적인 토대놓기가 주어질지 아닐지를 고려하는 것은 아마 흥미로울 것이다.
그의 책에서, 노딩스는 정의의 독립적인 원리들 또는 진리말하기 또는 당신들을 가진 것을 제공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돌봄과 도덕성 안의 모든 것을 관련시켜 설명하길 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행위자에 기반한 것으로서 그의 윤리학을 보는 것에는 여전히 가능한 반대가 있다. 그가 돌봄에서인 행위의 도덕적 좋음을 강조하더라도, 그는 또한 우리는 이 세계 안에서 돌봄을 장려하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말하며, 또한 이것은 그녀의 관점들 안에서 한 결과주의적이고 심지어는 완전주의적인 요소인 것처럼 들린다(완전주의는, 거칠게 말해서, 우리의 행위들이 덕과 탁월함을 만들지 그렇지 않을지에 관해 궁극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행복을 위한 그들의 결과들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결과주의의 한 형식이다.) 만약 그가 이 세계 속에서 돌봄을 만들고 장려하는 것이 한 기초적인 명령이라고 믿는다면 노딩스의 관점은 분명히 행위자에 기반하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우리가 노딩스의 관점들에 관해 아는 것은 그의 관점이 은연중에 행위자에 기반하게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한 주제를 자리잡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는 돌봄의 장려가 기초적인 도덕적 가치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또한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실 돌봄에 관한 한 행위자에 기반한 특수주의적 윤리학으로부터 그것을 이끌어내는 한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특정한 다른) 사람들을 더 돌봐주기 위해서 (특정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시도하는 것을 위해 가지는 이유들을 고려해보자. 더욱 보살펴주려고 그들을 모으는 것에 의해서, 한 사람은 결국에 인도적 행위를 일반적으로 또는 한 사람이 돌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더 많은 좋은 것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이유가 될 수 없는가? 만약 한 사람이 정말로 (특정한) 사람들을 돕길 바란다면, 한 다른 사람의 복지를 돌보려고 그들을 모으는 일을 하는 것은 아마 배가 되는 한 효과를 가지는데, 그것은 한 사람에게 적어도 간접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전체적으로 돕는 것을 한 사람이 언제나 간단하게 복지를 직접적으로 장려하는 경우보다 더 많이 허락하는 것이다. 한 돌보는 사람은 아마도 그러므로 한 돌보는 사람으로서의 그가 고려하는 것들을 장려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서의 돌봄의 장려를 알 것이고, 또한 이런 방식 안에서, 다른 이들의 부분에 관한 덕스러운 돌봄에 관한 고려와 장려는 도덕적인 탁월함의 한 기본적인 형식으로서 고려된 돌봄 그 자체의 한 사례일 것이고 또한 그러므로 돌봄의 도덕적 가치에 관한 한 행위자에 기반한 이론 안에서 조정가능하게 될 것이다. 완전주의와 이러한 좋은 결과들은 이런 요소 안을 향해 들어가야 하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처럼, 나는 노딩스가 이런 방식으로 가장 잘 해석된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고 또한 단지 그것을 제안할 수 있을 뿐인데, 우리가 방금 막 다다른 그 행위자에 기반한 이론은 적어도 흥미로우며, 또한 그것의 고유한 권리 속에서 제안한다.
특수주의적인 돌봄에 도덕적인 부가가치를 얹는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이론은 아마도 노딩스 스스로가 자기고려에 관해 그리고 제3자들을 향해가는 적절한 태도들과 행위들에 관해 말한 것보다 더 말할 필요가 있다. 어떤 합리적인 윤리학도 도덕적 행위자 안의 자기고려와 자기고집의 어느 정도를 가치절하하거나 시샘하지 않고, 또한 페미니스트들과 다른 이들이 최근에 지적해오는 것처럼, 그것은 아이러니가 되고 또한 여성의 자유와 자기실현을 일반적으로 제한해왔고 또한 제한했던 여성적인 도덕적 생각과 활동의 측면들에 관해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어떤 새로운 윤리학들을 위한 도덕적인 반대생산이 된다. 배타적이거나 또는 심지어 근본적으로 선호되는 다른이들을 위한 돌봄 또는 고려의 한 윤리는, 그러므로 도덕적으로 퇴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한 행위자에 기반한 양식 안에서 특별하게 발전된 돌봄에 관한 여성적인 또는 페미니스트의 윤리는 자기고려와 균형을 맞춘 다른 이들을 위한 고려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것이 가장 좋고 또한 가장 존경받을만하다고 말해서는 안되며, 또한 저런 균형과 일치하거나 그것을 보여주는 모든 행위들과 활동들만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일만하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또한 제3자에 관한 적절한 고려와 대우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주변과 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더 큰 고려를 변호하는 한 특수주의적인 도덕성은 아마 여전히 제3자를 향한 무관심을 한탄할 것이고, 만약 무관심하지 않은 것, 즉 인도적인 돌봄에 관한 도덕적 층위가 너무 낮게 정해지지 않는다면, 돌봄으로서의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성은 정의와 인간의 권리들에 관한 흔한 질문들을 그럴듯하게 하지만 완전히 구별되는 방식 안에서 다룰 수 있게 된다.
