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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
로저 스크루턴 지음, 류점석 옮김 / 아우라 / 2011년 7월
평점 :
이 책을 집어든 단 하나의 이유는, 철학자가 와인에 관해서 썼기 때문이었다. 와인은 먹는 것이다. 먹는 것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어느 미디어를 둘러봐도 이른바 ‘먹방’은 가장 흔한 컨텐츠가 되었다. 먹방에선 품평이 빠지지 않는다(대체로 좋게 포장하는 쪽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문제일 뿐이다). 이른바 음식에 대해 평가한다는 사람들은 넘쳐나고, 이들 중 몇몇은 전국적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맛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분명히 먹는 것을 비평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런 비평들이 과연 철학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맛에 관한 철학적 담론은 가능한 것일까? 이는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이다. 좋은 그림에 대한 철학적 기준은 대체로 어느 정도 표준이 잡혀있다. 이 표준들, 또는 이런 표준에 대한 연구를 우리는 대체로 미학이라고 부른다. 미학에 관한 철학자들의 글은 넘쳐난다. 그림에 비해 적은 편이긴 하지만 좋은 음악의 기준에 대한 철학적 연구도 그럭저럭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한때 아도르노라는 철학자를 좋아했는데, 그는 근대성의 파괴와 합리성의 전복 그리고 상품화할 수 없는 난해함을 표현하는 노래가 최고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재즈를 매우 싫어했다, 같은 입장들. 하지만 맛에 관한 철학책은 정말 찾기 어렵다. 심지어 맛이라는 영어단어(taste)조차도 미학적 태도 전체를 아우르는 ‘취향(taste)’이라는 의미로 쓰이면서, 맛의 철학은 그 자리를 잃어간 것만 같다.
스크루턴의 글에서 나는 이 잃어버린 ‘맛의 철학’을 어렴풋하게 넘볼 수 있었다. 맛은 와인이라는 대상의 파생물이 아니라 맛 자체가 독립된 대상이다. 하지만 맛은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다른 관념들과의(특히 다른 맛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미학적 대상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래서 직접 철학적인 개념들을 동원하는 부분보다는 오히려 각 지역의 와인에 관해 짤막하게 설명하는 2장의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맛’을 다루는 철학적 방식의 한 사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쓴 단어는 아니지만) 와인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총체성’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독특한(즉 고유한) 맛을 만들어내는 데 동원되는 자원은 객관적 방식으로 계측이 불가능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토질이 그렇고, 포도의 품종이 그렇고, 그 포도가 그곳에 흘러들어오기까지의 역사가 그렇고, 와인을 만들어내는 방식 - 오크통 나무의 재질이라든가, 숙성의 기간이라든가, 대충 넘어가는 화학적 변화라든가 등등 - 이 그렇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능숙하게 지적으로 다룰 줄 아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야말로 와인의 총체성을 제대로 ‘느낄’ 줄 아는, 이 세계 속에서 매우 독특한 지위를 지닌 개체들이다.
그럼에도 총체성이라는 말처럼 애매한 말이 또 없다. 이 글 전체에서 ‘와인’이라는 자리에 다른 것을 넣는다면, 예를 들어 탁주(혹은 청주나 소주)라든가, 맥주라든가, 위스키라든가, 코냑이라든가, 하는 대체어를 넣는다면 와인과 완전히 다른 담론이 탄생할 수 있을까? 설사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총체성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제작과정이라든가 탄생설화와 같은 부분적인 어떤 것에서 달라질 뿐일 것만 같은 불안함이 엄습한다. 결국 그래서 ‘그건 맛있어요?’라는 질문에 ‘네, 맛있어요’라거나 ‘아몬드 향에 태운 오크 통의 향이 살짝 덧입혀져서 구수한 부르고뉴 와이너리의 전통이 영국 신사의 깔끔함과 섞인 절묘한 블렌딩이로군요!’ 따위의 알듯말듯한 말들만 늘어놓게 되지 않을까. 스크루턴 또한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경계의 존재론’ 같은 표현을 사용하다가도, 짐짓 모르는 척 허세가 섞인 (것 같아 보이는) 말들을 풀어놓곤 한다.
여전히 맛의 철학이 흥미로운 이유는, 미지의 영역인데다가 어디에선가 표준적인 모형을 배울 방법도 경로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이 책조차도, 뭔가 본격적인 것 같지만 예비적 시도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 책에 인용된,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들이 무척 보고싶어졌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분명히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스크루턴이 다른 술에 대해서 얕잡아볼 정도로 와인을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가 있다. 맥주가 취향인 나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언사들을 마구 남발하는데,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가 이상한 저서를 쓴 이유가 와인이 아닌 맥주를 좋아했기 때문이라든가 하는 것들. 또 다른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멋드러진 묘사 속에서 살아숨쉬는 와인들을 한 번쯤은 맛보고 싶어졌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된 와인들 대부분은 한 병 가격이 10만원을 넘어가는 비싼 물건들이라 나는 그저 침만 흘릴 뿐이다…)
와인은 위스키의 해독제다. - 토머스 제퍼슨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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