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근대정치사상사』(강정인, 김용민, 황태연 編, 책세상, 2007)에서 루소 부분을 요약. 방학 때 했던 소모임 '초코파이의 사회학' 발제문.>
序. 루소의 작품을 읽는 순서
루소(1712~1778)는 자신을 변호하는 저서인 《대화》를 통해서, 자기는 모든 작품을 통해서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내용은 다름아닌 ‘인간은 자연적으로natural 이성적이고 양심적이지만, 사회화 과정에서 이성을 잃고 타락한다.’ 는 내용이다. 또한 이런 내용을 가장 잘 주장하는 저서는 바로 《에밀》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모든 작품은 《에밀》에서부터 거꾸로 읽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이 자신이 확립한 원리와 그에 따르는 여러 분야에 대한 주장을 정확히 읽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1. 《에밀》- 자연과 사회
《에밀》은 인간을 어떻게 가르쳐야하는가에 대한 루소의 생각이 담겨있는 책이다. 루소가 이 책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교육이란 한 인간을 종합적으로 길러내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모습이 달라지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면모 가운데 발현되거나 억압당하는 것들이 결정된다. 이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또한 인간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교육에 대한 관점을 확립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과 같다.
루소가 에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립구도는 바로 ‘자연’과 ‘사회’ 사이의 대립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좋으나 인간의 손에 의해(사회의 영향력 때문에) 타락]한다. 좋은 상태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능력 - 이성, 양심, 자유를 모두 갖춘 상태이다. 하지만 사회는 이런 인간을 비이성적으로/비양심적으로/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따라서 교육은 인간이 태어났을 때 그대로의 모습, 즉 이성과 양심과 자유를 발현하게 만드는 일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정치사상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에밀》은 인간의 삶에 정치적 지평이 반드시 포함되어있음을 밝혔기 때문에 중요하다. 루소가 이야기하는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은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다. 사적인 삶(혹은 이득)과 공적인 삶(혹은 이득)을 구분하고, 이것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점은 근대정치사상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 때문에 사적인 삶을 중요시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사유화(?)시킴으로써 공적인 삶을 인간의 삶에서 배제된다. 공적인 삶의 배제는 많은 인민의 불행으로 나타나고, 따라서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게 된다. 루소는 이런 사람들을 ‘부르주아’라고 비판하며, [조국은 모르고 돈만 안다]고 표현했다.
2. 《사회계약론》- 사회계약과 일반의지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자연인을 구속하는 사회가 어떻게 구속이 되며, 그 구속은 어떻게 정당성을 획득하는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 사회계약은 기본적으로 홉스와 로크의 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인들이 모여서 계약을 체결하며, 그 계약은 사회 내에 사는 모든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홉스와 로크의 논의와는 달리, 루소는 자연권이나 자연법에 기반하지 않고 사회계약을 설명한다. 즉, 계약이 체결되기 전 자연상태에서 인간에게 생존권이나(홉스) 신체와 재산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의 권리(로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권리들이 계약을 체결한 뒤에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권리들은 계약의 입법자인 시민에 의해 결정되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것 또한 시민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인간의 집단이 홉스가 생각한 것처럼 투쟁상태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자유롭다.’는 루소의 근본적인 가정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개개인의 판단 기준이 다 다른 것은 무엇으로 교정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루소의 대답이 바로 [일반의지]이다. 일반의지는 계약에 의해 ‘창출’되며,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다. 이 일반의지는 시민 개개인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생기는 이해관계를 모두 제거한 뒤에 남은 부분, 즉 다시 이야기해서 모든 시민이 추구할 수 있는 공통의 이익을 뜻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일반의지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사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이것이 루소가 이야기하는 ‘정의와 유용성의’ 조화이다.
(효진의 의견 : 그러나 이 일반의지는, 책에서도 다루고 있듯이 순전히 개념적인 것이다. 일반의지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는지는 시민의 여러 가지 견해에 따라서 결정된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내용’을 결정하는 일인데 - 혹은 이 ‘내용’을 결정하는 작업이 바로 정치인데, (적어도 이 책에는)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일반의지에 대한 이런 모호한 설명은 전체주의적으로도, 혁명이론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 일반의지를 이데올로기적 방식으로 해석할 경우, 일반의지로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조작의 성격을 띄게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루소의 설명에 따라 이것은 정당성legitimacy을 획득하게 되는데, 아주 위험하다 - 물론 별 거 아니라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계약을 통해 형성된 사회 내에서 시민은 입법자로서의 자격을 지니며, 따라서 이 입법자는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나아갈 때 이성과 도덕, 자유를 발휘하게 된다. 이것은 계약에 대해 취해야되는 시민의 태도에 대해 두 가지 면모를 설명해준다. 하나는 시민으로서 자신의 자유를 일반의지에 일치시키는, 다시 말해 자기입법에 자신을 복속시킴으로서 자유와 복속을 이론적으로 양립시킨다는 점, 다른 하나는 그 계약의 불합리-비이성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폭넓게 마련해준다는 점이다.
3. 인간불평등기원론
루소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듯이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자유롭다.’ 인간의 불평등은, 모두가 평등한 자연상태에서부터 출발한다.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자유롭다는 것을 의식한다는 점 그리고 완전가능성을 담지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실천한다는 점이다. 완전가능성은 스스로에게 있는 결핍을 채우고 무결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지향성을 의미한(듯 하)다. 이 두 가지 가운데 불평등은 완전가능성에 대한 실천에서 기원한다.
완전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소유 관념을 창출한다. 그것은 결핍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소유는 다시 인간소유(가족)와 재화소유(재산)으로 발전하며, 이것을 사회를 통해 법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인간의 불평등은 고착화되고 심화된다. 또한 이렇게 조직된 사회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다시 말해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발현하면 발현할수록 이 사회는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완전가능성이 이런 식으로 발현되는 것을 루소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완전가능성의 발현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선악이라는 관념 자체가 완전가능성의 발현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소는 완전가능성은 자연에 비추어 자연 그 자체를 발산하는 방향으로 발현되어야한다고 말한다.
4. 학문예술론
학문과 예술은, (효진이 해석하기로) 한 사회의 현상과 태도를 가장 추상적으로 압축하고 표현한 것이다. 학문과 예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본성이 타락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깊다. 학문과 예술이 발전하고 축적한다는 것은, 위와 같은 입장에서 볼 때 사회가 점점 복잡하고 고도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 루소의 입장에서 다시 해석하면, 인간은 점점 자연으로부터 떨어져나가 사회화되고, 따라서 비이성-비양심-타율적으로 점점 변해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이나 사상이 가장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학문이나 예술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가장 의지해야 할 것은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마음, 즉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양심은 학문이나 예술이 보여주는 그 어떤 내용보다도 더 이성적이며 도덕적이고 자유롭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에 따라 사는 사회인이 되기보다는, 자신에게 의지하며 현재를 지속적으로 창조해가는 미개인이 루소의 입장에서는 더욱 바람직한 인간이다.
結. 요약과 결론
루소의 인간관과 역사관은, 총체적으로 복고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복고적 역사관은 자연을 이상화하는 데서 출발하여,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로 나타난다. 자연에 대한 루소의 정의는 당시에 다른 사상가들이 바라보던 자연이라는 개념에 대한 수정이자 비판이다. 또한 인간관과 역사관은 단선적-직선적-발전지향적인 시각이 기본적인 근대modernity에 대한 총체적인 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루소가 당대의 어떤 다른 사상가들에 비해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