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 연구 발제문. 빌헬름 바이셰델, 『철학자들의 신』의 제3장 '중세의 철학적 신학' 요약.>

 

  철학적 신학으로서의 중세철학


  서양의 중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듯이 기독교가 유럽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정신적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기독교적인 신 개념의 지위 또한 기독교의 확산과 일반화에 따라 이전과 달라졌다. 기독교적 신의 핵심은 다름 아닌 신의 말씀, 곧 진리가 성서를 통해 계시라는 형태로 선포된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교부시대 이래로 성서-계시-신앙으로 이어지는 신에 대한 접근법은 여전히 경험-지식-이해로 이어지는, 인간에게 고유하다고 여겨지는 진리에 대한 접근법, 즉 이성과 충돌을 일으켰다. 기독교적인 철학, 기독교적인 의미의 철학적 신학은 바로 이 두 영역을 어떻게 하나의 체계 속에서 양립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 의문은 중세철학에서도 여전히 문제적이었다. 특히 문제는 신앙이라기보다는 이성이었다. 기독교 철학자들에게 신앙은 거부할 수 없는 전제,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로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절대적인 진리였다. 반면, 이성은 분명히 인간의 내부에 국한된 능력이고, 따라서 이성을 통해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중세의 모든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견해였다. 그렇다면 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왜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졌는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범위, 대상,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중세의 기독교 철학자들은 여기에 대해 답을 내놓아야했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신앙와 이성의 영역에 동시에 걸쳐진 과제로서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적 증명’이 중세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화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신의 존재는 신앙과 직결된 문제이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절차는 인간의 이성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논증의 형태가 된다.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완결된 형태로 제시될 수 있다면, 이성을 소유한 모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은 모든 인간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 증명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는가, 그리고 이 증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서 철학자의 특징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철학적 신학의 고유한 과제, ‘이성을 사용하여 신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가?’ 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중세 시대까지 내려온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철학은 철학적 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학과 신앙에서 이성의 지위와 역할


  이 두 가지 논점에 대해 인상적인 의견을 제시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이다.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이성은 언제나 신앙에 기초해 그 능력을 발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 능력은 개념적으로는 서로 대립,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이 두 가지 능력을 모두 잘 갖추고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신의 말씀으로서 거부할 수 없이 주어진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인간의 이성은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인간의 이성이 이런 기반 위에서 발휘된다면 이성을 통해서도 계시된 진리에 필연적으로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입장에서 그는 신의 개념에 대한 전제적인 믿음을 배제한 채, 이성적 능력 즉 논증을 통해서 신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에서 주목해야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능력, 즉 이성만으로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의 발상일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방식으로 인간에서부터 출발하는 신 존재 논증을 구사한다. 첫째, 인간은 이 세상에 선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선하게 만들어주는 근거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하다’는 단일한 것, 단 하나의 선한 것, 따라서 최고의 선이 모든 선한 것을 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 최고의 선이 바로 신이다. 둘째, 인간은 여러 대상들의 본질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차이들은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 본질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이다. 셋째, 인간 외부의 대상들을 바라보지 않고 좀 더 내적으로 성찰해보았을 때, 인간은 자신에게 ‘최고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인간의 내부에만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개념이다. 만약 이성에만 의존한다면, 어떤 존재라도 그것보다 더 높은 존재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개념이 있다는 것은 진짜로 ‘최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최고의 존재’가 바로 신이다.

  보나벤투라(1218~1274)와 로저 베이컨(1214~1294)은 ‘이성은 신앙의 기반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한다’는 안셀무스의 주장을 더욱 강한 형태로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성과 철학에만 기대어서는 결코 계시적 진리, 참된 지식에 이를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신앙의 기반 위에 있는 철학은 얼마든지 허용되며, 신앙의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전통적인 철학자들이 탐구한 주제들은 결코 신학에서 설명해야하는 과제들과 다르지 않다. 보나벤투라는 이것을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하였고, 베이컨은 철학의 전통에서 거론된 모든 진리를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지식은 성서에 담겨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아벨라르(1079~1142)와 헤일스의 알렉산더(1185~1245)는 신앙에서 이성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였다. 아벨라르의 경우,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사용되는 철학적 방법인 변증술을 신앙의 방법으로 이용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계속 질문하고 토론함으로써,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철학적 방법과 그 방법을 통해 획득한 지식으로 진리의 어렴풋한 모습을 파악할 수도 있다. 이것을 명증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도약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신앙이다. 헤일스의 알렉산더는 아예 신앙과 이성의 영역을 나눈다. 신앙을 정교하게 구축한 학문은 신학이며, 이성을 사용한 정교한 학문은 형이상학인데, 그가 보기에 이 두 학문은 모두 신에 대한 지식, 진리를 추구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도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후대의 입장들


