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철학과 해석학 보고서. 『철학적 해석학 입문』 7장 요약.>
1. 들어가는 말
Heidegger를 전유한 Gadamer의 해석학은 인간의 주관성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주관의 조건의 보편성으로부터 출발해 열려있는 해석적 지평으로 나아가려 했다. 이런 입장은 이전의 해석학과는 다른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철학적 원리를 다양한 학문분야에 적용시키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철학의 역사 그 자체에서부터 문예비평, 미학, 나아가서는 사회과학의 기초를 이루는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논의되고 수용되었다.
그의 철학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치 않았다. Gadamer는 『진리와 방법』발표 이후 그 저서에 담긴 입장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와 마주한다. 이 가운데 그가 각각 Betti, Habermas, 그리고 Derrida와 벌인 논쟁은 그의 해석학의 여러 면모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적 여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논쟁으로 평가받는다. 세 비판가들은 Gadamer의 철학에서 이해의 결여(Betti), 보수주의적 함의와 이데올로기 비판의식의 부족(Habermas), 무한한 지평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유의미성(Derrida)을 각각 문제삼았다.
또한 Heidegger·Gadamer의 해석학과 별개로, 프랑스의 해석학자 Ricoeur는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적 해석학을 구축하였다. 그는 인간이 죄에 구속을 받고 있지만 끝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를 토대로, 그 인간에 대한 이해를 내적으로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밝힌다. 하지만 이런 내적인 면모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상징의 체계를 거친다는 것을 통찰한 이후, 철학의 목표를 그 체계를 해석하는 것으로 바꾸면서 현상학에서 해석학으로 나아간다. 그의 상징해석은 인간의 조건을 설명하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해주었다.
2. Betti VS Gadamer
Betti의 해석학은 Heidegger․Gadamer가 세운 새로운 해석학적 전통에 대항하여 방법론적 해석학을 복권시키려 시도한다. 이런 맥락에서 Betti를 Dilthey 전통에 편입시킬 수도 있다. 이에 대립되는 Heidegger와 Gadamer의 해석학은 존재론적 해석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해석학의 위치와 영역의 문제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해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에게 해석학은 존재의 조건이자 양태이다. 이들에 따르면 현존재,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해석하는 존재이면서 또한 그들의 존재는 해석을 통해 규정된다. 다시 말해, 이 세계를 해석해야만 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능동적으로 해석하며 세계의 내용을 창출해가는 역설적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해석학은 이 양식을 기술하는 현상학적 작업이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론적 해석학의 경향은 그 이전의 해석학, 즉 방법론적 해석학의 이념에는 어긋난다. 이 이전의 해석은 정신을 올바르게 이끌어 대상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해석학은 해석에 대한 연구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기존의 해석학은 해석대상의 정확한 의미보다는 해석하는 주체의 능동성을 강조하고 결국 존재에 대한 연구로 전환되는 존재론적 해석학과는 거리가 멀다. Heidegger와 Gadamer의 입장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기술적descriptive 해석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들에 반대되는 방법론적 해석학은 대상의 의미를 올바르게 밝혀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의미의 규범적 해석학이다. Betti는 이 규범적 해석학의 입장에서 Gadamer를 비판하는데, 이 둘의 입장 차이는 1960년대 초반 두 학자가 직접 벌인 논쟁으로 인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 논쟁은 두 학자 사이의 논쟁임과 동시에, 전통적인 의미의 규범적-방법론적 해석학과 Heidegger와 Gadamer를 거치며 탄생한 기술적-존재론적 해석학의 이론적 대결이기도 하다.
두 학자 모두 자신의 해석학적 입장을 보편적인 해석학이라고 생각하며 왜 보편적인지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각자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Gadamer가 해석학적 보편성을 이야기할 때, 그 뜻은 모든 현존재들이 같은 해석학적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반편 Betti가 해석학의 보편성을 이야기할 때에는, 해석학이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모든 학문에 방법적인 토대가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해석은 정신과학의 보편적 방법이며, 해석학은 이 방법의 속성, 절차, 체계 등을 밝히는 방법에 대한 연구, 즉 방법론이 된다.
