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독일관념론 보고서>

1. 들어가는 말

  칸트의 실천철학, 특히 사회·정치철학은 근대의 계몽주의적 개인주의를 대표하는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역사철학과 관련된 논문, 그 가운데서도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추측해 본 인류 역사의 기원」, 그리고 『영구평화론』에 제기된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현대 이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그 이론적 완결성과 현실성을 잃지 않고 있다. 물론 그가 직접 정치사상, 또는 정치철학에 대한 글을 기획하고 완결된 서술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만큼 더욱더 끊임없이 그 의미가 재해석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회철학자는 다름 아닌 루소이다. 그의 역사철학 관련 논문 곳곳에서는 루소의 사회철학, 실천철학의 전제와 결론들이 반영되어있다. 특히 인류의 기원과 최초의 사회의 구성에 대한 견해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비교해 볼 때 그 내용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으며, 칸트 고유의 사회계약론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수용과 비판을 통해 탄생했다. 그러므로 사회화되기 이전의 개인의 모습에 대한 묘사와 사회화 과정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는 무척이나 닮아있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보았을 때, 칸트의 사회철학과 루소의 사회철학과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교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칸트는 루소의 사회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의 체계를 정립한 것이다. 따라서 루소의 사회철학의 형태와 특징을 명확하게 밝히고, 칸트의 역사철학, 실천철학과 사회철학을 비교하는 것은 칸트가 의도하고자 했던 바를 더욱 명확하게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서 현대의 이론적 논의를 근대적으로 대표하는 두 학자의 견해를 비교함으로써 바람직한 공동체란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풍성한 논의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2. 칸트와 루소의 이론적 기반 – 자유와 사회 이행

  칸트는 기본적으로 인식론적, 실천적으로 계몽된 개인들이 모여 각각의 개인이 결단에 의해 승인한 가치로 구성된 공동체(사회)를 지향한다. 그의 정치사상에서 가장 특징적인 면은, 그의 비판철학의 체계 전체가 띄는 특징이 그러하듯 절차와 형식적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형식적 중요성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각 개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자유이다. 칸트에게서 이러한 정치적 자유는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도덕적 권리라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자유와 공동체는 언제나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이 둘 사이의 조정의 수단으로서 칸트는 최고의 권위체(지배자)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최고의 권위체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결단의 집결체이며, 그 집결은 모든 개인이 참여하는 협의를 통해서 이뤄진다. 또 그 경우에만 그 최고의 권위체는 정당하게 각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 그 최고의 권위체 자체가 그 근거를 개인의 자유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는 것은 곧 자유로운 것이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구분한 이후로, 근대의 정치사상가들에게 자연상태의 인간 – 자연인과 사회상태의 인간 – 정치적 인간의 구분은 이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인간이 정치적 존재로 변하는 근거, 그리고 그것이 정당성을 가지는 근거를 자연상태의 인간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른바 자연권의 문제이다. 홉스에게 자연권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리였다. 그러나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거의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바라는 것이 겹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계약은 개인이 자연상태에서 누렸던 자연권을 포기하고 억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반대로 로크는 자연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취득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다는 뜻으로 자연권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전제적인 정권은 자연을 독점하여 취득을 방해하고, 소유를 침해하여 자연권을 침해한다. 따라서 그런 전제정권을 거부하고 자연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사회계약을 하고 계약을 통해 창출되지 않은 현실의 전제정권에 대항한다.

