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철학, 특히 『성찰』을 읽으면서 사람들의 오해를 가장 많이 사는 부분이 바로 「제 3성찰 - 신에 관하여 : 그가 현존한다는 것」이다. 1, 2성찰에서는 인간이 지닌 인식능력이 믿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유한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신으로 퇴보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등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제 3성찰은 제목도 그렇고, 실제로 그 내용에 있어서도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이후에도 신의 현존에 대한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철학자는 자신의 시대 안에서 사상을 전개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자기 생각을 쓰면서, 그 당시에 쓰던 언어와 개념을 통해 자신의 글을 서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쓰는 말이 그의 생각을 온전히 대변해주는 것 또한 아니다. 따라서, 그 언어의 한계 밑에서 자기만의 독해, 또 다른 생각을 잡아내야한다. 이 글의 내용은 글쓴이가 읽어낸 제 3성찰의 바닥에 깔려있는 또 다른 의미이다. 

  데카르트의 제 3성찰은, 자신의 논증 속에서 인간이 정신 속으로 갇혀버린 난국(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에 처한 가운데, 정신의 외부에 있는 최초의 타자의 현존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타자는 그가 정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한다. 

  1, 2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모든 감각정보를 부정하고, 오로지 정신만이 명증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모든 감각을 멀리하며, 물질적 사물의 상을 내 생각에서 모조리 지워버리자.(p.56 첫 번째 줄)’ 하지만 참과 거짓을 설정할 수 있는 기준을 남겨두는데, ‘극히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것을 일반적 규칙으로 설정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p.57 일곱 번째 줄)’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정신이 타자의 현존을 인정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된다. 타자의 현존이 정신 속에서 극히 명석 판명하게 지각된다면, 그것은 곧 타자의 현존에 대한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감각은 거부되고, 그것이 어떤 판단의 기준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즉, 내 외부에 어떤 사물이 있고, 이런 사물로부터 저 관념이 유래하고, 또 그 관념은 사물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설령 이에 대한 내 판단이 옳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내 지각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p.57 밑에서 일곱 번째 줄)’ 게다가 데카르트가 회의하는 대상은 단순히 감각자료일 뿐만 아니라, 모순이 없는 명제까지 포함된다. ‘예컨대 둘 더하기 셋은 다섯이라는 것을 고찰할 때 나는 적어도 그 진리성을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명석하게 직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나중에 이런 것들도 의심해야 한다고 판단했는데(p. 57 밑에서 둘째 줄)’ 

  기하학적 명제마저도 어떤 존재가 속이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약 그것이 신이라면, 우리는 가장 먼저 그런 기만자 즉 신의 존재 유무를 파악하고 그러한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성찰에서 신은 이런 맥락을 배경에 두고 등장한다. 즉, 인간의 명석 판명한 인식을 위해 요청되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는 위치가 바뀐 셈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심의 근거를 제거하기 위해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신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지, 또 존재한다면 기만자일 수 있는지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p.59 밑에서 열 번째 줄)’ 

  현재 단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정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정신을 분석하는 일 밖에 없다. 데카르트는 이에 따라서 인간의 정신을 관념, 의지, 정념, 판단으로 나눈다. 둘 이상의 관념이 긴밀하게 관계를 맺으며 떠오르는 것이 의지, 정념, 판단이기 때문에, 데카르트에게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념이다. 또한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것은 나머지 셋 가운데 판단이다. 이러한 판단은, 아직까지는 모순적이지만 않다면 참으로 간주되는 혼란스러운 상태다.

  데카르트는 관념에 세 가지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만들어질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본유), 둘째는 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것(외래), 셋째는 다른 관념을 짜깁기해 만든 것(만든)이다. 이 가운데 외래관념의 경우, 사람들은 흔히 그것이 외부의 사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자연적 충동(p.62 아홉 번째 줄)의 영향이거나(자연이 나에게 그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고 내가 말했을 때의 의미하는 바는, 어떤 자발적인 충동에 의해 나는 그렇게 믿게 되었다는 것이지, 그것의 참됨이 어떤 자연의 빛에 의해 나에게 명시되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외부와 관계없이 생성되거나, 그 사물의 각기 다른 모습이 감각을 통해 전달되어 같은 관념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그러나 주목할 것이 있다. 과학적 지식과 본유개념을 동일하게 간주한다는 것이다. ‘천문학적인 근거에서 얻은 것, 즉 내가 본유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떤 개념들로부터 끌어낸 것이거나(p.63 위에서 네 번째 줄)’) 

  이런 외래관념을 제외하면 본유관념과 만든-관념이 남는다. 이들에 대한 대상의 현존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들의 표상적 실재성을 검토하는 방법이 있다. 표상적 실재성이란 관념의 속성이기도 하고, 어떤 특정한 한 관념의 속성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이런 표상적 실재성을 띄기 위해서는 자연의 빛이 알려주는 인과법칙에 따라, 표상적 실재성을 띄게 해주는 원인으로서 형상적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 ‘자연의 빛에 의해 분명한 것은, 전체 작용 원인 속에는 적어도 그 결과 속에 있는 것만큼의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p.64 위에서 넷째줄)’ 표상적 실재성은 관념과 관념 사이의 관계에 한정되며 정신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속성이지만, 형상적 실재성은 관념과 외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형상적 실재성은 표상적 실재성보다 크거나 혹은 같다(각주 70). 

