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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평점 :
단적으로 말해, 사르트르의 구토는 소설이 아니다. 만약 죽은 사르트르가 내게 다가와 “이것은 소설이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최소한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다”라고 응수할 것이다. 만약 사르트르가 “나만의 기법이기에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서 재미를 못 느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작가의 의무이지 않나?”라고 반문할 것이다(물론 내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려운 것은 어렵게 쓰는 것이 맞다).
하지만 소설을 벗어나서 이것을 철학책으로 본다면, 또는 차라리 철학적 형상화를 포함한 어떤 문학적 결과물로 본다면, 나는 구토를 꽤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이 책 속에서 로캉탱이 밟아가는 과정의 기반이 되는 철학적 주장 즉 현상학에 관해서 후설이 직접 쓴 책을 기억 속에 떠올려본다면, “그래, 그래도 사르트르가 100배는 쉽네…”라는 쓸데없는 생각에 잠긴다. 이 정도 했으면, 잘 한거다.
로캉탱 스스로가 밝히듯, 그가 “구역질”을 느끼는 이유는 존재에 관한 근본물음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존재”에 얽힌 질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것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가? 사물들과 그 의미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가 존재한다고 쉽게 믿는 것들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또는 우리가 머리에 떠올리는 그 양상 그대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양상들을 너무나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과 결합시키며 - 기차의 검은색과 멍의 검은색이 왜 똑같이 검은색인지, 그것을 세계의 진짜 구조이자 진리라고 믿는가? 이 모든 질문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함축하며, 내 지속을 의탁해왔던 모든 것들로부터의 독립을 부추긴다.
하지만 이런 결별과 독립은 아무것도-없음을 동반한다. 익숙한 것들, 지속을 의탁해왔던 것들이야말로 익숙한 방식으로서의 내 존재의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폭력을 제거하자 규정이 없어지고 지식이 증발하며 경계가 허물어진다. 비유하자면, 내가 세계 속에서 온전히 서있을 수 있던 지반이 흐물흐물한 상태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다. 흔들리는 바다 위에 서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배멀미를 한다. 이것이 로캉탱 스스로가 밝힌, 그리고 후설의 현상학이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언급한 상태에 들어간 사람이 느끼는 지적인 어지러움 - 구토감이다. 그렇게 세계가 “흘러내린다.”
구토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다름아닌 익숙해지는 것이다 - 마치 뱃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존재한다고 간주했던 것, 익숙하기에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로부터 탈출한 뒤에, 이 세계가 원래 그런 모습으로 존재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존재방식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따지고보면 이것 말고 다른 어떤 해법이 있을까 싶지만,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어떤 나약함은 위험한 문제를 자꾸만 회피하고 싶어한다. 게다가 존재양식이 달라졌다고 해서 마치 해탈한 사람마냥 밥도 물도 끊고 초연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의 살덩이이기 때문에 - 존재양식의 침범에 저항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런 양식의 정점에 언어가 있다. 모든 폭력의 시작이자 끝이고, 세계를 포섭하겠다는 인간의 욕망이 담긴 어떤 장치. 그래서 익숙함의 포기는 언어의 포기이며, 언어의 포기는 사고의 포기인 것처럼 보인다. 이 차원에서의 언어 구사란 평범한 자의 정신세계로는 이해하기 힘든 어떤 것이 아닐까? 구토라는 소설 자체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는 것이 이미 전제된 어떤 지적 태도를 언어로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니 말이다 - 그렇다. 그래서 이 책은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