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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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혐오 현상에 관한 책을 하나 읽었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라는 책이었다. 인터넷의 각종 커뮤니티에 돌아다니는 이슬람/무슬림 관련 소문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 것인지 밝히는 책이었는데, 여기에서 다루는 그 소문들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들이었다.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수쿠크 법이라든가, 할랄식품 단지나 이슬람 계통의 대학교 설립에 관한 것들, 나아가 “기독교의 본산” 유럽이 무슬림으로 뒤덮히고 있으니 “세계 기독교의 성지” 한국은 무슬림의 유입을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나 뭐라나.


문제는 이런 (대부분의) 허위 사실이 이슬람과 관련된 논의를 하는 한국의 어떤 곳에 가든 심심찮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포교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가 전혀 아닌 비종교인들이나 일부의 무신론자들 조차도 이성적인 척, 합리적인 척 하면서 비슷한 논리를 들이댄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가 사례집이라면, 카롤린 엠케의 <혐오사회>는 왜 혐오라는 현상이 나타나는지, 이런 감정을 잦아들게 만들려면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그는 가시성(즉 가지성)을 만들어내고 감정을 공격적으로 표출하는 행위를 허용함으로써 특정한 집단에 대한 차별을 만들어내는 제도적 장치를 혐오 현상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 제도적 장치가 유지되는 원동력은 세 가지다. “우리”와 “너네”를 상상 속에서 구별하는 기준으로서의 동질성, 정상적 상태라는 기원과 그곳으로 회귀하는 복고의 서사를 구축하는 본연성, 정상적 상태에서 한 발도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이탈을 병리학적 상태로 규정하는 순수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추상적인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이 동원하는 사례는, 하나같이 슬픈 이야기들이다. 난민이라는 이유로 군중 속에서 공포에 떨어야 하는 무고한 아이들, 저항하지 않았는데도 경찰에게 목이 졸려 숨진 아프리카계 미국인, 성별 동기화를 위해서 법적인 장애판정을 받아내야만 하는 성소수자들, 위협이 두려워 자신의 지향을 쉬이 드러낼 수 없는 신실한 종교인들, 폭력적 정화운동의 물결 속에서도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


그 반대에는 난민이라는 단어에 부정적 이미지를 멋대로 결부시키고 그것을 현실이라 믿는 극우주의자들, 피부색과 폭력-공포를 연관짓는 인종주의적 문화를 체현한 경찰들, 세속주의라는 명분 아래 특정한 종교만 배척하려는 정치세력,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순수함”에 대한 갈망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무장조직과 이를 빌미로 우리도 “순수해져야 한다”는 운동을 이끄는 엘리트들이 있다.


이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대로 아예 세상을 재조립하고자 한다. 그 이념적 지향이 드러나는 실천들은, 최소한 방조함으로써 “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내고, 그것을 다수의 행동으로 조직함으로써 제도로 만든다. 이렇게 세워진 공동체는 내부적으로는 평등을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차별을 양산한다. 즉 그들은 동일성을 평등과 의도적으로 혼동함으로써 혐오라는 현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고리를 끊기 위해, 엠케는 가장 첫 단계인 “해도 된다”는 신호를 차단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혐오의 실천의 첫 단계에서 저항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뒤에 펼쳐질 문화적 상승 이후의 혐오를 막는 것은 훨씬 더 힘들다. 이런 활동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책의 말미에 푸코의 파르헤지아 개념을 설명하면서 정점에 이른다. 파르헤지아는 한글로 풀어쓰면 “권력에 대항해서 진실을 말하는 행동” 정도가 되는 개념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지의 차원에서 범주화해 현실을 억압하는 이념적 권력의 방향성을 전복시켜, 실제로 대상이 어떠하다는 “진실”을 말함으로써 권력적 이념의 허위를 폭로하는 것이 파르헤지아의 핵심이다.


혐오 현상의 원인에 대한 분석 만큼이나 추상적인 제안이라는 것을 저자 스스로도 인식한 탓인지, 박물관의 교육 프로그램이나 교과서 수정 등의 정책을 사례로 든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대안이라고 하는 것이, 줄여 말하면 혐오를 “해도 된다”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혐오가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그 강도와 혐오 현상에 대한 글쓴이의 설득력있는 분석에 비해 그 대책이 허공에 붕 뜬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읽을 땐 느낌이 조금 달랐다. 엠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유럽에 연관된 사례들만 계속 이야기하지만, 내 머리에는 <왜 우리는 이슬람을 혐오하는가>에서 보았던 여러 이야기가 스쳐지나갔다. 문제는 그 헛소문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에 문화를 만들어나갔고, 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결정적으로 자신들의 이념을 비슷한 방식으로 표방하는 정치세력에게 표를 준다는 사실이다. 이 책이 그 사건을 겨냥하진 않았지만, 한국 사회는 이미 엠케의 설명과 비슷한 사건을 숱하게 겪었다. 특히 클라우스니츠와 너무도 판박이 같은 일이 얼마전 제주도에서 벌어졌다! 지금의 혐오는 마치 예전에는 없었던 것인 양,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양 구는 것까지 어쩜 그렇게 엠케의 설명과 똑같을 수 있는지.


그래서 생각을 조금 달리하게 되었다. 인식을 바꾸는 활동이란 추상적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나의 인식도, 다른 사람의 인식도 바꿔야 한다.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수집하고 내가 처한 환경에 맞게 변용할 필요도 있다. 때로는 “단순하게” 따라하다가 역효과가 날 수도 있겠지만, 그 시도의 의의를 바래게 할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냥, 내 작은 실천에 담긴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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