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 원전 완역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9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박용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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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 사람에게는 동화로 기억될 책, “완역”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번역본의 소개글에는 동화가 아니라 정치풍자소설로 소개되는 책, 그 걸리버 여행기를 읽었다. 가장 처음 드는 인상은 ‘둘 다 아니다’다. 성인의 눈으로 끝까지 다 읽었을 때 이 책이 동화로 읽힐 리는 그야말로 만무하다. 그렇다고 풍자나 해학이 있어 웃기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어처구니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는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의 주제는 비판이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인, 논문을 보는 듯한 느낌의 비평이다.

걸리버 여행기가 드러내는 비평의 원천이자 전략은 단 한가지, ‘자기의 타자화’다. 자기객관화, 거리두기, 입장바꾸기 같은 말로 번역될 수도 있겠다. 소설 내내 걸리버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 심지어 생각하는 것까지 - 모두 우리의 평범한 정치생활에 묻혀서 무감각하게 지나쳐버리는 현상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걸리버의 눈을 통해서, 또는 걸리버와 대화하는 나 스스로의 눈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릴리퍼트, 브로브닝닥, 라퓨타, 후이늠 등의 설정은 이런 타자화의 변주다. 이 변주의 몇몇 단면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1부, 흔히 소인국이라고 불리는 릴리퍼트를 가로지르는 여행기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그 공동체에서 걸리버가 대우받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곳의 주민들은 걸리버에 비해 한없이 약한 존재들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여러가지 전략을 사용하고 협력하면 걸리버를 쓰러뜨릴 수 있는 정도의 힘은 가진 존재다. 다시 말하면, 걸리버가 곳곳에서 사용하는 묘사와는 달리 릴리퍼트 공동체와 걸리버 사이의 힘의 관계는 사실상 대등하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 신체적 크기, 그리고 그 크기를 반영하는 심리적 크기 때문에 릴리퍼트 사람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내 관심을 끄는 것, 그리고 지금 우리의 문제와 연관된 것은 소설 속에서 신체적 크기로서 은유되는 심리적 크기다. 우리가 느끼는 이방인의 심리적 크기가 딱 이만큼이다. 힘으로써는 대등하지만, 오히려 공동체 대 개인이라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지만, 아주 희박한데다가 제멋대로 해석된 증거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존경과 환호와 공포와 혐오로서 걸리버를 대하는 그 모습. 어느 곳에선가 많이 본 듯 하다. 이 부분은, 걸리버가 하루에 1000명 분의 밥과 물을 해치운다면서 “경제적인 짐”이 된다며 그를 쫓아내는 부분에서 정점을 찍는 것 같기도 하다.

2부로 넘어가면 이 위치가 아주 극적으로 역적된다. 거인국, 즉 브로브닝닥에서 자신보다 여섯 배나 더 큰 사람들의 무리에 둘러싸인 위기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걸리버’에 대한’ 타자화의 과정은 릴리퍼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인들은 그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그래서 한동안은 기예를 부리게 만들고는 구경거리로 소비한다. 서커스에 지친 그는 이내 탈진하고, 아주 극적으로 그 나라의 왕에게 싼값으로 ‘팔린다!’ 그를 공동체의 동료로서 대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

하지만 덕분에 걸리버는 자기 자신,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도 얻는 것처럼 보인다. 작은 스케일로 사람들의 삶을 그야말로 현미경처럼 자세히 관찰하게 된 것이다. 거인들의 냄새나 피부에 대한, 다소 사소하게 보이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런 평범함조차도 규모가 부여하는 차이로 인해 아주 색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스크린이 큰 영화관에서 종종 체험하는데, 특히 영화 앤트맨 시리즈를 보면 간접적으로 걸리버가 되어볼 수도 있다.)

3부에 접어들면서 이 이야기의 분위기는 극적으로 바뀐다. 앞의 두 여행기가 생활상이나 풍경을 그림그리듯 자세하게 묘사를 하는 데 집중했다면, 라퓨타를 포함한 발나바비 여행기인 3부부터는 추상적인 말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하고,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걸리버가 사는 사회와 걸리버가 기행 중인 공동체의 특징을 많이 비교한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등장인물이 있고 배경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설의 외피를 둘러썼을 뿐 작가가 설정한 여러 인물의 생각을 열거하는 데 집중한다.

발나바비를 거니는 부분에서 인상적인 것은 역시나 이전에 죽었던 사람들을 마법의 힘으로 소환해서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장면일 수도 있겠고, 사소하게 보면 인류가 그 동안 쌓았다고 생각한 여러 미덕과 업적이 사실은 꾸며졌거나 미화됐거나 와전되었다는 것을 폭로하는 국면이기도 하다. 마법에 의해 불려오는 영혼의 주인들은 (왠지) 걸리버가 그 당시에 알고 있었던 모든 역사시대와 모든 계층을 아우른다(는 느낌을 준다). 그에 따라 걸리버 - 그리고 독자 - 가 느낄 배신감의 크기도 커질 것을 의도한 것일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의 모양을 하고 살아가는 후이늠을 만나고 교류하면서 걸리버가 변화하는 과정은, 나로선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은 아주 온화하고 덕스러우며 인간들이 저지르는 온갖 악행을 경멸할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접해본 적이 없기에 아예 알지 못한다. 악덕의 사례들은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야후에게 전가된다. 걸리버는 후이늠의 논리를 마주하면서 처음에는 설명하고, 그 다음엔 해명하며, 나중엔 방어하다가, 끝내 설득당한다. 결국에는 인간과 야후를 동일시하며 인간을 경멸하는 태도를 지닌 채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으로 걸리버의 여행기는 끝을 맺는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이 마뜩찮았다. 과연 걸리버가 인간혐오의 상태로 빠져들어간 것은 그럴듯한(받아들일만한) 선택지였는가 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걸리버가 스스로 이야기한 것처럼 후이늠의 정치체제는 어떤 종류의 고대적 이상을 구현했다. 말이 색깔별로 계급이 나눠진다는 것은, 사람이 금/은/동으로 나눠진다는 플라톤의 주장과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한 군주가 절대권력을 발휘해 선한 명령을 내리면 피통치자들은 그것을 도덕적 사명으로 이해하는, 그런 사회 말이다. 반면 걸리버가 겪은 영국은 고대적 이상의 장점을 붙잡으면서도 그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려는 역동적인 상태였다. 물론 그 역동성은 혼란을 동반했고 그 때문에 온갖 협잡, 사기, 살인, 전쟁이 난무했지만,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나쁘다고만 볼 수도 없는 국면이기도 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바로 그 역동성의 결과로 진보한 세계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미 EDM이 주류가 된 지금 “클래식이 짱이고 나머지는 다 쓰레기야”라고 외치는 음악평론가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막판에 이 글의 분위기가 무너진다고 느꼈다. 조나단 스위프트에게 우호적으로 해석을 하자면, 아마 걸리버가 이렇게 바뀌어가서 영국의 현실에 대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평생을 살았다고 하는 것조차도 작가가 말하고 싶은 그 무엇에 포함되지 않을까 하고 잠깐 생각해봤다. 이리저리 여행을 다녀 견문을 넓혔다며 젠체하는 책을 써낸 걸리버조차도 결국 인식의 한계에 갇혀버리고 말았으며, 그래서 우리 시대에는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의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 그럼에도 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걸리버가 했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를 타자화하며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 4부로 구성된 이 책을 일관되게 해석하기 위한 배경을, 나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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