Betti가 이렇게 주장하는 해석학적 근거는, 모든 정신과학의 대상은 ‘의미를 담지한 형식들forma rappresentativa’이라는 점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모든 수단을 일컫는다. 이 점에서 Betti의 해석학은 해석interpretation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연구로 바뀐다. 즉, 주관의 개입보다는 외부의 형식과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를 어떻게 해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가, 혹은 파악해야 하는가가 Betti 해석학의 관건이다. 형식은 단순히 아무렇게나 모인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형식을 기획한 사람의 일관된 의도에 의해 조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해석학들이 형식이 담고 있는 의미를 투명하게 파악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고 충분히 논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규명해내려는 작업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인식해야 할 대상은 해석을 통해 드러나는 해석자의 내면이 아니라, 말하는 이(글쓴이)가 형식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의미여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존재론적 해석학자들이 강조하는 선이해와 지평의 융합은 자기반복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르면, 모든 해석은 자신의 의미의 체계를 자신의 내면에 투영하고 재확인하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Betti는 인식은 해석이 아니라 이해이며, 이해를 통해서만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해를 통해 그 모습을 어느 정도 드러낸 형식의 내용, 즉 의미는 해석을 자의적이지 않게 이끌어주는 표준이 된다. 이로써 형식의 의미Bedeutung와 유의미성Bedeutsamkeit은 구별된다. Gadamer의 해석학이 유의미성의 현상학이라고 한다면, Betti의 해석학은 유의미성의 현상학이 필연적으로 의미에 대해 소홀해지고 따라서 해석자에 의존하는 상대주의에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올바른’ 이해의 규준으로서 네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해석학적 자율성의 규준der Kanon der hermeneutischen Autonomie이다. 여기서의 자율성은 해석자의 자율성이 아닌, 형식을 구성한 사람(말하는 이, 글쓴이)의 자율성을 뜻한다. 그는 자기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해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의도 그리고 그 의도가 낳은 의미를 최대한 존중하는 상태에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해석자의 내적인 의미의 체계 또는 경험은 가능한한 배제되어야 한다.
둘째는 전체성의 규준der Kanon der Ganzheit이다. 어떤 형식의 체계에 의지해 표현된 여러 문장들은, 그 문장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의미를 담지한 형식’의 전체적인 의도와 항상 연관지어 해석해야 한다. 그 형식은 전체적이고 일관된 의도를 가진 존재들에 의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형식은 정합적이다. 그러므로 해석에서 전체 형식은 언제나 고려되어야 한다.
셋째는 이해의 현재성의 주관주의적 규준der Kanon der Aktualität des Verstehens이다. Betti가 의도한 것은 언제나 해석이 아닌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현재에 생생하게 살아있기 위해서 해석자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였다. 이런 입장을 밝힌 규준이 바로 이 세 번째 규준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선이해를 전부 투영하는 Gadamer적인 참여가 아니라, 그 형식을 만들어낸 말하는 이가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정신적으로 추적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이 과정은 어쩔 수 없이 해석자의 경험을 반영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살아있는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은 해석이라기보다는 번역에 가깝다.
넷째는 해석학적 의미상응성hermeneutische Sinnentsprechung 또는 해석학적 동등성의 규준der Kanon der Sinnadäquanz des Verstehens이다. 해석은 언제나 이해에 따라 말하는 이와 해석자 사이에 그 의미가 일치된다는 전제 아래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의미는 말하는 이의 의미와 해석자의 이해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해석자에게 내면화되며, 죽은 형식에서 살아있는 의미로 다시 귀환한다.
그러나 Betti의 이러한 시도는, 그가 강조한 만큼 의미가 그렇게 확정적일 수 있는가에서부터 큰 문제에 부딪힌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이 말은 그의 주장의 강도만큼이나 해석학 내에서 논쟁적인 주제이다. 존재론적 해석학자들이 선이해 개념을 끌어들여 해석학을 해석자 중심으로 정초한 것은 결국 이 의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Betti는 방법론으로 복귀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지만, 규준을 통해 밝혀진 의미가 정말 정확한 것인지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질 수 없다. 방법은 그 방법이 내어놓을 발견의 결과를 전제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방법 자체에 대한 검증의 방법이 없는 한 해석학적으로 의미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질 수 없다.
Betti는 이후 자신의 규준이 적극적으로 작용하기보다는, 해석의 과정에서 피해야할 것을 알려주는 소극적인 표준으로만 기능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런 부정적 기능은, 정신과학의 토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방법론적 해석학의 이념을 상당부분 훼손시킬 수 밖에 없다. 과학이 아닌 것을 배제한다고 해서, 과학이 아닌 것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Betti가 의미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완전히 주관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존재론적 해석학에 대해 그 위험을 비판했다는 점이다.
3. Habermas VS Gadamer
Habermas는 본인의 사회과학이론에 규범적이고 언어이론적인 정초를 시도했다. 그는 이러한 시도를 위해 Wittgenstein의 언어이론과 언어놀이에 대한 학설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여기서 Habermas는 모든 행위자가 자신의 언어세계에 감금되어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에 대한 논제에서 실증주의의 잔재를 진단한다. Habermas는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해석학을 활용했다.
