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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의 탄생 - 자본은 어떻게 종교와 정치를 압도했는가
그레그 스타인메츠 지음, 노승영 옮김 / 부키 / 201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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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로 사는 삶에 지쳐 도시로 이사간 할아버지 푸거는 농사 대신 옷감을 만들어 팔아 성공을 거둡니다. 아버지 푸거는 이 사업을 더욱 확장하고, 옷감 장사로 확보한 돈을 바탕으로 금융업에 진출하기로 합니다. 푸거 가문 사업의 금융 부문을 도맡게 된 사람은 아버지 푸거의 7형제 중 막내아들인 야코프 푸거입니다. 처음엔 가문의 여러 사업 중 가장 작고 하찮은 부문이어서 막내아들에게 그 몫이 돌아갔지만, 야코프 푸거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순식간에 유럽 최고의 금융인으로 거듭납니다.
왕들의 토지와 현물자산을 담보로 잡아 대출을 해주며 인플레이션을 이용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회계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사업투명성을 확보했으며, 유럽 전체에 걸쳐 정보망을 구축해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자금을 투자하거나 회수해 재산을 불려나갔으며, 무엇보다도 종교와 구시대적 윤리에 얽매여 금지돼있던 이자라는 영역을 합법화해 현대적 의미의 금융을 만들어낸 사람. 반면 가치관의 혼란이라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정경유착, 독점, 카르텔 형성, 분식회계 등 온갖 비리와 부정과 꼼수를 동원해 오로지 돈 버는 것 자체만을 추구했던 사람. 일종의 유럽판 허생전이라고 할 만할, 격동의 시대를 자신이 가진 자원과 능력으로 뚫고 나가고자 했던,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과 흡사한 근대적인 또는 현대적인 인간의 탄생과 생애를 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이것입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이 책의 키워드는 ‘경제사’입니다.
아마 이 방송을 들으시는 학부모 청취자분들께는 역사라는 단어의 의미는 거의 정치사와 일치할 것입니다. 고려니 조선이니 왕조 이름이나 왕 이름을 달달 외우고 집권세력의 교체와 관련된 사건을 시험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으로 배우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새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 교과서는 그 차원을 약간 벗어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진행된 역사라는 개념에 대한 학계의 관점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 경제, 문화, 일상, 소수자 등 아주 다양한 영역이 역사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학생 청취자분들께는 공부할 거리가 늘어나서 조금 안타까운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폭넓은 역사의 영역 가운데 가장 주목받고 중요한 분야를 꼽으라면 단연 경제사입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의 종류와 생산 및 거래 방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는 것만큼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가장 잘 꿰뚫어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특히 경제사 연구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국내총생산이나 통화유통량 같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경제지표로 과거를 재해석해내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기록을 그야말로 영혼까지 끌어모아 당시 경제상황을 재구성하고, 짧게는 200년에서 길게는 500년에 이르는 경제지표 장기통계를 작성합니다. 몇 년 전 화제를 일으켰던 경제학 책인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도 이런 장기통계를 분석한 결과물이었죠. 경제사 연구는 지금까지 역사 과목에서 소홀했거나 보지 못했던 부분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의 경제 현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주는 유용한 교훈을 주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역사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고 대학에서 깊게 공부해 볼 만한 분야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푸거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기는 이러한 현대적 의미의 경제체제가 잡히는 시기, 다시 말하면 현대적인 의미의 경제사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법적으로 이자가 허용되며 금융업이 시작되고, 이익 자체가 최고의 목적이 되는 행위 양식 즉 투자라는 행위와 그 주체인 기업-기업가가 탄생하고, 종교에서 비롯된 도덕적 독단을 벗어난 세속적 인간이 등장하면서 경제적 행위가 역사의 전면으로 나오는 순간이죠. 야코프 푸거의 일대기는 이 순간을 대표하는 이야기로 손색이 없습니다.
이렇게 ‘경제사’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여담을 하나 해보자면, 이런 ‘경제사의 시작’의 정점인 세계적인 무역 네트워크의 형성 즉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과 유럽인의 동아시아 진출이 아이러니하게도 야코프 사후 푸거 가문의 몰락을 재촉합니다. 푸거 가문의 부는 유럽 내에서 은 광산을 모두 독점한 데서 나왔는데, 남아메리카와 일본에서 은이 쏟아져 들어와 은값이 폭락했기 때문이죠. 당시 전세계의 은 생산량 가운데 2/3는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에서, 1/3은 일본에서 나왔다고 하죠. 이렇게 일본의 은 생산이 폭증한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조선에서 대접받지 못한 제련업자들이 일본에 기술을 수출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조선의 기술이 유럽 최고 부자의 몰락의 원인이라니, 이것이야말로 현대적 의미의 경제가 시작됐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 아닐까요?
2제 아이랑 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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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추천드리는 콘텐츠는 제리 브로턴의 <르네상스>입니다. 푸거가 살았던 시기를 우리는 흔히 르네상스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유럽 몇몇 지역의 미술사나 사상사쪽에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 빈치,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는 다들 아시잖아요? 그러나 이 격변의 시기를 살펴보기 위해선 더 넓은 맥락과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너무 두꺼운 벽돌같은 책이 부담스럽다면, 이 <르네상스>라는 책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내는 “아주 짧은 입문서” 시리즈는 우리 수요독서의 전 시즌에서도 두어 권 다룬 적이 있는데, 이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