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9
플라톤 지음, 이기백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크리톤』에서 크리톤과 소크라테스가 맞붙는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한 문장으로 쓸 수 있다. “탈옥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크리톤은 친구인 소크라테스가 죽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실력자들을 매수해 그를 아테네 밖으로 빼내려한다. 반대로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주장에 맞서 자기가 여기에서 빠져나가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법’의 목소리를 빌어서(때로는 스스로) 답변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근거가 끼어든다. 정의에 대한 판단은 사람들의 평판에 좌우되지 않는다는(즉 다수의 의견과 무관하게 객관적이라는) 것(47d), 그냥 사는 것 보다는 훌륭하게(즉 정의롭게, 정의의 원칙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47e), 해를 끼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49a), 정의롭지 못한 일은 어떤 경우에도 해선 안된다는 것(49a), 개인의 판단에 의해서 법의 절차에 따른 처분을 지키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행위하는 것은 공동체를 해치는 일이라는 것(50b), 절차에 따른 처분은 합당한 처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 합당한 처분을 지지하는 공동체의 규칙을 꽤 긴 시간 동안 스스로 준수하고 존중해온 일관성을 해치면 안된다는 것(53b).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탈옥을 거부하고 죽기로 결심한다.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감옥에서 크리톤과 저런 대화를 나누었는가 여부와는 별개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근거들은 크리톤이 그에게 하는 말에 대한 반박이다. 아닌게 아니라, 크리톤은 이 대화의 첫 구절에서부터 탈옥이 사람들의 평판을 깎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탈옥시키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쟤는 친구보다 돈이 좋은갑다”라고 수군대며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의 평판이 깎일 것을 염려한다(44d).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아버지 없느 자식이라는 편견(이것 역시 평판의 일종이겠지) 속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곁들인다. 여기에 살아남는 것 또한 ‘용기(즉 훌륭함)’를 보여주는 행위로서 충분하다는, 소크라테스로서는 솔깃할 말도 빼놓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논변과 별개로, 우리는 크리톤에게서 일상인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평판은 중요하다. 소문도 중요하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우리는 말의 무서움을 안다. 그래서 크리톤의 말처럼 “말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기도 하고, 해를 입히기도 한다.” 크리톤의 설득도 뿌리치고, 이런 말의 무서움을 죽음으로서 돌파할 생각을 해낸 소크라테스의 고결함은 언제고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 말들이 지닌 칼을 개인의 힘으로 돌파하는 방법은 죽음 말고는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 낸 뒤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그 결과 말이다.


어쨌든, 그보다 거의 2500년을 더 뒤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각각의 근거에 반박할 만반의 논리가 갖춰져있다. 법감정이라는 것도 있고, 어떤 명분보다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도 하고, 정의의 원칙은 광범위하긴 하지만 때로는 예외가 주어지기도 하고, 따라서 개인의 판단에 따라 법을 위반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렇게 한다고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는 일 따위는 대체로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내세운 주장들보다는, 이 문단에 늘어놓은 현대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훨씬 더 친숙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에게 막 반박하고픈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지만 다시 마음 한켠에 걸리는 구석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사람들의 몰이해와 왜곡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그 위기의 순간에 그는 (사실상) 자발적으로 자신의 신념과 죽음을 맞바꿨다는(53e) 사실이다. 소크라테스만큼 칭송받으며 인류의 정신 속에 기억될만한 것이 아닐지는 몰라도, 우리 모두 목숨과도 맞바꿀만한 사랑의 대상 하나쯤은 갖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우리는 함부로 돌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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