  그러나 루소는 이런 자연권 개념에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홉스나 로크 같은 사회계약론자들이 제시하는 자연상태가 진정한 자연상태가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루소가 보기에, 그들은 이미 충분히 사회상태로 이행한 사람들을 자연상태라고 상정한 뒤 자연권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자연상태보다도 더 이전의 사람들, ‘진정한’ 자연인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전반부의 주요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루소가 자연인,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인간에게 내재한다고 본 두 가지 특징은 자유에 대한 의식과 완전가능성이다. 인간은 자연이 설계한 그대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한다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물론 이것은 자연인에게는 단지 감각에 대한 반응, 또는 자연적 성향에 대한 부정적 태도 정도에서 출발하지만, 이것은 점점 발달하여 적극적인 계획 설계와 행동 방식의 창안으로 나아간다. 또한 단순히 주어진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게끔 끊임없이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더욱더 고도로 이것을 추구한다. 완전가능성이란 이와 같은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완전가능성에는 도덕적인 의미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정념, 감각적 충족을 향해서만 발휘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악한 일을 할 수도, 선한 일을 할 수도 있는 능력이다. 자유 또한 마찬가지인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뿐 그것이 어떤 도덕적 함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자연인의 고려사항에 아예 없다. 그의 첫 작품인 『학문예술론』에서는 완전가능성이 가장 잘 발현된 학문과 예술이 인간을 선이라기보다는 악, 도덕적 고양이라기보다는 타락으로 이끌어간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칸트는 인간의 자연상태에 대한 루소의 분석을 받아들인다. 자연인에게는 도덕적인 면모가 전혀 없다. 물론 그러한 자질이 인간의 내부에 잠재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순하게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태초의 인간은 감각기관의 자극에 반응하는 수준으로만 행동하지만, 자극의 축적과 지속적인 분별작업에 의해 내재된 이성이 작동을 시작한다. 또한 이 이성에 의해 자연적 경향을 거부함으로써 최초로 자유를 의식하게 된다.

  집단적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계기가 우연적이라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공통점을 보인다. 모든 인간은 혼자서도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또한 자신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타인과 떨어져 사는 삶은 거의 필수적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우연히 협동의 용이성을 알고 그것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모여서 살기 시작한다. 이 시기까지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충족적이며, 단지 몇몇 일들을 협동해서 처리할 뿐이다. 그러나 교환이 시작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면서 집단적 생활은 개체들의 병렬적 집합을 넘어 유기적 결합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곧 공동체를 결성하면서 생기는 모든 문제들의 뿌리이기도 하며, 사회적으로 악이라 평가받는 사건들의 발생을 이끈다. 자신들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3. 칸트와 루소의 분기점 – 공동체의 성격, 인간, 최종적 지향점

  그러나 시민사회 공동체의 최종적인 지향점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 대립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첫째는 공동체의 성격과 정당성의 확립에 대한 부분이다. 루소는 일반의지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절차적인 정당성과 도덕적 당위성을 통합시킨다. 일반의지는 개념적으로 모든 사적인 이해관계가 배제되어 있으며, 공동체 내 구성원이 모두 따라야하는 것으로 강제된다. 반면 칸트는 개인들이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도덕적인 면을 아예 배제한다. 공동체의 근거인 자유는 도덕적인 평등함에 근거하여 주어지지만, 그 자유를 사용하는 과정이 도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계몽된 개인들이 공동체를 구성한다면, 그 공동체는 도덕적으로도 다른 공동체에 비해서 우월할 것이고 그것이 법률을 통해 강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칸트에게 법의 정당성과 내용은 루소와는 다르게 통합되지 못하고 긴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공동체 내에서 활동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에 대한 입장이다. 특히 이는 두 사람의 상업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루소는 기본적으로 공동체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봉사하는 상인들을 매우 경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충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안녕을 해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며, 이것은 공동체 내에 항상 위험요소로 남는다. 이러한 의지의 동기는 대개 금전적 이익을 통해 이루어진다. 더군다나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지면 심해지고 있지, 덜하지 않다. 루소는 이런 점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즉, 물질적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 즉 상업적인 이득은 ‘노예들이 쓰는 말’이며, 만약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은 피하는 것이 옳다. 물질적인 이득을 매개로 하지 않는 시민으로서의 의식, 자질, 소양 같은 것들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인간으로 불릴 수 있으며, 이런 사람 가운데서 행정부의 구성원이 될 인물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서 꼭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오히려 그들이 개인적인 이기심을 활발하게 추구해야만 공동체는 도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자연이 인간의 역사를 기획하는 순간에, 그 모든 이기적인 질서들이 인간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설계해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은 상업활동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에, 상업의 활성화는 공동체 사이의 전쟁을 예방하는데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문명사회 이후에 시민들은 더 이상 정복이나 다른 폭력적 수단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충동과 미몽에 의해 지배받는 수단들이다. 계몽된 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은 교환이며, 그 교환을 기초로 형성된 경제체제이다. 폭력은 이 경제체제의 근간을 흔들고 교환행위를 방해한다. 이것은 다름아닌 각 시민의 이익추구를 방해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런 국가는 더 이상 시민들의 지지를 받기 힘들고, 자신의 힘을 소모시킨다. 따라서 계몽된 시민들은 이러한 사태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세계적 수준의 구속력 있는 공동체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또한 여기에서 개인들의 이기적인 동기와 도덕적 요구는 하나가 된다.