보편성과 공평성의 방어자들은 아마 돌봄의 윤리가 제3자가 적절하게 다루어질 것이라는 보장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반대하고 또한 그래서 행위자에 기반한 교의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의 이론적인 선호가능성을 위해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특수주의자들은 특별한 개인들을 향한 헌신은 공평한 자비로움의 어떤 양식보다도 더 도덕적으로 선호할만하고 또한 더욱 존경받을만하게 보인다고, 또한 여기서 어느 쪽이 더 나은 경우인지도 명확하지 않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특수주의적 돌봄이 의무적이고 또한 존경받을만한데 그것은 오직 가까운 관계 안에서만 실현하는 중요한 인간적인 좋은 것들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몇몇 특수의자들이 주장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이런 한 설명은 우리를 행위자에 기반함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리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이 얼마나 적절한지에 놀란다. 만약 부모의 사랑이 가족의 삶에 관해 좋은 것(들)에서 핵심적이기 때문에 의무적이고 존경받을만하다면, 왜 한 아이는 그의 부모들로부터 물건들을 가져오는 것이 이처럼 의무적이게 되지 않고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존경받는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는가? 여기에서 그 차이는 돌보는 것과 돌봐지는 것 사이의 존경할만함에 관한 한 기초적인 차이에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한 돌봄을 그 자체로 그리고 특정한 좋은 것들을 실현하는 그것의 도와줌으로부터 떨어져서 존경할만한 것으로 간주하는 한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성과 함께 꼭 맞는다. 비슷하게, 한 성장이 늦은 아이를 향해 도움을 주는 사람의 헌신은 매우 존경받을만할 수 있는데, 심지어 그것은 만약 그들의 관계가 필요해지지 않은 경우에 더 좋아질 것이라도 그렇다. 이런 돌봄의 존경할만함은 한 관계의 바람직함 속에서 토대가 지어지지 않고, 다시 말해 더한 정당화의 필요가 없는 것 안에 서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나는 돌봄의 한 도덕성은 행위자에 기반한 것으로서 그 스스로를 고려하는 것에 관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을 적용하기
그러나, 행위자에 기반한 덕 윤리학에 관한 우리의 두 좋은 형식들 –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과 돌봄으로서의 도덕성 – 은 이제 반드시 언급해야만하는 한 더한 어려움과 마주한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이 어찌해야할지 모를 도덕적 문제와 함께 마주되었을 때, 그것은 어쨌든 부적절해보이고 또한 심지어는 사람들과 이 세계에 관한 사실들보다는 오히려 그의 고유한 동기들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이 허용하고 또한 심지어 지시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보편적인 또는 특수주의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우리에게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옳고, 또한 받아들일만한지 아닌지, 말하자면, 늙어서 죽어가는 부모를 살린 상태로 두려는 과감한 수단들의 사용에 반대하는 것은 이 당사자의 동기들에 달려있는지, 또한 이것이 죽어가거나 또는 고통받는 부모를 위한 과감한 수단을 옹호할지 또는 반대할지를 알지 못하는 어떤 한 사람을 위해서 전체적으로 도움이 될만한가? 동기들 안을 살펴보는 것은 아마도 저 사람의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러므로, 우리가 대부분 도덕적인 지도가 필요한 곳에서, 그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이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도덕적 어려움들을 향한 한 답을 찾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처럼 보인다.