Habermas는 1970년대에 Gadamer의 해석학적 통찰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뒤 영미의 언어철학적 전통과 조우시킴으로써 사회이론을 위한 종합적인 언어이론을 설계할 수 있었다. Habermas는 1981년에 출간된 『의사소통 행위이론』에서 체계적인 표현을 갖추게 된 자신의 언어 철학에 이러한 해석학적 통찰을 통합시킨다. 여기서 그는 보편적 화용론에 바탕을 둔 의사소통 행위이론을 구축하고, 그 이론에 입각하여 비판적 사회이론의 규범적 기초를 새롭게 설정한다. 이 새로운 언어 이론의 곳곳에는 체계적이고 명시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여전히 Gadamer의 해석학의 통찰들이 수용되어 있고 아울러 극복되어 있다. 이런 연관에서 볼 때 Habermas의 의사소통이론은 Gadamer와의 논쟁으로부터 가장 잘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식 과정에 내재된 전통과 이성의 변증법적 관계가 이 두 철학자 사이의 논쟁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Gadamer와 Habermas의 공통적인 출발점은 의미 이해를 해석의 모델에 입각해서 해명하려는 데 있다. Gadamer는 해석자가 해석 대상에 귀속되어 있음을 해석적 반성의 결정적인 요소로 확정한다. 이로부터 이해의 역사성이 해석학의 원리로 고양되며 모든 비역사적, 방법론적 인식에 대항하는 해석적 진리의 보편성이 요구된다. 더 나아가 Gadamer는 해석적 경험의 본질을 영향사적 의식으로 규정하고 모든 이해 과정이 전통에 귀속될 것을 촉구한다.
Habermas는 의미 이해에 있어 해석자가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 즉 이해와 전통의 영향사적 결합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입장으로부터 Gadamer가 전통의 존재론적 우위를 끄집어내는 데에는 반대한다. Habermas는 전통의 정당성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하며 일상적인 상호주관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이해에 앞선 구조인 사회적 합의는 체계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 언어적 전통을 포함한 사회화과정 속에는 권위의 요소가 상존하기 때문에, 참된 합의가 가능한 만큼 지배이익에 의해 왜곡된 합의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주어진 현실을 가치척도로 상정하는 Gadamer의 해석학은 이상적인 상황을 전제로 할 때만 성립할 수 있는 논리라 생각했다. 현실을 규정하는 모든 가치가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현재의 시점에서 작용하고 있는 전통과 권위, 선입견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모든 해석행위는 인간사회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기존질서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시도해야 한다. 따라서 Habermas에게 해석은 곧 비판을 의미한다. 지배와 노동이 담화과정을 왜곡시킬 수 있는 것처럼 역으로 진실한 의사소통을 통해서 지배와 억압의 구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비폭력적인 언어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합의이다. 그는 다수에 의해서 견지되는 왜곡된 합의와 허위의식의 가능성을 문제 삼았고, Gadamer의 해석학이 이러한 문제를 소홀히 함으로써 사실상 현실을 정당화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해석자가 이해 과정의 참여자로서 해석적 출발 상황의 선이해에 결부되어 있긴 하지만, Gadamer의 존재론적 입장은 이러한 귀속성으로부터 텍스트의 존재론적인 우위를 주장하게 하며 해석자의 위치를 은연중 격하시킨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Habermas는 여기서 Gadamer가 계몽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Gadamer는 전통이 이해되어야할 대상인 텍스트나 텍스트의 해석자를 함께 떠받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전통 속으로 참여하는 행위를 전제한다고 말한다. Habermas는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면서도 해석자는 이성을 통해 비판적·반성적으로 그 텍스트를 이해해야한다며 자신의 비판철학을 내세웠다. 이런 텍스트에 묻어있는 외부적인 요인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의 견해차이가 다음 논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수사학 또한 Gadamer와 Habermas의 논쟁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Gadamer는 반성적으로 통찰된 소통을 수사학적으로 목표된 소통에 대항하여 제시하는 것은 인위적이라고 하면서 수사학의 전통에 동조했다. 그 이유는 수사학을 통해야만 보다 확실한 의미 전달이 오가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수사학을 비판과 대립시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에서 협의된 소통의 기회조차도 과소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Habermas는 해석학적 관점에 대한 논의에서 “외견상 ‘일상적으로’ 작동된 합의가 사이비 의사소통의 성과일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대화를 거친 동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은폐된 지배구조에서도 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적으로, 즉 반성적으로 통찰된 동의는 순수한 수사학적 혹은 전략적(즉 목표가 조작적으로 설정된) 합의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메타해석학 혹은 심층해석학의 통찰은 “의미이해에서 제한되는 모든 합의는 근본적으로 사이비 의사소통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 해석학은 “이해를 이성적인 말의 원칙에 결합하는데, 그에 따라 진리는, 제한되지 않으며 지배로부터 해방된 의사소통의 이상적인 조건 아래서 달성될 수 있다는 그 합의를 통해 보증된다.”