  신앙와 이성 사이의 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구분하고, 이성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더욱 긍정적으로 답한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이다. 물론 그 또한 신학자인 만큼 이성만으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성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신이 단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반면 신앙은 이런 존재하는 신이 정말 ‘어떤 존재인가’, 즉 신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게 해준다. 따라서 이 두 능력은 인간이 신을 인식하는 각기 다른 방법과 영역을 가지고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이성은 이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르는 능력이고, 반대로 신앙은 신에 대한 믿음에서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도출해내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신에 대한 인식을 보장해줄 수 있는가? 아퀴나스는 이에 대해 이 세계의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간이 눈 앞에서 목도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간이 이러한 조건에 처해진 이유는, 다름 아닌 신 때문이다. 신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을 창조하였고, 인간 또한 그 존재자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모든 존재자들의 피조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 피조성은, 존재자들의 존재로부터 도출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동시에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이것을 그는 자연의 빛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도 여전히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이것을 얻는데 필요한 이성보다는, 신앙을 통해서 신을 직접 인식하고 진리 그 자체에 다가가는 것이 진리에 다가가는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안셀무스의 증명을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혼동한 결과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고유한 신 존재 증명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어떤 운동이 있다면, 그 운동은 다른 운동하는 것에 의해 유발된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운동의 원인이 되는 운동자들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최초의 운동자가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둘째, 어떤 작용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그것의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역시나 원인 또한 무한히 추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최초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이다. 셋째, 이 세계의 존재자들은 존재하지 않고 소멸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것은 명백하게 오류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존재자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있어야하는데, 이것이 신이다. 넷째, 우리는 고귀한 것,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더 고귀한 것, 더 소중한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무한히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최고로 소중한 것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이다. 다섯째, 모든 존재자들은 완벽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운동한다. 이렇게 완벽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자들의 목적이다. 그러나 언제나 이 목적을 향해있도록 만드는 존재가 있지 않다면, 모든 존재자들은 아무렇게나 운동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존재자들은 아무렇게나 운동하지 않으므로, 그런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아퀴나스의 이 논증들은 결함이 많다고 평가받는다. 첫째, 이 논증들은 모든 존재자가 목적을 내포하며 이것을 향해 운동한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정하고 있다. 둘째, 감각적인 세계와는 구별되는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위계를 설정하고 있다. 셋째, 최초의 무엇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며 원인/근거와 결과/작용의 연쇄를 자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넷째, 아퀴나스가 증명한 것은 신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최초의 원인, 최고의 존재자이다. 즉, 그의 논증이 최초의 원인이나 최고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앙에서 말하는 그 신인지는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결론은, 끝내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작업에서 이성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둔스 스코투스(1265~1308)는 철학에서의 형이상학을 이용하여 신에 대한 인식에 다다르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형이상학의 대상, 이성의 대상은 신이 아니라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사유는 최초의 원인, 최고의 존재에 도달할 뿐이며, 그것이 신이라고 인식하는 도약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신앙이다. 윌리엄 오컴(1288~1348)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신앙은 학문적 체계로 만들어질 수조차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듯하다. 신에 대한 인식은 학문적 인식과 같은 방법이나 구조일 수 없다. 신이 인간적 학문의 대상들처럼 명백하게 알려진다면, 그것 자체가 신의 속성에 어긋나는 일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어렴풋한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며, 이성은 이 과정에 전혀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폈다.



  신비주의자들


  이 맥락에서 시대를 거슬러 신비주의적 전통을 살펴보는 이유는, 신앙과 이성이 명백하게 구분된다는 오컴의 주장이 인간과 신의 단절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적 전통 내지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입장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 두 전통은 중세 신학에서 신비주의 전통이라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준 철학자들로는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815~877),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1153), 생빅토르의 후고(1096~1141), 생빅토르의 리카르트(?~?), 보나벤투라 등이 있다.