  하지만 아직 데카르트는 정신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따라서 ‘나’의 세계는 표상적 실재성만 존재하거나, 혹은 ‘나’를 근거로 삼는 형상적 실재성과 그것을 반영한 표상적 실재성을 띈 관념들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형상적 실재성의 근원의 근원을 계속 추적해 올라갈 수 있는데, 이것은 자연의 빛이 가르쳐준 인과법칙에 따라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원형에 근접해간다. ‘한 관념이 다른 관념으로부터 생길 수는 있지만, 이런 소급은 그러나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으며, 마침내 제일의 관념에 도달하게 되는 바, 이 관념의 원인은 이른바 원형과 같은 것이며, 관념 속에 그저 표상적으로만 있는 모든 실재성이 이 원형 속에는 형상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p.66 가운데)’ 이 ‘원형’은 자신의 정신의 연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데카르트의 과제는 이제 이 ‘원형’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으로 바뀐다.

  그에게 관념은 다시 생물, 물질(무생물), 신이라는 세 종류로 나눠진다. 모든 생물은 만든-관념이다. 물질에 대한 관념은, 여러 가지 감각으로 관찰되는 자료들은 제2성찰에서 나온 밀랍의 사례에서 보듯 그 대상 자체의 속성이 아니다. ‘이 관념에 있어 명석 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은 극히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p.67 밑에서 여덟째 줄)’ 물질에서 명석 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은 연장(부피), 형태, 위치, 운동, 실체, 지속, 수 등이다.(여기서 데카르트가 왜 근대적 정신의 선구자인지를 알아보셨다면 철학과 대학원을 추천합니다. 농담 아님.) 감각으로 인한 관념들은, 만약 그것이 외부에서 주어진 관념이라면 그에 걸맞는 표상적 실재성과 형상적 실재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야한다. 하지만 ‘나’의 정신 속에서는 두 실재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감각으로 인한 관념들은 내 내부에 근원을 두고 있는 관념들이다. 즉, 상상이라는 이야기이다. 또한 연장, 실체, 위치, 수 등도 아직까지는 표상적 실재성만 갖추고 있는 단계이다. 상상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고 나서야 신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제까지의 증명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신을 제외한 모든 관념은 인간의 상상의 산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관념들이 명석 판명한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명석 판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외부와 아무런 접촉이 없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데카르트는 ‘관념이 정신에 근원을 두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현존 없이도 인간의 정신 속에 세계가 구축될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데카르트는 마지막으로 신의 관념을 검토한다. 검토의 주안점은 ‘신 관념이 정신에 근원을 둘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데카르트는 처음부터 ‘신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무한하고 비의존적이며, 전지전능하며, 나 자신을 창조했고,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다면 그 모든 것을 창조한 실체이다. 실로 이런 것은 내가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나 자신에서 나온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p.69 밑바닥).’ 라고 못박으며 시작한다. 

  ‘나는 유한하다(p.70 두 번째 줄)’는 말이 갑자기 등장해 뜬금없지만, 이 말은 성찰이라는 책의 출발점이다. 유한한 존재이기에 잘못된 인식을 하는 것을 보면서 데카르트는 회의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유한한 존재 안에 무한한 존재(실체)인 신이라는 관념이 있다는 것은, 그 관념의 근거가 정신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무한 실체의 관념은 실제로 무한한 실체로부터 유래해야(p.70 세 번째 줄)’ 한다. 

  또한 데카르트는 신이 무한한infinite 존재이지 규정할 수 없는indefinitive(‘유한한 것의 부정(p.70 다섯 번째 줄)’)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의 부정, 즉 비존재를 뜻할 뿐이다. 신 관념이 존재-비존재를 초월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듯이 보인다. 또한 신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무한’이기 때문에, 어떤 관념이든 그에 대한 표상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실재적인 어떤 것도 나에게 나타내지 못한다고는 가상할 수 없(p.71 첫 번째 줄)’다. 또한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의 정신에 당연히 온전히 잡힐 수도 없다. 무한한 존재라는 것 자체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정신이 완전한 인식에 이르는 과정을 밟아나가면 무한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런 가능성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정신이 유한한 존재라는 반증이다. 신은 언제나 ‘완전한 현실태’로서 무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한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다. 따라서 무한에 다다른다고 하는 표현 자체가 모순이다. 게다가 무한한 존재인 신은 자신 안에 모든 표상적 실재성과 형상적 실재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그 기원으로 둘 수가 없다. 