  셋째는 궁극적인 공동체의 모습에 관한 구상이다. 루소는 공동체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좋지 않으며, 나쁜 정치체제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구성원의 숫자에 따른 것이든 그 공동체가 영위하는 토지에 따른 것이든, 공동체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정치적인 의사결정과정에서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지분이 그만큼 적어지며, 그에 따라 정치에 대한 관심 자체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 체계에서 개인들이 정치적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은, 그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이것은 곧바로 공동체의 위기와 연결된다. 따라서 그는 소규모 공동체를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각 공동체가 일반의지를 중심으로 통합된 동질적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상정하는 이상적 공동체는 현실에서 어느 정도 실현가능한 형태로 주어지며, 루소는 실제로 그리스와 로마의 시민사회를 역사 속에 존재했던 이상적인 공동체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 뿐이다. 따라서 그의 이상적인 공동체는 그 지향점이 명확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 복고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칸트는 각각의 공동체들이 통일된 세계시민사회로 발전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각 개별 공동체가 자신의 자유를 잘못 사용할 경우, 그것은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 하지만 개인이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러했듯, 국가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자유에 근거에 세계적 수준의 기구를 창설하게 된다. 개인과 시민사회의 관계와 개별 국가와 세계적 수준의 기구 사이의 관계에는 분명한 유비가 존재한다. 이는 국가 간에도 각 개별국가의 자유와 그에 따른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정당한 형식적 절차가 있음을 말해준다. 그것이 비록 느슨한 연맹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그 구조는 그 연맹은 각 개별 공동체에 대해 구속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공동체의 탄생 자체가 인류의 역사, 특히 도덕적 역사에 일대 혁명을 불러오는 사건이며, 영원한 평화라는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과연 달성할 수 있는 것인가? 칸트는 그것이 현실에 완전한 형태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상적 공동체(또는 이상적인 도덕적 상태)의 실현은 한 개인의 내면에서는 불가능하며, 유적 존재로서 인간 전체에 걸쳐서 일어나는 변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이것을 달성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실제로 구현되는 것은 역사의 가장 나중에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어감은 현실가능성이라기보다는, 부단한 과정으로서, 그리고 그 과정을 무한히 실천하는 구체적인 개인들의 모습에 더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따라서 그는 루소와는 달리 그 공동체가 미래지향적이지만 또 그만큼이나 미결정적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공동체가 달성된 적이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4. 맺는 말

  칸트와 루소는 모두 똑같이 근대라는 기반을 밟고 서있었다. 루소는 자연인과 사회상태를 새로 정의했다. 이런 이론적 작업으로 말미암아 그 이전의 이론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특히 복고적 이상을 설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의 이론, 학문과 이성의 진보에 대한 그의 불신은 근대 속에서도 그것을 비판하는 선구자적인 시선이었다. 또한 그의 이러한 관점은 근대정치이론의 역사에서도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현실 정치에 대한 함의 또한 혁명적이었다. 칸트 또한 이러한 점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칸트가 루소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데, 그 이름을 자신의 저서에서 직접 거론하며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사회상태를 향한 인류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루소의 분석은 칸트에 의해 전폭적으로 수용되었고, 칸트의 체계 속에서 새롭게 변용되었다.