다시 말해, Habermas는 (Gadamer에 따르면 생각될 수 없는) 수사학으로부터 독립된 소통이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수사학은 전통이나 권위에 의해 이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 반성적으로 통찰된 소통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Habermas는 Gadamer와의 논쟁을 통해 더욱 단호하게 비판적 사회이론의 언어이론적 기초로 파고들었다. 이것이 그를 보편화용론의 전개,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 인도했다. 그의 중심적인 직관은 사회 이론과 그 담화 윤리의 규범적 기초가, 의사소통과 합의를 목표로 하는 언어 사용의 화용론적 함의나 타당성 요구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Habermas의 비판 철학의 과제는 언어 사용과 관련해서 직관적으로 만들어진 전제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Habermas는 보편적인 합의가 원리적으로 대화 속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Gadamer의 해석학에서 발견하였고, 언어와 합의가 그 근원이 같으며 서로를 설명해주는 개념들이라고 생각한다. 합의라는 해석학의 근본 범주는 Habermas에게서 새로운 보편화의 단계를 열어주었다. 합의는 이제 모든 언어 사용의 암묵적 목적이자 공통의 토대로 간주된다. 그러한 행위는 전략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언어가 소통을 오용하는 곳에서도, 그것의 타당성이 합의와는 무관한 목표설정으로 악용될 뿐인 합의의 이념 위에서도 기생적으로 살아간다. 합의에 대한 이렇게 포괄적으로 시도된 예견으로부터 Habermas의 담화 윤리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해야만 하는 윤리적 전제들이 추론될 수 있다.
Habermas가 주장하는 해석학의 보편성 요구의 혁신에서 중요한 것은, 수사학적 이해의 이념을 언어의 목적과 동일시하는 것이 윤리적 귀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Gadamer는 Aristoteles의 상황윤리에 기대어 실천적 지혜의 실현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끊임없이 형성되는, 좋은 삶과 소통에 대한 자신들의 표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공동체에 의지하여 이뤄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반면에 Habermas는 해석학과 보편적으로 착상된 합의의 이념 배후에 있는 Kant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항상 보편적 합의의 원리를 반사실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그는 Kant 철학의 전통에 입각해서 현대 철학자들의 도덕 이론을 자기 방식으로 수용하고 계몽주의 사조를 옹호한다. Habermas의 담화윤리학은 의사소통의 이론을 실천과 관련하여 이론적으로 전개해 나아가고자 한다. 담화윤리학은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의 일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진리에 관한 물음은 담화에서 제기되고 해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담화윤리학의 형식주의와 합의는 관련이 깊다. 담화는 이론적 혹은 실천적 타당성 요구를 이성적 근거로써 인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렇게 담화윤리학의 이점은 독백적인 주관에서 벗어나 상호주관적 이해를 통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있다. 또 진리는 상호주관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타당성을 갖는 범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진리의 이념은 오직 타당성 요구를 이해함과 관련해서만 발전된다.”
Habermas에 의하면 진리는 주장 안에서 표현되는 진술의 사용의미이다. 같은 의미에서 진리는 진술의 성질이다. 예컨대 우리는 근거 지을 수 있는 진술을 참이라고 부른다. 주장 안에 내포된 진리의 의미는 경험에 기초한 타당성 요구를 담화적으로 이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할 수 있을 때 충분히 해명될 수 있다. 이러한 해명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진리에 관한 합의의 목표이다. Habermas에 의하면 합의는 담화의 형식적인 성질로써 “더 나은 논증의 본래적으로 강제 없는 강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담화의 출발점은 논리적 강제나 경험적 강제만을 통하여 결정될 수 없고” 더 나은 논증의 힘을 통하여 결정될 수 있어야 한다.
하버마스의 담화윤리는 그 형식적인 성격 때문에 내용이 충실한 정의로운 사회적 관계의 모델이 될 수는 없고, 사회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절차만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그의 담화이론이 개인 사이의 관계 영역과 사회 원리의 정립에 타당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충분히 던져볼 수 있다.
