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의 기술 - 트럼프는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 The Art of the Deal 한국어판
도널드 트럼프 지음, 이재호 옮김 / 살림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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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트럼프는 여러 모로 신기한 대상이다. 도통 왜 대통령이 되었는지조차 모르는 존재이고, 외국인의 입장에선 막말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언사들을 반복한다. 그의 트위터 계정은 공식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으며, 정부 각료들과 말이 맞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럼에도 트럼프 덕분에 한반도에는 평화가 찾아들고 있지만, 지구 반대편 서남아시아는 트럼프 탓에 쑥대밭이 되어간다. 대체 그는 왜 그럴까? 아니, 질문을 더 좁게 바꿔서, 이런 듣도보도 못한 미국 대통령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트럼프 자신이 쓴 자서전 『거래의 기술』이 그에 대한 해답의 단초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책은 1987년경 출판되었고 그 뒤 오늘날까지 강산은 세 번이나 바뀌었기에 그의 성격도 바뀌었을지 모르겠으나, 젊었을 때 형성된 행동양식은 보통 평생에 걸쳐 재현되기 때문이다. 그의 자기자랑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그는 옛날부터, 지금 하는 것처럼 그랬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 사건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끌고가려 한다.

그 과정에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끝내 달성한다.”


써놓고 보니 이명박 전 대통령의 면모가 떠오르긴 하지만, 적어도 이 자서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트럼프의 모습은 이렇게 다섯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야말로 크고 높은 것 즉 ‘빅 이벤트’를 성공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향이다. 투자한 땅은 넓어야 하고, 지을 건물은 높아야 하며, 들어가는 예산의 규모는 천문학적이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과 언론의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가 들인 천문학적인 돈보다 더 천문학적인 수입이 생긴다. 트럼프 자신은 이것을 “합리적”인 계산법이라 말한다.


어처구니 없게도, 트럼프가 이런 규모를 실현시키는 방식은 끝없는 블러핑이다. 이 책에는 아직 확보되지 않은 불투명한 자금줄, 건축과 관련된 허가에 머뭇거리는 공무원, 자신이 가진 것을 트럼프에게 팔거나 또는 (이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트럼프가 내놓은 것을 사려는 결정을 망설이는 세일즈 파트너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트럼프는 이들을 상대로 자신의 패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거래를 한다. 자금줄은 이 프로젝트가 분명히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건네 확보하고, 공무원들에겐 이 프로젝트의 성패 여부는 당신들의 자리와 상관이 없을 것이고 반면 성공하면 아주 좋은 일이 될 것이라는 말로 설득하며, 거래 상대역으로 나온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낮거나 높은 가격을 일단 부르고 시작한다. 최소한 이 책에 등장한 몇몇 대형 프로젝트는 대체로 성공리에 마무리되거나 트럼프가 큰 손해를 보지는 않은 상태에서 끝나는데, 트럼프 자신은 이것을 “신용” 또는 “신뢰”의 결과라고 부르길 좋아하는 것 같다.


트럼프가 이렇게 블러핑의 방식으로 큰 사건들을 불러일으키고 그걸 처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부동산-건설업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치의 상당 부분은 환상의 크기에 비례한다. 집을 지으면 곧장 붕괴할 가능성이 가장 낮기 때문에 서울의 집값이 한국에서 가장 높은 게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환상이다. 게다가 트럼프가 거래하는 대상은 모두 아직 실현되지 않은 대상들이다. 낡은 건물이 있는 땅, 리모델링이 필요한 낡은 호텔과 오피스텔.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거래하기에 블러핑은 이 영역의 유일한 영업수단이 되는 역설이 구현되는 순간이다.


(트럼프의 대척점에 있으면서 그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평론가 집단 역시 환상을 먹고 사는 족속들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트럼프의 성공기를 이렇게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것은 아니다. 그의 행보에는 분명 과감한 구석이 있다. 그가 사업을 막 시작하고 첫 프로젝트를 시작할 시기인 70년대 중반, 전세계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세계의 중심, 그 중에서도 뉴욕 시의 위기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테다. 책에서 볼 수 있듯, 트럼프 주변의 공기는 굉장히 위축되어 있다. 19세기에 지어진 것 같이 생긴 것으로 묘사되는 건물들에선 활기를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제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점점 보수적이고 안정지향적인 방향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트럼프는 그 가운데서, 마치 뉴욕의 어느 곳에 트럼프 타워가 불쑥 솟아있는 것처럼 튀어보인다. 좋게 말하면, 혼자서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다. 


지금 백악관의 수석보좌관인 이방카 트럼프가 갓난쟁이인 것으로 묘사될 정도로 오래된 책이지만, 트럼프의 사고방식 즉 사업방식은 이후로도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뉴욕을 넘어 다른 곳으로, 더 크게, 더 많이, 더 빨리. 그의 행보 자체가 합리적인 것이 아닌, 그 ‘더-더-더’를 통해 자기 수를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또는 비틀어버리는 방식 말이다. 그 능력을 이용해서 그는 세계 최고의 부동산업자로 등극했고, 급기야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까지 되었다. 자서전을 쓰던 1987년, 민주당 인사들과 격의 없는 친구관계를 맺었다며 좋아하던 트럼프 스스로는 이런 미래를 상상이나 했을까?


이렇게 다시 지금 우리의 시대로 돌아와서 생각해본다. 트럼프의 지금 행보는, 그저 트럼프가 트럼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서있는 위치가 바뀌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며, 그의 향방에 전세계 구석구석의 모습이 시시각각으로 바뀐다. 다시 말해, 그는 정치인이 되었다. 빅 이벤트를 지향하며 환상을 팔기 위해 끊임없이 블러핑을 치는 그의 방식, “거래를 위해서 거래를 한다”는 그 생각이 정치의 영역에서도 올바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가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거래는 의외로 싱겁게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 ‘실제로 원하는 것’을 한 번도 내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현재의 위치에 올라왔다. 그런 그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 또 얻어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두 사람이 정상회담을 하네마네 옥신각신하는 이 때, 트럼프의 성공기가 그것을 읽고 있는 한국의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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