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한 줄 요약: 오랜만에 선동적 정치 팸플릿을 읽었더니 마음 한 켠이 따스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서문
20세기 초반 인류의 경험은 법의 지배와 물질적 평등에 대한 요구를 동시에 확립함으로써 인간의 삶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 차원에서, 권리나 자유 등 계약의 결과물의 차원이 아니라 존엄성의 차원에서 평등을 이해해야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고방식에 기반해 필라델피아 선언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인권선언과 브레튼우즈 체제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상품이 아닌 방식으로 노동을 존중하고, 개인의 개별화에 맞서 연대를 제도화하며, 비계급적 타협의 정치를 억제하고 사회적 민주주의를 회복하며,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집단적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 필라델피아 정신의 요점이다. 이 정신은 법의 지배를 확립함으로써 구현된다.
1-1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이후, 이 지역의 엘리트들은 도구적 국가라는 관점에 부합하는 신자유주의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또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과학화”한다는 이름 아래 조직원리를 민주적 토론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창조된 질서인 신자유주의적 제도를 진리로서 이해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상은 “자생적 질서의 탄생”이라는 지향점을 내세웠던 하이에크의 철학에서 드러나지만, 그 논리는 내적으로 자생적 질서의 탄생을 위해 기존의 규범을 공격하고 해체한다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의 귀결은 기간산업의 민영화를 통한 엘리트들의 이윤 뽑아먹기, 엘리트의 이해에 그야말로 충실하게 복무하는 국가정책의 결합이라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독특하고 파괴적인 체제의 탄생이다. 이것을 극단적 자유주의 반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1-2 복지국가의 사유화
사회정의의 개념은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비례성에 기초한다는 오래된 믿음이 있다. 즉, 많이 받으면 많이 토해내야 한다. 그러나 많이 가진 자들은 사회/정치/경제적 권리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체계적으로 “토해내지 않게” 만들 가능성 또한 갖고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집단적 합의”를 통해 형성된 사회보장(법)이다. 하지만 최근의 경향은 “마태효과”, 즉 사회보장이 가장 필요없는 사람들에게 사회보장의 손길이 가장 많이 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기업에서의 노동강도는 무제한으로 증가한다. 공기업과 공공서비스는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처럼 보이는” 사기업화의 압력에 시달리고, 그에 따라 불친절과 불필요가 다시 불친절을 낳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이 악순환에 가장 많이 노출된 제도가 연금과 의료보험이다. 엘리트들은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를 통해서 손실을 사회하고 이익은 사유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1-3 시장전체주의
시장경제체제는 정치경제적 “고안물”이다. 지속가능한 인간적 삶을 위해서 자연, 노동, 화폐는 상품으로 취급돼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재의 시장전체주의는 이들마저 상품으로 취급하려는 지속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는 정치경제적 고안물의 목적을 인간의 삶의 보장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결과다. 이런 목적의 전도는 WTO 마라케시 선언과 필라델피아 선언을 비교할 때 뚜렷하게 드러난다. 마라케시 선언은 교역의 정량적 증가를 목적이라고 말하는 반면, 필라델피아 선언은 삶의 질의 상승이 목적이라고 명시하기 때문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WTO의 목표는 점점 더 관철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화 현상은 기업 간의 경쟁이 아니라 국가 간의 제도경쟁을 부추기며 “입법 시장”, “국가 쇼핑”을 만들어냈다. 즉, 재화를 거래하는 체계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규범을 바꿀 것을 역설하고 강제하는 것이 자유시장제도의 본질이다(라는 것을 하이에크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1-4 계량화의 환상들
인간이 물리적 존재로 계량화돼 해석되는 세계가 도래했다. 이전에 인간은 통치의 구조 아래 놓이는 존재였지만, 현재는 계량화된 수치를 통해 효용을 스스로 올리려고 노력하는 자기규율의 존재가 됐다. 즉 수치는 자기규율의 근거다. 이런 현상은 국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정책(의 결과)의 계량화와 비교평가, 모든 지역의 모든 것을 지표로 만드는 노력에 의해 시장전체주의에 속도가 붙었다. 수치로 평가하기 어려워보이는 것,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수치로 나타낼 수록 사람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이 수치화는 이질적인 것을 통합해 동질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수치화 이후 정책의 목적은 이 “보이는” 지표 자체를 개선하는 것으로 전도됐고, 숫자를 통해 사람들의 행위를 규율하는 “협치”가 탄생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지표를 설정할 때 개입할 상위 규범이 무엇인지 모색하는 것이다. 숫자는 표현의 도구이지 평가의 도구가 아니며, 이것을 망각할 때 “사실의 거짓말”에 빠질 수 밖에 없다.
