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책,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2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 박상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고전 중의 고전이다. 하지만 직접 읽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서술도 평이하고, 역사적 사례도 많아 이해하기 쉽고, 이른바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에서 많이 볼법한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논증 같은 것도 없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이게 과연 철학 고전인지 역사 고전인지 혹은 고전도 아니고 단순한 이야기 모음집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런 부분이, 고전에 관심이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과 전문 연구자들 모두의 흥미를 돋우는 군주론만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


군주론에는 묘한 지점이 있다. 먼저 말해둘 것은 “역량(virtu)” 개념에 대한 논의다. 군주론을 다루는 많은 책에서도 언급하는 내용이지만 짧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고대 전통에서는 이 역량 개념에 도덕철학/윤리학적 접근법을 채택해서 “착함”, “선”, “옳음”과 virtu를 결부시켜 이것을 “(도덕적)덕”으로 해석하지만, 마키아벨리에게서는 딱히 그런 면이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는 것.


하지만 고대 윤리학의 논의에 익숙하다면 이 말이 오히려 현대적 관점에서 고대 도덕철학을 바라보다가 생기는 착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전통에서도 virtu 즉 덕은 옳음이나 선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키케로에게서도, 덕이란 탁월함, 즉 인간적인(도덕의) 특정 영역에서 뛰어난 기능을 발휘한다는 뜻에 가깝다. 마키아벨리가 사용하는 실천적 지혜라는 개념 역시도 이 고대적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키아벨리의 논의는 묘하다. 마치 “탁월함”과 “현명함”으로 정의된 것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끝까지 밀어붙인 느낌이라고 할까? 고대의 철학자들은 현명하고 탁월한 사람들은 당연히 착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 반면에, 마키아벨리는 탁월하고 현명한 사람은 대개 착하지만 반드시 착하지는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다르게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나 키케로는 무언가를 “잘” 한다는 것과 “옳게” 한다는 것을 둘 다 성취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잘” 하는 것에 “옳게”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포함시켰다. 그 귀결은 “잘” 한다는 평가의 상당 부분을 평판 즉 사회 속에서 기존에 확립된 기준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이론에는 “잘”과 “옳은” 사이의 갈등이 존재하고, 이 긴장관계는 객관적 기준을 옹호하는 사람들 또는 무차별적 상대주의자들에게 끊임없이 공격받는 지점이 되었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잘” 하면 그것이 “옳은” 것이 된다는 입장을 편다. 이 문장 자체가 추상적이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윤리학적 관점에서는 합목적적 활동과 결과주의에 대한 옹호가 될 것이고, 정치철학적 관점에서는 투쟁에서 승리해 이념지형 자체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선언이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도 바로 이 지점이 될 것 같다. 마키아벨리 스스로가 말하듯, 이런 입장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나아가서 외교의 영역)에선 허용된다. 논리는 간단하다.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삶만 책임지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평온한 개인의 삶과 다르게, 언제나 긴장과 사건의 연속이며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정이 가져올 영향이 심대하다.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서 개인으로 현명했던 사람이 군주로서 비참했던 사례가 있고, 군주로서 현명한 사람은 때로 개인의 영역에서 허용되지 않는 일을 저질러 좋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렇게 군주론 속에서 정치와 도덕은 분리되고, 정치 영역에서의 현명함은 개인의 현명함과는 다르게 규정된다.


최근의 연구성과를 정리해놓았다는 이 번역본을 읽으면서 또 다르게 다가온 부분은, 역자가 근거를 두고 의도적으로 강조한 느낌을 주는 “민중적” 관점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다수와 연대를 구축하기”를 들고 있다. 단순히 다수의 견해를 대표하는 확성기가 될 것인지, 또는 자신의 뜻에 맞게 다수를 단련시켜 자신의 편으로 만들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정치적으로 현명한 사람이라면 분명 후자의 과업을 해낼 것이다. 설령 공동체의 의사 결정기구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그저 다수인’ 민중이라고 하더라도, “소수지만 힘있는” 귀족들보다 그들의 지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일관된 관점이라고 번역자는 주장한다. 이미 다른 번역본으로 두어 번 읽었던 책이지만 이런 점은 상대적으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또 다른 방식의 독해를 배운 것은 이번 읽기의 개인적 수확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도 역시나 생각해볼 부분이라고 제기하는 것처럼) 이 책을 통치자 즉 정치적인 중요 인물이면서 실제로는 “유일한 귀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사람에게 바친 이유는 무엇일까? 민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피상적인 주장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런 말은 마키아벨리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으며, 동아시아에도 있었고 서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도 있었을 것이다. 핵심적 문제는 그저 다수인 민중을 마키아벨리가 정치적 주체로서 보았는지 여부가 될 것이다. 여기에 확실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그가 가진 역사적 의미는 많이 퇴색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니오”라고 확실하게 대답할만한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니, 이런 미묘한 어감을 읽어내는 것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영역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측면, 즉 정치와 도덕의 분리라는 개념과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중을 인정하는 듯한 관점은, 최근의 내 고민과 맞닿아있다. 질문을 단순하게 바꾸면 이렇게 된다. “정치와 도덕이 정말 분리되는가?” 또는 “현명하게 나쁜 사람은 정치를 해도 되는가?”, 그리고 “대체로 소수파 정체성을 지닌 내게 정치적 주체로서 연대할만한 시민이 있는가?” 또는 “그러면 나는 얼마나 현명해야 하는가?” 지난 세월 우리 사회의 진보를 앞당기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을 도덕적 결함으로 숱하게 공격당했고, 그 중 몇몇은 정치적 생명을 잃었고 또 그 중 몇몇은 글자 그대로 생명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공격을 반박할 자신이 없었거나 때로는 편승했다. 각종 소수자 혐오의 목소리가 거대한 확성기를 달고 우리 사회를 덮쳐오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따뜻한 언어로 그 망측한 음파와 마주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이런 것들이 바로 어떤 성취를 위해 앞에 놓인 불변의 여건들(necessita)이며, 이것을 현명함(prudenza)과 함께 헤쳐나가는 것이야 말로 군주가 가진(가져야 할) 역량이라고 했다. 즉, 오롯이 내게 주어진 과제다.


덧댐. 정확한 번역인지 판단할만한 능력은 내게 없다. 하지만 읽기 쉽고 친절한 번역본인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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