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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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책은 지금의 내 인생을 만든 책 중에 한 권이다. 그만큼 오래 전이 읽었고, 또 그만큼 아끼고, 지금 내가 가진 여러 생각들의 뼈대를 제공해준 책이다. 그렇다고 막 힘들 때 슬플 때 외로울 때마다 번번이 꺼내보고 나를 반성하고, 뭐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어지간하면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 내 습관 속에서 이 책은 벌써 이번이 네 번째 완독이다. 한때는, 그러니까 두번째에서 세번째쯤 읽을 무렵 상대적으로 그의 생각과 가장 멀리 있었던 것 같다. 뭔가 꺼림칙한 귀족풍의 냄새라고 해야하나…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지금은 오히려 그 때보다 러셀의 생각에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러셀은 이 책에서 기독교라고 이름붙여진 무엇을 공격한다. 이 글에서 그가 반대하는 대상을 종교현상 내지는 종교활동으로서의 기독교로 내가 확정짓지 않는 이유는, 그가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유 때문이다. 그의 반대의 핵심엔 경험적 증거가 없는 환상에 대한 맹신,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표식이라고 간주하는 비합리적 태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가 살아온 문화궈에서는 이런 것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상징이 “기독교”라는 명사이기에, 그가 기독교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또는 어쩌면 이 단어 말고 다른 대체할 단어를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이런 믿음이 과연 기독교 공동체 또는 기독교 문화권에만 존재하는가? 러셀 스스로가 지적하듯, 이런 태도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각기 다른 양상으로 인간의 지성의 진보를 가로막고, 단지 문화의 발전만 지체시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문화적 구조 안에서 소수로 배제되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와 고통까지 안겨준다. 그 고통에 어떤 의미와 목적이 담겨있기에 (또는 담겨있다면) 어쩌면 공동체의 관점에서 또는 인류의 관점에서 감내할만한(감내해야할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신자와 목회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게 정녕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피해당사자들 앞에서 내뱉는 것은 역시나 인간적인 도의가 아닐 것이다.


이런 비경험적 믿음이 정말 인류의 차원에서 사실이라면 즉 그들이 내세우는 이론이 세계의 구조에 대한 비밀과 사실을 정말 아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귀담아들을만한 일말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세계엔 호교론자들과 변증론자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러셀의 관점에서 이들의 논증은 형식적으로 올바르게 구성된 것이 거의 없다. 여기에 나도 대부분 동의한다. 따라서 신은 합리적 이유로 이해되는 대상일 수 없고, 어떤 감정적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러셀의 이런 주장을 떠올리며 나는 내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철학을 전공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너 점 볼 줄 아냐?”였다. (아주 기분나쁘고 자존심 상하지만, 나는 주역점을 볼 줄 안다.) 대체 이런 걸 왜 돈을 주고 하는 것인가 싶지만, 번화가에는 어김없이 미래를 맞춘다는 포춘텔러 부스가 줄을 서서 개설된다. 동네의 점집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부적을 팔고 굿판을 벌인다. 정부에서 절반 이상을 대신 내주는 약값은 500원만 나와도 아깝다는 사람들이 한 번도 효능이 증명된 적 없는 홍삼베이스의 건강보조식품은 백화점에서 10만원 100만원씩 턱턱 주고 구입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심리적 위안”이라고 퉁치는데, 그러면서 진짜 훈련받은 전문가인 신경정신과나 심리상담사에게 비용을 치르는 것은 주저한다. 러셀의 눈에는 이 모든게 “기독교”일 것이고, 내 눈에도 그러하다. 이 모든 노력과 정성과 돈이(이게 제일 중요하다. 돈이!!!) 과학과 지성의 진보에 사용되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져있지 않았을까?


물론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여기에서 러셀 자신의 분석과 희망사항과 제안이 서로 (약간의) 충돌을 일으키는 것 같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하고, 그 인식을 효과적으로(과학적으로) 바꾸기 위해선 사람들의 본성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인 과학의 모든 관점을 동원해서 인간을 본다고 하더라도, 거의 근본적 수준의 감정 중 하나인 두려움은 그칠 줄 모르고 틈만 나면 우리의 지성을 뚫고 나올 것이라는 결론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러셀의 낙관적인 예측처럼, 지식의 축적과 과학의 눈부신 성과만으로 이걸 뛰어넘을 수 있을까? 우리 인류의 상태가 그것이 부족하기에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가… 모르겠다.


이런 거창한 인류사적 고민 말고도, 예전엔 없었던 개인적인 고민도 이번에 책을 읽으며 하나 더 늘어났다. 이전엔 무슨 의미로 이런 글을 쓴건지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넘겼던 챕터인 “마담…” 부분과 관련된 고민이다. 나 스스로는 러셀의 의견에 십분 공감하지만, 사람들이 내게 요구하는 철학의 모습이나 형태 즉 판매용 철학과 내 마음 사이의 고민에 관한 문제였다. 러셀이 비판하는 맥타가트와 브래들리(철학의 역사에서 B급 정도의 중요성을 갖는 사람들)의 형이상학적 태도, 즉 미학적 도취 혹은 종교적 열망의 대리만족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사람들의 요구(또는 철학자들 스스로의 어떤 잘못된 방향설정)에 나는 부응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고 살자니 굶어죽기에 딱 좋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적이 많이 생길 것만 같고, 그러고 살자니 평생 거짓말이나 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고… 뭐 그런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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