2-1 한계의 기법
시장전체주의는 보편성에 대한 잘못된 요구를 이끌어냈다. 개별적인 사회/문화/역사적 조건을 갖고 있는 각각의 법체계 사이의 차이와 전개의 과정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시장전체주의가 정착했다. 이에 맞서는 정치운동 중 하나는 공동체의 규범(=법) 자체를 우회해 “나의 자리”를 요구하는 정체성 정치인데, 이는 법이 구속하지 못하는 영역(=법으로부터 개인의 이탈)을 발생시키는 시장전체주의의 귀결 중 하나다. 법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탄생한 것은 봉건 시대에 왕이 간섭할 수 없는 영역, 즉 봉건 영주의 영역의 탄생과 비슷하며, 이런 의미에서 기업가 엘리트들을 현대의 봉건 영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전세계가 상당부분 이런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부정하긴 매우 어려우며, 따라서 법은 “창문”의 역할을 한다. 바깥을 볼 수 있으면서도 원하는 때에 그 문을 세계화의 여파를 막도록 문을 닫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2-2 척도의 의미
척도는 사실성과 규범성을 동시에 지닌다. 규범성의 영역에 사회정의라는 목적을 도입할 수 있고(도입해야 하고), 이 목적의 설정이 민주적 과정을 통해 달성돼야 한다는 제한을 둘 수 있다. 자유주의적 세계는 한동안 사회정의라는 목적 자체에 회의적이었고, 법은 탈목적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런 탈목적론은 불평등의 심화,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의 근본적 악화를 불러왔다. 사회정의를 되살리기 위해선 1인1표의 자유주의적 접근이 아닌 1집단 1표의 사회적 민주주의 방식의 접근법이 필요하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근본적 차이와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규범성의 설정에 참여함으로써 척도에 대한 물신주의와 과학적 관리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개입이 적용될 영역은 회계, 지표, 통계가 될 것이다. 이들 지표가 사회정의라는 목적에 부합하게끔 변형시켜야 한다.
2-3 행위능력
행동을 위한 반응이 아니라 행위를 위한 자유와 통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시장전체주의는 자유의 의미를 왜곡한다. 24시간 일할 자유는 있지만 일하지 않을 자유는 없는 것이다. 20세기의 세계는 고용을 보장함으로써 물질적 기반을 제공하는 포드주의 합의가 사회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세계화 이후의 세계는 이러한 합의를 유지할 수 없게 변화했다. 따라서 현재 인간의 삶의 보장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노동담지성’, 즉 역량(능력)이 있다는 사실 자체다. 즉, 일을 하는 조건을 유지함으로써 행위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존중함으로써 행위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국가는 고용을 유지할 수 있는 법적 제도를 마련해주게 되는데, 모순어법같은 “유연안정성” 모델이 참고할만한 사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충분하진 않다.
2-4 책임의 부과
책임엔 책임자, 요구자, 중재자(보장자)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책임은 응답과 이행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책임의 구성요소를 만족하지 못한다. 우선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유동화해 주체로서의 지위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또 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런 유동화와 책임회피에 맞서기 위해선, 생산의 측면에선 기업의 집합적 연대책임이라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유통의 측면에선 모든 영역에서의 원산지 표시제를 시행해야 한다. 이는 초국적화를 통해 국가 차원의 사법적 통제를 피해가려는 기업과 엘리트들에 대한 통제의 수단으로 작동할 것이다.
2-5 연대의 고리들
연대의 원칙은 “비계약적 협력의 형식”이며, 이것을 명문화하면 사회보장제도가 탄생한다. 이 탄생은 “인생의 빚”이라는 철학적 개념에서 “의무”라는 정치적 표현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함축한다. 그러나 현재의 사회보장제도는 무형의 세대간 연대를 금전적 관계로 대체해 이해하게 하는 효과를 낳았고, 오히려 연대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동하기도 한다. 또한 열악한 의료보험제도도 개인간 연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며, 따라서 개혁이 필요하다. 새로운 연대의 형식을 모색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요소는, 현재까진 국가적 차원에서 작동했던 연대가 국제적 규모로 확대되어야 할 시간이 됐다는 점이다. 이 연대는 기업이 초국적 차원으로 확장됐다는 현실과, 국가간 격차로 인한 갈등과 폐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로부터 동시에 도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