4. Derrida VS Gadamer
Derrida는 플라톤 이래의 서구 철학이 ‘신’과 같은 통일성의 원리로 작용하는 중심적 체계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고는 절대적 기초나 제일 원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사고라고 부른다. 또한 Derrida에 의하면 이러한 사고는 이항 대립이나 이분법 위에 성립한다. (예컨대 파롤/랑그, 기표/기의, 통시성/공시성, 말/글, 객체/주체, 현상/본질, 내용/형식, 육체/영혼, 공간/시간) 이항 대립의 사고는 진리와 허위 사이에 엄격한 경계를 긋고자 하며, 상호 배타적인 두 구성 요소 중 어느 하나에만 특권을 부여하고 나머지는 부정하는 배중률에 기반을 둔다. Derrida의 해체란, 이러한 이항 대립에 기초한 서구 전통적 사고,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비평적 작업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해석학에 대한 Derrida의 비판은 형이상학적 전제를 부정하는 해체주의의 특성이 기반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해석학에서의 ‘소통’ ‘이해’라는 것이 이성-로고스주의에 입각한 형이상학적 전제에 다름 아니라고 Derrida는 말한다.
Derrida의 해체주의가 Gadamer의 철학적 해석학과 맞서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과연 Gadamer에서 말하는 ‘이해’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Gadamer 해석학은 인간적 삶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며, 여기에서 이해는 두 지평간의 융합 과정 즉 이해되는 존재와 이해하는 존재 간의 상호 대화에서 이루어진다. Gadamer에 따르면, 표현이란 ‘누군가를 위한 표현’이며 이해되어지기를 원한다. 이로부터 모든 해석학적 현상의 배후에는 개별성간에 서로 이해하려는 의지, 즉 선한 의지가 전제되어 있다.
Derrida는 우선 대화를 통한 이해에서 Gadamer가 선행조건으로 내건 ‘선한 의지’라는 것이, 타자성을 형이상학적 전제로써 극복시키는 논리라고 비판한다. 즉, Gadamer는 대화에서 성취되어야 하는 이해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을 가정한다. 다시 말해, 대화에서 각각의 참여자는 다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경청하여 이해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Derrida는 이러한 주장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으며, 대화의 의지가 모든 구체적인 상호작용보다 앞서감으로써 Kant적 의미에서 자명하고 무조건적인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Derrida가 주목하는 것은 이 선한 의지의 ‘절대성’이다. 즉 이러한 ‘선한 의지’는 통일 원리로서 권위적인 형이상학의 일환이다.
Kant는 ‘그것이 작용하는 바 그리고 달성하는 바, 또는 미리 설정된 어떤 목적의 성취에 유용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의욕함에 있어서, 즉 그 자체로 좋은 것’ 또는 ‘아무런 제한 없이 좋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의지라고 말한 바 있다. Derrida는 이른바 이해를 전제하는 선의지를 Kant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의지로 해석하고, 바로 이 절대성에서 철학적 해석학의 근원적 형이상학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Gadamer는 Derrida가 자신의 입장을 완전히 오해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선의지는 Kant의 형이상학적 선의지와 무관하며, 오히려 Platon의 대화 모델에 근거한다. 즉 ‘타자의 진술이 분명하게 이해됨(Einleuchtendes; eumeneis elenchoi)’의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서, 타자의 진술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토대로서 선의지가 놓여 있다는 말이다. 이를 통해서 잘못된 일치, 오해, 잘못된 해석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이해에 앞선 선한 의지를 부정한 Derrida는 대화 과정에서의 ‘단절’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대화의 성공적인 이해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히려 이해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려 한다. 물론 해체주의가 이를 통해 이해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의 차이를 그 중심에 두었던 것이다. 이해의 보편성은 이해의 차이가 극복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타자를 이해하는 문제는 극복이 아닌, 언제나 과정으로서만 진행될 수밖에 없다. Derrida에 따르면, 모든 텍스트는 의미의 불확정성 그 자체를 통해 해체된다. 따라서 모든 통일적인 의미부여는 불가능하다. 나아가 텍스트를 일종의 대화로 파악한다 하더라도, 그 대화는 이해와 합의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Gadamer가 말하는 완벽히 이해되는 대화에서의 인식 경험, 혹은 성공적인 확증의 경험을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Derrida의 말은, 대화는 오히려 견해의 차이를 보존하며, 타인의 진술을 낯선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
언어적 기호와 의미의 관계를 차연에 두어 통일된 이해를 부정한 것도 이같은 태도에서다. 의미는 언어의 덧없는 놀이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정립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의미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데 현재의 언어적 의미는 부재적 기표의 기능이기 때문에 의미 자체는 결단코 완전히 현재적일 수 없다. 즉 고정되지 않는다. 언어는 자신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지시하지 않으며 차연 속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을 지시한다. 차연이란 그것이 어떤 것을 지시할 때 항상 의미 없이 머무는 언어 현상을 말한다. 차연에는 의미의 차이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지연도 같이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이해되어지는 결정된 의미는 없고 기표의 끝없는 미끄러짐만이 있다.
