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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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도의 링컨』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하나씩 있다. 익숙한 것은 공동묘지 주변을 떠도는 여러 존재들에 대한 묘사다. 뭔가 굉장히 독특한 것처럼 묘사를 해놓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한을 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다 가끔 긴머리에 소복차림으로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원혼들이 이 이야기의 주연이자 조연들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듣는둥 마는둥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데 바쁘다. 자신의 억울함에 몰입하기 바빠 다른 영혼들의 이야기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쪽에 훨씬 더 가깝다. 원혼들이 이렇게 난리를 치고 이 소설은 그것을 아무런 정제 없이 날것으로 보여주는 바람에, 글을 처음 읽어내려가는 수십 페이지 동안은 대체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인지 조그마한 감조차 잡을 수가 없다.


반대로 낯선 것은, 이 공동묘지가 위치한 장소가 조선이나 고려의 어느 고을이 아니라 19세기 미국, 남북전쟁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이다. 스스로 말을 내뱉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일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아들을 묻으러 온 링컨을 보며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한다. 죽은지 오래된 사람들은 저 사람이 무슨 대통령이냐며, 자기가 죽을 때는 정치인이었는지 아닌지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원혼들 사이에서도 흑백이 나뉘어, 마치 묘지 밖에 세상에서 그런 것 같이 이들 또한 나름의 남북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도 있다.


왜 이들은 여기에 남아있는가? 그냥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냥 죽을 수 없는가? 무덤 바깥 세상에 미련이 남을 수 밖에 없는 황망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영혼들이 떠드는 말은 대체로 자신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죽음의 과정, 이유, 상황 같은 것들에 대한 나름의 일장연설과 해석들. 누군가가 그것을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울려퍼지지만, 그 소원은 성취되지 못하고 모든 영혼을 돌아 그 자신에게 메아리로 돌아온다. 보태고 얹어진 다른 영혼의 사연은 자신과 무관하다보니 그저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이 영혼들을 무대에 올려놓고, 이 소설은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살아있을 적의 기억, 사실과도 다른 기억, 불확실함을 메우기 위해 횡설수설 해야만 하는 기억, 가끔은 잊어버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다시 떠올릴 수 있는 바로 그 기억. 그럼에도 영혼이 기억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하다. 무덤 바깥의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의외로 허약한 병자-상자(관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아직도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속 차갑게 식어 하얗게 굳은 몸은 나였지만 더 이상은 내가 아니다. ‘나’임을 호소할 때, 나’임’을 주장할 때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이제 기억 뿐인 것이다.


이 글 안에서 기억이란 주제를 잡아내는 것은 의외로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영혼들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기록도 함께 실려있다. 대통령 링컨에 관한 이야기, 그의 죽은 아들 윌리에 대한 묘사, 윌리가 죽은 날 밤 열렸던 파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사람들의 전언, 이 사건에 대한 세간의 평가. 모두가 모순으로 가득하다. 천방지축이면서 품위가 있었다는 윌리, 못생겼지만 잘생긴 링컨, 화려하지만 아이를 죽이고야 만 그날밤의 파티라든가 하는 것 말이다. 살아있는 사람과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에서 기억에 의존하는 일은, 영혼들이 기억에 집착하는 마음 만큼이나 애처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기억이란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은(못한) 자들, 즉 살아있는 자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죽은 자들에겐 기억이 없다, 기억을 말할 기회조차 빼앗기고 어딘가로 잡혀가거나 끌려간다. 반대로 죽음을 거부하고 무덤가에 남은 원혼들은 원혼이 되어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까 기대하며, 아버지 에이브러햄 링컨과 뭔가 나눈 것 같은 자그마한 느낌을 주는 윌리에게 몰려가 각자의 사연을 토해내려 애쓴다. 이건 비단 무덤가의 원혼들에게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었으나 한 번도 사람으로서 대우받은 적이 없었던 흑인 노예의 말이 살아있음과 기억의 연관을 가장 잘 보여준다. 남을 위해서 일하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없어요, 좋은 주인을 만나 꽤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졌을 때, 내가 뭘 했는지 기억이 나요, 어떤 느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궁금해졌어요, 24시간을 이런 느낌을 갖고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수많은 사람의 기억이 일관성 없이 동시에 튀어나오는 것이 이 소설의 형식적 특징이다.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 우리의 기억을 아무런 정제 없이 그대로 옮긴다면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지 않을까? 기억이란 의식의 흐름의 저장, 관념의 이동의 박제이니 말이다. 내 경험을 말하자면, 이런 방식이 너무 이질적이어서 집중 없이 일독을 하다가 무척이나 헤맸다. 다 읽지 못하고 덮어버리다, 잠시 책과 거리를 두었다가 다시 펼쳐보았다. 그래, 결국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란 이런 식이지. 복잡하고 뒤죽박죽하고 앞뒤도 맞지 않고 서로 다른 요소가 각자의 이야기만 악다구니처럼 하는 것의 총체. 그럼에도 살아있다는 증거. 찬찬히 뜯어보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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