덕 윤리학의 몇몇 방어자들은 덕 윤리학이 – 행위자에 기반하든 또는 다른 것이든 – 실천적인 도덕적 주제들에 응용될 수 없다는 것을 승낙하길 바라고 있지만, 그러나 덜하지 않게 덕 윤리학이 도덕성에 관한 올바른 이론이나 관점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이 응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덕 윤리학을 위해서 더 좋으며, 또한 나는 자비로움과 같은 한 내적인 상태가 이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또한 이 세계에 관한 사실들을 모으는 것과 함께 그 자체를 고려하는 방식에 관해 앞에서 이야기된 것의 사용을 더 나아가게 만드는 것에 의해서 우리가 이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만약 한 사람이, 말하자면 그것의 행위자의 동기들의 자비로움을 향한 참고에 의해서 행위나 결정의 한 특정한 과정을 도덕적으로 판단한다면, 한 사람은 그 스스로 이 세계 안의 사람들에 관한 사실을 참고하고 고려하는 한 내적인 요소들을 향한 관계 안에서 곧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내면적인 응시는 효과적으로 세계를 향해 ‘되돌아가고’, 또한 마치 우리가 한 순간 안에서 더욱 자세한 것 안을 보게 되는 것처럼 이 세계에 관한 사실들을 무엇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일만하거나 또는 하는 데 가장 좋은가를 결정하려는 한 사람의 시도 안인 생각 속으로 집어넣는 것을 한 사람에게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되돌아감은 도덕적 노력에 관해 불필요하게 이중적이거나 또는 필요없는 것인데, 만약 우리가 저런 동기가 기본적으로 적어도 모든 행위의 도덕적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렇다. 만약 이 세계에서 그들의 효과에 의해서 단순하게 행위들이나 우리 스스로나 다른 이들을 우리가 판단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도덕적으로 존경하고 또한 도덕적으로 좋고 칭찬받을만한 행위들로부터 우연히 또는 아이러니컬하게 유용한 행위들을(또는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끝내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그의 늙은 어머니가 병원에 갑자기 실려갔다는 것을 듣고는 어머니와 같이 있으려고 먼 도시로부터 날아온 어떤 한 사람을 고려해보자. 몇몇 또는 다른 형식 안에서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 주어지고 또한 그가 어머니가 살아가면서 관계맺은 유일한 사람이라면, 그는 그가 병원에 갈 때 그의 부모와 함께 또는 부모를 위해서 도덕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주제를 어떻게 풀어야만 하는가? 예를 들면, 그는 그의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과감한 수단을 옹호해야 하는가? 물론 자비로움의 (한 또는 다른 형식) 으로서의 도덕성은 이 질문을 향한 답변을 그에게 주지는 않지만, 그러나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무지와 그의 어머니의 특수한 조건과 전망들에 관해서는, 이 지점에서 저 질문을 향한 답을 내는 대부분의 도덕 이론들에는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그가 병원에 갈 때 그가 도덕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을 향한 답을 그에게 내준다. 그것은, 미래의 고통과 무능력함을 고려하는 한 확실하게 삶의 질과 지속성을 고려하는 것, 즉 그의 어머니의 조건과 전망들에 관해 더 많이 도덕적으로 알아내야만(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쁜) 한다고 그녀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실제 동기들을 향한 참고에 의해서 이것을 그에게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만약 그가 더 알아보지 않고 할 것을 결정한다거나 또는 현재의 상대적인 무지에 기초해서만 그의 어머니에 관해 옹호할 것을 결정한다면, 그는 자비로움과는 동떨어진 (그의 어머니에게) 한 냉담함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전원을 끊을 것을 결정하거나 또는 그의 어머니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아는 것 없이 과감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무심함과 냉담함을 보여주고, 또한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라는 이러한 기초 위에서는 그가 어떤 결정이라도 내리기 전에 더 많은 것을 찾아야만 한다는 도덕적 판단을 만들어줄 수 있다.(내적인 강함으로서의 도덕성이 비슷한 결론을 낳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면, 그 사실들이 일어나있으며 또한 그들이 실제로 명확하며 또한 그녀의 어머니에게 끔찍한 아픔과 쇠약해질 전망들을 가리킨다고 해보면, 그 사람의 결정은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으로부터 다시 한 번 그럴듯하게 이끌어질만하다. 이 지점에서, 그것은 과감한 수단을 주장하는 것은 그의 냉담함이 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자비로움이 되며 또한 적절한 도덕적 결론은 그러므로 행위자에 기반한 고려들에 의해서 도달될 수 있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스스로 이런 방식 안에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어떤 한 사람은 말할지 모른다. 