“해체는 모두 ‘탈-전유’(ex-apprioriation)의 운동들이다.”라는 Derrida의 말은 단순히 해체론에 대한 정의라기보다는 해석을 거친 텍스트로서의 존재자 일반에 대한 정의일 수 있다. 해체는 개념적이거나 상징적인 고유한 정체성의 획득과 박탈을 동시에 가져오는 이중적 리듬이다. 이런 해체의 리듬은 모든 존재자 안에서 반복되고 있다. Derrida의 중요한 용어인 차연과 흔적은 그런 해체의 리듬에 붙이는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자 안에는 그것을 있게 한 차연이 있다. 하지만 존재자를 있게 하거나 없게 하는 차연은 존재자처럼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다. 차연은 존재자처럼 현전하거나 부재하지 않는다. 현전도 부재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차연은 흔적이다. 모든 현상은 흔적으로서의 차연, 차연으로서의 흔적에 의해 비로소 나타나거나 사라진다. “흔적은 나타남과 의미작용을 개방하는 차연이다.”
여기서 언어적 기호는 그러한 흔적에 해당한다. 일정한 형태의 흔적일 수 있는 가능조건은 여전히 또 다른 흔적들에 있다. 이런 소급적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따라서 현재 기록이 일어나고 있는 텍스트는 결코 현재화하거나 현전화할 수 없는 흔적들과 함께 엮여 있다. 흔적이란 “현재의 단순성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흔적들에 힘입어 비로소 일정한 형태를 얻는 기호화된 텍스트들은 결코 현전의 형식 안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런 텍스트 안에서 현전적 사태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결과에 불과하다. 가령 과거는 미래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고,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미래보다 늦게 온다. 원인은 결과에 의해 소급적으로 성립되고, 그런 의미에서 원인은 결과 뒤에 발생한다. 이 사후성의 논리 안에서 원초적인 것과 파생적인 것, 현전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과거에 있는 것과 미래에 있는 것은 서로의 가능성과 속성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사후적 시간성의 세계인 텍스트에서 순수한 현전은 불가능하며, 나아가 형이상학적 이항대립 역시 불가능하다.
기호란 결코 확고히 파악될 수 없고 끊임없는 차연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그의 주장에 대하여 해석학은 이해의 원리적인 가능성으로 응수한다. 참여 진리와 대화의 끊임없는 작용은 현전의 형이상학이 제시하는 고정된 의미의 비종료성을 말한다. 즉 해석학에서는 어떤 단어나 기호도 의미의 최종적인 현전으로 간주 될 수 없다고 굳게 믿는다. 또한 해석학 역시 단절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통 혹은 대화의 단절은 해석학에서 전면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물론 보다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대화의 공통성과 합의가 보다 근원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Gadamer는 해체주의자들이 언어를 ‘정신의 바빌론 유수’로 간주하고 있으며, 언어가 대화의 매개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와 같이 Gadamer는 차이와 소통의 단절을 중시하는 Derrida의 목소리를 이해에 이르는 기나긴 과정 속에 거쳐야 하는 한 국면으로 소화시킨다. Gadamer는 Derrida의 차연마저도 넓은 의미에서 동일성의 논리로 본다. 불변의 타자 존재는 동일성과 관련되며, 동일성 속에서 타자존재가 타자로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일성 속의 차이성’이며 이는 곧 ‘의미의 다의성(Mehrdeutigkeit)’이다. 뒤에 소개할 Ricoeur는 이런 현상에 대해 ‘해석의 갈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갈등은 Derrida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혀 화해되지 않는 모순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는 의미의 동일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해석의 과정일 뿐이며, 더 나아가 중단 없는 대화와 이해의 과정 속에서 지속적인 자기변화를 요구한다. Derrida가 주장하는 차이에 근거한 해체는 Gadamer가 제시하는 대화의 목표가 아니라 대화의 발단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대화 모델’에 근거한 자신의 해석학적 사유를 Derrida와의 논쟁에도 적용시키고자 한다. 차이와 불연속, 이해와 연속이라는 양자 간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간극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추구하고자 했던 공통적 차원은 분명 존재한다. 해석학과 해체는 의미의 정확한 결정가능성과 반복가능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이념을 극복하고자 하는 데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Gadamer는 논쟁 가운데 Derrida의 비판을 ‘하나의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자신이 구현하려 했던 대화해석학을 좀더 예리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이해, 대화로 나아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차이, 타자성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유용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5. Ricoeur의 해석학적 철학