  에리우게나의 출발점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여러 철학자들의 출발점과 유사하다. 이성은 신앙의 영역 안에서 발휘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신비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사람들은, 신과 인간은 개념적으로도 현실적으로 근본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고대의 전통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하나되는 체험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성은,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신적인 체험을 향해 나아가는 사유능력으로 간주된다. 또한 이성은 신앙의 영역 안에서 발휘된다는 것은, 이성이 신앙의 형태라는 뜻으로 바뀐다. 이후의 신비주의자들은 신앙 안에서 신과 하나되는 인간의 능력을 이성과는 다른 직관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한다.

  신비주의적 전통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인식의 단계를 명확하게 설정한다는 점이다. 리카르트와 보나벤투라의 견해를 참고해보면, 인식은 크게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진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존재자들을 인식한다. 이 존재자들은 그 자체로 각각 신을 반영하고 있는 신의 현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고작용이 우리에게 단순한 존재자들 뿐만이 아니라 무형적인 것, 작용하는 것 등이 있다는 것 또한 일러준다. 또한 이러한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정신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데, 이것이 두 번째 수준의 인식이다. 그 다음 내적 반성을 통해 이 정신이 신의 반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우리의 구조가 신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을 향해 넘어가는 ‘정신의 고양’을 경험한다. 신비주의적 체험 신학은 이렇게 완성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또한 신비주의적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이다. 그의 독특함은 인식의 단계에 대한 정의와 신적 체험을 향해 가는 방법론에 있다. 신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 때부터 그러했듯, 신비주의자들은 대개 상승이나 도약, 고양같은, 위계성이 갖춰져있고 계속해서 위를 향해 올라가는 은유를 사용한다. 에크하르트는 반대로 아래로 향하는 은유, 이 세계로부터 자신의 내면으로 점점 향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즉, 자신과 자신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존재자들로부터 자신의 내면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격리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나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정신의 고려사항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존재자들이 추방된 정신 그 자체가 발견된다. 그런데 이 과정을 다르게 표현하면, 정신이 피조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다시 말해 신적인 영역으로 자신을 옮겨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발견된 정신 그 자체가 바로 신이며, 이 정신에 대한 체험이 신에 대한 인식이다.

  나의 정신 그 자체가 바로 신이라는 인식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바로 신이라는 인식으로 유비될 수 있다. 물론 모든 존재자들의 총합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며, 신은 오히려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 존재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 존재성은 마치 내가 나의 내면에 깊이 들어감으로써 신을 체험하듯이, 신이 모든 존재자들을 체험함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을 에크하르트는 ‘통찰’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은, 인간이 격리성을 통해 체험할 수는 있으나, 규정할 수는 없다. 도저히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인식은 기술될 뿐, 설명되지 않는다.

  신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번번히 좌절된다는 것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401~1464)의 철학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대립하는 어떤 대상을 가질 수 없는, 단 하나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자들은 신의 피조물로서 독립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구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더욱 주목할 것은, 그 안에 비단 현재뿐만이 아닌, 과거와 미래의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거대한 가능성의 덩어리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타자가 없는 존재, 즉 비-타자로서의 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다. 가능성이 끊임없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변화하는 존재인 신은, 그래서 인간의 개념에 포착될 수 없고 따라서 가능성 그 자체라는 묘사 이외의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신을 인식하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절대적인 존재는 이성의 규칙인 모순율마저도 뛰어넘는데, 왜냐하면 신에 대립하는, 즉 모순된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은 신을 인식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는 신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 그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신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인식이라고 밝힌다. 따라서 그에게 신은 인식이 아닌 체험을 통해 다가오고, 그 체험을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연모 즉 신앙이다. 그는 이 신앙을, 이성적(즉 인간적) 요소를 모두 배제한 순수한 바라봄이라는 뜻에서 ‘관조’라고 말한다. 이 관조 속에서 신은 인간에게 다가오며, 여기에서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로 설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체험이 철학의 주제가 될 수 있는가? 또는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단적으로 말해 신비주의자들이 철학, 즉 철학적 신학을 한 철학자들인지 되묻는 것이다. 신에 대한 고찰이 체험이나 믿음의 영역으로 돌려지는 순간, ‘철학적’ 신학은 포기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에 대한 중세적 사유를 끝맺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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