  따라서 칸트의 사회·정치철학은 루소와 공유하는 부분도 있으며, 그와 명확히 반대되는 부분도 있다. 그는 인간의 발전에 있어서 도덕적인 부분이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것, 인간의 이성은 정념에 이끌려서 그 결합이 실제로 발전의 노정에 놓여있다는 것, 따라서 사회는 어떤 필연성이나 자연적 경향에 따라 결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우연적인 사건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루소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이것은 둘의 이론이 우연히 일치한 것이라기보다는, 칸트가 루소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칸트는 그러한 루소의 정치이론을 극복하기 위해 그와 반대의 입장을 개진하기도 한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행동의 지침, 무엇을 해야하는지 당위까지 제공해주지만 칸트가 생각하는 이상적 공동체는 도덕을 강제하지 않는다. 칸트적 공동체는 자신의 자유에 의해 승인된 한에 있어서만 그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며, 그것이 도덕과 결부되지는 않는다. 물론 그러한 공동체가 도덕적 성취 또한 달성할 수 있으나, 그것은 인간들의 계획이 아니라 자연의 계획 전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부각되던 상업 부르주아지들에 대한 태도도 눈에 띄게 다르다. 루소의 경우 자신의 이익을 공동체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인간으로 이들을 바라보았고, 따라서 공동체에 해가 되는 존재들이라고 판단하여 배척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평화적 수단으로 시민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상업행위가 사회의 발달에 기여할 것이며, 나아가 상업행위 내에서 이기적으로 발현되는 시민들의 행위 자체가 인류 역사의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루소는 스스로가 생각한 이상적 공동체의 형태가 과거에 특정한 형태로 존재했다고 어느 정도 인정하는 데 비해서, 칸트의 공동체는 무한하게 열린 미래에 놓인 미결정적 상태이다.

  칸트가 루소와 벌인 이론적인 대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람직한 공동체와 인간이란 어떤 모습인가 하는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인 논쟁이다. 그 둘의 견해의 차이는 끊임없이 다른 형태로 부활하여 사회·정치철학의 주요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다. 우선 루소의 사회이론은 근본적으로 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혁명적 입장에 의해, 왕정과 전제정에 대항하는 논리적 근거로서 활용되어왔다. 그러나 동시에 로베스피에르 등에 의해, 그리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대중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구조로 오해(또는 이해)받아온 것 또한 사실이다. 반면 인간의 도덕적 평등으로부터 모두에게 평등한 정치적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이끌어낸 칸트는 이후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전통의 이론적인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칸트적인 자유주의는 계몽주의의 가장 정교하고 완성된 형태의 이론으로 간주되며, 근본적으로 어떤 일관된 가치체계를 옹호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칸트가 옹호했던 상업공화국의 이상은 현재 자본주의의 폐해의 뿌리이며, 그가 예상한대로 상업이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 사태에까지 도달하였다. 단순히, 칸트가 예견한 공동체는 우리에게 오지 않는 상태로, 영원한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특정한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제시하는 이론적 경향은, 미래를 식민화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칸트가 강조했듯이 공동체의 철저한 기반인 개인의 자유이다. 자유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개인의 결단이다. 공동체가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결국 공동체의 모든 성격과 지향점의 근원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개인의 실천에서부터 출발한다. 비록 칸트 스스로는 자연적 경향에 의해 인도되는 것일 뿐 개인 자체가 도덕적인 결단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칸트 그 스스로가 그러하듯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바람직한 시민사회를 미래에 투사하고 그것을 위해 힘겨운 한걸음을 내딛는 데 가장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루소 비판과 극복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현재적이며, 나아가 칸트 스스로가 미결정이며 무한한 시간 뒤에 오리라고 설명한 그 상태가 (언젠가는) 현현할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정치적 근거이다.


* 참고문헌

강정인, 김용민, 황태연 엮음, 『서양근대정치사상사』, 책세상, 2007
레오 스트라우스·조셉 크랍시, 『서양정치철학사2』(이동수 등 옮김), 인간사랑, 2007
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역사철학』(이한구 옮김), 서광사, 2009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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