Ricoeur의 철학 또는 해석학은 인간의 조건에 대해 근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 내용은 그가 가장 처음 쓴 책인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에서 등장한다. 의지적인 것은 주체가 자신의 뜻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유로운 상태를 뜻하며, 반대로 비의지적인 것은 결정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들을 뜻한다. 이 책은, 인간이란 장소에 이 두 측면이 절묘하게 결합되어있다고 말한다. 인간 주체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아무런 전제 없이 오로지 의지적으로만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의지적인 것을 분석해보았을 때는 필연적으로 비의지적인 것과 연관이 되어있다. 무엇을 결정하는 행위는 그 행위에 대해 사고하는 것,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 그리고 그 행위를 할 것을 스스로에게 승낙하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분석된 세 술어는 모두 대상을 갖는 술어로서, 이는 의지적인 것이 반드시 어떤 대상 - 비의지적인 것과 동시에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인간의 자유는 필연 혹은 외부적인 조건과 언제나 동시에 출현하며, 또한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서로가 상대방이 없이는 결코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Ricoeur의 학문적 방향은 이러한 대전제 위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러한 인간이라는 장소의 특성을 인간의 유한성의 근본적 원인으로서 파악하고, 인간이 악의 가능성을 떠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측면에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양식을 고찰할 수 있는 현상학적 방법이 유용하다.
그는 현상학의 방법과 태도를 차용하기는 하지만, 현상학을 정초한 Husserl의 전제에 대해서는 매우 강하게 비판한다. Ricoeur의 입장에서 Husserl의 현상학은 절차에 따라 합리적으로 반성하고 자신의 의식을 발견할 수 있는 자아, 즉 Descartes의 전통에서 가정하는 자아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현상학의 측면을 더욱 깊이 파고들면 들어갈수록 이런 자의식은 더 이상 합리적으로 투명하게 드러날 수 없다. 이는 위에서 Ricoeur가 주장한 바와 같이, 순수하게 사유하는 자아는 언제나 순수하지 않고 외부와 교류하거나 또는 그에 의존하여 자신의 자유를 전개해 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학에서 논외가 되어왔던 신체, 그리고 사유하는 자아 밖의 타자들에 대한 논의를 복권시켜야만 인간의 조건에 대해 올바르게 연구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라는 Heidegger의 입장을 수용한다. 인간이라는 장소가 갖추고 있는 조건은, Ricoeur의 철학적 탐구에서 가장 토대가 되는 전제임과 동시에 주체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외부의 조건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인간은 언제나 비의지적인 것에 자신의 의지 전체를 맡기며 오류에 빠질 가능성에 언제나 처해있다. 인간의 악의 가능성은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인간의 조건을 밝혀내는 현상학적 탐구의 결과는 여기까지이다. 현상학적 방밥은 그 방법의 고유한 한계 때문에 자아 밖으로는 결코 나갈 수 없다. 따라서 실제 악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악의 가능성으로부터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악한 행동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 현실의 문제가 어떻게 악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내야만 한다. 따라서 현상학적 방법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이미 역사적으로 남겨진 기호들에 담긴 악을 분석하기 위해 해석학적 방법이 동원된다.
따라서 그는 악과 선의 대립, 혹은 악 그 자체를 드러내는 비유가 담겨있는 여러 신화를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해석학적 관점을 펼쳐나간다. 특히 그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인간의 조건을 비중있고 고찰한다. 그 이유는 다른 신화들은 악 그 자체의 모습을 서술하거나 또는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비하여, 성경의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아담은 선과 악이 서로 뒤섞여있는 존재로서 인간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생각하고 논증하려하는 인간상에 가장 잘 부합한다. 또한 종말의 신화는 인간의 본래적인 악의 가능성과 그것이 발현되고 또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인 악이 모두 걷혀진 세계로 인간이 나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정신분석학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그것이 해석학적인 논증 구조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가 정신분석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어떻게 인간이 비의지적인 것에 구속당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다시 드러낼 수 있는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의 대상은 꿈인데, 꿈은 언제나 실제의 어떤 내용 - 무언가를 감추려는 여러 상징과 기호로 가득하다. 하지만 꿈은 동시에 꿈을 꾼 사람의 무의식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구조화되어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꿈은 감추는 동시에 보여주는 모순적 기능을 한다. 정신분석은 바로 이 꿈에서 보여진 내용을 해석하고, 감추어진 내용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여러 상징이 어떤 식으로 구조화되어있는지 알기 위해 정신분석가는 꿈을 꾸는 사람이 겪었던 사건과 사고를 해부하고 동시에 그것이 지금 꿈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나아가서 그 사건과 사고들이 지금 꿈꾸는 사람의 행동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고 있는지까지 말해줄 수 있다.
