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아이티, 보편사 엑스쿨투라 1
수잔 벅모스 지음, 김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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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지적전통 발제문>

 

  이 책의 저자인 수전 벅-모스 위키피디아 Susan Buck-Morss는 미국의 비판이론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발터 벤야민의 『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 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이 책은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벤야민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관심을 가졌던 주제는 ‘자본주의 도시의 문화적 구조’인데, 이 프로젝트는 그 주제에 대한 연구의 결과이다. 벅-모스는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고, 이에 대한 해설서로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The Dialectics of Seeing : Walter Benjamin and the Arcades Project』(1989)를 출간하였다. 그 외에도 『부정변증법의 기원』(1977), 『무릉도원과 파국 : 동서양의 대중적 유토피아 가로지르기』(2002), 『테러 이후』(2003) 등의 저서가 있다.

 

  「헤겔과 아이티」

 

  벅-모스가 「헤겔과 아이티」에서 다룰 주제의 모티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헤겔이 아직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다 정리하지 못한 시기, 즉 예나 시기에 초기 자본주의의 성장을 날것으로 지켜보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들 뿐만 아니라, 분명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은 흔적이 발견된다는 데서 증명된다. 홉스, 로크, 루소 등 헤겔 이전의 사회철학자들은 인간의 조건을 고립되고 혼자뿐인 자연상태와 다양한 개인들 간의 상호 교류로 얽혀있는 사회상태로 양분하였다. 또한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진보해간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헤겔은 이와 다르다. “헤겔의 근대적 주체는 상품 교환으로 인해 이미 사회적 의존의 망 안에 존재하고 있다.”(p.24)

 

  그렇다면 이 사회적 의존의 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것이 두 번째 모티프이자 벅-모스가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하는 핵심적 주제인 주인-노예 변증법, 그리고 여기에 얽힌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아이티 혁명이다. 벅-모스가 보기에 주인-노예 변증법은 자본주의적 사회의 관계를 묘사한다. 각 개인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통해서, 인정하는 자인 주인과 인정받는 자인 노예로 나뉜다. 그러나 주인과 노예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이며, 게다가 변화를 추동하는 진정한 원천은 노예의 노동으로부터 나오며, 오히려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의존한다. 이 관계가 역전되어 노예가 자신의 주체를 위한 인정투쟁을 벌임으로써, “자신의 예속 상태를 뒤엎고 법치국가를 확립하는 노예들의 혁명적 투쟁”(p.26)이 발생한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주인-노예 변증법에 대해 내놓은 해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존의 철학의 전통 안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들로 환원시키는 것이다.(p.76) 이들은 이 변증법의 기원을 찾기 위해 가깝게는 피히테, 멀게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머지는 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으로, 이것을 계급투쟁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p.86) 하지만 벅-모스가 보기에 이 둘은 모두 헤겔이 놓인 역사적 조건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해석들로, 이 변증법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헤겔이 살던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발견할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아이티 혁명이다. “헤겔의 분석을 무한히 팽창하는 식민경제에서 떼어내, 그가 자유의 실현으로 규정하는 세계사의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이론적 중심점을 제공”(p.26)하는 그 사건은 “바로 그 순간 아이티에서 현실화되고 있었다.”(p.26) 하지만 “헤겔이라 불리는 현상과 아이티라 불리는 현상은 그 시작 지점에서는 서로에게 스며들만큼 연관되어 있었지만 전수의 역사를 거치면서 서로 분리되었다.”(p.27)

 

  이 지점에서 이야기의 주제는 노예제에 대한 당대의 시각과 담론의 변화를 보여주며 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노예제는 분명히 존재했고, 유럽으로 흘러들어오는 상품의 상당수는 노예노동에 의해서 생산되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것을 외면하거나 철학적으로 교묘하게 정당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홉스는 이것을 ‘자연상태의 투쟁에서 발생한 산물’이라고 말하고, 로크의 경우 노예를 다루는 것은 노예의 주인과 노예 사이에 관련된 사적인 사안(다시 말해 사적 소유)이므로 국가가 법으로 관여할 분야가 아니라는 논증을 폈다.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노예제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다. 그렇기에 정치적 혁명의 시기에 모든 혁명적 팸플릿들은 자신들이 노예의 상태에 있다는 은유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은유가 아니라 실제의 상황이기도 했는데, 프랑스 식민지인 생도맹그의 흑인 노예들이 바로 그랬다. 그들은 그것을 은유가 아닌 실제로 받아들이고, 그 노예제를 ‘실제로’ 철폐하려는 봉기를 일으켰다. 투생 루베르튀르, 장-자크 데잘린 등이 주도한 봉기세력은 생도맹그에서 백인들을 쫓아냈고, 그 지역을 점령하려는 여러 식민 열강들에 맞서 긴 전쟁을 수행한 끝에 아이티라는 독립국가를 건립할 수 있었다.