  하지만 만약 신이 무한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외부에 현존한다는 것은 아직 ‘나’의 정신 안에 증명되지 않았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신이 현존하지 않더라도, 신 관념을 가진 [나]는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전히 질문은 인간의 존재에 중심이 맞춰져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이 가정을 논파하는 시작도 ‘나’의 존재에서 출발한다. 내가 존재한다면, ‘내가 만일 내 자신에서 나왔다고 한다면(p.74 세 번째 줄)’ 나 자신을 완전하다고 인식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타자가 없고, 결핍이 없다. 따라서 감각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품을 수 없다. 유한에 결국 갇히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시간 앞에서 그 존재의 현존조차 보장받을 수 없다. 무한히 작은 시간 속에서 어떤 시각의 나와 다른 시각의 나는 그 동일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동일성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부단히 새로 만들어지고 없어지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보존은 단지 생각의 차원에서만 창조와 구별될 뿐임은 자연의 빛에 의해 명백하게 알려지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p.75 일곱 번째 줄)’ 

  그렇다면 내 존재와 현존을 보장해주는 것은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결코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현재 단계에서 ‘나’는 아직 사유만 할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존재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이런 조건이 결국 ‘나’, 즉 정신 외부의 어떤 존재를 요청하게 된다. 이것은 무한한 시간을 조망하며 ‘나’의 존재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이 존재는 바로 신인데, ‘나는 사유하는 것이고, 또 신의 관념을 갖고 있으므로, 내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 신이 갖고 있는 모든 완전성의 관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p.75 밑에서 네 번째 줄)’ 

  이 원인, 즉 원형이 신이라는 무한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데카르트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첫째, 신은 정신을 비롯한 모든 것의 현존을 보장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근원을 캐물어가는 질문의 끝에는 반드시 신이 자리잡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사유하는 나’의 현존을 보존해주는 존재는, 다름아닌 ‘나’ 속에 신의 관념을 불어넣어준 바로 그 외부의 존재, 즉 신이기 때문이다. 둘째, 완전하다는 것은 단 하나의 존재라는 뜻이다. 변화하지 않고, 분할되지 않는 존재야말로 완전한 존재 즉 무한한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다. 따라서 신이 아닌 다른 여러 개가 아니다. 셋째, 이 단계에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나’는 여전히 정신에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관념을 산출하는 존재 이외의 다른 존재(부모)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의 관념은, 외래 관념도 아니고, 만든-관념도 아니다. 따라서 본유적이다. 이것이 본유적일 수 있는 이유는 신이 자신의 모습과 유사한 존재로서 인간을 창조하였기 때문이(랜)다. 따라서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로서 신이 존재하며 현존해야만, 신 관념을 가진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 또한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나’를 기만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는데, 속이는 것은 거짓을 가정해야만 가능하지만, 신의 무한함 안에 거짓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연의 빛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지기 때문이다. 

  신의 현존을 증명한다고 말하는 데카르트의 글은, 곳곳에 이 글의 주안점에는 인간이 놓여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증명마저도, 앞에서도 말했듯 그 목적이 ‘인간의 인식이 정당한지 검토하는 과정’에서 증명해야 하는 과제였다. 또한 인간의 정신을 통해 신을 증명할 뿐 아니라, 신의 현존마저도 인간의 현존과 외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교두보로서의 의미 이상을 지니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현존에 대한 증명은 ‘정신의 외부에 있는 최초의 타자에 대한 증명’ 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무한한 존재인 신에 대한 증명은, 앞에서도 나오듯 존재들의 현존을 보장해주는 존재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증명은, 신 자체에 대한 증명일 뿐 아니라, 데카르트가 회의 속에서 구해내지 못했던 정신 외부의 모든 사물에 대한 증명, 그리고 정신적이지 않은 또 다른 타자들의 존재에 대한 구제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제 3성찰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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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서양철학소모임 발제문.

1. 써놓고 보니 표상적 실재성과 형상적 실재성 사이에 연결고리가 약하다. 데카르트가 약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고, 난 이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2. 제 3성찰에서 전개되는 데카르트의 신존재 증명을 더 명확히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철학의 신 관념,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큰 화제였던 ‘존재-비존재’, ‘유한-무한’ 논쟁에 대한 선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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