따라서 정신분석에는 무의식을 드러내주는 꿈의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고, 해석된 내용들은 지금의 행동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정신분석의 해석학적 작업을 주관의 고고학archeology of subject이라고 부른다. 주관의 고고학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적 작업은 주체가 결코 우리가 이성에 의해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으며, 결코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로 투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Ricoeur는 자신의 인간관을 토대로 정신분석학의 연구 성과를 수용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체의 불투명성과 비자립성을 논증한 사람은 또 있다. 바로 니체와 마르크스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Descartes의 전통에 서있는 이성의 철학자들을 비판했으며, 이성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오히려 그 의지를 감추고 은밀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하면서 사회의 이념적 구조가 인간에게 얼마만큼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계급적 구조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면에서 Ricoeur는 이들의 연구성과 또한 높이 평가하며, 니체와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 세 사람을 의심의 대가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그에게 주체의 문제는 이러한 고고학적 성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고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특히 종교적인 의미에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난점에 대한 그의 대답은 해석학에서의 변증법적 종합이다. 즉, 해석의 작용은 인간이 여러 상징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을 세계에 투사하여 의미를 적극적으로 탐색해내는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투사는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는 것이 아니며, 분명한 목적성 즉 투사의 대상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목적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이 Hegel의 절대적 관념론이며, 그의 표현에 따르면 주체의 고고학에 대비되는 주체의 목적론이다. 주체의 고고학과 주체의 목적론 어느 한 쪽의 견해만으로는 주체에 대해서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으며, 주체는 이 두 과정의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상징과 언어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맥락에서 그는 Kant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보이는 초월적transzendental 종합의 이론적 구조를 논의에 끌어들인다. 즉, 상징(특히 언어)은 이미 주체의 외부에 전개되어있다. 하지만 이 상징을 해석하여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주체의 내부에 해석학적으로 형성된 이해의 구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Kant가 규명한 주체가 현상의 생성에서 그 논의를 그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해석학적 주체는 미완에서 그치거나 혹은 고고학과 목적론의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긴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파악해나간다. 따라서 해석학적 순환은 해석자가 자신을 끊임없이 축조해가는 과정으로서,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 즉 종교적 의미에서의 구원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형성해가는 주체의 무한한 운동이다.
Ricoeur의 주체 이론은, 그의 해석학적 철학의 뿌리인 성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나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 참고문헌
박종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에 관한 연구』, 사회와 철학 연구회, 2001
홍기수, 『하버마스와 현대철학』, 울산대학교 출판부, 1999
김광명,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과 데리다의 해체주의」, 『예술문화연구』 4권, 서울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김영한, 「베티의 정신과학 해석학 - 가다머의 현상학적 해석학과의 논쟁을 중심으로」, 『해석학연구』 8권, 한국해석학회, 2001
김영한, 「푸코, 데리다, 료타르의 해체사상」, 『해석학연구』 4권, 한국해석학회, 1997
김영한, 「해체주의와 해석학」, 『철학과 현상학 연구』 10권, 한국현상학회, 1989
김영한, 「리쾨르의 해석학적 철학」, 『해석학연구』 1권, 한국해석학회, 1995
김상환, 「데리다의 텍스트」,『철학사상』27권,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8
김종걸, 「리쾨르의 인간학적 철학」, 『해석학연구』 2권, 한국해석학회, 1996
김창래, 「통일과 해체의 이율배반」, 『철학연구』 24권,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01
박순영, 「가다머의 해석학과 해체주의」, 『해석학연구』 6권, 한국해석학회, 1999
박순영, 「리쾨르의 정신분석적 해석학」, 『해석학연구』 9권, 한국해석학회, 2002
장원석, 「해석학 논쟁과 사회과학 방법론의 제문제」, 『한국정치학회보』 25권 1호, 한국정치학회, 1991
정기철, 「해석학과 해체주의 :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 『해석학연구』 1권, 한국해석학회, 1995
정연재, 「대화와 해체 그 간극을 넘어서」, 『해석학연구』 16권, 한국해석학회, 2005
최성환, 「방법과 진리 - 해석학의 방법 논쟁을 중심으로」, 『해석학연구』 15권, 한국해석학회, 2005
Hans Ineichen, 『철학적 해석학』(문성화 옮김), 문예출판사, 1998
Jean Grondin, 『철학적 해석학 입문』(최성환 옮김), 한울, 2009
Richard Kearney,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곽영아, 임찬순, 임헌규 옮김), 한울,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