 

  계몽주의 이념의 실천이라는 면에서, 그리고 그것이 전혀 실천되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발생한 실천이었기 때문에 아이티 건국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헤겔은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있었다. 헤겔은 이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고, 그와 교류했던 주변의 많은 인물들이 아이티에 직접적인 소식통(프리메이슨)을 가지고 있었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적 입장과 이 사건이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고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벅-모스는 주장한다. 헤겔은 “마치 은현 잉크처럼 자신의 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현재의 역사적 현실을 텍스트 안으로 들여온다.”(pp.80-81)

 

  또한 벅-모스는 헤겔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프리메이슨의 존재를 거론한다. 주인-노예 변증법이 반영하는 (당시의 시각에서) 급진적인 평등사회를, 그들이 이미 집단적 이념의 차원에서 이미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프리메이슨은 직공들이 공동체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서 상업적 관계망으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유럽의 상업적 범위가 대서양 전체로 넓어지면서, 상업적 관계망으로서의 프리메이슨은 문화적 교합의 공간도 제공하였다. 입회 조건에 제한을 두지 않으며, 내부적으로는 모두 평등하다는 강령이 프리메이슨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주변 인물들, 헤겔이 보던 신문을 제작, 인쇄하고 배포하는 과정들은 모두 일정부분 프리메이슨의 세계시민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이 사건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적 팽창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역사철학자로 변모한다. 벅-모스는, 여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조차도)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독립국가로 출범한 아이티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이 아이티 혁명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독립 이후 긴 전쟁과 경제정책의 실패는 독립국가 내부의 인민의 삶을 전혀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그 혁명이 자유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해냈는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벅-모스의 표현처럼, 그는 연구를 거듭하면 할수록 더욱 어두워졌다.

 

 

  보편사

 

  벅-모스는「보편사」가 「헤겔과 아이티」에 대한 호응 및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서 기획된 논문이라고 말한다. 이 논문의 중심주제는 ‘과연 아이티 혁명이 보편사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그게 가능하려면 ‘보편사는 어떤 개념이어야 하는가?’ 라는 두 가지 질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벅-모스는 아이티 혁명의 주변을 둘러싼 정치, 경제적 상황와 그 속에서 아이티 혁명의 의미에 대해 논하고, 그런 아이티 혁명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당시의 맥락을 충분히 반영하여 해석한다면 보편사 개념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상기해야 할 것은, 아이티 혁명이 그 사건 이후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지며, 그것이 정말 의미있는 사건이었는지에 대해 당대의 사람들이 회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벅-모스는 그 이유를 경제적인 상황에서 찾았다. 루베르튀르를 비롯한 혁명 주도세력은 정치적인 기획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이 경제적인 조건과 얼마나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따라서 정치적 기획의 모델을 그대로 경제에 도입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른바 ‘농-군 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아이티의 산업기반은 식민지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부는 농업으로부터 창출되었다. 그러나 노동의 양식은 정치체제의 변화 때문에 이전과 같아질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아이티 혁명 세력이 고안해낸 노동의 양식은, 군에서 하는 것과 같이 강력한 규율에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여 일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근대 이후 한동안 노예제는 어쩔 수 없는 것, 혹은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그 존재가 긍정되어왔다. 그러나 노예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노예제가 공론화되면서, 사람들이 노예상태에 대한 언급을 부정적으로 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이 노예상태는 ‘자유로운 노동’이라는 상황으로 대치될 수 있는 상태였다. 규율에 따라 ‘자발적으로’ 노동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조직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자유로운 노동이란 무엇일까?