그는 그의 어머니가 아픔 또는 즐거운 미래의 존재를 가지는지 아닌지에 관해 고민하고, 예를 들면, 만약 그가 어머니의 존재를 연장할 것을 알았다면 그가 스스로 냉담하게 할지 안할지에 관해서는 아니다. 이것은 납득할만한가? 그는 만약 어머니가 살아간다면 거의 겪을 미래의 고통들에 관한 단순한 참고에 의해서 또는 말하자면 더욱 복잡하고 풍부한 것에 의해서 둘 가운데 하나에 의해 과감한 수단을 허락하지 않는 그의 결정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가: 그것은 주어진 그녀의 전망들 속에서 어머니를 산 채로 두려고 시도하는 나의 냉담함이 되는가? 물론, 도덕적인 문제풀이의 한 표현으로서의 후자에 관해서 유별난 것도, 운이 나쁜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역사적인 사실의 한 요소로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옹호하면서 만들어진 논증들에 관해 생각해보자. 부통령 앨 고어와 하원의 야당 원내대표인 로버트 미첼은 그것이 이 세계와 아메리카의 미래에 비굴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태도를 채용하게 될 것을 거부하는 토대들 위에서 이 협정을 방어했다. 그들은 결과들에 관해 더욱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어왔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 주제를 제출하는 방식에 관해 비합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또한 그래서 나는 내적인 동기들의 외적으로 보이는 성격이 주어지면,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은 더 일반적인 공리주의와 결과주의와 같은 이런 실천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도덕적 이론들을 향해 저런 유효함에서 어깨를 나란히하는 도덕적 주제들에 관한 해법을 위한 재료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맺고 싶다.
어려운 또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실천적인 도덕적 주제들을 향한 대답 안에서 우리의 평범한 생각은 동기들 또는 결과들 또는 둘 다에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주의는 궁극적으로는 결과들에 그리고 단지 간접적이고 유용한 접근의 한 방법으로서만 공평한 자비로움같은 동기들에 관한 고려에 도움을 청하는 것에 의해서 이런 주제들에 답을 낸다. 자비로움으로서의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성은 궁극적으로는 동기들에,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결과들을 취하는 것에 도움을 청하는 것에 의해 반대의 유형 안에서 문제에 답을 내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이런 동기들(과 함께인 사람들)에 의해 고려되고 또한 이런 동기들을 향한 답변 안에서 탐사된다. 각각의 접근은 많은 도덕적 어려움들 또는 문제들에 관한 경우에 따른 답을 허락하고, 또한 그래서, 응용 윤리학의 전체 문제를 향한 고려와 함께, 어떤 접근법도 이로움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또한 실천적인 도덕적 문제들에 부적절하게 된다거나 또는 그들의 해법을 달성하기에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때문에 행위자에 기반함을 비판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확실히,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 우리의 도덕적 어려움들에 답을 낼 수 없게 되는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만약 그의 어머니에 관한 사실들이 배워지지 않았거나 또는 완전히 복잡해지게 된다면,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오히려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에 가치가 있는 어떤 결과주의도 이런 한 경우들 안에서는 텅 빈 것으로 다가오며, 또한 그것은 저런 관점들의 강함이지만, 특수주의적인 또는 보편주의적인 형식이든 자비로움으로서의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성도 그에 못지 않고, 이런 관점들은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 또는 합리적인 힘들을 벗어나는 경우들 안의 어려운 도덕적 질문들을 향한 답변을 알 것이라고 추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할지와 무엇을 느낄지를 아는 것을 언제나 너무 쉽게 만드는 어떤 윤리이론도 그걸 확장해봤을 때 결함이 있거나 심지어는 쓸모없게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도덕적 현상의 배배 꼬인 복잡성에 관한 우리의 멀쩡한 감각의 부정확성 때문이다.
덕윤리학의 부활 이래로, 이 주제에 흥미로운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또는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생각들에 관해 주로 초점을 맞춰왔다. 나는 『도덕성에서 덕으로(덕의 부활)』 안에서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생각들을 스스로 방어해왔지만, 그러나 우리는 행위자에 기반한 덕 윤리학의 특정한 형식들 또한 진정한 약속과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보았다. 덕윤리학이 그것의 세력을 확장하는 기간 안에서,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혼자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한 요법들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