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고전의세계 리커버
르네 데카르트 지음, 양진호 옮김 / 책세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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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증명 방식은 21세기의 감각에서 봤을 땐 어느 모로나 뜯어봐도 참 상식에서 벗어나있다. 외부사물의 의심까지는 그렇다쳐도,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선성, 신이 존재한다는 확신, 신의 착함에 대한 증명, 그 뒤에야 우리가 흔히 ‘물질’이라고 부르는 어떤 세계(대상)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는 것까지. 반대로 나는(혹은 이 시대의 일반적 감각은) 외부의 사물을 의심하지 않고, 정신은 결코 육체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신은 착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존재한다고도 말하기가 어렵고, 세계의 모든 것은 물질이라는 형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사상의 역사 속에서 근대 -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 - 를 만들어온 사람으로 데카르트를 지목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그 말이 딱히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내 정신에 대한 탐구 과정 속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존재는 인간이었다. 그 과정을 글로 남겨 출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대로 따라하게 만들어서,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또한 인간에 대한 탐구 속에서 인간이 가장 먼저 등장하길 고대했다. 그가 생각한 인간은 다름 아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그 생각을 잘 벼려야 우리는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구실을 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것들은 시체(즉, 몸으로서의 인간)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우리의 정신을 이용해 몸(즉 물질)으로서의 세계를 잘 연구하면, 그것이 과학이 된다.


그가 생각하기에 과학적 활동은 인간의 정신이 짊어진 일종의 의무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과학이야말로 의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았을 때는 손톱보다도 더 작게 보이는 해는 실제로 지구의 몇 십배도 더 된다. 한 개의 작은 점으로 보이는 별들은 사실 그보다도 더 크고, 더 밝다. 우리의 몸보다 몇십만분의 일 정도로 작은 것도 우리의 발 밑에선 생물이랍시고 꿈틀거리고 있다. 이처럼 탐구, 발견, 창조성 같은 것들은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을 포함한 육체성(?)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해, 발상의 전환으로 마무리된다. 결론으로서는 현대인의 감각에 맞지 않지만 신념으로서는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다는 것, 나아가서는 인간으로서 꼭 가져야 할 태도라는 것이, 이 케케묵은 책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가치라면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PS. 번역본에 대한 이야기는, 읽어본 '인상'으로만 따질 때에는 이것보단 이현복 번역본이 나은 것 같긴 하다. 먼저 읽은 것에 대한 익숙함의 문제일까? 나중에 본격적으로 비교해볼 시간이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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