 

  벅-모스는 바로 여기에 아이티의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노예노동과 자본주의적인 임금노동, 즉 ‘자유로운 노동’ 사이의 관계를 성립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다름아닌 독립한 아이티였다. “개혁가들이 범죄, 빈곤, 노동 규율 등의 문제와 씨름할 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노예 대농장의 이미지에 사로잡혔던 듯 하다. (...) 노예주와 산업가는 모두 자기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뿐 아니라 그들의 성품과 습성을 개조하는 데 점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p.137) 흑인 노예들의 해방공간, 즉 아이티에서 벌어지는 노동의 양식 – 자유민들이 규율에 자발적으로 복종하여 착취가 이루어지는 노동 - 은 자본주의, 산업혁명 시기 노동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므로 저자는 아이티 혁명이 정치적 혁명이었으나 경제체제에는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유럽의 자본주의적 착취의 모델로서의 의미에 대해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아이티 혁명의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이 아이티 혁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실제로 그들이 혁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적 임금노동 양식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유럽 자본주의의 역사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설명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분석 대상은 실제 여기에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들, 즉 잡색무리가 되어야 한다.

 

  유럽의 발달한 항구도시에는 흑인, 크레올, 혼혈, 백인 극빈층 등이 섞여서 하나의 정치적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파업이나 반란 등을 통하여 어떤 정부에도 종속되지 않는 “다인종·다민족의 “히드라 정체”로서, 법을 집행하고 부를 나누며 전쟁을 벌이는 자치적 대항정권이 되었다.”(p.146) 이들은 유럽의 사람들에 의해 “공산주의적 수평파, 종교적인 도덕률 폐기론자, 반란을 일삼는 노예, 혁명적 급진주의자”(p.147) 등으로 묶여 히드라로 묘사되었다. 이들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제멋대로 나간 민주주의를 함축했다.”(p.147)

 

  그러나 벅-모스가 보기에 이들은 “본래 의미에서 ‘세계시민적’이었다.”(p.147)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보편주의’를 주창한 이들은 혁명의 시대에 인류라는 하나의 인종에 대해 말했으며, 당대에 이 이념은 후대의 역사적 흐름이 보여주려 한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표현되었다.”(p.149) 이것을 더욱 확대해서 해석하면, 현대로 들어오기 이전의 거의 모든 ‘단일한 정체성’에 대한 언급은 “하나의 은유다.”(p.156) 이들은 그 존재 자체로 “집단적 의미의 모든 기존 질서를 위협했다.”(p.158) 헤겔은 ‘보편사’라는 개념을 고안해냈을지는 몰라도, 이런 다중적인 정체성에 대한 통찰을 보편사 개념에 집어넣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프리메이슨의 존재를 다시 강조한다. 이런 다중적인 정체성을 당대에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집단이 바로 프리메이슨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모든 인간의 지식을 집대성하고 가장 본질적인 측면에 접근한다는 프리메이슨의 이념과, 여기에 가입되어있는 여러 종류의 흑인들의 문화적 전통이 그 단체 속에서 결합한다는 사실이다. 서로의 문화적 전통에 대해 잘 모르는 개인들은 상징과 기호를 사용하여 소통한다. 다른 하나는 여기에 가입하고 의식을 치르는 흑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존재를 박탈당하는 경험을 한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습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었음을 인식한다. 이 두 요소가 뒤섞이면서, 벅-모스에 따르면 “여기서 출현하기 시작한 보편사의 규정은 이렇다. (...) [문화적] 파열 지점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출현한다. 자신의 문화가 무리한 압력을 받아 붕괴될 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문화적 한계를 뛰어넘는 인류를 표현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불연속성 속에서다.”(p.184)

 

  물론 벅-모스도 아이티 혁명 전체가 이것을 온전히 성취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는 노예제를 그대로 이식한 노동의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아이티라는 국가를 수립함과 동시에 다중적인 정체성은 사라지고,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회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티 혁명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혁명의 순간에 세계시민주의적인 것으로서의 보편사적 성향이 드러났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이 보편사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역사를 재서술함으로써 발견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럽적인 이념으로서의 ‘보편사’로부터 보편사를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획에는 끝이 없으며 다만 무한히 고리들을 잇는 작업만이 있다. 고리들이 지배 없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종합적이기보다 측면적이고 부가적이며 혼합주의적일 것이다. 보편사의 기획은 종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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